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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류회원 님께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이번에는 '해모수 부여기'를 올리겠습니다.
이 내용은 고조선 솨락시기에 해모수가 새로운 기풍으로 나라를 세웠으니
'북부여기'라 해했습니다. 그 후 다른 영웅호걸들이 나라의 이름을 바꾸어서
모두 단시일에 몰락되어서 마지막에 고주몽이 해모수의 후손으로
북부여의 맥통을 계승하여 고구려의 건국을 이룰 하는데...
그간의 북부여기 상하, 가섭원,기, 갈사국 등을 모두 '해모수 부여'로
편저자인 제가 하나로 통일을 하였습니다. 판소리를 하는데 혼란을 막고 일목요연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대체로 내용이 역사의 순서로 맞추어져 있기 때문에 별문제 없기도 합니다.
三 篇; 해모수 부여기(夫餘記)
{북부여기상, 북부여기하, 가섭원기 등을 통합}
첫째; 찬자(撰者) 범장의 이력
<아니리>
복애거사(伏崖居士) 범장(范樟)[생몰? 이조 초기]이 찬(撰)하였다. 9천년 한민족사의 잃어버린 고리 부여사의 진실을 온전하게 드러낸 기록. 그는 고려 말 두문동(杜門洞) 72인 중 한 분이다. 태조 이성계가 3번 불렀으나, 고향 금성으로 돌아가 은거하였다. 태백일사 고려국 본기에 의하면 이명(李茗)과 함께 기고지서(奇古之書)인 한. 단 이후로 전해 내려오던 역사의 진결(眞訣)를 얻었다. 이암은 단군세기를 범장은 북부여기 상하와 가섭원기를 저술했고, 이명은 조선 숙종 때 북애(北崖)가 지은 규원사화의 저본(底本)이 된 진역유기(震域留記) 3권을 썼다고 한다.
※편저자는 혼란을 막고 일관된 역사기록으로 보이기 위해 북부여 상과 북부여 하 그리고 가섭원기를 ‘해모수 부여기’로 통일하였다. 그래서 이 창본집 사설에서는 ‘북부여’ 나라 명칭을 모두 해모수부여로 을 바꾸었다.
둘째; ⌜해모수 부여국⌟시조 ‘해모수’ 단군 재위 45년
<아니리>
고조선의 국통 계승자 로 해모수가 단군에 즉위 하였다.
<진양 - 우조>
해모수단군은 동기6960[서전239. 고열가단군(47세) 재위57]] 임술년 4월 8일 이 재위원년이다. 임금께서는 원래 타고난 기품이 영웅의 기상으로 씩씩하시고, 신령한 자태는 사람을 압도하여 바라보면 마치 천왕랑(天王郞) 같았다. 23세에 하늘에서 내려오셨다. 임금님께서 웅심산(熊心山)에서 기병하여 난빈(蘭濱)에 제실을 지으셨다. 머리에 오우관(烏羽冠)을 쓰고 허리에 용광검(龍光劍)을 찼으며, 오룡거(五龍車)를 타고 다니시며 정사를 돌보시고 날이 저물면 하늘에 오르셨다. 이 해에 이르러 즉위하셨다. 동기6961[서전238.재위2] 계해년 3월 16일 대영절(大迎節)에 임금께서 하늘에 제를 올리고, 연호법(煙戶法)을 만들어 백성을 살피셨다. 오가(五加)의 군대를 나누어 배치하고 둔전(屯田)으로 자급하게 하여 뜻밖의 사태에 대비하셨다.
<아니리>
오가(五家)의 공화정 종결이 되었다.
<진양 - 우조>
동기6967[서전232.재위8] 기사년에 임금께서 무리를 거느리고 옛 수도에 가서 오가를 설득하시니, 오가가 드디어 공화정(共和政)을 철폐하였다. 이때 나라 사람들이 단군으로 추대하여 받드니, 이분이 바로 해모수부여 시조이시다. 겨울 10월에 ‘태아를 가진 임신부를 보호하는 법’[공양태모지법(公養胎母之法)]을 만들고 사람들을 가르칠 때 반드시 태교부터 시작하게 하셨다. 동기6970[서전229.재위11] 임신년에 북막(北漠) 추장 산지객륭(山只喀隆)이 영주(寧州)를 습격하여 순사(巡使) 목원등(穆遠登)을 죽이고 크게 약탈한 뒤 돌아갔다.
