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萬里長城에서 창해(滄海)를 바라보니 물은 동류(東流)한다.[3편]
胡人 漫散이 동(東) 混同江에도 있고 서(西) 萬里長城에도 있다
2023년 09월 28일
○ “1편과 2편”에서 “호인(胡人)과 만리장성(萬里長城)”에 대해서 여러 각도(角度)에서 조명(照明)을 해보았는데, “3편”에서도 마찬가지로 “만리장성(萬里長城)”에 대한 여러 기록(記錄)을 살펴보기로 하자.
“만리장성(萬里長城)은 진(秦)의 것”이 아닌 “조선(朝鮮)의 만리장성(萬里長城)”이어야 하기 때문이며, 특히 “만리장성(萬里長城)의 남(南)쪽 땅이 조선(朝鮮)의 요충지(要衝地) 땅이었기 때문이다” 이게 핵심(核心)이다.
실제(實際) 그동안에 우리가 알고 있었던 만리장성(萬里長城)과는 그 실체(實體)가 전혀 다른 기록(記錄)들이 많다. 독자(讀者)분들이 알고 있었던 사실(事實)도 있을 것이고, 처음 접(接)해보는 기록(記錄)들도 있을 것이다.
중요(重要)한 것은 “만리장성(萬里長城)의 실체(實體)”를 찾아, “조선(朝鮮)의 것”임을 고증(考證), 증명(證明)하는 일이다. 이러한 것을 “3편과 4편”에서 다룰 예정(豫定)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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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新增東國輿地勝覽 제53권 / 평안도(平安道) 의주목(義州牧)
《장성(長城) : 고려 덕종 2년에 평장사(平章事) 유소에게 명하여 북쪽 변경의 관방(關防)을 창설하였는데, 주의 서쪽 바닷가에 있는 옛 국내성의 경계로 압록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곳으로부터 시작하여 동쪽으로 위원(威遠)ㆍ흥화(興化)ㆍ정주(靜州)ㆍ영해(寧海)ㆍ영덕(寧德)ㆍ영삭(寧朔)ㆍ운주(雲州)ㆍ안수(安水)ㆍ청색(淸塞)ㆍ평로(平虜)ㆍ영원(寧遠)ㆍ정융(定戎)ㆍ맹주(孟州)ㆍ삭주(朔州) 등 14성에 걸치고, 요덕(耀德)ㆍ정변(靜邊)ㆍ화주(和州) 등 3성에 다달아 동쪽으로 바다에 가까이 붙었다. 연무(延袤 연은 동서, 무는 남북, 즉 넓이, 넓음, 길게 뻗음의 뜻) 1천여 리를 돌로 성을 쌓았는데, 높이와 두께가 25척씩이며, 속칭 만리장성(萬里長城)이라 한다. 주의 동쪽 옥강리(玉江里)의 북쪽에 있는 것은 길이가 3백 2보(步)이고, 구룡연의 북쪽에 있는 것은 길이가 4백 11보이다.》
➨ 조선(朝鮮)의 만리장성(萬里長城)은, 「높이(高)가 25척(尺), 넓이(厚)가 25척(尺)이었다.」라는 것인데, 오늘날의 수치(數値)로 보면 : 1척(尺)은 31cm【32.21cm∼31.22cm∼30.303cm로 변천(變遷)되었다】로 보면 : 〈높이(高) : 7.75m, 두께 : 7.75m〉로 진짜 옛 ‘성(城)다운 성(城)’이었음을 알 수 있다.
➊ 높이(高) 7.75m / 넓이(두께: 厚) 7.75m
➋ “세 겹의 해자(垓字)”에 둘러싸인 성(城) … …이 정도(程度) 크기의 성(城)이라면 본래(本來)의 ‘성(城)다운 성(城)’이랄 수 있는 것이다.
이 정도(程度)의 높이(高)와 폭(幅)을 감안(勘案)한다면 : 기마(騎馬)가 자유롭게 진입(進入), 통(通)할 수 있다. 이게 진짜 성(城)다운 성(城)이랄 수 있다. 오늘날 한반도(韓半島) 땅의 이곳저곳의 성(城), 산성(山城)을 답사(踏査)해 보면 : 현존(現存)하는 성(城)들은 아이들 ‘성(城) 놀이용’으로밖에 사용(使用)할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大部分)이다.
심지어는 ‘모’ 지역(地域)의 ‘산성(山城)’이라고 홍보(弘報)하는 곳을 가보면 : 높이가 1-1.5m 정도의 돌을 한두 겹으로 쌓아 올려 발로 차도 넘어질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게 보병(步兵)과 기마(騎馬)들을 수비(守備)하는 성(城)이라고 한다면 조선왕조(朝鮮王朝)는 존재(存在)하지 않았다는 말과 같다.
이렇게 위에서 설명(說明)한 “성(城)다운 성(城)은 한반도(韓半島)에 존재(存在)하지 않는다”라는 의미(意味)는, “고려(高麗)나 조선(朝鮮)은, 한반도(韓半島) 땅에 없었다.”라는 뜻이다. 곧 “만리장성(萬里長城)”은 “조선(朝鮮)의 것이었다‘는 뜻과 같다.
(12) 심전고(心田稿) 제2권 / 유관잡록(留館雜錄) 유책록(留柵錄)
《及秦幷呑六國。使蒙恬築長城。起臨洮。至遼東。延袤萬里。是所謂萬里長城也。: 진(秦)나라가 6국을 점령한 뒤 몽염(蒙恬)으로 하여금 장성을 쌓게 하였는데, 임조(臨洮)로부터 요동(遼東)까지 만 리에 뻗쳤으니 이것이 이른바 만리장성이다. 蒙恬之築城也。因地用制險塞。塹山塡谷萬餘里云。未知包燕,趙故城而築之否也。: 몽염(蒙恬)이 성을 쌓을 때 지형에 따라 험새(險塞)를 제압하여 산을 깎고 골짜기를 메우기를 만여 리나 하였다 하는데 연(燕), 조(趙)의 옛 성을 포함하여 쌓았는지는 알 수 없다. 自角山至渤海數十里。卽皇明中山王徐達之所築。而東人一入山海關。輒曰。吾見萬里長城。非也。: 각산(角山)에서 발해(渤海)에 이르는 수십(數十)리는 명(明)의 중산왕(中山王) 서달(徐達)이 쌓은 것인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한번 산해관(山海關)에 들어가면 문득, “나는 만리장성(萬里長城)을 보았다”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잘못이다.》라고 하였다.
➨ 즉(卽) “오늘날의 하북성(河北省) 산해관(山海關 : 秦皇島)은, 옛 진(秦)의 장성(長城)이 아닌 명(明)나라 때 쌓은 것이다”라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說明)에서, “명(明)이 없었다면, 서남아세아(西南亞細亞) 또는 번국(蕃國)이었다”라면 : 오늘날의 산해관(山海關)과 주변(周邊) 성(城)을 쌓은 것은 “조선(朝鮮)”이 되는 것이다.
