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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상.. 아쌋사따 assasata 인가 아니면 아니짜 anicca 인가
효진 홍윤표추천 0조회 5426.10.21 19:24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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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책 출판하려고 수집정리할 때 매 순간 페이지 페이지에 신중하게 집중하는데.. 그런 가운데 더욱 진지하게 고려하는 게 있다면.. 책 시작에 무엇을 담을 것인가.. 이리라. 저자에게 첫 장이란 책 전체 내용을 암시하거나 보여준다고 여기기에.. 초기 경전이라 하면 <니까야>가 있고, <아함경>이 있다. 두 경전은 석가세존의 설법을 전하는 것이니 같은 내용이지만.. 정리한 부파에 따라 수집한 순서는 <쌍윳타 니까야>와 <잡아함경>에서 보이듯 아주 다르다. <쌍니>의 시작인 <S 1.1. 거센 물결 경>에는 천신이 세존께 질문으로 시작한다. “스승이시여, 당신은 어떻게 거센 물결을 건넜습니까” "벗이여, 나는 머무르지도 않고 너무 애를 쓰지도 않고 거센 물결을 건넜노라.” <쌍니 1.1>의 핵심 단어는 천신과 중도. <쌍니>를 정리한 이들은 석가세존은 하늘의 신들이 스승으로 모시는 분[천인사]이시고, 그런 세존의 가르침 중심은 중도라고 보았고.. 그 내용이 어느 것보다도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랬기에 처음 경에는 하늘 신과 중도 내용이 나온다. 그에 반해 <잡아함경> 시작은 세존께서 제자들에게 간곡히 부탁하는 내용이 나오니.. <잡. 1. 무상경> "색(色)은 무상하다 관하라. 이렇게 관하는 게 바른 관찰[正觀]이다..." .." 천신과 중도 대신에 제자와 무상이 보인다.. <쌍니>에서는 석가모니가 어떤 분인지를 보여주고, <아함경>에서는 불제자라면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여기서는 제자를 중심에 두고 정리한 <아함경>을 본다. 세존 당시 수행자들은 다 알겠지만.. 지금처럼 잘 정돈된 수행처에서 커리큘럼에 따라 교육과 수행을 받는 시스템이 아니었다. 스승으로 가르치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 석가모니 시대 영화에서 볼 수 있듯이 제자가 되어 배운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지금과 같은 시스템이 그때 있었더라면.. 부처까지는 아니더라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수많은 뛰어난 제자들이, 보살마하살이 출현했으리라. 나무 관세음보살.(). 암튼 그런 가운데 세존께서는 제자들에게 무상, 고, 무아, 열반을 가르친다고 하니.. 자기도 고(苦, 두카)가 무엇인지 바르기 보고, 두카에서 벗어나 열반을 성취하겠다는 원으로.. 와서 열심히 수행하고 있었다. 그런 제자들에게 세존께서는 "너희들은 5 온인 색온이 무상하다고 관해야만 한다"라고 간곡히 부탁하는 모습이다. 그런데 말이다. 5온을 포함한 일체는 생주이멸이나 생로병사하는 무상이라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듯이 불제자가 되기 전부터 그들도 알고 있지 않았을까? 아니, 그것을 알기에 출가하여 수행을 하는 게 아니냐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잡아함경> 처음 경으로 수집한 것은..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이니.. <아함>에서 불교는 무상에서 시작함을 새삼 강조하는 것일까.. 그것만으로 많이 부족하다. 무상을 사유하면.. 우리는 강물을 보며 많은 생각을 하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흐르는 물처럼 나도 흘러간다는 무상을 느낀다. 태어나 늙고 거기다가 병도 들면서 끝내 죽는다는 무상을 말이다. 다는 아니지만 강을 노래하는 곡이나 가사는 슬픔이 묻어있다. 강물은 흘러 흘러 바다에 이른다. 만일 우리 삶도 과정에는 어려움도 있지만 결국엔 바다라는 영원한 안식처에 이른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세존 당시 인도인들은 강물은 흘러 바다인 열반에 이르지 못하고, 복원된 청계천 물처럼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 흘러가기를 반복하는 윤회를 믿고 있었다. 윤회를 한다는 것은 전생에서 현생으로, 그리고 다음 생으로 이어지는 항상 하는 게 있다는 게 아닌가.. 그렇게 이어지는 게 없다면 다시 태어난다 해도 윤회라고 할 수 없다. 그처럼 이어지는 핵심의 이름을 인도인들은 아트만[유아, 아]이라 했다. 