<아니리>
기준[75세]이 번조선의 마지막 왕위에 오름
<중모리 - 우조>
동기6978[서전221.재위19] 경진년에 기비가 흥서 하자 아들 준(準)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번조 왕으로 책봉되었다. 임금께서 관리를 파견해 군대를 감독하게 하여 연나라의 침입에 대비하는 데 더욱 힘쓰게 하셨다. 이보다 앞서 연나라가 장수 진개(秦介)를 보내 번조선 서쪽 변방[서비(西鄙)]를 침범하여 만번한(滿番汗)에 이르러 그곳을 국경으로 삼았다. 동기6979[서전220.재위20] 신사년에 임금께서 아사달에서 천제를 지내도록 명하셨다. 7월에 궁궐 366칸을 다시 짓고 이름을 천안궁(天安宮)이라 하였다. 동기6981[서전218.재위22] 계미년에 창해역사 여홍성이 한(漢)나라 사람 장량(張良)과 함께 박랑사(博浪沙)에서 진왕(秦王) 정(政)을 저격하였으나 적중하지 못하여 수행하던 수레[부차(副車)]만을 맞췄다. 동기6990[서전209.재위31] 임진년에 진승(陳勝)이 병사를 일으키자 진(秦)사람들이 큰 혼란에 빠졌다. 이에 연(燕). 제(齊). 조(趙)나라 백성 가운데 번 조선으로 망명해 온 자가 수만 명이었다. 준왕이 곧 상. 하 운장(雲障)에 나누어 수용하고 장수를 파견하여 감독하게 하였다. 동기6997[서전202.제위38] 기해년에 연나라 노관(盧綰)이 다시 용동의 옛 요새를 수리하고 패수(浿水)를 동쪽 경계로 삼았다. 패수는 지금의 조하(潮河)이다. 동기7007[서전192.재위45] 병오년에 연나라 노관이 한나라를 배반하고 흉노로 달아나자 그 일당인 위만이 우리나라에 망명을 구하였다. 임금[해모수단군]께서 이를 허락하지 않으셨으나, 병이 들어 능히 스스로 결단을 내리지 못하셨다. 번조선 왕 기준이[물리칠 수 있는] 기회를 여러 번 놓치고 마침내 위만을 박사(博士)로 삼고 상하 운장을 떼어 주어 지키게 하였다. 이 해인 동기7004[서전195]년 겨울에 해모수단군께서 붕어하시니 웅심산 동쪽 기슭에 장사 지냈다. 태자 모수리(慕漱離)가 즉위하였다.
셋째; 2세 단군 모수리 재위 25년
<아니리>
고조선 삼한 유민들의 중삼한 건국
<중모리>
동기7005[서전194] 정미년은 ‘모수리 단군’의 재위 원년이다. 번조선 왕 기준이 수유(須臾)에 있으면서, 일찍이 백성에게 은혜를 많이 베풀어 모두 풍요롭고 생활이 넉넉하였다.
<중모리 - 평조>
후에 기준(箕準)이 떠돌이 도적 위만에게 패하여 바다로 들어가 돌아오지 않았다. 이에 오가의 무리가 상장(上將) 탁(卓)을 받들고 대규모 여정에 올라 곧바로 월지(月支)에 이르러 나라를 세웠다. 월지는 탁이 태어난 곳이다. 이를 일러 중마한(中馬韓)이라 한다. 이때 변한과 진한도 각각 그 백성과 함께 백리 땅에 봉함을 받아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웠다. 변한. 진한은 모두 마한의 정령(政令)을 따라서 그대로 행하고 세세토록 배반하지 않았다. 동기7006[서전193.재위2] 무신년에 임금께서 상장(上將) 연타발을 보내 평양에 성책을 세워 도적 위만을 대비하게 하셨는데, 위만도 싫증이 나고 괴롭게 여겨서 다시는 침노하지 않았다. 재위 3년 기유(己酉) 년에 임금께서 해성(海城)을 평양도에 복속시켜 아우 고진으로 하여금 지키게 하셨다. 이때 중부여(中夫餘) 사람들이 모두 식량조달에 참여하였다. 겨울 10월에 ‘수도와 지방을 나누어 지키는 법’[경향분수지법(京鄕分守之法)]을 재정하여 수도는 천왕이 친히 군사를 거느려 위수를 총괄하게 하고, 지방은 사방 네 개 구역으로 나누어 오가가 진수(鎭守)하게 하셨다. 그 모습이 마치 웃놀이 에서 말판 사움을 보는 듯했으며,[천지의 창조 설계도인] 용도(龍圖)로써 변화의 법칙을 알아내는 것과 같았다. 동기7029[서전170.재위25] 신미년에 모수리 단군께서 붕어하셨다.
