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4장은 바울의 자신의 자격을 말하는 자천서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편지를 쓰는 자격을 진술하는데 그 핵심은 그리스도의 일꾼은
하나님의 비밀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고전4:1) 그 하나님의 비밀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역사적으로 이 땅에 오셔서 온 세상의 빛이 된 예수를 비밀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께서 하나님께로 돌아가시고 진리의 성령이 오셔서 임무교대를 하셨습니다.
진리의 성령이 우리에게 임마누엘하시면 우리도 주님과 임무교대를 할 수가 있습니다.
그로 인해 나는 죽고 그리스도만 사는 충성을 하므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고전4:2,20)
그러나 이 비밀은 아는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어떤 사람에게는
감추어져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친구처럼 가까운 분입니다. 또 어떤 사람에게는
보배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서푼어치도 안 됩니다.
시골에서 농사만 짓는 분에게는 컴퓨터보다는 비료 한 부대가 더 중요할 겁니다.
하나님의 비밀을 가진 바울이기에 자신을 주 안에서 자랑하는 자천서를 쓸 수 있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내가 아니다’라는 전제로 그는 나도 사도라는 자천서를 쓰고 있는 겁니다.
지금 사도성에 대해 시끄러운데 이건 자신이 이 비밀을 지니고 있느냐 하는 문젭니다.
고전5장은 도덕적인 문제입니다. 여기서 음행은 심지어 아비의 아내를
범하는 일까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문제에 대한 해결 방법을
제시하기보다 문제에 대한 원인과 발전과정을 경고하고 누룩 없는 떡으로
돌아가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고전5:6-8절) 말씀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문제를
없애는 방법이라는 사실을 말합니다. 사도요한도 하나님의 씨가 그 안에 있는 자는
죄를 범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마귀에게 속했기 때문에 죄를 짓는다고 말합니다(요일3:8)
죄는 죄를 이기려고 안간힘을 써서는 이기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산 자로서 죄와 상관이 없는 자리에서 죄가 싫어지면 죄를 이기게 됩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자신의 행실을 고치려고 큐티를 해 봐도 약간의 승산만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도덕적인 문제가 있는 사람도 사귀라고 합니다.
그러나 일단 형제라 일컫는 자는 내어 쫓으라고 말합니다. 누룩이 되기 때문입니다.
고전6장은 송사 문제입니다. 예를 들면 한국의 고려파와 반고소파가 있습니다.
반고소파는 소송사건의 내용이 옳다 그르다 문제가 아니라 고소자체를 반대했습니다.
고전6장의 정신 때문에 노회 안에 재판국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법적인 구속력이 없고 권위에 문제가 있어 항상 다툼이 일어납니다.
오히려 파벌과 편파적인 사건이 일어나는 부조리가 되고 있는 걸 봅니다.
율법적인 영향력이 고린도교회에서도 있었습니다. 지금도 음식문제를 안식교나
기독교 안에서도 개인적으로 특별한 사람들이 문제를 삼기도 합니다.
그러나 식물의 문제는 하나님이 자연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식물에 대해서는
선을 긋지 말아야 합니다. 율법에서 돼지고기를 금한 것은 해롭다보기보다 돼지라는
부정적인 이미지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소를 바치라고 하심은 그 분이 쇠고기 맛을
좋아하심이 아니라 소의 특성 때문입니다. 소의 상징과 그 의미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신체적으로 소 보다 돼지가 더 잘 맞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들리는 말로 돼지는 사람을 차갑게 하고 쇠고기는 덥게 한다고 하니 체질마다 다르겠지요?
어떤 사람에게는 술 담배가 전혀 안 맞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떤 사람은
막걸리로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한국의 초대교회에서 술을 부정적으로 본 것은
술보다 과음하는 한국인의 음주문화의 영향이 더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때는 술 취한 사람을 후하게 봐주기 하는 문화는 분명히 잘못입니다.
술을 먹지 않는 사람은 한국적인 교회의 입장의 도덕관 때문인 사람이 많습니다.
그렇지만 자신이 진리 안에서 자유를 얻었다고 다른 사람에게 걸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면 매킨타이어 박사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반공과 보수신학자로서 한국교회의 보수 교단에 많은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우리가 어릴 때만 해도 매킨타이어 박사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끽연가여서 골초요 줄담배를 즐겼답니다. 그러나 일단 한국 공항에
내리면 담배를 딱 끊었다고 합니다. 그건 한국교회의 정서 때문이지요.
그런데 다시 한국을 뜨면 다시 줄담배를 피웠다는데 그러다가 어느 장로교
사람에게 그 모습이 보이므로 한국교회와 인연이 끊어졌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실 커피 속에 담배와 같이 카페인이 들어있습니다. 담배와 똑 같이 뇌를
자극합니다. 독일은 커피보다 대신 맥주를 음료로 마신다고 하지 않습니까?
한국에서는 커피를 하루에 10잔 마셔도 어느 누구도 탓하지 않습니다.
커피는 담배와 똑 같은 영향력을 미칩니다. 이런 것이 바로 그 시대나 지역의
도덕관의 차이로 드러납니다. 인도네시아는 어느 지역은 목사가
설교하는데 장로는 담배를 피우고 있을 정도라고 합니다.
그들은 이를 하나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고 합니다.
