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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뒤안길에 가려진 비운의 천재 구봉龜峯 송익필宋翼弼
1905년 외교권을 넘긴 을사오적乙巳五賊(이완용,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권중현)은 전원 노론이었고, 1910년 경술국치 당시 총리대신이자 마지막 노론 당수로 소위 한일합방 조약에 서명한 이완용은 당론으로 나라까지 팔아먹었다. 왜 그랬을까?
이들 서인(노론)의 사상적 뿌리는 흔히 알려진 율곡 이이나 우계 성혼이 아니다. 그는 잘 알려지지 않았고 역사의 뒤안길에 감춰진 인물로, 당대 제일의 천재로 일컬어지는 구봉 송익필이다.
송구봉을 이해하지 않고는 조선 중·후기 당쟁뿐 아니라 서인(노론)들이 왜 그런 행보를 보였는지 알 수가 없다. 반대로 송익필의 삶과 사상을 이해하게 되면 조선 후기 안개에 덮인 정치사와 사상사의 많은 실마리들이 깨끗하게 풀리게 될 것이다.
이를테면, 병자호란 이후 전개된 예송 논쟁이나 사도세자는 왜 뒤주에서 죽어야 했는가의 문제, 그리고 정조에 대한 암살 위협, 탕평정치, 세도정치 등에 얽힌 사건의 단초를 헤아려볼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는 말이다.
일본은 조선이 당쟁을 하다 망했다고 했는데 바로 당쟁의 뿌리가 송구봉이다. 이 분열과 대립의 뿌리를 정확히 파악할 때에야 진정한 통합주의로 가는 길도 열릴 수 있다고 본다. 이제 뛰어난 재주와 경륜을 가졌던 그가 어떤 선대의 악업과 시대적인 환경으로 인해 그 꿈이 좌절된 ‘비운의 천재’가 되었는지 알아보도록 하자.
송구봉의 시 ‘하늘 천天’
君子與小人(군자여소인) 所戴惟此天(소대유차천)
군자와 소인은 오직 같은 하늘을 이고 살건만
君子又君子(군자우군자) 萬古同一天(만고통일천)
군자는 또 군자가 되어 만고에 똑같은 하늘로 여기네
小人千萬天(소인천만천) 一一私其天(일일사기천)
소인은 하늘을 천만 개로 여기고 하늘을 하나하나 사사로이 여겨서
欲私竟不得(욕사경부득) 反欲欺其天(반욕기기천)
사사롭게 하려다 끝내 얻지 못하고 돌이켜 그 하늘을 속이려 하네
欺天天不欺(기천천불기) 仰天還怨天(앙천환원천)
하늘을 속이려 해도 하늘 아니 속으니 하늘을 우러르다 도리어 원망하네
無心君子天(무심군자천) 至公君子天(지공군자천)
사심 없음이 군자의 하늘이고 지극히 공평함도 군자의 하늘이라네.
窮不失其天(궁부실기천) 達不違其天(달부위기천)
곤궁해도 하늘을 잃지 않고 영달해도 하늘을 어기지 않는다네.
欺須不離天(기수불리천) 所以能事天(소이능사천)
잠시라도 하늘을 떠나지 않으니 하늘을 잘 섬기는 까닭이라네.
聽之又敬之(청지우경지) 生死惟其天(생사유기천)
듣고 또 공경하여 생사 간에 오직 그 하늘뿐이니
旣能樂我天(기능락아천) 與人同樂天(여인동락천)
이미 나의 하늘을 즐길 수 있다면 남들과 더불어 하늘을 즐기리라.
조선 14대 임금 선조 22년 기축년(1589년) 12월 1일. 정여립의 난 여파로 기축옥사己丑獄死가 일어났다. 그 처리과정에서 이 사건은 송구봉과 그 아우 송한필에 의한 조작과 모략이라는 제보를 받은 선조는 이들을 잡아들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당시 56세로 지천명의 나이에 든 송구봉은 사노私奴라는 최악의 모멸적 호칭과 함께 과거가 드리운 그늘, 선대부터 뿌려진 악업의 결과를 받으며 자진하여 형조에 자수했다.
선대의 악업은 무엇이었는지, 문제가 발생한 시간으로 거슬러 가보자.
송사련의 고변(告變) 때는 중종 16년 신사년인 1521년 10월 11일.
※ 고변告變을 하는 자는 부귀를 얻지만 고변告變을 당하는 자는 멸족의 화를 입는다.
당시 송구봉의 아버지인 송사련宋祀連(1496~1575)은 천문, 지리 등을 맡아보던 관상감의 종 5품 관직인 관상감판관觀象監判官이었다. 이날 송사련은 자신의 처남인 정상鄭瑺과 함께 승정원에 모반사건을 고발한다.
대상은 자신에게는 외삼촌과 외사촌에 해당하는 전 좌의정 안당安瑭(1461~1521)과 그 아들인 안처겸安處謙(1486~1521)과 아우인 처근處謹(1488~1543, 이조좌랑)과 처함處諴(1490~1521)
그리고 종실인물인 시산정詩山正 이정숙李正叔(세종대왕의 증손자로, 시산이란 호號이고 정正은 종친부에게 내린 정3품 관직)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들이었다.
이들은 기묘사화를 일으킨 남곤南袞(1471~1527), 심정沈貞(1471~1531) 등이 기묘사화로 죽은 조광조를 지지했던 자신들을 비롯한 사림들을 가만 두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여, 남곤, 심정 일파를 제거하여야 한다고 불평스러운 말을 주위에 하고 다녔다.
이들의 대화를 들은 송사련은 이를 관청에 일러바쳤다. 자신의 출세를 위한 목적이었다.
그 제보 내용의 신빙성을 높이기 위해 안당安瑭의 부인이 사망했을 때 문상을 온 사람들과 장례를 도운 일꾼들의 명부도 함께 제출하면서, 이들이 거사에 참여키로 했다는 것이다. 여러 명의 종친들이 거론되고 중종에 대한 폐립 이야기가 나오면서 사건은 역모로 확대되었다. 당시에는 역모에 걸리면 집안이 풍비박산이 났고 연좌하여 벌을 받게 되어 있었다.