넷째; 3세 단군 고해사 재위 49년
<아니리>
번조선 유민 최승의 낙랑국 건설
<중모리 - 평조>
단군 고해사 재위 원년은 동기7030[서전169] 임신년이다. 정월에 낙랑왕 최승이 해성에 곡식 3백석을 바쳤다. 이 보다 먼저 최승은 낙랑산에서 왕검성(王儉城)에 도읍하였다. 이때는 동기7005[서전194.해모수 단군재위45] 병오년 겨울이었다. 동기7021[서전128.제위42]] 계축년에 임금께서 친히 보병과 기병 1만 명을 거느리고 남여성에서 도적 위만을 격퇴하고 관리를 두어 다스리게 하셨다. 동기7078[서전121.재위49] 경신년에 일군국에서 사절을 보내 방문을 마쳤다. 이해 9월에 고해사 단군께서 붕어하셨다. 태자 고우루(高于婁)가 즉위하셨다.
다섯째; 4세 단군 고우루(일명 해우루) 재위 34년
<아니리>
위만정권 우거왕의 침략과 고진의 격퇴
<중모리 - 평조>
고우루단군의 재위 원년은 동기7079[서전120] 신유년이다. 임금께서 장수를 보내 우거[위만의 손(孫)]를 토벌하게 했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이에 고진(高辰)을 발탁하여 서압록을 지키게 하니, 고진이 점차 병역을 증강시키고 성책을 많이 설치하여 능히 우거의 침입에 대비하여 공을 세웠다.
<아니리>
한 무제의 침략을 격퇴한 고두막한
<중모리 - 평조>
재위 13년 계유(癸酉) 년에 한(漢)나라 유철(劉徹; 무제)이 평나(平那)를 침범하여 우거를 멸하더니 그곳에 사군(四郡)을 설치하려고 군대를 크게 일으켜 사방으로 쳐들어왔다. 이에 고두막한이 구국의 의병을 일으켜 이르는 곳마다 한나라 도적을 격파하였다. 이때 유민이 사방에서 호응하여 전쟁을 지원하니 군세를 크게 떨쳤다. 재위 34년 갑오(甲午) 10월에 동명국(東明國) 고두막한이 사람을 보내어 고하기를, “나는 천제의 아들[천제자(天帝子)]이로다. 장차 여기에 도읍하고자 하나니, 임금은 이곳을 떠나도록 하시오!”하니 임금께서 난감하여 괴로워 하셨다. 이 달에 고우루 단군께서 근심과 걱정으로 병을 얻어 붕어하셨다. 아우 해부루(海夫婁)가 즉위하였다.
<아니리>
해부루의 가섭원 부여 건국
<중모리 - 평계면>
동명왕 고두막한이 군대를 보내어 계속 위협하므로 임금과 신하들이 몹시 난감하였다. 이때 국상(國相) 아란불(阿蘭弗)이 주청하기를 “통하(通河) 물가에 가섭원(迦葉原)이란 곳이 있는데, 토양이 기름져서 오곡이 자라기에 적합하니 가히 도읍할 만한 곳입니다.”라고 하였다. 임금께 권유하여 마침내 도읍을 옮기니, 이 나라를 가섭원 부여, 혹은 동부여(東夫餘)라 한다.
여섯째; 5세 단군 고두막한(일명 두막루)
<아니리>
동명왕 동기7070[서전87.재위22.해모수단군27]년 동명왕 고두막한의 해모수 부여 재건(再建)과 시대 배경
<중모리 - 우조>
고두막한군의 재위원년은 동기7091[서전108] 계유년이다. 이때는 해모수부여 고우루 단군 13년이다. 임금께서는 사람됨이 호탕하고 영준하며 용병을 잘하셨다. 일찍이 북부여가 쇠하면서 한나라 도적이 불길처럼 일어나는 것을 보고 분개하여 개연히 세상을 구제하겠다는 큰 뜻을 세우셨다. 이에 졸본(卒本)에서 즉위하고 스스로 호를 동명(東明)이라 하셨다. 어떤 사람은 이분을 고조선의 마지막 47세 고열가단군의 후예라 말한다. 재위3년 을해(乙亥)년에 임금께서 스스로 장수가 되어 격문을 돌리니 이르는 곳마다 대적할 자가 없었다. ‘한 달이 채 안되어’[불 순월(不旬月)] 군사가 5천명에 이르렀다. 싸울 때마다 한나라 도적이 멀리서 보기만 하여도 스스로 무너졌다. 임금께서 마침내 군대를 이끌고 구려하(九黎河)를 건너 계속 추격하여 용동 서안 평에 이르셨다. 그곳은 바로 옛 고리국 땅이다. 동기7114[서전85.재위22년.고우루 단군34] 갑오년에 임금께서 장수를 보내 배천(裵川)의 한나라 도적을 격파하고, 유민과 합세하여 가는 곳마다 한나라 도적을 연달아 쳐부수었으며 그 수비 장수를 사로잡았다. 방비를 갖추어 적을 막기에 힘쓰셨다.
