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월22일 [연중 제29주일]
이사야 2,1-5 로마 10,9-18 마태오 28,16-20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 선교는 결국 당신이 만족하자고 하는 거 아닌가요?
어떤 분이 냉담자 친구를 회두하려고 하다가 이런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선교는 결국 당신 행복해지자고 하는 거 아닌가요? 날 위해 지옥에 갈 수 있을 정도로 사랑하나요?
그것도 아니라면 왜 내가 당신 행복을 위해 내 믿음을 바꿔야 하나요?”
염세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사랑은 성욕일 뿐이다”라고 주장합니다. 결국 자기만족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사실 내가 지옥 가도 좋으니 누군가를 천국 보내려는 그런 사랑은 없습니다.
자기만족을 추구하지 않는 행복은 없는 것입니다. 엄마가 아기를 키워주며 아기가 자라는 것을 보고
행복해하는 것은 죄일까요? 예수님께서 부활의 희망으로 십자가 사랑을 보여주신 것은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일까요?
‘로마의 휴일’의 오드리 햅번은 8살 때 부모님의 이혼으로 힘겨운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미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욱이 10살 제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며 튤립 뿌리, 벌레, 음식물 쓰레기 먹으며 생존해야만 했습니다.
나이가 들자 오드리는 모든 일을 접고 아이들에게만 충실하고 싶었습니다.
여러 번 결혼했지만, 남자들은 하나같이 다 바람둥이였습니다.
하지만 아이들과 있을 때는 행복했습니다.
어느 날 초콜릿을 먹다 어렸을 때 한 군인 아저씨가 준 초콜릿 맛이 떠올랐습니다.
쓰레기통을 뒤지던 그녀에게 그때 먹은 초콜릿 맛은 천상의 맛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미소 지었던 그 아저씨의 미소도 떠올랐습니다.
그녀는 당시 유니세프에서 도움을 받은 것도 생각났습니다.
이때부터 오드리는 유니세프 홍보대사로 엄청난 돈을 끌어모으는 역할을 합니다.
아프리카 불쌍한 아이들을 위해 천사의 역할을 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오드리 햅번은 아프리카 아이들을 향한 순수한 사랑으로 도움을 주었던 것일까요?
그 마음 근저에는 자기를 버린 아버지와 닮지 않으면서 자기에게 초콜릿을 주었던 군인 아저씨를 닮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자신이 그렇게 하면서 자신이 존경하는 그 아저씨를 닮아가고 있다는 행복이 그 먼 곳의 아이들을 돕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사랑은 최고의 투자입니다. 더 많이 줄수록 더 많은 걸 얻을 수 있으니까요.”
오드리 햅번도 사랑을 투자로 하였습니다. 더 많은 사랑을 받는. 하지만 사랑이 되돌아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녀는 계속 사랑했을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 자신이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닮아가고 있다는 행복을 잃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며 물 위를 걷고 싶어 뛰어내렸을 때 베드로는 어떤 만족감을 얻고 싶었을까요?
자기를 바라보며 희망과 용기를 얻는 다른 사도들에게서 기쁨을 얻었을까요? 아닙니다.
바로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있음에서 기쁨을 얻었습니다.
그런 행동이 배 위에 타고 있던 이들에게도 좋은 영향을 준 것입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라고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복음을 전하는 이들에게 당신께서 함께해 주실 만큼 소중한 존재라는 믿음을 주겠다는 뜻입니다.
아기가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부모의 자녀임을 믿고 싶은데 의심이 간다면 그것만큼 고통스러운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부모처럼 되기 위해 걸음마를 멈추지 않습니다.
이 과정에서 조금씩 부모와 닮아가는 자신을 볼 때 마음의 평화를 얻습니다.
이 노력이 부모는 물론이요, 형제들에게도 도움이 되고 기쁨이 되는 사랑 실천이 되는 것입니다.
영화 ‘핵소 고지’(2016)는 미국과 일본이 벌이는 전투에서 한 미국 위생병이 혼자 75명을 구해
명예훈장까지 받게 된 실화를 그린 영화입니다. 데스몬드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도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한 나라의 당당한 시민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군인이 되고자 합니다.
하지만 제칠안식 교도로서는 총을 잡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위생병을 하게 됩니다.
다른 이들이 다 도망갔을 때 그는 자기가 누구임을 증명하였습니다.