(13) 燕途紀行, 中, 日錄 / 병신년 [순치(順治) 13년, 1656, 효종 7)] 9월 3일(무신)
《豆乙非在瀋西百里外。遼河北岸。亦是淸人與明師對壘處。: 두을비(豆乙非)는 심양 서쪽 백 리 밖 요하(遼河) 북쪽 언덕에 있으니, 역시 청나라 사람이 명(明) 군사와 대진(對陣)했던 곳이다. ➊ 山海關頭萬里長城外大漠中。又有二條長城舊墟。五里置一墩。是分限華夷界。: 산해관(山海關) 머리 만리장성(萬里長城) 밖에 있는 큰 사막(沙漠) 가운데 또 두 줄기 장성(長城)의 옛터가 있고, 5리마다 돈대(墩臺) 하나씩을 두었으니, 이는 중화(中華)와 이적(夷狄)의 경계를 나눈 것이다. 一條自建州界起。從淸河撫順等堡。歷開元鐵嶺等衛。由遼河南抵于三河堡。: 한 줄기는 건주(建州)의 경계로부터 시작하여 청하보(淸河堡)ㆍ무순보(撫順堡) 등지로 해서 개원위(開元衛)ㆍ철령위(鐵嶺衛) 등을 지나 요하(遼河)를 거쳐 남쪽으로 삼하보(三河堡)에 이르렀다. ➋ 一條自陝西界起。從太原大洞等府。歷大漠逶迤醫巫閭後。過林寧鎭遠鎭寧等堡。抵高平驛。: 한 가닥은 섬서(陝西) 경계로부터 시작하여 태원부(太原府)ㆍ대동부(大洞府) 등지로 해서 큰 사막(沙漠)을 거쳐 의무려(醫巫閭) 뒤로 꾸불거리다가 임녕보(林寧堡)ㆍ진원보(鎭遠堡)ㆍ진녕보(鎭寧堡) 등을 지나 고평역(高平驛)에 이르렀다. 極目只有其基。而林寧近處則草莽間。間有粉堞。: 눈에 보이는 것이 오직 그 터뿐이요, 임녕(林寧) 근처에는 풀숲 사이에 분첩(粉堞)이 간간이 있었다.》라고 하였는데.
➊〈山海關頭萬里長城外大漠中.又有二條長城舊墟.五里置一墩.是分限華夷界 : 산해관(山海關) 머리 만리장성(萬里長城) 밖에 있는 큰 사막(沙漠) 가운데 또 두 줄기 장성(長城)의 옛터가 있고, 5리마다 돈대(墩臺) 하나씩을 두었으니, 이는 중화(中華)와 이적(夷狄)의 경계를 나눈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산해관(山海關)=진황도(秦皇島)‘의 동서북(東西北) 어느 땅에도 사막지대(沙漠地帶)는 없다. 다만 ’대막(大漠)‘이라고 표현하는 ’큰 사막지대(沙漠地帶)‘는 ’산해관(山海關)=진황도(秦皇島)‘에서 “서(西)”쪽으로 3 천리(千里) 이상(以上) 떨어져 있다. 때문에, 위의 기록(記錄)대로 “대막(大漠)의 한 가운데(中)”라면 5 천리(千里) 이상(以上) 서(西)쪽으로 이동(移動)되어야 마땅한 것이고, 이곳에서 5리마다 돈대(墩臺)를 설치했는데, 이것이 중화(中華)와 이적(夷狄)의 경계(境界)를 나눴다고 하면 : 중화(中華)는 서역(西域) 땅에 있었다는 것이고, 그 동(東)쪽에는 조선(朝鮮)이 있었다는 말과 같다.
➨ 〈一條自陝西界起.從太原大洞等府.歷大漠逶迤醫巫閭後 : 한 가닥은 섬서(陝西) 경계로부터 시작하여 태원부(太原府)ㆍ대동부(大洞府) 등지로 해서 큰 사막(沙漠)을 거쳐 의무려(醫巫閭) 뒤로 꾸불거리다가〉라고 하였는데,
위의 기록(記錄)은 오늘날의 지형지세(地形地勢)를 거꾸로, 정반대(正反對)로 설명(說明)하고 있다. 즉 한반도(韓半島) 북방지대(北方地帶)에서는 존재(存在)할 수 없는, 불가능(不可能)한 지형지세(地形地勢)다.
중요(重要)한 것은 지형지세(地形地勢)는 임의(任意)로 바꿀 수도, 이동(移動)시킬 수도 없다는 점이다. 즉(卽),
“사막지대(沙漠地帶) 또는 대막(大漠 : 대사막]”은, 영하성(寧夏省)의 황하(黃河) 서(西)쪽 즉(卽) 하란산맥(賀蘭山脈)의 서(西)쪽 지대(地帶)인 하서(河西) 땅에 있다. 따라서 태원부(太原府)니, 대동부(大洞府)니, 의무려산(醫巫閭山)이니 하는 곳은, 사막지대(沙漠地帶)와는 전혀 관계없는 “초원지대(草原地帶)와 산악지대(山岳地帶)”로 형성(形成)되어 있는 곳이다.
➨ ’의무려산(醫巫閭山)‘은, 오늘날의 신강성(新疆省) 땅에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은, 이 산(山)의 뒤[北]에는, “달단(韃靼)[韃子=㺚子)]”이 있었다고 했기 때문이니, 『태원(太原), 대동(大同), 의무려산(醫巫閭山) 등의 지명(地名)과 산 이름은 일만(一萬) 리 서(西)쪽 땅에서 차용(借用)해 온 것이다』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즉(卽) “신강성(新疆省)의 의무려산(醫巫閭山) 서(西)쪽에 태원(太原)이 있고, 그 서(西)쪽에 대동(大同)이 있었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또한 “의무려산(醫巫閭山) 뒤【북(北)쪽】에 달단(韃靼)이 있다”라는 말은, “의무려산(醫巫閭山)은 곧 천산산맥(天山山脈)이다.”라는 말과 같다.
(14)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別集 17권 / 변어전고(邊圉典故) 폐지된 산성
《장성(長城) : 고려 덕종(德宗)이 평장사(平章事) 유소(柳韶)에게 명하여 처음으로 북경 관방(北京關防)을 설치했는데, 주의 서쪽 바닷가 옛 국내성(國內城) 경계에서 시작하여 동쪽으로 위원(威遠)ㆍ홍화(興化)ㆍ정주(靜州)ㆍ영해(寧海)ㆍ영덕(寧德)ㆍ영삭(寧朔)ㆍ운주(雲州)ㆍ안수(安水)ㆍ청색(淸塞)ㆍ평로(平盧)ㆍ영원(寧遠)ㆍ정융(定戎)ㆍ맹주(孟州)ㆍ삭주(朔州) 등 14개에 걸쳐 있고 요덕(耀德)ㆍ정변(靜邊)ㆍ화주(和州) 등 3성에 이르러 동으로 바다에 다달았으니, 그 길이가 1천여 리이며, 돌로 성을 쌓았다. 세상에서 만리장성(萬里長城)이라 부른다.》고 하였다.
➨ 이 장성(長城)이 곧 “만리장성(萬里長城)”이며, 이 장성(長城)의 규모(規模)가 『높이(高)가 7.75m요, 두께(厚)가 7.75m였고, 해자(垓字)에 둘러싸여 있었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규모(規模)와 해자(垓字)에 둘러싸인 만리장성(萬里長城)은 한반도(韓半島) 땅에 있을 수 없다. 축성(築城)한 자(者)가 없는데, 어떻게 만리장성(萬里長城)이 있을 수 있겠나?
(15) 연원직지(燕轅直指) 6권 留館別錄 / 19성(省)의 도리(道里)와 재부(財賦)
《直隷在保定府.如我國京畿.東西一千二百二十八里.南北一千六百二十八里.東界盛京.西界山海關.南界河.北界邊墻 : 직례(直隷) 보정부(保定府)에 있는데 우리나라의 경기(京畿)와 같다. 동서(東西) 1228리, 남북(南北) 1628리며, 동계(東界)는 성경(盛京), 서계(西界)는 산해관이며, 남계(南界)는 황하(黃河), 북계는 변장(邊墻)이다. 》라고 하였다. 그러나,
➨〈동계(東界)는 성경(盛京) 즉 심양(瀋陽)이고, 서계(西界)는 산해관(山海關), 남계(南界)는 하(河) 즉 황하(黃河)요, 북계(北界)는 변장(邊墻)이 있다〉라고 한 것은, 오늘날의 대륙(大陸) 하서(河西) 땅에서나 가능한 지세(地勢)다.