<아니리>
고두막한의 해모수부여 국통 계승
<중모리 = 평조; 당당하게>
동기7113[서전86.재위23] 을미년에 해모수부여가 성읍을 바쳐서 항복하고 왕실만은 보존시켜 주기를 여러 번 애원하였다. 고두막한단군께서 들어 주시어, 해부루(解夫婁)의 봉작을 낮추어 제후로 삼아 차릉(岔陵)으로 이주해 살게 하셨다. 임금께서 북치고 나팔 부는 악대를 앞세우고 무리 수 만 명을 이끌고 도성에 입성하셨다. 나라 이름을 해모수부여라 칭하셨다. 가을 8월에, 한나라 도적과 여러 번 서압록 하 강가에서 싸워 크게 승리를 거두셨다. 註; 고두막한이 나라 이름을 북부여로 여전히 북부여로 했지만, 여기서는 부득이 해모수부여로 함을 양해바람,
<아니리>
고주몽의 탄강(誕降)
<진양 - 우조>
동기7120[서전79.재위30] 임인년 5월 5일에 고주몽(高朱蒙)이 차릉에서 태어났다. 재위 49년 신유(辛酉)년에 고두막한단군께서 붕어하셨다. 유명(遺命)에 다라 졸본천(卒本川)에 장사를 지냈다. 태자 고무서(高無胥)가 즉위하였다.
일곱째; 6세 단군 고무서 재위 2년
<아니리>
덕을 갖추고 민심을 얻어 작은 해모수라 불림
<중모리 - 우조>
고무서단군의 재위 원년은 동기7140[서전59] 임술년 이다. 임금께서 졸본 천에서 즉위하셨다. 부로(父老)들과 더불어 백악산에 모여 규약을 정하고 천제를 지내셨다. 여러 가지 사례를 반포하여 널리 행하게 하시니 안팎에서 모두 크게 기뻐하셨다. 임금께서는 태어날 대 신령스러운 덕을 갖추시어 능히 주술(呪術)로써 바람을 부르고 비를 내리게 하시며, 자주 곡식을 풀어 백성을 구휼하시니 민심을 크게 얻어 소해모수라는 칭호가 붙게 되었다. 이때에 한나라 도적이 요하 동쪽에서 분란을 일으키므로 여러 번 싸워서 승리를 거두셨다. 재위2년인 동기7141[서전58]년에 임금께서 순행하시다가 영고 탑에 이르러 흰 노루를 얻으셨다. 이해 겨울 10월에 고무서 단군께서 붕어하셨다. 고주몽이 유명(遺命)을 받들어 대통을 이었다. 그런 다음 나라 이름을 바꾸어 ‘고구려(高句麗)’라 하고 새 세상을 여는 시조(始祖)가 되었다.
여덟 째; 시조 해부루 재위 39년
<아니리>
동부여 수도 가섭원은 차릉
<진양 - 우조>
시조 해부루왕의 재위 원년(元年)은 동기7113[서기전86] 을미년이다. 왕이 해모수부여의 제재를 받아 가섭원으로 옮겨 살게 되었다. 가섭원을 차릉이라고 부른다. 이곳은 토지가 기름져서 오곡이 자라기에 적합하였는데, 특히 보리가 많이 났다. 또 호랑이, 표범, 곰, 이리가 많아 사냥하기에 좋았다. 동기7115[서전84.재위3] 정유년에 국상 아란불(阿蘭弗)에게 명하여 구휼을 베풀고 원근의 유민을 불러 위로하며, 굶주리거나 추위에 떨지 않게 하였다. 또 밭을 나누어 주어 농사를 짓게 하니, 몇 해를 지나지 않아 나라가 부유해지고 백성이 번성하였다. 때를 맞추어 비가 내려 차릉은 축축이 적시므로 백성이 왕정춘(王正春)이라는 노래를 불러 임금을 찬양하였다.