송사련의 고변으로 순흥 안씨 집안인 안당安瑭과 세 아들은 사형당하고, 집안은 멸문되었다. 안당安瑭의 재산과 노비는 송사련이 차지하였다. 또한 그 공으로 벼슬도 정3품 당상관 첨지까지 오르게 되었다. 이런 배경으로 송구봉이 유족한 환경 속에서 성장하게 되었다. 훗날 이 사건을 ‘신사무옥辛巳誣獄’이라고 부른다. 무고에 의한 옥사라는 뜻이다.
이 고변 사건이 복잡한 이유는 안처겸과 송사련이 적서에 얽힌 친족사이였다는 사실이다. 즉 안처겸의 아버지인 안당과 송사련의 어머니인 감정(甘丁)은 이복 남매 사이였다. 안당은 아버지 안돈후의 적자였고, 감정은 비첩婢妾(종 출신의 첩: 본래 안돈후의 형 안관후의 종이었다가 안돈후가 데려다 첩으로 삼았다) 중금重今에게서 얻은 얼녀蘖女(천인 출신에게서 난 자식, 반면 양인 출신에게서 낳은 자식은 서녀庶女라고 했다. 이 둘을 합쳐 서얼庶孼이라 한다)였다.
어머니 쪽의 신분을 따르게 돼 있던(從母法) 당시 신분제로 보자면 송사련은 이중의 제약을 받고 있는 셈이었다. 즉 중금重今의 신분이 본래 안씨 집안의 노비였고, 신분제에 따라 얼녀 감정 역시 안당安瑭 가문의 노비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감정甘丁이 양인 송린과 혼인하여 송사련을 낳았는데, 송사련은 어머니 신분에 따르면 안당 가문의 재산에 속하는 것이다.
하지만 적서의 차별이 그리 심하지 않았던 안씨 집안의 도움으로 천한 신분을 면하고 관직에 올랐고, 신분을 넘어 신임을 받으며 집안의 대소사를 관장하기까지 한 입장이었음에도, 송사련은 이를 자신의 출세와 명예욕에 사로잡혀 역모 고변으로 답을 한 것이다.
당시 사대부들과 세인들은 송사련에게 등을 돌리며 심한 비난을 하였다.
송사련 자신은 80세로 죽을 때까지 부귀영화를 누렸지만, 악업에 대한 대가는 고스란히 자신의 자식들에게 돌아가게 된 것이다.
1540년 중종 35년 안당安瑭에 대한 신원伸寃이 이루어졌다. 또한 송구봉이 대과 공부에 여념이 없던 1559년 명종 14년에는 이미 초시에 율곡 이이와 함께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한 송구봉과 동생 운곡雲谷 송한필宋翰弼의 대과의 길이 막히게 되었다.
이때 사관이었던 이해수李海壽는 서얼은 과거를 응시할 수 없다는 이유로 과거를 금지시켰다. 또한 송사련이 죽은 1575년 선조 8년에는 안당安瑭에게 ‘정민貞愍’이라는 시호가 주어져 관작의 환급을 통한 복권과 명예도 완전히 회복되었다. 1586년 선조 19년 안당安瑭의 아들 안처겸 등이 무죄로 밝혀져서 신원이 복권되고 송사련의 관작이 삭탈되었다.
치밀하게 와신상담하며 복수를 꾀하던 안당安瑭 집안 후손들은 송구봉의 정치적 보호막 역할을 하던 율곡 이이가 죽은 1584년 갑신년 이듬해인 1586년 드디어 칼을 빼들었다. 동인의 공공의 적인 송구봉을 제거하기를 원하던 동인 강경파 이발李潑(1544~1589) 등의 후원을 얻어 송구봉 일가에 대한 노비 환천 소송을 진행하였다.
“송익필 등은 원래 우리 집안의 노비이니 법에 의해 다시 불러 쓰고자 합니다.” 65년 전 명문가에서 하루아침에 폐족으로 전락해버렸던 원한을 푸는 일이었다. 안씨 집안에서는 안처겸의 장남인 안로(安璐:당시 70세)와 안로의 조카뻘되는 서출인 안정란安廷蘭이 앞장섰다.
적서 차별이 별로 없던 안씨 집안이었고, 집안 사람 대부분이 관직에 나가지 못한 반면, 안정란은 중간간부이긴 해도 외교 문서를 다루는 승문원承文院 이문학관吏文學館에서 봉직해 문장을 잘하고 재기가 있고 겁이 없는 성품이었다. 또한 종놈의 자식과 싸우는 데에 정실인 자신들보다는 정실 소생이 아닌 정란이 선봉에 서는 게 보기가 좋지 않겠냐는 의도가 숨겨져 있었다.
소장訴狀은 안로의 처인 윤씨 명의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들의 주장에는 무리가 있었다. 법대로 한다면 비록 노비라도 2대 이상 양역良役(노비가 아닌 비양반의 신분자가 할 수 있는 일)을 한 집안의 자손은 노비를 면하게 되어 있었다. 송구봉 형제들은 그의 할아버지(송린)에서부터 아버지 2대에 걸쳐 이미 관상감 등에서 근무를 하였다. 그리고 이미 조정 각지에는 송구봉의 제자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그래서 소송을 맡은 관청인 장례원掌隷院 관원들도 송구봉 형제의 환천還賤에는 소극적이었다.
송구봉 제자들은 안씨 집안 사람들을 만나 회유, 협박을 해보았지만 요지부동이었다. 그들의 한(恨)과 상처가 너무 크고 깊었던 것이다.
동인(東人) 정윤희丁胤禧(1531~1589)의 판결
하지만 법보다는 정치적인 세력 싸움에서 동인이 우세하였다. 동인의 이발과 백유양白惟讓 등은 해당 관청을 압박하였고, 송구봉의 할머니인 감정이 안씨 집안의 씨가 아닌 다른 종의 자식이라고 하면서, 송씨 집안의 양적良籍(양인임을 나타내는 문서)을 모두 없애 버렸다. 이때 장례원 판결사는 여러 번 바뀐 끝에 동인의 외곽인물인 정윤희, 아우 정윤복의 현손 정도태의 현손이 다산 정약용이다. 다산이 노론의 핍박을 받았던 이유는 여기서부터 비롯한다)였다.