이러한 지형지세(地形地勢)를 ’연행사신(燕行使臣)들이 기록(記錄)했다‘는 것으로 보아 진실(眞實)을 담고 있을 확률(確率)이 높다. 곧 ‘연경(燕京)=북경(北京)’은 예부터 전해오는 ‘총령(葱嶺)=곤륜산(崑崙山)’으로부터 발원(發源)한다는 “하(河)의 북방지대(北方地帶)에 있었다”라는 것을 증명(證明)해 주는 기록(記錄)이다.
➨ “남(南)쪽에 하(河)가 있다”라는 말은 : 최소한(最小限) 『오늘날의 섬서성(陝西省) 북방지대(北方地帶)로부터 서역(西域)의 총령(葱嶺)에 이르는 곳이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직례(直隷)와 보정부(保定府)’는, 동방(東方)이 아닌 ‘서방(西方) 땅의 직례(直隷)와 보정부(保定府)’를 말하는 것이 된다.
(16) 월사집(月沙集) 제17권 / 권응록 중(倦應錄中)【오늘날 상국(上國)을 유람한 사람은 모두 망해정(望海亭)을 가장 빼어난 경치로 치는데, 산해문(山海門)의 만리장성 가장 꼭대기에 있는 각산사(角山寺)가 남(南)쪽으로는 중원(中原)을 굽어보고 북쪽으로는 오랑캐 땅을 바라보는 곳이라 참으로 천하의 장관임을 유독 알지 못한다. 성절사(聖節使)가 떠날 즈음에 전별의 말을 해 달라고 하기에 그곳의 경치를 써서 준다.】
➨〈산해문(山海門)의 만리장성 가장 꼭대기에 있는 각산사(角山寺)가 남(南)쪽으로는 중원(中原)을 굽어보고 북쪽으로는 오랑캐 땅을 바라보는 곳이라 참으로 천하의 장관임을 유독 알지 못한다〉라고 하였는데,
산해문(山海門)은, 산해관(山海關)의 관문(關門)일 것이니, 이곳의 남(南)쪽은 말 그대로 망망대해(茫茫大海)가 있을 뿐이다. 위에서 설명(說明)하는 땅은 오늘날의 하북성(河北省) 땅 이야기가 아니다.
“남(南)쪽으로 중원(中原) 땅을 굽어볼 수 있는 곳”은, 서역(西域)의 총령(葱嶺)으로부터 신강성(新疆省), 감숙성(甘肅省), 영하성(寧夏省)을 흐르는 황하(黃河)밖에 없다. 이곳 황하(黃河)의 남(南)쪽 땅이 바로 “중원(中原)” 땅이기 때문이다
(17) 잠곡유고(潛谷遺稿) 서 / 잠곡유고 서(潛谷遺稿序) [윤신지(尹新之)]
《長城碣石水陸萬里。恣伯厚取以資其壯遊。此其所以遭亂世而能爲治世之音者歟。: 만리장성(萬里長城)과 갈석산(碣石山)은 수륙(水陸)으로 만리나 떨어진 곳에 있는데도 백후는 그것을 마음껏 취해서 장쾌한 유람거리로 삼았으니, 이는 어지러운 세상을 만나서도 능히 다스려진 세상의 음을 만든 것이다.》라고 하였다.
(18) 靑莊館全書 아정유고(雅亭遺稿) / 아정유고 서(雅亭遺稿序)[윤행임(尹行恁)]
《일찍이 스스로 말하기를, “소년 시절에, 서쪽으로 중국의 계주(薊州)에 들어가 만리장성(萬里長城)에 서서 창해(滄海)가 동(東)으로 흘러가는 것을 보았으며, 요동(遼東) 들에 수레를 멈추어 오랑캐와의 싸움터를 물었다.》라고 하였다.
※ [출처 : 고전번역원 DB 아정유고 서(雅亭遺稿序)[윤행임(尹行恁)] :『倚 長 城, 見 滄 海 東 流 : 장성(長城)에 기대어 서서 창해(滄海)를 바라보니 동쪽으로 흐른다(東流)』라고 하였다. 바닷물이 어떻게 동(東)쪽으로 흐를 수가 있겠는가! 곧 ‘창해(滄海)’는 바다가 아닌 넓고 넓은 당시(當時)의 하(河)를 칭(稱)하는 말이다.
➨➨『倚 長 城, 見 滄 東 流 : 만리장성(萬里長城)에 기대어 서서 창해(滄海) 곧 황하(黃河)를 바라보니 물은 동(東)쪽으로 흘러간다. 또는 만리장성(萬里長城)에 기대어 동(東)쪽으로 흘러가는 창해(滄海)를 바라본다』라는 뜻이다.
곧 만리장성(萬里長城)은, 곧 하새(河塞)라고 하였으니 옳은 말이다. 옛 기록(記錄)에서 “창해(滄海)”에 대한 해석(解釋)은, 재고(再考)되어야 마땅한 것이다.
사기(史記), 전한서(前漢書) 등에서는 발해(渤海)가 아닌 ‘발해(勃海)’라고 하였으나, 『‘자치통감(資治通鑑) 서한기(西漢紀)’는, ‘발해(勃海)’라는 글자 자체(自體)가 없다.』
곧 〈한(漢)나라 병사(兵士)가 조선(朝鮮) 영토에 들어가니, 조선왕(朝鮮王) 우거(右渠)가 발병(發兵)하여 험한 곳에서 막았다. 【漢兵入朝鮮境, 朝鮮王右渠發兵距險】〉고 하였다.
(19) 갑인연행별록(甲寅燕行別錄) 권1 / 1734년(영조10, 갑인) 28일(신미) 맑음
《산해관(山海關)은 황명(皇明) 때 서달(徐達)이 창건한 것이다. 성벽을 따라 관문을 설치하여 산에 기대고 바다로 막혀 있으니 참으로 신주(神州)의 요새이다. 그러나 지금은 성가퀴에 무너진 곳이 많은데도 전혀 수리를 하지 않는다. 오삼계(吳三桂)가 청나라 군사를 끌어들였을 때 허물어졌던 곳을 지금까지도 아무렇지 않게 무너진 채 방치해 두었다. 그런데 유독 성 위의 표루(標樓)만은 평소 사람들이 노니는 곳에 불과한데도 여러 차례 중수(重修)하여 서까래와 처마가 새것 같았다. 저들이 이것은 하고 저것은 하지 않는데 여기에는 의도하는 바가 있는 것일까?
다시 『남문 밖으로 돌아와서 성을 돌아 서쪽으로 가서 심하(深河)』와 홍화점(紅花店)을 지나 범가점(范家店)에 도착해서 아침밥을 먹었다. 『저녁에 유관(楡關)에 도착하였다. 듣자하니 몽염(蒙恬)이 만리장성을 쌓을 때 느릅나무를 심어 관문을 만들었기 때문에 유관이라고 이름 하였다는데 아직까지도 느릅나무가 많이 있다.』 대개 대명(大明) 이전에는 관방(關防 국경)이 유관에서 그쳤다고 한다. 여기부터는 이수(里數)를 헤아려 일정한 거리마다 돈대를 설치하고, 높은 곳에서 망을 보고 창(鎗 총포)을 꽂아 대비함으로써 도적들을 막고 여행자를 보호한다.》라고 하였다.
➨ 산해관(山海關)에 있는 장성(長城)은 진(秦)의 장성문(長城門)이 아니다. 또한 『몽념(蒙恬)이 쌓았다는 유관(楡關)은 산해관(山海關)의 서(西)쪽의 심하(深河)를 건너 그 서(西)쪽에 “느릅나무(楡)로 만든 요새(要塞)인 유관(楡關)이 있었다.”』라는 이야기다.
