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부령을 넘어서니 희뿌연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동서울터미널에서 정선군 고한까지는 3시간 10분예정이지만 예상치 못한 눈발로
인해 거북이 운행을 하고 있으니 아무래도 예정보다 두어시간 정도 늦어질려나 보다
수많은 터널을 지나고 궂은 날씨로 인해 전파수신이 수도 없이 끊기는 차내 비디오에서
상영해 주는 영화에서 잠시 눈을 떼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흩뿌리는 눈발속에서 세상은 온통 백색으로 뒤덮여 있었다
이름 모를 마을을 지나곤 하지만 표지판이나 상점간판도 눈에 뒤덮여 어디가
어디인지 분간조차 할 수 없었다
드문 드문 서 있는 가로등 불빛은 들짐승의 눈처럼 요기롭게 파르스름한 광채를 띄고
있었다.
온 누리는 한바탕 눈 세상이었다
나는 하염없이 내리는 눈발을 바라보다 잠시 눈을 감고 있으려니
가와바다 야스나리! 내 젊은 날을 온통 지배했던 그의 소설 雪國의 도입부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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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경의 긴 터널을 빠져 나오니 눈이 많이 내리는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환해졌다.
신호소 앞에서 기차가 멎었다.
유리창을 열어 젖히자 눈의 냉기가 흘러 들어왔다.
철도 관사처럼 보이는 바라크들이 산기슭에 으스스 추워보이는
모습으로 흩어져 있을 뿐 눈빛은 거기에 이르기도 전에 어둠 속에 묻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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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이 눈 덮인 산야 . 흰 눈의 싸늘하고 청결함 .
그 속에서 펼쳐지는 애수를 자아내는 숙명적인 사랑과
그 허무한 사랑의 투명한 덧없음 !!
雪國은 내 젊은 날을 온통 열망으로 뒤끓게 했던 서정의 압축판이었던 주옥같은
중편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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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한에 도착한 시간은 예정시간에서 훌쩍 1시간 반이나 지나 있었다.
우리 일행은 자박 자박 눈길을 밟으며 예약한 식당으로 갔다
정선 아우라지 깨끗한 물과 청결한 눈 녹은 물기를 머금은 듯한 청정 한우
생고기는 선홍색과 흰색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마치 이쁜 그림책을 보는 듯 했다
바알갛게 핀 참숯불에 자글자글 기름이 끓는 잘 익혀진 고기살은 내 허기진
목구멍으로 사르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흩뿌리는 눈발을 바라보며 몇병인지도 모르게 소주를 마시니 내 얼굴은
금방 굽기전의 청청 한우 선홍빛 살빛을 닮아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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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만감과 취기에 얼큰히 젖어 정선 카지노장에 들렀다
개인당 5천원씩하는 입장료를 끊고 신분증을 제시하고 줄줄이 입장을
하는데 내 차례가 되자 갑자기 음주자이므로 입장이 불가하다고 하였다
황당 그 자체!! 나 혼자만 음주한 것도 아닌데~~
음주 측정기를 불어보니 역시나 삑 소리가 나며 빨간 경보등이 켜졌다
쪽 팔리기도 하여 얼른 대열에서 이탈하여 일행이 있는데 혼자 남을 수도
없으므로 입장시켜 달라고 사정하니 입장 못하는 취객들이 어필하므로
불가하다고 하였다
분한 마음에 관할 읍장님께 SOS를 날렸다
10분정도 지나니 그 분이 오셔서 조금전 깐깐한 보안요원에게 다가가 뭐라고
했는지 들어가라고 하여 입장료도 주지 않고 들어갔다
그 분보고 씩 웃으니(혀라도 날름 내밀고 싶었지만) 그 양반도 눈빛으로
계면쩍은 표정으로 입장하세요 그런 눈빛 신호를 보냈다
일만원으론 2~3분도 채 견디지 못할 듯 한데도 몽롱한 눈빛의 인간들이
대박을 꿈꾸며 기계마다 꽉 차게 앉아 있었다
난 그들 뒤에서 가만이 하는 양을지켜보니 중간 중간 따는 경우도 있지만
시간이 지나니 죄다 입금액을 죄다 털리기만 했다.
얼마나 오래끄느냐가 문제지 결론은 빈털털이 신세가 되는 듯 했다
점당 최하 단위인 오백원짜리가 그 지경이니~~
기회비용을 생각하면 안하는게 따는 거라는게 맞는 말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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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는 50평정도 됨직한 선데일리조트였다
냉장고에 가득 쌓여있는 캔 맥주를 마시며 카드놀이를 했다
초반엔 이상하게 끗발이 오르지 않았지만 마지막 먹기 네판에 큰 물건이
받쳐주어 겨우 겨우 본전 정도를 건졌나 보다
새벽두시에 취침을 했다
기상시간은 새벽 네시반!