정윤희는 퇴계 이황의 제자로 문과 장원을 한 인재였다. 1586년 7월 드디어 판결이 나왔다. “송사련의 후손 송익필 형제와 그 자손들을 원래대로 안씨 가의 사노비로 되돌려라” 조선 최고의 천재로 손꼽히던 송구봉이 노비가 되는 순간이었다. 황해도 배천에 모여 살던 송구봉과 일가 70여 명은 죽기 살기로 각자 살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져 자취를 감춰버려야 했다.
정여립의 난과 기축옥사 그리고 송구봉
정처 없는 도망자 신세지만, 시간은 변함없이 흘러갔다. 여러 곳을 전전하며 숨어 살던 송구봉의 얼굴에는 수많은 주름이 드리워지고 흰머리는 더욱 많아졌다. 몸에 깃든 병과 마음고생이 더해 갈 무렵 엄청난 역모 사건이 일어나고 이를 처리하는 과정에 그의 운명도 휩쓸려 들어가게 되었다. 이른바 정여립의 난과 기축옥사己丑獄事다.
정여립의 모반
정여립(鄭汝立, 1546~1589)은 동래 정씨로 전주 동문 밖에 살고 있었다. 그의 태몽은 ‘고려의 역신 정중부가 나타난 꿈’이었다고 한다.
정여립은 1570년 선조 3년 25세 나이로 문과에 급제했으나 고향으로 돌아와 독서에만 전념했다. 이 시기 율곡(栗谷) 이이(李珥,1537~1584)와 우계(牛溪) 성혼(成渾, 1535~1598)의 문하를 왕래하면서 학문을 논하기도 했다. 이이와 성혼은 정여립의 과격하고 급한 기질을 걱정하면서도 그의 박학다식함에 탄복해 조정에 천거하기까지 했다.
정여립은 언변이 능수능란하여 말의 옳고 그름을 떠나 한번 입을 열면 좌중을 감탄시켰고, 비록 그가 잘못되었음을 알고 있더라도 감히 그와 대적하려는 자가 없었다.
1584년 선조 17년 겨울, 율곡 이이가 죽은 뒤 정여립은 노수신, 이발 등에 의해 관직에 나가기도 했다. 그러면서 이이를 “나라를 그르치는 소인”으로 매도했다.
선조 앞에서도 이이를 소인이라고 비난하여 선조는 정여립을 배은망덕한 인물의 표본으로 불리는 송나라 형서邢恕 같은 이라고 혹평했다. 이렇게 임금의 눈 밖에 나게 되어, 이발의 거듭된 천거에도 그는 등용되지 못했다.
이에 고향으로 내려간 정여립은 집권 동인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재기를 노렸다. 현재의 왕 아래에서는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거짓으로 학문을 강론한다고 하면서 무뢰한을 불러 모았다.
그 중 황해도 안악 사람 변숭복, 박연령, 해주사람 지함두 등과 비밀리에 사귀며 기회를 엿보았다. 그리고 전주, 금구, 태인 등의 여러 무사와 노비 등 계급의 상하를 막론하고 사람들을 모아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했다.
1587년 선조 20 정해년에 왜구가 전라도 손죽도에 침범했을 때 정여립은 전주부윤 남언경의 요청으로 군사를 원조하였다. 이를 계기로 대동계 조직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왜적이 물러가고 군사를 해산할 때 정여립은 “너희는 뒷날에 또 어떤 일이 있거든 각기 소속 군사를 거느리고 일시에 모이라”는 명령을 내리고 군사 명부 한 벌을 가지고 돌아갔다.
당시 조선의 군사력은 왜국의 이런 변방의 침략에도 대동계 같은 사조직의 도움을 받아야 할 정도로 허술한 상태였다. 이런 상황은 만약 군사력을 쥔 이가 있다면 반역을 꾀하기 좋은 여건이었다.
출세욕이 강한 정여립은 평소 “천하는 공물公物인데 어찌 정해진 임금이 있겠는가”(天下公物豈有定主)라고 하거나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것은 왕촉王蠋(미상~BCE 284 전국시대 제나라 사람)이 한때 죽음에 임해 한 말이지 성현의 통론은 아니다”며 왕위 계승의 절대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여기에 세간에 떠도는 “목자(木子: 李)는 망하고 전읍(奠邑: 鄭)은 흥한다”는 참언을 민간에 널리 퍼지게 했다. 1589년 선조 22년 기축년 이러저런 비밀이 누설된 것을 알고 정여립은 모반을 일으키기로 했다. 하지만 겨울이 오기 전인 10월 2일 안악군수 이축, 재령군수 박충간, 신천군사 한응인 등이 정여립의 역모를 고변했다. 황해감사 한준 역시 같은 내용의 비밀 장계를 보고하는데, 동인은 고변한 자가 이이의 제자들이라며 정여립을 두둔했다.
고변이 들어온 이상 진위를 알기 위해 정여립을 잡아들이고자 했는데 정여립은 변숭복과 아들 정옥남을 데리고 진안 죽도로 달아났다. 진안현감 민인백이 관군을 이끌고 이들을 추격하자, 정여립은 칼로 변숭복과 아들을 쳐서 죽인 후 자신은 칼자루를 땅에 꽂아놓고 스스로 찔러 죽었다.
정여립은 자신의 혐의를 인정한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가 쳐 놓은 함정에 빠진 것인가?
그 배후 인물로 지목되는 게 바로 송구봉이었다. 율곡 사후 동인의 공격을 받아 벼슬에 오르지 못했던 서인이 쌓은 울분과 법리마저 무시하며 정치적 힘으로 일가를 도망 노비로 전락시킨 것에 대해 원한을 품은 송구봉이 동인 정권을 뒤집으려는 계책을 세웠고, 이들에게 정여립의 대동계는 좋은 먹잇감이었다는 것이다.
평소 정여립과 친하게 지내왔기 때문에 그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고, 대동계라는 사조직을 키우자 반란의 기미를 읽은 송구봉이 사람을 시켜 이를 고변하게 한 것이다. 동인을 공격하는 촌철살인의 상소문을 대신 써주고, 정치적 동반자이기도 송강(松江) 정철(鄭澈,1536~1594)을 조정해 사건을 주도면밀하게 조작했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사화로 불리는 기축옥사는 정여립 모반사건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서인의 실세였던 정철鄭澈의 누이 중에 인종의 후궁과 종친 계림군 이유의 부인이 있어 왕실의 인척이었다.