윤회를 하고, 변하지 않는 항상하는 아트만이 있더라도 괴로움[두카]이 없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문제는 윤회를 하는데 아트만에 불순한 것들이 끼어들어 그것이 고통을 생기게 하니.. 삶이 온통 괴로움으로 차 있다는 것이다. 괴롭더라도 단 한번뿐인 삶이라면 참을 수 있을 것인데.. 이게 끝도 없이 반복된다면?. '윤회하는 아트만이 진짜 있는 건가?.' 하고 의심하는 자들이 인도에도 있어.. 그들 가운데 당돌하게도 아트만 같은 것은 없고 부모에게서 태어나 살다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라고 주장하는 단멸론자도 있어 한때 그들의 세력이 컸다지만.. 인도인들은 단멸론보다는 윤회론에 더 끌리어 그것이 대세를 이루었다. 그런 세상이었기에.. 세존을 찾아와 제자가 된 자들 역시 자신에게 몸과 생각의 주인인 아트만이 있으며, 인생무상의 고통을 반복할 거라고 생각했기에 그런 윤회에서 벗어나고자 세존을 찾아와 제자가 된 것이다. 그러니 그런 제자들에게 무상을 수행의 발판으로 삼고자 새삼 강조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개나 소도 아는 시시하게 보이기까지 하는 무상을 아함 첫 번째 경으로 삼을만한 가치가 있어 보이느냐는 것이다. 그것보다는 석가세존님은 천신보다 훨씬 우월하다는 <쌍니> 편집이 훨씬 고수의 편집으로 보이지 아니하는가. 그러나.. 여기서 숨을 고르고.. 주의해야만 하는 게 무상의 의미다. 부처님 당시 힌두교인 브라흐마에서는 존재인 아트만이 주체가 되어 윤회하는 무상을 노래하고 있지만, 불교는 아트만이 없는.. 존재하는 실체가 없는 무상을 가르치고 있지 아니 한가. '내가 윤회한다'는 것과 '나 없이 윤회한다'는 것의 차이를 볼 수 있다면.. 여기서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감을 잡을 수 있으리라. 우리는 인도인이 알고 있는 아트만을 모른다 해도.. 이 몸의 주인인 나가 실제로 있어, 그 나가 주체가 되어 몸과 정신을 운전하고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아..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알듯이.. 내가 행동의 주어로 실재하는 그 자의 이름을 자아[나]라고 하듯.. 그 자아는 아트만 또는 단멸론자들이 이해하는 자아와 별 차이가 없다. 아트만이 있다는 것의 예를 들면, 물이 조건이 변하면 수증기와 얼음이 되는데.. 그 셋의 공통점은 H2O로, 어떤 모습이 되든 존재인 H2O는 그 안에 있으면서 변하고 있다. 그처럼 인도인들은 아트만은 항상 하지만, 인생은 '무상 assasata'으로 괴로움이라고 노래했다. 그와 같은 괴로운 무상 assasata에서 벗어나려면 수행을 해야 하고 목표는 열반이 되니.. 그런 열반 상태를 '범아[브라흐마와 아트만] 일여'라고 하지 않는가. 그에 반해 불교는 아트만은 없다 [안-아트만]. 그런 가운데 '인생무상 anicca'이라 가르친다. 수레는 각각의 부품이 조립되어 생겨난다. 부품이 조립되기 전에 수레는 어디에 있었나? 그전에 없던 수레가 생겨나듯.. 사람은 다섯 가지[5 온]인 색. 수. 상, 행, 식이 화합하여 생겨 난다. 5온이 화합하기 전에 사람은, 나는 없다. 화합이 일어나기 전에는 수레가 없었고, 사람이 없었듯이.. 무아[안아트만]였지만 수레나 사람으로 세상에 태어나 무상하게 살아간다. 인생무상은 같지만 '내가 윤회한다' 는 아트만이면서 무상 assasata 하다는 것과 '나없이 윤회한다' 는 안아트만이면서 무상 anicca 하다는 차이가 분명 있지 아니한가.. 무상은 한문으로는 한 단어이지만 범어에는 'assasata'와 'anicca'로 구별되어 있었는데.. 상좌부를 중심으로 아니짜라 하면서 그 뜻을 아싸사타로 사용하는 천치같은 어리석음이 불교 안에서 저질러졌다. 그것은 나중에 보기로 하고.. <잡.1.1. 무상경>에서 '색이 무상하다고 관하라'는 것은.. 몸을 바라보며 '내 몸[색취온]이 무상하는구나'.. 하는 것으로 불제자가 이해한다면.. 그는 천치처럼 어리석은 자일 뿐이다. 색온은 무상임을 관한다는 뜻은.. 색에는 자아가 없음 [무아]이면서 무상임을 관찰하라는 세존의 간곡함이 묻어 있는 것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무상, 고, 무아 인 3법인이 나오는 <잡. 33경>을 보면.. "비구들아, 만일 (5온인 색온이) 무상하다면 그것은 괴로운 것인가?" "그것은 괴로운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라고 한다. 몸이 항상 하지 않는다는 것은 괴로움이라 하는 것인데.. 몸이 변하지 않고 항상 하면 행복해질까?. 어린이의 몸이 변하지 않고 항상 어린이 몸이라면 행복해할까.. 병든 노인 몸이 변하지 않고 항상 노인 몸이라면 행복하겠느냐는 것이다. 그럴 리가 있나.. 그런데 어째서 세존께서 제자들에게 변하는 게 괴로움이라 물으니 제자들은 당연하다는 듯 옛써~ 하고 답하는 것인가?. 