오늘날의 산해관(山海關)을 옛 유관(楡關)이라고 한다는 역사해설(歷史解說)은 뭔가? 즉(卽), 위에서 설명(說明)하는 것은,
➊ 『산해관(山海關)은 명(明)의 서달(徐達)이 만든 것이다』라는 것이고,
➋ 『유관(楡關)은 진(秦) 몽념(蒙恬)이 느릅나무(楡)로 만든 요새(要塞)인데 산해관(山海關)의 서(西)쪽에 있는 심하(深河)의 서(西)쪽에 있다』라는 것이다.
➌ 그렇다면 “천하제일성(天下第一城)”이라는 말도 서(西)쪽 땅에 있었던 것을 이동(移動)시켜 조작(造作)하여 놓았다는 것이다.
➍ 〈또 김응하(金應河) 장군(將軍)이 절사(節死)했다는 ‘심하(深河)’는 산해관(山海關) 서(西)쪽에 있었다는 것으로 보면, 오늘날의 하북성(河北省) 땅도 요동지방(遼東地方)이 되어야 한다. 올바른 해설(解說)일까?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이 벌어졌었던 곳 “요동 요서(遼東遼西)와 산해관(山海關), 유관(楡關)”등은 동방(東方) 땅에는 존재(存在)할 수 없다.
(20) 강한집(江漢集) 제1권 / 부(賦) 만리장성을 애도하는 부〔弔長城賦〕
《遵華表而西邁兮,望長城而弔之,睥睨聯亘於萬里兮, 曾不禦夫四夷 : 화표를 따라 서쪽으로 가며, 만리장성을 바라보고 애도하노라. 성가퀴는 만리(萬里)에 이어 뻗어있건만, 저 오랑캐들을 방어하진 못했도다. 何秦皇之狂妄兮,命蒙恬而暴師,自臨洮而列雉兮,橫大幕以委蛇 : 어찌하여 진황(秦皇)은 망령이 나서, 몽염을 시켜 군대를 혹사시켰던가. 임조에서부터 줄지어 선 담이, 대막(大漠)을 가로질러 구불구불 이어졌도다. 塹其高而湮其深兮,因地形之嶮巇,亭障通於祁連兮, 環瀚海而爲池 : 높은 곳은 깎고 깊은 곳은 메꾸면서, 지형의 험준함을 이용하였다. 정장을 세워 기련산으로 통하게 했고, 한해를 둘러 성지(城池)를 만들었도다. 據北假而達于雲陽兮,壯九服之藩籬,勞赤子之三十萬兮,絶地脉而鬼神咨 : 북가에서 운양까지, 구복의 울타리가 장엄도 하다만, 삼십만 백성들을 고생시키고, 지맥을 끊어버려 귀신이 탄식했다. 중략(中略)》라고 하였으니,
➊ 〈遵華表而西邁兮,望長城而弔之,睥睨聯亘於萬里兮,曾不禦夫四夷 : 화표를 따라 서쪽으로 가며, 만리장성을 바라보고 애도하노라. 성가퀴는 만리(萬里)에 이어 뻗어있건만, 저 오랑캐들을 방어하진 못했도다.〉라고 하였는데,
화표(華表)는 요동(遼東)에 있으나, 만리장성(萬里長城)은 그곳으로부터 수천(數千)리 서(西)쪽 땅에 있으니 만리장성(萬里長城)을 바라보고 애도(哀悼)할 수 없고, 필요(必要)도 없다.
➨ 「‘저자(著者)’가 진실(眞實)로 화표(華表)를 따라 서(西)쪽으로 가면서 만리장성(萬里長城)을 바라보며 애도(哀悼)했다고 한다면」 : 그 땅은 오늘의 요녕성(遼寧省)과 하북성(河北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서(西)쪽으로 7-9 천리(千里) 먼 곳 땅을 말하는 것이다.
➋ 〈自臨洮而列雉兮,橫大幕以委蛇 : 임조(臨洮)에서부터 줄지어 선 담이, 대막(大漠)을 가로질러 구불구불 이어졌도다〉라고 하였는데,
오늘날의 “임조(臨洮)”는 대(大) 사막지대(沙漠地帶)의 동(東)쪽에 있다. 따라서 원문(原文)의 설명(說明)대로라면 : “임조(臨洮)”는 대(大) 사막지대(沙漠地帶)의 서(西)쪽 땅 즉(卽) 당(唐) 때의 “북정도호부(北庭都護府) 서(西)쪽 땅에 있어야 한다”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대(大) 사막지대(沙漠地帶)’는 북정도호부(北庭都護府) 경내(境內)로부터 시작(始作)되며, 하서회랑(河西回廊) 북방지대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즉(卽), 진(秦) 장성(長城)이 시작되었다는 “임조(臨洮)”는 “대막(大漠)”의 서(西)쪽 땅에 있어야 올바른 것이고, 그 지형지세(地形地勢)를 설명(說明)할 수 있다.
➌ 〈亭障通於祁連兮, 環瀚海而爲池 : 정장(障)을 세워 기련(祁連)으로 통하게 했고, 한해(瀚海)를 둘러 성지(城池)를 만들었도다.〉라고 하였으니,
‘기련(祁連)’이란 「하늘 곧 ‘天’」을 말하는 것이니, “천산(天山) 곧 한등격리봉(汗騰格里峰 : 한텡그리산)”을 뜻하고, 「한해(瀚海)는 북정도호부(北庭都護府) 경내(境內)에 있다」라고 하였으니,
‘진서(晉書) 재기(載記)’에서 말하는 『진(秦)은 임조(臨洮)의 험한 곳에 해자를 만들고, 천산(天山)에 올라 지맥(地脈)을 끊고, 현토(玄菟)를 감싸안고 하(河)에 이르렀다【‘晉書 載記 序頭’에서 이르기를 : 然則燕築造陽之郊,秦塹臨洮之險,登天山,絕地脈,苞玄菟,款黃河,所以防夷狄之亂中華,其備豫如此】』는 말과 똑같은 내용(內容)으로 이를 고증(考證)하는 기록(記錄)이다.
또한 몽념전(蒙恬傳)에 의하면 : 《於 是 渡 河, 據 陽 山, 逶 蛇 而 北 : 여기에서 이렇게 하(河)를 건너, 양산(陽山)에 기대어, 구불구불 뱀처럼 북(北)쪽으로 이어졌다.》라고 하였다.
➍ 이러한 기록(記錄)에 따르면 : 『“임조(臨洮)는 북정도호부(北庭都護府)” 서(西)쪽 땅의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땅에 있었다』라는 결론(決論)에 다다르며, 『이때의 진(秦)나라 역시(亦是) 중원(中原) 요충지(要衝地)가 아닌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와 신강성(新疆省) 서(西)쪽 땅에 있었다』라는 결론(決論)에 다다른다.
이때 진(秦)의 동(東)쪽 “신강(新疆)으로부터 중원(中原) 땅에는, 조선(朝鮮), 부여(夫餘), 맥(貊), 구려(句驪)와 삼한(三韓)이 자리 잡고 있었다”라는 것이다.
➎ 즉(卽) 당시의 ‘시황(始皇)과 부소(扶蘇)와 몽념(蒙恬)과 30만 대군(大軍)’이 쌓은 장성(長城)은 : 〈북정도호부(北庭都護府) 관외(管外) 서역(西域) 땅에 있었던 “임조(臨洮)”로부터 시작해 천산(天山) 높이 올라, 지맥(地脈)을 끊고 메워, 현토(玄菟)를 감싸고 하(河)에 다다르고, 북(北)쪽으로 한해(瀚海)에 다다라 성지(城池)를 만들고, 양산(陽山)에 기대어 구불구불 뱀처럼 북(北)쪽으로 이어졌다〉라고 한 것이다.