동인 영수인 이발과는 개인적인 악감정이 있었고, 호남을 대표하는 유자의 지위를 놓고 보이지 않은 경쟁을 했다. 평소 술을 좋아하고 직설적인 성격이었다. 정철은 우의정에 임명되어 사건을 조사하는 위관委官이 되어 가혹하게 다스렸다.
이에 역모와는 직접 관련이 없어도 정여립과 친분 관계나 친인척 관계에 있는 많은 동인 유력 인사를 연루시켜 처벌했다. 이발과 이길 형제, 백유양, 최영경, 정언신, 정개청, 김방 등이 억지에 가까운 죄목으로 처벌당했다. 약 1천명의 희생자가 나왔는데 호남 지역이 제일 피해가 커 이 일로 호남 유맥儒脈이 거의 끊어지다시피 했다. 공교롭게도 이들은 선조의 실정에 대해 비판적인 인사들이었다.
이발은 사건 직전 낙향하면서 선조 아래에서는 아무런 일도 할 수 없다고 통탄한 적도 있다. 그래서 기축옥사의 피해자들은 선조에 대한 ‘괘씸죄’에 걸려 희생된 인물들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당시 역모사건은 사실의 진위 여부를 추밀하게 살피기보다는, 한번 지목을 당하면 스스로 벗어날 수 없고 원통함을 밝힐 수 없는 마녀사냥식이 많았다.
결국 서인은 정여립의 모반사건을 계기로 동인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하는 계기로 삼았다. 이제 송구봉의 신원도 이루어지는가 싶었지만, 정철의 결정적 패착으로 이 모든 게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인 신묘년, 정철은 왕세자 책봉 문제에 연루되어 실각하고 유배를 당하게 되었다.
신성군을 마음에 두고 있던 선조에게 광해군을 세자에 앉혀야 한다는 주장을 한 것이다. 같이 주청을 하려던 영의정 이산해는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나오지 않고 다소 어정쩡한 자세를 취한 우의정 류성룡 사이에서 직설적 성격의 좌의정 정철 홀로 건저建儲(세자를 세우는 문제)를 들고 나온 것이다.
이미 신성군의 외삼촌 김공량을 통해 왜곡된 사실(이산해를 통해서 정철의 배후에는 송구봉, 성혼이 있으며 이들이 정국을 좌지우지하고 건저문제를 통해 귀인 김씨 사이에서 난 신성군을 제거한 뒤 광해군을 허수아비 임금으로 세워 권력을 쥐려한다는 내용)을 알게 된 선조는 이 문제를 구실삼아 서인 세력을 붕괴시켜버린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건저建儲문제를 이산해에게 이야기한 사람이 송구봉 자신이었다.
정철은 평안도 강계로 유배를 떠났다. 사형 바로 아래의 가장 혹독한 유배형인 위리안치圍籬安置, 극변 유배였다. 그동안 정철의 비호를 받았던 송구봉 형제에게 정철의 유배는 보호막이 사라졌다는 뜻이다. 동인들이 장악한 조정에서는 또다시 반노叛奴 형제를 추포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나이도 벌써 환갑을 바라보는 58세. 이 나이에 잡혀서 고문을 받거나 감옥살이를 하면 죽을 수 있었다.
고심 끝에 자수하였고, 송구봉은 평안도 희천熙川으로, 동생 송한필은 강원도 이성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어쩌면 생의 마지막을 북변 유배지에서 맞이할 수 있다는 생각에 회한이 밀려들었다. 절친한 친구 정철이 같은 평안도 경내에 유배와 있어 비록 보지는 못했지만 마음의 위안이 되었다. 또 워낙 낙천적인 성격도 유배를 견디게 해 주었고, 조선 도학의 발상지라고 할 수 있는 희천에 유배를 왔기에 이 기회에 정암 조광조를 생각하며 도학을 정리해야겠다는 마음을 가졌다.
임진왜란의 발발
그러나 인생사가 어디 뜻대로 되던가. 1592년 임진년. 미증유의 대전란이 남쪽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임진왜란이다. 민족적 비극과 대혼란의 이 7년 전쟁은 송구봉에게 지인들의 죽음을 연이어 알려 주었다. 최초의 충격은 문과 장원급제 출신이면서 무략이 뛰어났던 김여물이 탄금대에서 신립 장군과 함께 전사했다는 것. 시신조차 제대로 수습하지 못했다. 눈물을 주체할 수 없어 애도시를 한 수 읊었다. 하지만 전쟁은 감상에 젖어 있을 여유를 허락하지 않았다.
파죽지세로 북진한 왜군들에게 6월 중순 평양성이 함락되고, 유배 중이던 송구봉은 인근 명문산으로 은신하라는 명이 떨어졌다. 그 후 9월에는 우직하면서도 자신을 위해 몸을 사리지 않았던 조헌이 금산에서 의병을 일으켜 장렬하게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연이은 충격 속에서 마침내 1593년 9월 유배에서 풀려났다.
정철을 비롯한 서인들의 간청 끝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송구봉은 한성으로 돌아가기 전 양현사兩賢祠를 참배했다. 이곳은 희천 지역으로 유배 왔던 한훤당 김굉필과 그에게 도학을 배운 정암 조광조를 기리는 사당이었다. 제자 김장생의 아버지 김계휘가 평안도 관찰사로 있을 때 주도적으로 세운 것이다. 자신의 정신적 뿌리를 찾은 셈이다. 이후 서둘러 남쪽으로 향하면서 전란의 참상을 눈으로 직접 보게 되었다.
화불단행禍不單行, 재앙은 번번이 겹쳐 온다고 했던가. 황해도 인근으로 내려와 있던 송구봉은 자신을 스승의 예로 대해주고 진정을 다해 헌신적으로 모든 것을 준 평생지기 송강 정철의 부음 소식을 듣게 된다. 이어 이산해의 사촌동생이면서 변함없이 자신을 따라주었던 이산보가 56세 나이로 과로사를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일곱 살 많은 둘째 형 부필이 세상을 떠났고, 80을 바라보는 큰형 인필은 지방을 떠돌고 있다는 소식만 듣게 되었다. 가까웠던 친구도 형제도 동지도 모두 떠나가는 것을 보며, 송구봉은 “과연 내 인생은 무엇이었는가?”라는 탄식과 함께 눈물짓는 일이 많아졌다.