그 안에는 힌두교식으로 무상 assasata을 이해하면서 예스라고 하는 자도 있겠으나, 오리지널 아니짜 뜻인 '무아의 무상' 을 기억하며 예스하는 자들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색온이 무아인 무상임을 관하고 있다면.. 주체가 없다는 뜻인데.. 주체가 없으면 무엇이 있어 괴로워할까?. 무아인데.. 현재 과학은 몸과 생각을 선험적으로 지배하는 자아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실험을 아주 많이 했다. 그들이 그런 실험을 한 이유는 선험적 자아가 있다고 믿고 있기에 그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려고 했는데.. 결과는 반대로 자아가 없다는 것으로 증명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양자 역학이 밝힌 5온인 몸과 생각의 주인인 자아에 대한 자각은 5온의 행이 있은 후 0.0005초 후에 인식된다는 것을 밝혔다고 한다. 물론 그 시간은 찰나지간으로 무시해도 충분한 시간으로 의식과 나는 동시에 생긴다고 할 만큼이다. 그러나 매우 작은 시차지만 안과 색등 2법6쌍의 행이 먼저 일어나고 이어서 그것을 의식하는 나가 생긴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런즉 몸이 아프다는 감촉이 느껴지면 '나는 아프다' 하는 감정이 생긴다. 그리곤 '무엇이 나를 아프게 했구나' 하고 안다. 이 사건은 찰나에 일어나므로.. 무엇이 나를 아프게 해서 나는 그 통증을 느꼈다라고 하여 마치 존재하는 나를 무엇이 아프게 한 것으로 이해한다. 다시 반복하지만.. 순서는 통증이 생기면 이어서 아픔을 느끼고.. 아픔을 느끼는 자를 나라고 하는 자각이 일어난다. 몸 자체도 통증을 느끼지만, 진짜 통증은 몸의 주인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자아가 심하게 느낀다. 같은 세기의 통증이라도 사람마다 다르게 강도를 느끼는 것은 몸의 감도가 다른 이유도 있지만 더 핵심은 자아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것은 같은 세기의 펀치를 맞아도.. 자기 애가 때린 것과 전혀 모르는 남이 때린 것의 신체적 통증은 같겠지만 실제로 본인이 느끼는 통증 차이는 아주 크게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세존께서 제자들에게.. 몸의 무상을 관하라는 것은 아니짜인 무상 곧 몸의 생주이멸을 보며 그것의 주인인 자아가 없음도 보아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본래 무아이지만 사람들은 자아가 있다고 여기고 있기에.. 인생무상에 대해 그 자아가 고통스러워한다. 그러나 부처님 제자라면 달라야만 한다. 신체의 고통을 감당하는 자아는 어디에도 없음을 관찰해야만 한다. 하여 그런 자아가 없음을 보아야만 하니.. 그것을 <잡. 33경>에서는 "그런데 많이 아는 거룩한 제자가 무상과 고를 보며 과연 '이것은 나다. 나와 다르다. 나와 나 아닌 것이 함께 있는 것이다'라고 보겠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위 경의 뜻은.. 색온인 몸을 관찰하며.. 단멸론자들이 하듯이 '몸은 나다', 또는 힌두교에서 하듯이 '몸은 나와 다르다', 또는 자이나교에서 주장하듯 '몸은 나와 나 아닌 것이 함께 있는 것이다'라고 하겠느냐는 질문에.. "아닙니다"라고 답하고 있다. 이 글 결론을 말하면 <잡아함경>을 수집정리한 그 당시 상좌와 논사들은.. 제자들에게 시시한 것처럼 보이는 '무상'을 화두처럼 <잡아함경> 첫 장에 자리시켜.. 21세기 불자들이 12연기나 4성제, 4념처, 중도.. 는 모르더라도.. 내가 무상을 느끼는 아삿사따 무상에서 벗어나 나 없음을 보며 아니짜인 무상을 이해하는 불자가 되기를 바란 것이 첫번째 목적이 아니겠는냐 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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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생활속불교에서 삶의 지혜를 배웁니다 나무관세음보살 _()()()_
귀의불양족존
귀의법이욕존
귀의승중중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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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하신 가르침에 귀의 합니다
거룩하신 스님들께 귀의 합니다
어서오세요
환영합니다.
원공법계 제 중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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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가워요
거룩하신 삼보님께 귀의 합니다
일체 중생의행복을 발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