선교도 그렇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증명하려는 마음이 결국엔 선교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로 만드는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0월22일 [연중 제29주일]
이사야 2,1-5 로마 10,9-18 마태오 28,16-20
참담한 현실 속에서도 눈부시게 환한 미소를 지으며...
요즘 예전에 저희 수도원이나 청소년 시설 주방에서 근무하시던 자매님들의 얼굴이 자주 떠오릅니다.
제가 요즘 동종업계에 종사하다 보니 그런 것 같습니다.
똑같은 식재료를 반복해서 씻고 다듬고 지지고 볶고 하다 보면 팔이며 어깨며, 여기저기 쑤시고 결리고, 그러다 보니 쉬는 날에는 어김없이 한의원으로 침맞으러 가고...
한 며칠 침 맞으러 한의원을 갔습니다.
의사 선생님께서 얼마나 친절하고 자상하신지 모릅니다.
세월의 연륜 앞에 어찌할 도리없이 여기저기 고장 나서 찾아오는 환자들을 얼마나 따뜻이 맞이해주시는지, 놀랄 정도입니다.
그러다 보니 병원은 언제나 문전성시를 이룹니다.
침을 맞으며 생각했습니다.
우리의 인간미 넘치는 삶, 극진한 환대의 자세, 진심이 담긴 다정다감한 말 한 마디...
이런 것들이 얼마나 중요한 이웃 전교의 바탕인지 모릅니다.
전교 주일이자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를 봉헌하는 오늘 우리 교회에는 다양한 유형의
선교사들이 필요합니다.
청춘을 바치고 목숨을 바치며 머나먼 타국으로 건너가, 그 나라 백성들에게 또 다른 그리스도가 되고, 그 나라 땅에 뼈를 묻는 위대한 선교사들도 필요합니다.
저처럼 주님의 말씀을 쉽게 풀어서 양떼들에게 전하는 유랑 선교사들도 필요합니다.
어깨띠를 두르고 직접 거리로 나가서 지나가는 행인들을 교회로 초대하는 적극적인 가두 선교사들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닙니다.
실제 삶 속에서, 자신이 행하는 매일의 직무 안에서, 이웃들에게 감동과 기쁨, 희망과 위로를 선사하는 일상의 선교사, 삶 속에서의 선교사도 필요합니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직장이나 단체, 각종 모임에서 기쁘게 희생하고 봉사하십니까?
모임 안에서 이방인이나 걸림돌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겸손한 리더로서 헌신하고 있습니까?
어떻게서든 조직이 복음적이고 인간적으로 돌아가도록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습니까?
모임 안에서 친교와 나눔의 중심이 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참으로 훌륭한 선교사이십니다.
더없이 비관적이고 참담한 현실 속에서도 눈부시게 환한 미소를 지으며 살아가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주님께서 크게 칭찬하실 위대한 선교사이십니다.
내게 결코 호의적이지 않은 상황, 숱한 도전들과 걸림돌들이 즐비한 여행길이지만, 마치 소풍 나온 소녀처럼 환하게 웃으며 걷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역시 훌륭한 선교사이십니다.
이웃 전교는 우리가 지은 죄를 보속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도구요, 하느님께 드릴 수 있는 가장 향기로운 선물입니다.
선교는 그리스도교 신앙인으로서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선택 사항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만 하는 필수 사항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믿는 하느님, 우리가 지니고 있는 신앙은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대상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을 통해 우리는 구원이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으며, 그토록 염원하던 하느님 나라에 입국할 수 있고, 하느님을 만나뵐 수 있는 가능성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따지고 보니 억만금을 준다 하더라도 버리지 말아야 할 대상, 우리 삶 속에서 첫 번째 가치가 곧 신앙인 것입니다.
이토록 좋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이웃들, 특히 가까운 사람들, 가족들에게 전하지 않고
공유하지 않는다는 것,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전교 주일인 오늘, 용기를 한번 내보면 좋겠습니다.
주변에 지금 누가 홀로 외로워하며 울고 있습니까?
그는 가장 좋은 선교의 대상입니다.
주변에 누가 갑작스러운 병고나 사고로 힘겨워하고 있습니까?
그는 가장 시급한 선교의 대상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29주일 강론>
(2023. 10. 22.)(마태 28,16-20)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선교활동>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18ㄴ-20).”