전란이 한풀 꺾인 1596년 충청도 당진군 마양촌馬羊村(지금의 송산면 매곡리 수머굴. 숨은골이라고도 함) 농막에 송구봉 부부는 아들 취대就大 부부와 함께 짐을 풀었다. 제자 김장생도 아들 김집金集(1574~1656), 김반金般(1580~1640)을 데리고 와 짐 푸는 것을 도왔다. 김집과 김반도 어려서부터 송구봉에게 학문을 익힌 제자들이었다. 농막의 주인은 김반과 친분이 깊은 첨추僉樞 김진려金進礪였다. 겨우 안식을 찾는가 싶었지만, 송구봉의 삶은 하루가 다르게 스러져가고 있었다.
1598년 무술년 평생의 반려였던 부인 창녕 성씨가 56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송구봉보다 아홉 살 아래로 간난艱難과 신산辛酸의 삶을 묵묵히 따라준 부인이었기에, 그것은 삶에 대한 의욕을 잃을 정도의 큰 충격이었다. 게다가 또 다른 평생지기 성혼이 병으로 세상을 떴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송구봉은 가끔 이이나 성혼과 주고 받았던 편지를 꺼내 만지작거리는 게 유일한 낙이었다. 결국 그 이듬해인 1599년 기해년(선조 32년) 8월 8일 아침. 아들 취대와 수제자 김장생을 비롯한 제자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송구봉은 66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하였다. 문인들과 인근 유림들은 당진현唐津縣 북면北面 원당동元堂洞에 장사를 지냈다.
조선을 지배한 그의 후예들
송구봉이 충청도 당진 숨은골에서 66세의 일기로 쓸쓸하게 세상을 떠난 지 24년 후인 1623년 광해군 15년에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났다. 이 반정이 성공하지 못했다면 송익필이라는 이름은 역사에서 흔적도 없었을 것이다. 인조 원년 윤 10월에 논공행상을 거쳐 52명의 정사공신靖社功臣이 책봉되었는데, 이들은 이후 300년간 조선의 정치사에서 원류를 형성하는 인물들이다. 그중 1등 공신 9명 모두 직간접적으로 송구봉과 인연을 맺고 있었다. 그들의 면면을 살펴보는 일은 송구봉의 영향이 조선 후기 사회에 얼마나 막대했는지를 엿볼 수 있는 단초가 될 것이다.
구봉의 직접 제자인 김류(1571~1648): 본관이 순천으로 세종 때 명신 김종서의 본관도 순천이다. 순천 김씨는 궁예의 후손이라는 설이 있다) 임진왜란 당시 탄금대에서 신립 장군의 막료로 함께 전사한 김여물의 아들이었다. 평소 김여물과 가깝게 지내던 송구봉은 특히 애정을 가지고 김류를 지도하였고 김류는 스승을 잊지 못하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은 그날 구봉 선생님으로부터 친히 가르침을 받은 덕분이다.” 이귀는 송구봉, 성혼, 이이에게서 두루 학문을 배운 서인의 신진 엘리트였으나, 서인이 힘을 잃음에 따라 한직만 돌다가 인조반정 때는 평사부사로 있었다. 당시 65세였다. 탄금대에서 전사한 신립 장군의 아들인 신경진(1575~1643)과 훗날 병자호란 당시 주화파로 청과 화친을 추진했던 지천 최명길(1586~1647: 본관 전주),
훗날 인조가 되는 능양군의 큰 외삼촌으로 반정 당시 군사력을 담당했던 구굉(1577~1642), 이서(1580~1637) 등은 송구봉의 수제자인 사계 김장생의 제자로 송구봉의 손자 제자에 해당한다. 송구봉과 뜻을 함께했던 성혼의 제자 김자점(1588~1652: 본관은 안동. 고려의 명장 충렬공 김방경의 후손이며, 단종 복위 당시 거사를 누설한 좌의정 쌍곡 김질의 5대손이며 백범 김구의 방조傍祖)은 조카 제자에 해당한다.
송구봉의 절친한 친구이자 정치적 동지였던 정철의 제자 권필의 제자인 심기원(1587~1644: 병자호란 후 역모 사건으로 능지처참됨)도 손자제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심명세(1587~1632)는 송구봉의 동지였고 형제처럼 지내던 심의겸의 손자로 송구봉에게는 제자와 다름없는 사람이었다.
인조반정 후 76세였던 김장생에게 사헌부 장령(정4품)이 제수된다. 이는 실직實職이라기보다는 명예직과도 같은 것인데, 새로운 왕이 초야의 학자를 고위직에 임명하고 정치의 개요와 학문하는 요령을 자문했다는 것은 대단한 영예임은 분명하다. 송구봉의 성리학, 예학, 그리고 직直사상은 수제자 김장생, 김집 부자를 거쳐 다시 고스란히 우암 송시열에게 전수되었다. 스승인 송구봉이 이루지 못한 꿈을 그의 제자들이 하나씩 이뤄가게 된 것이다.
송시열은 송구봉의 묘갈명을 직접 지었다. 훗날 1689년(숙종 15년) 사약을 받고 죽을 때, 송시열은 제자 권상하(1641~1721)의 손을 붙잡고 말했다. “천지가 만물을 낳는 이치와 성인이 만사에 응하는 이치는 곧음[直]일 뿐이다.” 송시열의 사상은 송구봉의 직直사상이었다. 제자와 후학들은 스승의 삶을 안타까워하며 누대에 걸쳐 송구봉을 위한 신원운동을 벌였다.
사후 여러 번의 신원 상소가 올려졌으나 모두 묵살당했고, 인조반정 후 1625년(인조 3년) 김장생 등의 제자들이 상소하여 스승의 양민 환원을 요청했으나 이뤄지지 않았다. 이후 김장생이 송익필의 복권 상소를 계속 올려 결국에는 복권시켰다.