졸리는 눈을 비비고 일어나 태백산행준비를 했다
30여분을 버스로 달려 등산로 초입에 당도하니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있었다
눈 덮인 등산로는 외길이었다
깜깜한 어둠속이지만 눈빛이 있어 무작정 앞사람의 발자욱만 따라
걸어가면 되었다
사각사각 밟히는 눈길의 감촉이 좋았다
정상까지 소요 시간은 두시간 반이라고 했다
그러나 가파르고 미끄러운 눈길을 아이젠이나 스틱도 없이 걸으려니
출발 5분도 되지 않아 괜히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발은 계속 날리고 주위에 우리 일행이 어디있는지도 방향도 모르고 무작정
앞사람을 따라 가려니 너무나도 힘이 들어 다시 되돌아 갈려고 해도 외길이라
갈 수도 없고 진퇴양난이었다
한참을 가다보니 누군가가 다 와간다고 소리쳤다
기쁜 마음에 조금난 고생하면 되겠다고 생각하니 새삼 다리에 힘이 실렸다
그러다 조금 더가니 일행인 듯한 두사람이 이제 한 사분의 일쯤 왔나 보다 이렇게
말하는게 들렸다
그 말을 들으니 갑자기 다리에 힘이 쫙 풀리며 이건 완전히 사서 고생한다는 말이
딱 맞네 그런 생각만 자꾸 들었다
그런 와중에 초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어린애들이 깡충깡충 뛰듯이 즐거운 마음으로
산길을 오르는 모습을 보고 부끄러워서라도 정상은 꼭 밟고야 말겠다고 마음을
다졌다
그렇게 마음을 고쳐 먹으니 주위의 아름다운 설경이 눈에 들어 오기 시작했다
칠부 능선을 넘으면서부터는 아름드리 주목이 보이기 시작했다.
흰눈을 뒤집어 쓰고 있는 주목 가지사이로 물기머금은 초록잎은 생명력으로
넘치고 있었다
이리도 찬땅에 뿌리를 내리고 칼바람과 찬눈을 맞으며 오연하게 서있는 주목
군락지를 지나며 조그만 시련에도 투덜대고 타협하려한 나약한 나 자신이 한없는
부끄럽게 느껴졌다
드디어 눈앞에 바위로 쌓은 천제단의 위용이 보였다
정상엔 자연석 바위에 한자로 太白山이라고 팻말도 보였다
말없 수 없는 감동과 기쁨과 끝없는 성취감이 밀려왔다
일년에 두어번 정도 앞산자락이나 밟고 다니던 내가 한강과 낙동강의
발원지이자 백두대간의 축인 태백산에 오르다니!!
아마 세시간 정도의 사투끝에 정상을 밟나보다
정상에서 바라는 설경은 장엄했다
광막한 하늘에선 끊임없이 뿌옇게 눈발이 날리고 있었고 엎드린 땅은 백색
눈발을 거두어 뒤덮어 천지간엔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오색 백색 일색의
설국이었다
불현듯 唐대 유종원의 시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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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山鳥飛絶(천산조비절) 萬徑人踪滅(만경인종멸)
孤舟蓑笠翁(고주사립옹) 獨釣寒江雪(독조한강설)
산이란 산에는 새 한마리 날지 않고
길이란 길에는 사람 자취가 끊겼도다
외로운 배 도롱이 삿갓쓴 노인
눈 내리는 추운강에서 낚시 홀로 드리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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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동안 감격에 몸을 떨었지만 정상엔 칼바람에 싸락눈이 날려서
1초도 정면을 바라볼 수 없을 정도였다
아마 세시간 정도의 사투끝에 정상을 밟았나 보다
우리 일행은 기념사진을 찍고자 했지만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어
몇 컷 찍지도 못 하고 서둘러 하산을 시도 했다
하산할때 미끄러지면 설매도 타면서 어린애처럼 즐거워했다
내려오면서 다시금 주위를 살펴보니 보이는 사물마다 온통 천진하고
깨끗했다
동심으로 돌아간 우리는 지난 고통도 까맣게 잊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산 중턱쯤에 고즈늑한 절간이 보였다
우리는 그 곳에 아침 식사를 예약해 둔 상태였다
온돌방의 따스한 온기속에서 곤드레 나물국을 마시니 세상을 다 얻은 듯 했다
가지고 온 양주를 서너잔씩 마시니 나른하게 졸음이 밀려왔다
고마운 마음에 가지고 온 과일, 초콜릿 등을 그 방에 있던 이름모를 분들에게
나눠 드리니 아주 좋아라 했다
작은 거라도 나누어 주는 마음이 산행의 큰 즐거움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절 문 밖으로 나오니 산행객들이 찬 눈발에 웅크리고 앉아 뜨거운 컵라면을
먹고 있었다
우리는 사전에 예약을 하고 정보를 수집하고 현지 조력자(?)의 협조 등 치밀하게
준비를 하였기에 비교적 안락한 여행이 되었지만 그 분들을 보니 새삼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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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을 마치고)
거대한 태백은 왜소하고 나약한 나를 말없이 포근히 싸안아 주었다
하얀 눈밭을 어린아이처럼 뒹굴면서 오랫만에 천진하고 순수한 동심의 세계에
젖어 보았다
일상으로 되돌아 와 지난 시간을 돌이켜 보니 슬며시 미소가 피어 오른다.
자글자글 숯불속에서 맑은 기름기 자르르 흘리며 익어가던 한우와 시리도록
차가운 눈밭의 기억을 떠올려 본다
울 친구들도 눈 쌓인 겨울산행을 해보면 색다른 감흥에 젖을 수 있을거라는
생각을 해 본다
첫댓글 근 1년만에 글을 써 보는 것 같다 앞으로는 가끔씩 글로써 인사할까 생각중이야 금년 1.11~12 평소 업무에 도움을 주시던 교수님들과 모처럼 시간을 가져 보았어, 우리 동기들 모두 새해에는 뜻하는 일 다 이루기 바란다
고생과 보람이 교차했겠네 무슨일이든 보람을 느낄때가 가장 행복하다는거 나도안다 올해도 건강하고 더좋은 소식 마니마니 전해줘
눈덮인 산을 산행하는데 아이젠도 없이 하다니 ... 니 바보아이가???
아~~~진짜 ,당신이 진정 겨울산행의 진맛을 듬뿍 만끽하고 돌아온 느낌 인상적인데~~ 지가마 04년도 눈꽃축제에 같다가 고생한 마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