또한 북정도호부(北庭都護府) 관내(管內)에 “흑수(黑水)”가 있어 연안(沿岸)에 “흑수수착(黑水水捉)”도 있었다고 하였다. 이러한 설명(說明)은 아래의 파라문(婆羅門) 6수의 내용(內容)과 정확(正確)하게 일치(一致)한다. 즉(卽),
➏ 또한 파라문(婆羅門) 六首[耶律鑄 元] 가운데, 4.5.6 수(首)를 보면 :
4. 《黄草泊圍青草甸,白楊河繞緑楊堤. 依然名是叅天道,誰使唯聞戰馬嘶. 【註釋 : 北庭都䕶境内有白楊及黄草泊唐新史同國朝所設驛傳東臨三韓西抵濛汜黄草泊白楊河皆正驛路也】》: 〈東臨三韓西抵濛汜黄草泊白楊河 : 북정도호(北庭都護) 경내(境內)를 벗어나면 즉 경외(境外)는 “삼한(三韓)에 임한다”라는 뜻이다.
5. 《弓月山風長似箭,燭龍軍火亂如星. 秪除盡挽天河水,可洗兵塵戰地腥.【註釋 : 北庭都䕶府有瀚海軍本燭龍軍也.府境有弓月城弓月山是謂弓月道出兵路也.唐梁建方嘗為弓月道總管】》
6. 《黒水且誰為翠水,白山原自是氷山. 得非煙客乘龍火,為煽洪爐到世間. 【註釋 : 天山軍在西州交河郡夏絶無雨其熱甚于炎方唐舊史北庭都䕶府自永嶶至天寳管瀚海天山伊吾三軍天山一名白山以其四時氷雪不消因以名之唐新史北庭都䕶府境内有黒水及黒水守捉】》라고 하였으니,
조선사(朝鮮史) 또는 대륙사(大陸史)에서 놀라운 기록(記錄) 임에 틀림없다. 필자(筆者)가 그동안 주장(主張)했던 것과 단 한치도 틀리지 않는 내용(內容)으로 용기(勇氣)를 준다.
이때의 ‘한해(瀚海)’는 : ‘준갈이분지(準噶爾盆地)’를 말하는 것이고, 준갈이분지(準噶爾盆地) 안에는, 오륜고호(烏倫古湖), 마납사호(瑪納斯湖), 애비호(艾比湖) 등의 호수(湖水)와 액이제사하(額爾齊斯河), 포이진하(布爾津河), 오륜고하(烏倫古河), 규둔하(奎屯河)등의 하천(河川)이 흐르고 있어 “한해(瀚海)”로써의 충분한 가치(價値)를 하고 있던 곳이라고 보는 것이다.
당 잠삼(岑參)의 “한해(瀚海)”를 읊은 시(詩) 구절(句節)에 의하면 : 이때 한해(瀚海)는 ‘금산(金山)=아이태산(阿爾泰山)=별노합산(別盧哈山)=벨루하산(Belukha,Mt)’의 빙하(氷下)와 빙벽(氷壁)을 포함(包含)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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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芝峯集 4권, 詩 七言律詩 / 연경으로 가는 윤가회를 전송하며〔送尹可晦赴京〕
《聞君今着遠遊鞭, 秋色遙程氣槪前, 季札眼中周禮樂, 子長脚下漢山川 : 그대 지금 머나먼 여정에 오른다 하니, 먼 길 가는 기개 앞에 가을빛 펼쳐지리. 계찰의 안중에는 주나라의 예악이요. 자장의 발밑으론 한나라의 산천이라. 金臺草樹千年地, 玉塞風霜八月天, 悵望行塵西萬里, 別愁無限夕陽邊 : 천 년의 땅 금대엔 초목만 무성하고, 팔월이라 옥새(玉塞)엔 풍상(風霜)이 몰아치리. 서쪽 만 리 떠나는 길 서글피 바라보니, 석양가에 이별의 시름은 끝이 없구려》라고 하였는데,
➨ 〈玉塞風霜八月天 : 팔월이라 옥새(玉塞)엔 풍상(風霜)이 몰아치리〉하였으니, 돈황(燉煌) 서(西)쪽에 있는 옥문관(玉門關)을 가리키는 말이다. 위의 말대로라면 : 연경(燕京)으로 가는 여정(旅程)에 “옥문관(玉門關)”을 통과(通過)해야 한다는 뜻이다.
주(注)에서는 ‘변방(邊方)’을 뜻한다고 하였지만, 그 많은 변새(邊塞) “ 중에서 ”옥관(玉關)“이겠는가?
(22)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총서(總序) / 태조가 동북면 도지휘사가 되어 임지로 떠나자, 이색이 시를 지어 전송하다
辛禑八年壬戌秋七月, 以太祖爲東北面都指揮使。 時女眞人胡拔都, 擄掠東北面人民而去, 以太祖世管其道軍務, 威信素著, 遣以慰撫之。 韓山君 李穡作詩送之曰 : 신우(辛禑) 8년(1382) 임술 가을 7월, 태조를 동북면 도지휘사(東北面都指揮使)로 삼았다. 이때 여진(女眞) 사람 호발도(胡拔都)가 동북면의 인민을 사로잡아 가니, 태조가 그 도(道)의 군무(軍務)를 대대로 관장하여 위신(威信)이 본디부터 나타난 이유로써, 보내어 그들을 위로하고 어루만져 주게 하였다. 한산군(韓山君) 이색(李穡)이 시(詩)를 지어 전송했는데, 그 시에,
“松軒膽氣蓋戎臣, 萬里長城屬一身。 奔走幾經多故日, 歸來同樂太平春。 如今大勢關宗社, 況是前鋒似鬼神。 聯袂兩朝情不淺, 只將詩律送行塵。: 송헌(松軒)의 담기(膽氣)가 무신(武臣)을 뒤덮으니, 만리장성(萬里長城)이 한 몸에 맡겨졌네. 분주하면서 몇 번이나 다사(多事)한 시기를 지냈던고. 돌아오면 함께 태평한 날을 즐길 것이네. 지금은 대세(大勢)가 종사(宗社)에 관계되는데, 하물며 이 선봉(先鋒)은 귀신 같음에랴. 양조(兩朝)에 같이 벼슬하매 정(情)이 얕지 않으니, 다만 시율(詩律)을 지어 가는 것을 전송한다.” 하였다.
(23) 태종 13년 계사(1413) 7월 19일(병신) / 최이ㆍ연사종ㆍ김승주ㆍ이종무ㆍ조비형ㆍ윤곤ㆍ마천목 등을 외방의 군 책임자로 보내다
"帝固無心於我矣。 若胡人漫散, 則東有混同江, 西有萬里長城, 故必南奔於我矣, 無備可乎?" : “황제가 진실로 우리에게 마음이 없다 하지만, 만약 호인(胡人)의 만산(漫散)이 동쪽으로 혼동강(混同江)에도 있고 서쪽으로 만리장성(萬里長城)에도 있는 까닭으로 반드시 남쪽으로 우리에게로 도망할 것인데 방비하지 않아도 좋겠습니까?”
➨ 이러한 이야기가 군주(君主)와 신하(臣下) 간에 문답(問答)이 이루어졌다면 : 조선왕조(朝鮮王朝)는 대륙(大陸)의 터줏대감 즉(卽) 주인공(主人公)이었다는 말과 같다.