1752년(영조 28년) 충청도관찰사 홍계희의 상소로 송구봉은 통덕랑通德郞 행行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증직되었다. 사후에나마 신원이 이루어지고 관직의 길에 나아간 것이다. 후에 충청도 당진군 원당에 그의 사당인 입한재立限齋가 세워졌다. 그로부터 10년 뒤인 영조 38년에는 김장생의 6대손에 의해 그의 저서 《구봉집》이 발간되었고, 족보에서 누락되어 빠져 있던 그의 이름도 사후 3백여 년이 지난 1905년 광무 9년에 족보에 등재되었다.
그리고 대한제국 융희 4년인 1910년 7월 20일에 규장각 제학으로 추증하고 26일에는 문경文敬의 시호가 내려졌다. 국권이 피탈되기 33일 전이다. (이때 융희제는 이미 1909년 7월 12일 기유각서 사건으로 대한제국 주재 일본통감 소네 아라스케曾禰荒助에게 실권이 박탈되어 있던 상태였다)
만약 송구봉이 부친의 악업의 영향을 받지 않고 떳떳하게 활동하였다면 조선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상제님 말씀처럼 임진왜란의 참혹한 전란이 8개월 만에 끝나고 전혀 다른 조선의 역사가 펼쳐졌을까? 오늘날에 와서야 그에 대한 인식과 평가가 조금씩 진행되고 있다.
송구봉의 시, 오년吾年(내 나이)
吾年六十一(오년육십일) 日覺俗緣空(일각속연공)
내 나이 예순 하나 세속 인연 비어감을 날로 느끼네
有壽仙何學(유수선하학) 無愁酒不功(무수주불공)
오래 사니 신선을 어찌 배울쏜가 근심이 없으니 술도 쓸모가 없구나
養多心轉靜(양다심전정) 看久理逾通(간구리유통)
함양이 깊어지니 더욱 마음 고요해지고 오래 보니 사물 이치 한층 잘 통하네
未路相知少(미로상지소) 迢然出世翁(초연출세옹)
늘그막에 서로 아는 사람 적으니 초연히 속세 떠난 늙은이로다.
송구봉과 진묵대사, 그리고 최풍헌의 도력(道力)
[道典 4편 7장] 지난 임진왜란에 정란(靖亂)의 책임을 ‘최풍헌(崔風憲)이 맡았으면 사흘 일에 지나지 못하고, 진묵(震默)이 맡았으면 석 달을 넘기지 않고, 송구봉(宋龜峯)이 맡았으면 여덟 달 만에 끌렀으리라.’ 하니 이는 선도와 불도와 유도의 법술(法術)이 서로 다름을 이름이라.
옛적에는 판이 작고 일이 간단하여 한 가지만 따로 쓸지라도 능히 난국을 바로잡을 수 있었으나 이제는 판이 넓고 일이 복잡하므로 모든 법을 합하여 쓰지 않고는 능히 혼란을 바로잡지 못하느니라.
[한국구비문학대계韓國口碑文學大系](한국 정신문화연구원 간행)는 진묵대사의 죽음에 얽힌 비화를 싣고 있다.
진묵대사(震默大師,1562~1633)의 도술 조화의 능력을 시기하고 질투한 유학자 김봉곡(金鳳谷,1575~1661)에 의해 참혹하게 죽었다는 것이다.
진묵대사(震默大師,1562~1633)는 뛰어난 도력을 지녔으나 몸을 두고 시해(屍解)로 다른 곳으로 간 사이 김봉곡에 의해 억울한 죽음을 당한다. 진묵대사는 조선 중기 명종 17년 임술년(1562)에 태어나 인조 11년 계유년(1633) 10월 28일에 세상을 떠난 고승으로 고려 말 공민왕 때 나옹懶翁대사와 더불어 석가모니 후신불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이름은 일옥一玉이며, 진묵震默은 그의 호로 김제군 만경萬頃면 화포火浦리에서 태어났는데, 이 화포리란 곳은 옛날의 불거촌佛居村으로 부처가 살았던 마을이란 의미를 나타낸다. 대사가 태어날 때 불거촌의 초목이 3년 동안이나 시들어서 말라 죽었으므로 사람들은 모두 '불세출의 기운을 타고났다'고 하였다.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7세 때, 전주 서방산西方山에 있는 봉서사鳳捿寺로 출가했다.
대사는 불가(佛家)의 인물이지만, 이미 그 경계를 뛰어넘어 유불선儒佛仙 삼교에 회통會通한 인물이었다. 타자(他者) 구원보다는 자기구원에만 집착하는 소승불교를 비판하고, 명리승인 서산대사를 비판하면서 중생들의 생활 속에서 중생들을 제도하는 진정한 보살행을 행함으로써 부처의 화신다운 면모를 보였다. 또한 출가인임에도 모친과 누이동생에 대한 지극한 정성과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는 점에서 부모와 자식 사이의 천륜과 동기간 우애의 소중함을 누구보다 중시한 인물로 유자(儒者)보다 더 유자儒者다웠다.
진묵대사는 이땅의 인간들을 위해 천상문명을 지상에 이식하기 위해 '시해선尸解仙'으로 천상에 올라간 사이에 유학자 김봉곡의 시기심과 질투로 인해 대사의 육신은 불타서 사라지고 말았다. 봉곡鳳谷 김동준(金東準,1575~1661)은 자가 이식(而式)이고 호는 봉곡鳳谷이다. 본관은 광산으로 고려조의 시중 문정공 태현의 후손이고, 생원 희지의 아들이다.
서인의 영수격으로 예학에 능통했던 사계 김장생(1548~1631)의 제자로서 그의 추천을 받아 의금부도사와 사헌부 감찰 등을 제수 받았다. 그는 계몽도설啓蒙圖說, 심성서언心性緖言 등의 성리학에 관한 저술을 남길 정도로 성리학적 지식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훗날 그의 묘갈명을 우암 송시열(1607~1689)이 지었다.
다음은 초의선사草衣禪師(1786~1866)가 쓴 [진묵조사유적고震默祖師遺蹟考]의 일화이다.