우리 교회는, 선교활동은 교회의 ‘존재 이유’이고,
신앙인들의 ‘기본 의무’ 라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모든 신앙인들이 선교활동에(복음 선포 활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근본적인 질문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도대체 왜, 선교활동을 해야 하는가?
“예수님의 명령이니까.” 라고 대답하는 것으로 그치면 그만인가?
그냥 자기가 믿고 싶은 대로 믿다가, 각자 알아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고 구원받으면 되지 않은가?
다른 사람들에게 신앙을 권고하는 활동을 꼭 해야 하는가?
요한복음서 저자가 복음서에 기록해 놓은 다음 말이 그런 질문들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20,31).”
이 말은, “여러분이 생명을 얻기를 바라기 때문에
예수님을 알려 준다.” 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불치병에 걸려서 죽어가는 사람을 가엾게 여겨서, 그 병을 고칠 수 있는 명약을 병자에게 소개해 주는 것과 같은 심정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 심정은 바로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또 오셔서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신 것은, 인간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선교활동을 하는 것도 사람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이고 핵심입니다.
만일에 사랑이 없다면, 그 신앙은 신앙이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립니다.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와 천사의 언어로 말한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요란한 징이나 소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고, 모든 신비와 모든
지식을 깨닫고, 산을 옮길 수 있는 큰 믿음이 있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1코린 13,1-2).”
<사랑이 없으면 예언은 예언이 아니라 거짓 예언이고, 산을 옮기는 기적은 그냥 속임수일 뿐입니다.>
따라서 “남들이야 망하든지 말든지 나만 구원받으면 그만이지.” 라는 이기적인 마음으로 혼자서만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것은 신앙생활이 아닌 것이고, 그렇게 해서 받는 구원은 구원이 아닌 것이 됩니다.
다른 사람들 없이 자기 혼자만 들어가서, 혼자서만 지내는 나라가 하느님 나라일 수는 없습니다.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는 다음 이야기와 대화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간수가) 그들을(바오로와 실라스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 ‘두 분 선생님, 제가 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그들이 대답하였다. ‘주 예수님을 믿으시오.
그러면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받을 것이오.’
그리고 간수와 그 집의 모든 사람에게 주님의 말씀을 들려주었다.
간수는 그날 밤 그 시간에 그들을 데리고 가서
상처를 씻어 주고, 그 자리에서 그와 온 가족이 세례를 받았다.
이어서 그들을 자기 집안으로 데려다가 음식을 대접하고, 하느님을 믿게 된 것을 온 집안과 더불어 기뻐하였다(사도 16,30-34).”
죄수들을 지키고 감시하는 간수가 감옥에 갇혀 있는 죄수들에게 ‘구원’을 받는 방법을 묻는 상황 자체가 대단히 상징적입니다.
바오로와 실라스는, 몸은 감옥에 갇혀 있어도 영혼은 참된 평화와 자유를 누리고 있었고, 간수는, 몸은 감옥의 밖에 있어도 그 영혼은 평화도 자유도 안식도 없는 상태였습니다.
선교활동은 그 간수처럼 구원받기를 갈망하지만 그 길을 모르는 사람에게 ‘구원의 길’을 알려주는 활동입니다.
또 현세적인 일만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허무하게 사라질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에게는, 그 길은 ‘멸망의 길’이라는 것을 깨우쳐 주는 것도 선교활동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에서,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모든 사람들에 대한 ‘생살여탈권’을 가지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생살여탈권’은 사람들을 구원하거나
구원하지 않을 권한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 권한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믿으면 안 되고, ‘예수님만’ 믿어야 하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야 합니다.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라는 말씀은, ‘모든 곳’으로 가서,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 주라는 뜻입니다.
물론 현실적으로 가지 못하는 국가와 지역이 있긴 합니다.
그래도 포기하지 말고, 그 국가와 지역의 문이 열리기를 기도하면서 기다려야 하고, 준비해야 합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라는 말씀은, 신앙인이 되는 것과 구원을 받는 것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사랑에 참여하는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 참여는 곧 구원과 생명을 얻어 누리는 일이기도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라는 말씀은, 믿고 세례를 받는 것만으로 구원과 생명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충실하게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라는 말씀은, 선교활동은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는 활동이라는 것을 나타내는데, 우리가 하는 일을 예수님께서 도와주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우리가 도와드리는 것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