(24) 세종 지리지 / 평안도
옛 장성[古長城] 【俗傳萬里長城, 自麟山郡西鎭兵串江始築, 歷義州南, 連延朔州、昌城、雲山、寧邊, 至于熙川東古孟州之境, 接于咸吉道 定平境。: 세속에서 전하기를, ‘만리장성(萬里長城)’이라 하는데, 인산군(麟山郡) 서쪽 진병곶강(鎭兵串江)으로부터 쌓기 시작하여 의주(義州) 남쪽을 지나서 삭주(朔州)ㆍ창성(昌城)ㆍ운산(雲山)ㆍ영변(寧邊)에 연하여 뻗치고, 희천(熙川) 동쪽의 옛 맹주(孟州) 지경에 이르며, 함길도 정평(定平) 지경에 닿았다.】
(25) 세종 지리지 / 함길도 함흥부
읍 석성(邑石城) 【둘레가 1천 5백 13보(步)이다. 안에 우물이 2, 샘이 11, 작은 못이 2가 있는데, 사철 마르지 아니한다. 위의 성(城)은 북쪽으로 옛 장성(長城)에 의지하였는데, 그 장성(長城)은 서쪽으로 대령(大嶺)을 넘으며, 동쪽으로 도련포(都連浦)에 접(接)한다. 속설에 전하기를, “만리장성(萬里長城)은 세 겹의 해자[隍池]로 둘러 있다.”고 한다. 예전에 수어(守禦)하던 요해처(要害處)이다.】
➨ 〈속설에 전하기를, “만리장성(萬里長城)은 세 겹의 해자[隍池]로 둘러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만리장성(萬里長城)의 유지(遺址)가 상존(尙存)하는 곳이 있는가? 하다못해 주춧돌 몇 개라도 있느냐? 묻고 싶은 심정이다.
이때의 성(城) 규모(規模)는 높이가 7.5m요, 두께 또한 7.5m나 되는 거대(巨大)한 축조물(築造物)이었다고 하였으니, 그 유지(遺址)는 분명(分明) 상존(尙存)하는 곳이다. 분명(分明)하게 말하건대 한반도(韓半島)와는 전혀 관계(關係)없는 대륙(大陸)의 요충지(要衝地) 땅에서의 사실(史實)이다.
(26) 당송팔대가문초 소식(3) [唐宋八大家文抄 蘇軾(3)] 05 儒者可與守成
《秦始皇燔詩書殺豪傑東城臨洮北築遼水民不得休息傳之二世宗廟蕪滅此以藥石養生也 : 秦始皇은 燔詩書하고 殺豪傑하며 東城臨洮하고 北築遼水하야 民不得休息하야 傳之二世에 宗廟蕪滅하니 此는 以藥石養生也라【秦 始皇帝는 詩經과 書經을 불태우고 호걸들을 죽였으며, 萬里長城을 쌓을 적에 동쪽으로는 臨洮에서부터 축성하고, 북쪽으로는 遼水에까지 축성하여 백성들이 휴식하지 못해서 帝位를 전한 지 2世 만에 宗廟가 황폐하여 멸망하였으니, 이것은 藥石을 가지고 養生을 한 것이다】》
➨ 《만리장성(萬里長城)을 쌓을 적에 동(東)쪽으로는 임조(臨洮)에서부터 축성하고, 북(北)쪽으로는 요수(遼水)에까지 축성하여》라고 하였으니,
〈진(秦)나라의 만리장성(萬里長城)은 우리가 알고 있는 만리장성(萬里長城)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내용(內容)대로라면 “동(東)쪽에 있는 임조(臨洮)로부터 시작(始作)해서 북(北)쪽으로 요수(遼水)까지 쌓았다”는 것이므로, 요수(遼水)는 임조(臨洮)의 북방지대(北方地帶)에 있었다는 이야기다.
요수(遼水)는 오늘날의 요수(遼水)가 아니었다는 것이고, 임조(臨洮) 또한 오늘날의 임조(臨洮)가 아니었다는 증거(證據)다.
위의 당송팔대가문초(唐宋八大家文抄) 중에서 위에서 인용(引用)한 원문(原文)은 ‘소식(蘇軾)’의 것이다. 그만큼 신뢰(信賴)할 수 있다는 뜻이다.
소식(蘇軾)[1037年 ~ 1101年] 8월 24일 : 송(宋)나라 때의 대문호(大文豪). 자(字)는 자첨(子瞻), 호(號)는 동파(東坡). 시호(諡號)는 문충(文忠). 아버지 소순(蘇洵), 동생 소철(蘇轍)과 더불어 삼소(三蘇)라 불리며, 3부자(父子)가 모두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에 속(屬)함. 철종(哲宗)에 중용(重用)되어 구법파(舊法派)의 중심적(中心的) 인물(人物)로 활약(活躍)하였고, 특(特)히 구양수(歐陽脩)와 비교(比較)되는 대문호(大文豪)로서 부(賦)를 비롯하여 시(詩)ㆍ사(詞)ㆍ고문(古文) 등(等)에 능(能)하였으며, 재질(才質)이 뛰어나 서화(書畫)로도 유명(有名)했음. 그의 문학(文學)은 송(宋)뿐만 아니라, 고려(高麗)에도 큰 영향(影響)을 끼쳤음[출처 : 네이버 한자사전]
【唐宋八大家 : 又稱唐宋古文八大家 : 是唐代韓愈,柳宗元和宋代歐陽修,蘇洵,蘇軾,蘇轍,曾鞏,王安石八位散文家的合稱】
➨ 일천(一千) 년 전(前)의 소식(蘇軾)이 2023년 우리에게 알려주는 내용(內容)이다. 이걸 누가 “아니다. 오류(誤謬)다”라고 논할 수 있을까?
〈당송팔대가문초(唐宋八大家文抄) 소식(蘇軾) 3, 儒者可與守成〉에서 설명(說明)하고 있는 내용(內容)은 : 위의 글 (20) 강한집(江漢集)에서 설명(說明)하고 있는 것과 대동소이(大同小異)한 것이다.
➨ 즉(卽) 「동(東)쪽에 있는 “임조(臨洮)”로부터 장성(長城)이 시작(始作)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옛 기록(記錄)을 뒤집을 만한 신뢰(信賴)할 수 있는 기록(記錄)이나 그것을 고증(考證)할 수 있는 신뢰(信賴)할만한 자료가 없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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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위(所謂) 21사(史)니 24사(史) 25사(史) 하는 사서(史書)라고 부르는 것들은 AD 1,900년 초(初), 그 혼란스러웠던 시기(時期)에 일괄적(一括的)으로 교정(校正), 개정(改訂), 증보(增補), 재편찬(再編纂) 과정(過程)을 거쳐 인쇄되어 시중으로 나온 것인데, 당시의 사정(事情)으로 보면 100% 이해불가(理解不可)하다고 말한다.
당시(當時)의 혼란(混亂)스러움은 말 그대로 단 한치의 앞도 볼 수 없는, 내일(來日)도 장담(壯談)은 할 수 없는, 어떤 사건(事件)이 터질지 모르는 극심(極甚)한 불안(不安)과 혼란(混亂)의 세월(歲月)에서 백성(百姓)들의 삶은 피폐(疲弊)해질 대로 피폐(疲弊)해져 하루하루를 겨우 연명(延命)하고 있을 때라고 전해진다.
이러한 시기(時期)에
➊ 중대(重大)하지도, 중요(重要)하지도 않은 신원사(新元史)를 새롭게 만들고 21사(史)니, 24사(史)니, 25사(史)니 하는 옛 기록(記錄)들을 엄청난 예산(豫算)과 인원(人員)을 동원(動員)하여 은밀(隱密)하게 작업(作業)하여 모조리 재편찬(再編纂)을 해버렸다는 점과
➋ 재편찬(再編纂) 과정(過程)을 거칠 때 참고(參考)로 했던 자료(資料)인 원전(原典) 사료(史料)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진 것이냐? 하는 의문(疑問)의, 의문(疑問)은 오늘날까지도 불가사의(不可思議)하고, 해괴(駭怪)한 일이며, 지금까지도 그 당시(當時)의 사정(事情)으로 볼 때 그 타당성(妥當性)이나 정당성(正當性)을 인정(認定)받을 수 없다고 말한다.