조선 인조 때 무더운 여름날 변산(邊山) 월명암月明庵에서 진묵대사를 모시던 시자(侍者)가 때마침 속가에 제사가 있어 공양물을 지어 놓고 산을 내려가 내일 온다고 고했다. 이 때 스님은 방안에서 창문을 열어놓고 손을 문지방에 대고서 능엄삼매楞嚴三昧에 들어있었다. 이튿날 시자가 올라와 보니 밥상은 그대로고 스님의 자세도 그대로인데, 스님의 손에서 피가 흘러 내려 그대로 말라붙어 있는 것이 아닌가.
바람이 불어 닫힌 문이 계속해서 문지방에 댄 손을 찧어 피가 흐르는 데도 그것을 알지 못한 채 삼매三昧(수행에 있어서 최고의 정신 집중 상태)에 들었던 것이다. 스님은 이미 시,공간을 초월한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삼매에서 깨어난 스님은 평소 좋아하는 술을 거르고 있는 다른 중에게 무엇을 거르는가 하고 물었다.
스님이 평소 술을 곡차(穀茶)라고 하면 마시고, 술이라고 하면 마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그 중은 스님을 시험하기 위하여 술을 거른다고 거듭 대답하여, 결국 스님에게 곡차 공양을 하지 않았다. 이에 스님은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 길을 가는데, 얼마 뒤 금강역사金剛力士가 나타나 그 중을 타살해 버렸다. 이후 절문을 떠나 길을 나선 스님은 냇가에서 천렵(川獵,냇물에서 하는 고기잡이)을 한 뒤 매운탕을 끓이고 있는 소년 무리들을 만났다.
스님이 이 광경을 보고 탄식하면서, "이 무고한 물고기들이 화탕火湯 지옥의 고생을 하는구나!"하니, 한 소년이 희롱하여 말하기를 "선사께서도 이 고깃국을 드시겠습니까?"하니 "나야 잘 먹지"하였다. 이에 소년이 "저 한 솥을 선사께 맡기겠으니 다 드시오."하였다. 이에 스님이 솥을 들어 입에 대고 순식간에 남김없이 다 먹어 버리자, 소년들은 살생하지 말라는 계율을 어기고
고깃국을 다 먹었다고 조롱하였다. 이에 말씀하시기를 "물고기를 죽인 것은 내가 아니지만 그것을 살리는 것은 내게 있다"고 말하며 냇가에 가서 뒤를 보니 무수한 고기들이 살아서 헤엄쳐 갔다. 이에 소년들이 탄복하고는 그물을 거두어 가지고 돌아갔다. 그 물고기들이 ‘중태미’로 중(僧)의 태(胎)에서 나온 물고기란 뜻으로 전북지방에만 있다고 한다.
전주 장날을 맞이하여, 어스름이 찾아올 즈음 어머니를 뵙기 위해 왜막촌으로 가는 길에서 흥이 돋은 스님은 덩실덩실 춤을 추며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天衾地席山爲枕
천금지석산위침
月燭雲屛海作樽
월촉운병해작준
大醉居然仍起舞
대취거연잉기무
却嫌長袖掛崑崙
각혐장수괘곤륜
하늘을 이불로 땅을 자리로 산을 베개로 삼고
달을 촛불로 구름을 병풍으로 바다를 술통으로 삼아
크게 취하여 거연히 일어나 춤을 추니
도리어 긴 소맷자락 곤륜산에 걸릴까 꺼려지노라.
유유자적하고 무위 자연한 소요유(逍遙遊)의 경지를 보여주면서 호호탕탕한 스님의 모습은 명리를 초탈하여 아무 것에도 속박 받지 않은 대자유인大自由人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이윽고 도착한 왜막촌에는 7세 때 출가한 이후 봉양해 온 늙은 어머니가 계셨다. 스님은 그 마을 뒤에 있는 일출암에 머물렀다.
어머니가 해주신 보리밥 한 덩이와 보글보글 맛있게 끓인 된장국에 누이가 거른 곡차로 저녁을 맛있게 먹은 스님은 또다시 입정삼매에 들었다. 만경들녘에는 휘영청 밝은 백중百中일의 보름달이 대지를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진묵대사는 신통력이 뛰어난 도인이면서도 세상에 초연한, 그러면서도 인간 냄새가 물씬 풍기는 다정다감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살가움을 지닌 이였다. 그리고 결코 손으로 움켜잡을 수 없는 바람과 같은 인물로 그 무엇에도 걸림이 없이 홀로 나아가는 구도자이며 천지만물과 함께 살아가는 대자유인大自由人이었다.
다음은 진묵대사의 억울한 죽음에 관한 내용이다.
道典 4편 138장) 전주 서방산(西方山) 봉서사(鳳捿寺) 아래에 계실 때 하루는 성도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김봉곡(金鳳谷)이 시기심이 많더니 하루는 진묵(震默)이 봉곡에게서 성리대전(性理大全)을 빌려 가면서 봉곡이 곧 후회하여 찾아올 줄 알고 걸어가면서 한 권씩 보고는 길가에 버려 봉서사 산문(山門) 어귀에 이르기까지 다 보고 버렸느니라.