성경의 원칙은 진리 안에서 자유와 자연스러움입니다. 그러나 그 지역의
문화를 배제하지 않는 이유는 인간은 문화의 영향을 받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 나라의 도덕과 윤리관을 생각하고 존중해야 합니다.
고전6장은 도적적인 외적인 문제보다 내적인 문제를 강조합니다(12절이하)
특히 19절 이하를 보면 우리의 몸이 성령이 계시는 성전이라고 여기면
이미 피 값으로 주님께 팔린 그 몸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 대답이 나옵니다.
성령이 계시는 몸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데 이르기까지 많은 고난을 통해 헌신의
학습을 거치므로 드디어 그 몸으로 의의 무기가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고전7장은 가정의 부부문제이며 현실적으로 교회의 민감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엄연히 지적하고 있음에도 교회가 잠잠합니다. 이혼문제의
대부분을 고전7장이 해결해 줍니다. 따라서 교회가 담대하게 말해 주어야 합니다.
인간의 기본적인 욕심 중에 하나가 성에 대한 욕구가 있습니다.
식욕, 성욕, 소유욕이 인간의 기본적인 인간의 욕구입니다. 식욕은 생존의욕입니다.
그런데 이제 사람들이 이 식욕을 즐기고 있습니다. 성욕은 종족번식 곧 생육을
위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것마저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세대가 되고 있습니다.
그건 성이 먹방과 함께 이젠 쾌락의 수단으로 발전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소유욕도 소재의 질서를 위해 필요한 것이나 이 또한 사람들의 탐심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성을 죄악시 하거나 혐오감을 갖지 말고 하나님께 감사해야죠. 하나님이
누릴 수 있는 복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탐닉은 음란이 됩니다.
고전7:25절의 결혼 문제는 6장의 식물의 문제와 마찬가지입니다.
결혼을 하고 싶은 사람은 하고 결혼하기 싫은 사람은 하지 마라입니다.
그러나 필요에 따라 결혼을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에 독신여성이
계속 늘어가고 있는 추세입니다. 사회적인 구조와 편리함이 그렇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의 뜻은 억지로 결혼하려고 조건으로 꿰맞추지는 마라입니다.
그래서 그 조건이 깨어지고 나면 이혼하고 만 이야기가 방송에 난무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사람이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합하여 한 몸을...’ 이 말씀이 결혼의 기준입니다.
그러나 일부다처인 아브라함이나 다윗에게 하나님이 따지지는 않으셨습니다.
심지어 다윗에게는 불법으로 밧세바를 취한 사건이후 책망하시면서
‘네가 필요하다면 더 주었을 것이다’(삼하12:8)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현대 사회는 일부다처를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합니다.
의식구조의 변화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자연의 원칙을 중요시하십니다.
중요한 말씀은 고전7:40절입니다. ‘나도 또한 하나님의 영을 받은 줄로 생각하노라’
바로 하나님의 영의 인도를 받아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바로 7장의 정신입니다.
고전8장은 우상의 제물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고전8:13)
이 말씀이 우상의 제물을 먹어야 할지 말지에 대한 대답입니다.
고전9장은 바울이 과연 사도냐 하는 논쟁입니다.
그 당시 기준으로 사도는 예수님이 육신으로 살아계실 때에 부르심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으심과 다시 사심에 동참해야 하고
예루살렘교회가 인정하는 자라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에게는 이런 것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습니다.
그러므로 과연 사도가 맞느냐 하는 반대 여론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도가 왜 중요하느냐? 그건 전하는 말씀의 권위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고전9장에서 바울은 자신이 사도임을 증거하는 조건을 제시합니다.
1절에서 자신이 자유자임을 선언합니다. 그 당시에는 이 자유자라는 말이
상당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 다음엔 예수 그리스도를 다메섹에서 보았고 직접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객관적인 증거가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리고 그는 사역의 결과를 말합니다(고전9:1-2) 바로 너희들이 알지 않느냐 합니다.
예수님도 나의 한 일을 믿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현재에 이 말씀을 적용을 해 보면 하나님의 종은 어떤 제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된다는 사실입니다. 부르심을 받으면 주의 종입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주의 부르심을 받았는가? 이것이 바로 소명입니다.
이 부르심은 내적 부르심이며 곧 성령의 보증을 말하는 겁니다.
그 다음 9장에서 공부할 내용은 사도의 사역의 정신입니다.
바울은 복음 때문에 자기의 권세를 다 사용하지 않습니다(12절)
내가 주려 죽을지언정 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고전9:15)는 말씀과 함께 권세를 다 사용하지 않음이 바로 사도의 정신입니다.
참된 사도가 어떤 사람인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수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자칭 사도라고 말하고 있지만 사도는 복음과 말씀을 사랑해야 하는 겁니다.
그리고 고전9장 마지막 부분에 사도라도 버림을 받을 수 있음을 암시합니다(고전9:26-27)
사도도 그의 사역을 통해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가야 함을 말씀합니다.
남에게는 전하고 자신의 진보가 없어 용도폐기 당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겁니다.
만일 말씀이 자신을 통과만 하고 자신에게 아무 유익이 없다면 택배기사와 같겠지요.
그래서 바울은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선수처럼 1등을 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2인3각의
달리기를 하므로 자신을 쳐 복종시켜 남에게 전파하고 자신이 버림받지 않으려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