➌ 이것은 당시(當時)의 “일제(日帝)+서세(西勢)”들의 지원(支援)과 협력(協力)을 받은 손문(孫文)을 대표(代表)로 하는 서남세력(西南勢力)들에 의해 고의적(故意的)인 역사(歷史) 왜곡(歪曲) 조작(造作)이었으며,
중원(中原) 대륙(大陸)의 “조선(朝鮮)”을 지우고, 이는 곧 조선(朝鮮)을 제후국(諸侯國)으로 만들고 강역(疆域)을 반도(半島) 땅으로 고정(固定)시키기 위한 작업(作業)이었다는 것이다. 이때 갑자기 회자(膾炙)된 ‘한족(漢族) 중심(中心)의 화하(華夏)’란 말이 이를 증명(證明)하며, 이때부터 ‘한족(漢族)’이란 말은 거스릴 수 없는 정치적(政治的) 구호(口號)가 되어버렸다.
1만 년(萬年)이라는 장구(長久)한 세월(歲月) 동안「동구라파(東歐羅巴)로부터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와 중원대륙(中原大陸)을 통치(統治)했던 “대조선제국(大朝鮮帝國)”」은, 일개(一介) 제후(諸侯)로 전락(轉落)되고, 한반도(韓半島) 금수강산(錦繡江山) 무궁화(無窮花) 삼천리(三千里) 땅의 나락(奈落)으로 떨어져 버린 것이다.
예전의 사례(事例)를 보면 역사서(歷史書) 하나를 편찬(編纂)하는 데는 수많은 참고자료(參考資料)인 저본(底本)이 필요하며, 예산(豫算)과 인원(人員), 그 세월(歲月)은 수년(數年)에서 수십(數十) 년이 소모(消耗)되는 거대(巨大)한 작업(作業)이었다는 것을 고려(考慮)해보면 : 첨삭과정(添削科程)【뺄 것은 빼어 삭제(削除)해 버리고, 추가(追加)로 보충(補充)할 것은 삽입(揷入)하는 작업(作業)】을 거쳐 그대로 인쇄과정(印刷過程)을 거쳐 나온 것이다.
이런 작업(作業)에는 많은 인원(人員)이 필요(必要)도 없고, 저본(底本)만 있으면 얼마든지 가능(可能)한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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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은 원문(原文)을 비교(比較), 검토(檢討)를 해봤다. 결국(結局) 『만리장성(萬里長城) 이남(以南)』이라는 말은 『“대륙(大陸)의 서(西)쪽 일부(一部) 조선(朝鮮) 땅”을 말하는 것이고, 대륙(大陸) 땅은 조선왕조(朝鮮王朝)의 것이었다』라는 결론(決論)에 다다를 수밖에 없다.
➤〈호인(胡人) 만산(漫散)이 동(東) 혼동강(混同江)에도 있고, 서(西) 만리장성(萬里長城)에도 있다〉는 말은,
➊ 한반도(韓半島) 또는 그 북방지대(北方地帶)와는 전혀 관계(關係)가 없다.
➋ 그 무대(舞臺)는 서융(西戎) 곧 호인(胡人)들이 살고 있었던 ‘조선(朝鮮) 영토(領土) 서변(西邊)에서 일어났던 사건(事件)’이다.
즉(卽) 〈조선(朝鮮)의 서계(西界) 장성(長城) 북방(北方)에 있었던 호인(胡人) 만산(漫散)들이 마땅히 갈 곳이 없으니, 남(南)쪽으로 내려오면 조선(朝鮮) 서계(西界) 백성(百姓)들이 피해(被害)를 입게 된다〉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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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大韓民國)은, ‘에미애비’도 없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나라(國家)였을까?
대한민국(大韓民國)의 선대국가(先代國家)는 조선왕조(朝鮮王朝)로, 조선왕조(朝鮮王朝)는, 고종(高宗) 대(代)에 이르러 근대국가(近代國家)의 면모(面貌)를 갖추고자 대한제국(大韓帝國)으로 나라 이름(國名)이 바뀌었으나, 『군주(君主)와 백성(百姓)과 영토(領土)는 똑같은 나라(國家)였다. 다만 ‘조선(朝鮮)’이란 나라 이름이 “대한제국(大韓帝國)”으로 바뀌었을 뿐이고, ‘한민족(韓民族)=조선족(朝鮮族)’의 나라였다는 사실(事實)은 변함이 없었다』
즉(卽), 〈조선(朝鮮)에서 대한제국(大韓帝國)으로, 다시 대한민국(大韓民國)으로 나라 이름과 정치체계(政治體系) 곧 옛 봉건왕조(封建王朝) 세습체계(世襲體系)에서 국민(國民)이 주권(主權)을 가진 자유민주주의공화국(自由民主主義共和國) 체제(體制) + 법치국가(法治國家)로 바뀌었을 뿐, 영토(領土)와 백성(百姓)들은 한 치의 변함도 없이 그대로 이어받은 나라(國家)다.〉
그 와중(渦中)에 ≪일제(日帝)와 미국(美國)의 은밀(隱密)하고 추악(醜惡)한 음모(陰謀)로 인하여 대한제국(大韓帝國)은, 일제(日帝)에 강제합병(强制合倂), 국권피탈(國權被奪) 상태(狀態)에 이르자 임시정부(臨時政府)가 수립(樹立)되어 대한제국(大韓帝國)을 이어간 것이고, 일제(日帝) 패망(敗亡) 이후(以後), 대한민국(大韓民國) 헌법전문(憲法全文)에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 …』하였으니, ‘건국(建國)’이라는 말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요, 언어도단(言語道斷)적 주장(主張)이요, 행동(行動)이다≫
이걸 “건국(建國)”이라고 말을 바꾼다면 : 『이런 주장(主張)을 하는 자(者)들은 제정신이 아니다. 무언가 다른 뜻이 있음이 분명(分明)한 것이다. 바로 일제(日帝)와 양키[Yankee]들을 위한 주장(主張)이요, 행동(行動)이다』 이런 주장(主張)은 말 그대로 반헌법적(反憲法的), 반역적(叛逆的) 주장(主張)이며, 행동(行動)이다.
【일제(日帝)들이 말하기를 “왜(倭)”는 “천손족(天孫族)”이라고 말한다. 즉(卽), 선택(選擇)받은 종족(種族), 부족(部族)이라는 것인데, 그 말을 그대로 적용(適用)시키면 “속된 말로 ‘왜(倭)’는 에미애비도 없는 호로자식(胡虜子息)이다”라는 말과 같다. 어떻게 부모(父母)없이, 부모(父母)는 증조(曾祖) 없이, 증조(曾祖)는 고조(高祖) 없이 이 세상(世上)에 태어날 수가 있겠는가?
일제(日帝)가 자신(自身)들은 특별(特別)한, 선택(選擇)받은 민족(民族)이란 것을 부각(浮刻)시켜 주변(周邊)의 여러 나라들을 침탈(侵奪), 점령(占領), 식민통치(植民統治)를 정당화(正當化)하기 위한 명분(名分)으로 내세우고, 국민(國民)들을 속여 병역자원(兵役資源)으로 이용(利用)하기 위한 일이었지만, 그들 “왜(倭)”는, 그들 스스로 “우리는 천(賤)하디 천(賤)한 천민출신(賤民出身)이다”라는 것을 공표(公表)하고 있다.