봉곡이 책을 빌려 준 뒤에 곧 뉘우쳐 생각하기를 '진묵은 불법을 통한 자인데 만일 유도(儒道)까지 정통하면 대적하지 못하게 될 것이요, 또 불법이 크게 흥왕하여지고 유교는 쇠퇴하여지리라.' 하고 급히 사람을 보내어 그 책을 도로 찾아오게 하니, 그 사람이 뒤쫓아 가면서 길가에 이따금 한 권씩 버려진 책을 거두어 왔느니라. 그 뒤에 진묵이 봉곡에게 가니
봉곡이 빌려 간 책을 돌려달라고 하거늘 진묵이 '그 책은 쓸데없는 것이므로 다 버렸노라.' 하니 봉곡이 크게 노하는지라. 진묵이 말하기를 '내가 외우리니 기록하라.' 하고 외우는데 한 글자도 틀리지 아니하였느니라. 봉곡이 이로부터 더욱 시기하더니, 그 뒤에 진묵이 상좌(上佐)에게 단단히 이르기를 '내가 8일을 기한으로 하여 시해(尸解)로 천상에 다녀올 것이니 절대로 방문을 열지 말라.' 하고 떠나거늘
하루는 봉곡이 봉서사로부터 서기가 하늘로 뻗친 것을 보고 '내가 저 기운을 받으면 진묵을 능가할 수 있으리라.' 하며 즉시 봉서사로 올라갔느니라. 봉곡이 서기가 뻗치는 법당 앞에 당도하여 진묵을 찾으매 상좌가 나와서 '대사님이 출타하신 지 얼마 안 됩니다.'하니 봉곡이 '옳거니, 법당의 서기를 이 참에 받아야겠다.' 하고 '법당 문을 열라.' 하매 상좌가 '대사님께서 자물쇠를 가지고 가셨습니다.' 하거늘
봉곡이 큰 소리로 호령하며 기어이 문을 부수고 들어가니 뜻밖에 진묵이 앉아 있고 그의 몸에서 서기가 뻗치더라. 봉곡이 잠시 당황하다가 문득 진묵이 시해로 어디론가 갔음을 알아차리고 '서기를 못 받을 바에는 차라리 돌아오지 못하게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상좌에게 '어찌 시체를 방에 숨겨 두고 혹세무민하느냐! 중은 죽으면 화장을 해야 하느니라.' 하며 마침내 마당에 나무를 쌓고 진묵의 시신을 화장하니 어린 상좌가 울면서 말리거늘 봉곡은 도리어 화를 내며 상좌를 내쳤느니라.
이 때 마침 진묵이 돌아와 공중에서 외쳐 말하기를 '너와 내가 아무 원수진 일이 없는데 어찌 이러느냐!' 하니 상좌가 진묵의 소리를 듣고 통곡하거늘 봉곡이 '저것은 요귀(妖鬼)의 소리니라. 듣지 말고 손가락뼈 한 마디, 수염 한 올도 남김없이 잘 태워야 하느니라.' 하며 일일이 다 태워 버리니 진묵이 다급한 음성으로 상좌에게 '손톱이라도 찾아 보라.' 하는데 봉곡이 상좌를 꼼짝도 못하게 하며 '손톱도 까마귀가 물고 날아갔다.' 하는지라.
진묵이 소리쳐 말하기를 '내가 각 지방 문화의 정수를 거두어 모아 천하를 크게 문명케 하고자 하였으나 이제 봉곡의 질투로 인하여 대사(大事)를 그르치게 되었으니 어찌 한스럽지 않으리오. 나는 이제 이 땅을 떠나려니와 봉곡의 자손은 대대로 호미질을 면치 못하리라.' 하고 동양의 도통신(道通神)을 거느리고 서양으로 건너갔느니라.' 하시니라.
이로써 대사의 뜻은 좌절되고, 깊은 원한을 품은 채 동양의 도통신(道通神)을 거느리고 서양으로 넘어갔다. 또한 거의 동시대에 서양 의 천주교를 동양에 뿌리내린 이마두((利瑪竇,마테오리치 신부,1552~ 1610) 대성사는 아래 말씀처럼 동양의 문명신(文明神)을 거느리고 서양으로 넘어가 서양의 과학문명을 일으키게 된다.(17세기 과학혁명과 산업혁명).
道典 2:30) 마테오 리치 대성사의 큰 공덕
이마두(利瑪竇)는 세계에 많은 공덕을 끼친 사람이라. 현 해원시대에 신명계의 주벽(主壁)이 되나니 이를 아는 자는 마땅히 경홀치 말지어다. 그러나 그 공덕을 은미(隱微) 중에 끼쳤으므로 세계는 이를 알지 못하느니라.
서양 사람 이마두가 동양에 와서 천국을 건설하려고 여러 가지 계획을 내었으나 쉽게 모든 적폐(積弊)를 고쳐 이상을 실현하기 어려우므로 마침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다만 동양과 서양의 경계를 틔워 예로부터 각기 지경(地境)을 지켜 서로 넘나들지 못하던 신명들로 하여금 거침없이 넘나들게 하고 그가 죽은 뒤에는 동양의 문명신(文明神)을 거느리고 서양으로 돌아가서 다시 천국을 건설하려 하였나니 이로부터 지하신(地下神)이 천상에 올라가 모든 기묘한 법을 받아 내려 사람에게 ‘알음귀’를 열어 주어
세상의 모든 학술과 정교한 기계를 발명케 하여 천국의 모형을 본떴나니 이것이 바로 현대의 문명이라. 서양의 문명이기(文明利器)는 천상 문명을 본받은 것이니라. 그러나 이 문명은 다만 물질과 사리(事理)에만 정통하였을 뿐이요, 도리어 인류의 교만과 잔포(殘暴)를 길러 내어 천지를 흔들며 자연을 정복하려는 기세로 모든 죄악을 꺼림 없이 범행하니
신도(神道)의 권위가 떨어지고 삼계(三界)가 혼란하여 천도와 인사가 도수를 어기는지라
이마두가 원시의 모든 신성(神聖)과 불타와 보살들과 더불어 인류와 신명계의 큰 겁액(劫厄)을 구천(九天)에 있는 나에게 하소연하므로 내가 서양 대법국 천개탑에 내려와 이마두를 데리고 삼계를 둘러보며 천하를 대순(大巡)하다가 이 동토(東土)에 그쳐
중 진표(眞表)가 석가모니의 당래불(當來佛) 찬탄설게(讚歎說偈)에 의거하여 당래의 소식을 깨닫고 지심기원(至心祈願)하여 오던 모악산 금산사 미륵금상에 임하여 30년을 지내면서 최수운(崔水雲)에게 천명(天命)과 신교(神敎)를 내려 대도를 세우게 하였더니
수운이 능히 유교의 테 밖에 벗어나 진법을 들춰내어 신도(神道)와 인문(人文)의 푯대를 지으며 대도의 참빛을 열지 못하므로 드디어 갑자(甲子 : 道紀前 7, 1864)년에 천명과 신교를 거두고 신미(辛未 : 道紀 1, 1871)년에 스스로 이 세상에 내려왔나니 동경대전(東經大全)과 수운가사(水雲歌詞)에서 말하는 ‘상제’는 곧 나를 이름이니라.
첫댓글 역사의 글 잘 보고 갑니다
네, 반갑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