재위 39년 동기7153[서전46] 계유년에 해부루왕이 홍서하였다. 태자 금와(金蛙)가 즉위하였다.
아홉 째; 2세 금와 왕 재위 41년
<중모리>
금와 왕의 재위 원년은 동기7154[서전45]년이다. 왕이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쳤다. 재위 24년 동기7177[서전22] 정유년에 유화 부인이 세상을 떠났다. 고구려에서는 위병(衛兵) 위병 수만 명으로 호위하게 하여 영구를 모셔와 능(陵)을 조성하고 그 곁에 묘사(廟祠)를 지으려 했다. 재위41년 동기7194[서전5] 갑인 년에 금와 왕이 홍서 하였다. 태자 대소(帶素)가 즉위하였다.
열 째; 3세 대소 왕 재위 28년
<중모리>
대소왕의 재위 원년은 동기7195[서전4] 을묘 년이다. 봄 정월에 왕이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왕자를 볼모로 교환하자고 청하였다. 고구려 열제(烈帝; 2세 유리명열제)께서 태자 도절(都切)을 볼모로 삼았는데 도절이 가지 않으므로 왕이 노하였다. 겨울 10월에, 왕이 군사 5만을 거느리고 졸본성을 쳐들어갔으나 큰 눈이 와서 얼어 죽는 군사가 많아 물러났다. 재위 19년 동기7214[서기15] 계유년에 왕이 고구려를 침공하였는데, 학반 령 밑에 이르러 복병을 만나 크게 패하였다.
<아니리>
대소왕의 죽음
<중모리>
재위 28년 동기7223[서기24] 임오년 2월에 고구려가 국력을 다하여 쳐들어왔다. 왕이 몸소 군사를 이끌고 나가싸우다가 왕이 탄 말이 진구렁에 빠져서 나올 수가 없었다. 이때 고구려 상장 괴유(怪由)가 곧장 나아가 왕을 죽였다. 동부여군은 오히려 굴복하지 않고 고구려 군을 여러 겹으로 에워쌓다. 마침 짙은 안개가 7일 계속되자 고구려 열제께서 밤을 틈타 군사를 비밀리에 움직여 포위망을 벗어나 샛길로 달아나셨다.
열 한 번 째; 대소 왕 아우 갈사국 건설
<중모리>
여름 4월 죽은 대소 왕 아우가 추종자 수백 명과 더불어 길을 떠나 압록곡에 이르렀다. 마침 사냥 나온 해두국 왕을 만나, 그를 죽이고 그 백성을 취하여 갈사수 가로 달아나 나라를 세우고 스스로 왕이라 칭하였다. 이 나라가 바로 갈사부여이다.
열 두 번 째; 고주몽의 고구려 건국
<중모리 - 우조>
고구려 6세 태조-무열제 융무 16년 8월에 이르러 갈사부여국 3세인 도두 왕이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어 고구려에 나라를 바쳤다. 이로써 실같이 이어오던 부여의 갈레들이 모두 몰락하고 단지 해모수부여를 계승한 고주몽의 고구려만이 남아서 한인(桓因), 한웅 조선으로 이어지는 국통(國統)을 차지한 것이다.
열 세 번 째; 정리 마무리
<아니리>
북부여기 상하가 없었다면 태고(太古)의 역사(歷史)는 고구려(高句麗)와 연결(連結)이 어려워 이웃인 중국 일본이 1만년의 역사를 부정할 것이다. 다행이 복애거사 범장이 단군말기에 혼란스러운 역사를 극명(克明)하게 핏줄을 연결하여 우리 후손은 지구와 우주에게 유구(悠久)한 역사를 자랑할 수 있게 되었다.
-편저에 대하여 한 마디
⌜해모수부여기⌟로 명칭을 하나로 통일을 했다. 이유는 얼마 안 되는 분량의 북부여기 상, 하와 동부여기 등 이 판소리하기에 번거롭고 혼란(混亂)만 야기되어서이다. 그래서 부득이 일부 중요치 않은 것과 중복은 생략하여 통합수술을 하였다. 모두가 해모수부여기 아래의 소 재목을 달고, 순서대로 뒤를 이어 나가게 하였다. 편자가 ‘범장’ 한분이라 일목요연(一目瞭然)하게 편찬되어있어서 별문제는 없다.
첫댓글 어렷을때 재미있게 들었던 옜날얘기들이 지금보니 한단고기에 다 들어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