이 말은 〈인간(人間)은 어떤 종족(種族)이든, 부족(部族)이든 ‘에미애비’없는 자식(子息)은 없다〉는 뜻이다.】
우리는 반헌법적(反憲法的), 반역적(叛逆的) 주장(主張)과 행동(行動)에 대해서는 무자비(無慈悲)할 정도로 철저(徹底)히게 응징(膺懲)해야 한다. 왜냐하면 국가(國家)와 한민족(韓民族)을 위험(危險)과 혼란(混亂) 속으로 빠뜨릴 수 있고, 파멸(破滅)로 이끌 수 있기 때문이다.
➤ 이런 주장(主張) 또는 행동(行動)을 하는 자(者)들을 보면 : 바로 “전체주의(全體主義), 파시즘[ascism], 나치즘[Nazism]”을 신봉(信奉)하거나 추종(追從)하는 놈들이다.
대한민국(大韓民國)의 주권(主權)은 국민(國民)에게 있다는 사실(事實)을 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이 싫다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국민투표(國民投票)를 해서 정치체계(政治體系)를 바꾸면 되는 일이다. 그렇치 않으면서 이런 주장(主張), 행동(行動)을 하는 것은 ‘반헌법적(反憲法的), 반역적(叛逆的)’인 것이다.
이렇게 과거(過去)를 부정(否定)해버리면 : “에미애비”도 없는 왜(倭)의 천손(天孫)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에비애비’도 없는데 어떻게 족보(族譜)가 존재(存在)하나?
솔직(率直)하게 대한민국(大韓民國) 국민(國民)들은 조선사(朝鮮史)에 관한 역사적(歷史的) 지식(知識)을 어느 정도 갖고 있을까? “태종태세”를 암기하는 그런 암기식(暗記式) 지식(知識)이 아닌 사고(思考)하는 역사적(歷史的) 지식(知識)을 말하는 것이다.
국민(國民)들은 어느 정도(程度)나 이를 알고 있을까? 1% ∼ 2%, 혹시(或時) 10% 정도(程度)… … 이건 오버일 확률(確率)이 높다? 답답한 현실(現實)이다.
➤ 오늘의 “윤석열의 통치행태(統治行態)”를 보면서 하는 말들이 : “바로 국민수준(國民水準)이 이 정도(程度)밖에 되지 않아 벌어지는 일이다”라고 말한다.
〈“서울대 법대출신, 검사출신”이라는 자(者)들의 수준(水準)이 ‘저 모양’인데 무엇을 더 바라겠느냐? 우리는 그동안 “허수아비들을 엘리트”라고 여기며 산 것은 바로 국민(國民)들의 수준(水準)이 낮아서 벌어지는 일이니 누굴 탓할 수 있겠느냐? 하는 자조(自嘲) 어린 말이다.〉
앞으로는 “서울대 출신(出身)이니, 법대 출신(出身)”이니 하는 말과 “검사 출신(出身)이다”라는 말은, 점수를 깍아 먹고 가는 길이고, 첫인상을 나쁘게 만드는 일이니, 이런 말을 자주들을 일은 없을 것 같다. 이 정도(程度)로 “윤석열”에 대한 평가(評價)는 심각(心覺)하며 위험(危險) 수준(水準)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국민(國民)들의 선택(選擇)만 남겨 놓고 있는 것이다.
➨ “윤석열”이야 죽던 살던 그건 개인(個人)의 일일 뿐이다
『그러나 대한민국(大韓民國)은 미래(未來)를 약속(約束)해야 하며, 한민족(韓民族)은 영원(永遠)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게 핵심(核心)이요, 중요(重要)한 것이다. [4-1편으로 계속]
2023년 9월 28일 [글쓴이 : 문무(文武)]
첫댓글 그동안 잘 지네셨나요...
좋은 글 잘 읽어보았습니다.
저 역시 東城臨洮 北築遼水라는 기록을 보고 몇 년간 고민하다
고려존속시 송나라 지도에서 臨洮의 위치를 찾았습니다.
지금의 청해성 海东市(湟州 樂州)와 동남방향으로 황하 사이의 지역입니다.
지금의 임조보다 황하를 건너 북쪽입니다.
참고하시고 좋은 글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탐구자"님!
관심과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참고할 수 있는 좋은 점을 알려주셨습니다. 고전원전에 따라 "임조"의 위치가 다르게 나타날 수도 있어 고심하고 있습니다.
몇 가지 중요한 조건과 추론할 수 있는 사서 기록을 찾아 보면 : 임조의 위치는 '서토'에 있을 수도 있다는 것에까지 지적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청해성 '황주나 낙주'근교라면 : 이곳의 북쪽에 요수가 있어야 만리장성 축성이 가능해 집니다.
'4-2'편에서 다 자세한 설명이 가능하고, 이미 정리되어 게재만 남겨 놓고 있습니다.
주요한 것은 여러 사서의 내용을 고찰, 검토해야 "임조"의 본시 위치를 추정할 수 있다는 것이고, "더 중요한 것은 시황제는 누군가? 하는 점이겠지요. 조선 즉 "한인(韓人)인가? 이민족(異民族)"인가? 하는 점이라고 봅니다.
따라서 "장안의 병마용갱과 시황릉은 결코 시황의 것이 아니다"라고 생각합니다.
늘 관심을 갖고 성원해주시는 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늘 건강하세요.
청해성 西宁市를 둘러싸고 상기 댓글에 언급한 임조지역까지
중국이 공개안하는 장성이 존재합니다.
개국의 명분이 없었던 조선이 명나라에 굴복해 조작한 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에는
현재의 감숙성 临洮县 부근을 秦都로 표시하고 있습니다.
제가 청해성 부근을 언급하는 이유는
당나라시기 서악 화산이 감숙성 롱주 남쪽 吳山에서 지금의 화산으로 이동되었다는 점입니다.
원문] 元和郡縣圖志 卷2 오산현 기록에
吳山縣 吳山 在縣西南五十里。秦都咸陽,以為西岳,今為國之西鎮山。《國語》謂之西吳
또한 우공의 치수를 검토한 바 기산 양산 악산이 있는 곳이 우공의 冀州이며
바로 섬서성 봉상현 주변이기 때문입니다.(현재 어느 정도 고증이 완료되어 있습니다.)
주문왕과 관련된 기산은 감숙성 천수시 남쪽 西和县에 존재하며
천수시와 서화현 사이를 명나라시기에 주문왕의 豐지역으로 보고 있습니다.
@탐구자 매우 민감한 사안이라 고증이 되면 자세한 내용은 추후 글로 쓰겠습니다만
중화민국이 水經注를 고증하지 못하고 지명비정이 일정하지 못한 이유가
바로 위에 언급한 송나라 고지도에 나타나 있으며
오늘날 중국이 공개한 지도는 조작이 되었고
이를 60%정도 복원하였으며 송나라 존속시 중국 동부해안은 고려의 강역이었음 증명하는 증거입니다.
한 예로 명나라는 하내군부터 모든 지명을 이동하였으며
여기에는 동경 개봉부 위치도 이동되었습니다.
또한 섬서통지에는 문무님이 말씀하신 병마용갱과 서안의 피라미드 지역이
商나라 시기 수도인 亳지역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병마용갱의 문제는 중화와 구분하는 상투 뿐만아니라
秦나라는 철기문화로 중국을 통일하였으며 검은색을 상징으로 갑옷을 입었는데
청동기 무기와 황토색갑옷을 이상하다고 주장한 중국학자가 조용히 사라졌습니다.
즉 빼앗긴 우리 상고사에 우리 민족이 中國이었을 때 만들어진 유산으로 보고 있습니다.
문무님의 다음글을 기대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