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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로또 인생 1
'너는 남보다 몸이 약하니 늘 조신하게 살아라' 아버지는 늘 그렇게 강조하셨다. 이제 와 후회를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내 몸이 망가진 최대 요인은 아무래도 술일 것이다. 근무처에는 조포 곽포 박포 3인이 있는데 그 중 한사람이 바로 나다. 다들 전설적인 기록을 최소 하나씩은 갖고 있다. 나는 과거 대전 도룡동에 롯데 호텔에서 생맥주 파티 개최를 할 때 입성하여 젊은 친구들 물리치고 장려상을 수상한 바가 있다. 지금에서 생각해 보면 한 마디로 미친 짓이다. 그렇다면 술은 내 원수이고 짓밟는 충동이 일어나는 게 맞다.
그런데 실은 후회를 별로 안 한다. 이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내가 술을 원망할까. 아니다, 나는 철천지원수라 하면서도 원망을 절대 하지 않는다. 이는 내 얼굴에 침 뱉는 것이나 마찬가지고 술은 술대로 내 인생에서 역할을 충분히 했다 싶기 때문이다. 술이 없었다면 아마 나는 정서적으로 메말라 더 형편없는 인간으로 전락했을 것이다. 내게 술은 마음의 가책을 달래고 의지를 북돋은 용혈 전사였다. 무기력 증세를 호심탐탐 엿보다 기백과 호기를 심어준 게 내 경우는 술이었다. 그런 술은 관록이 쌓이더니 나중 큰 역할을 하나 해냈다.
나의 야심 작 '조선의 꽃 열하일기' 란 책은 순전히 술이 곱게 빚은 결과물이다. 그는 달랑 붓 2자루와 공책 4권을 이고 떠난 3,700리 이국 길이지만 그가 남기고 알려준 세상 소식은 230여 년이란 긴 시간의 차가 존재함에도 여전히 진행형이고 실로 방대한 만리장성과도 같은 아우라를 구축했다. 나는 그의 아우라를 더듬기 위한 방도로서 우선 술을 말한다. 그는 천부적인 술꾼이었다. 글발을 쫓아 술 발도 연일 종횡무진 대륙 땅을 누볐다. 나 역시도 전통을 이어받은 술꾼으로서 대번에 그를 알아봤고 그 덕분에 술술술 열하일기를 독파할 수 있었다.
술 때문 연암을 바로 알아봤지만 아무튼 나는 현시대에 걸맞지 않게 평상시 조금 과했고 술 잔 내려놓는 때를 놓쳤다. 아니 술과 맞교환 한 글과의 거듭날 시간차가 서로 맞지 않았다. 아무튼 내 수필에는 술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그럴 수밖에는 없다. 술로 남산 샌님 같은 기질이 호탕무사로 변신에 변신을 했으니 당연 글도 걸쭉하고 꺼칠꺼칠한 술 기색이 완연한 것이다. 이런 호색을 어디서 다시 누려보겠는가. 아마 술에 대한 글만 모아도 책 한권은 족히 나올 것이다. 하지만 알다시피 술 때문 병원신세도 지고 배도 가르고 죽을 뻔도 했다. 이제 어쩔 수없이 고이 보내야만 하는 상황, 녀석은 역할을 다 했고 나로서도 더 이상은 미련도 없다. 때 맞춰 찾아온 자성의 시간, 참으로 기가 막힌 타이밍이다.
조금만 더 늦었어도 아마 나는 저 세상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나보다 3센티 길게 잘라 낸 사람은 아직도 똥이 안 뭉쳐져 고생을 한다는데 나는 용케 그 불운도 빗겨갔다. 이는 필시 살려주고 봐주는 대신 조물주께서 다른데 써먹자는 의도는 아닐까 모르겠다. 내가 그나마 잘 한다는 게 글 쓰는 것이니 달리 생각할 방도도 없다. 기실 수필가라 하지만 수필에 대해 한 마디로 이렇다고 말하기는 참 어렵지 싶다. 너무 광범위해서다. 굳이 말하자면 수필은 파란만장한 인생의 고개 길을 허위단심 넘으면서 생활의 모퉁이 모퉁이에 이런저런 풍경들에 감흥이 절실할 때 혹은 수시로 마주 오는 상념과 마주하고 걸어온 길을 더듬으며 또 걸어갈 길을 가늠할 때 문득 피어나는 정감의 꽃이 아닐까 싶다. 그런 정감은 잘난 척은 금물이다. 수필에도 도 닦는 마음은 절실해진다.
그래서 겪은 파란만장한 내 이야기를 도 닦듯 써보자 했다. 수필은 못 써도 반성문 식으로 쓰면 10점 만점에 5점은 받는다. 그런데 문제는 항암 치료에 4번의 수술에 따른 전신 마취 때문인지 먼 과거는 알알이 기억하는데 어제나 방금 전 것이 그만 깜빡하고 만다. 단어가 톡톡 튀어야 글을 쓸 것인데 실로 난감했다. 그래도 나는 개발 세발 매일 같이 반성문을 썼다. 그렇게 3년 쯤 지났을까. 도는 여직이었지만 깜빡 증세는 많이 사라졌다. 이 또한 나로선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아픈 사람이 왜 그렇게 열심히 끄적끄적 거리냐고 하지만 실상은 이는 나의 치유책이기도 한 셈이었다.
덕분에 반성의 시간에 얻은 소득이 제법 쏠쏠했다.
귀양 간 조선의 문인들이 절실함으로부터 마치 옥고를 얻어낸 양 그 무렵 나는 한국문화 예술위원회, 한국출판 문화산업진흥원, 한국수필가 협회 등등으로부터 치료비에 보태 쓰라고 돈도 받았다. 술발이 다하니 글발이 내게 도래한 셈이다. 지금도 나는 매일 글을 쓴다. 이제는 마저 도를 닦고 깨치기 위해서다. 때는 바야흐로 환갑도 넘은 나이, 나이를 먹은 만큼 싫든 좋든 사회에서 멀어져 간다.
슬프다 말할 것이지만 사회에서 멀어지는 만큼 나이가 주는 홀가분함이 또 나에게 있다. 이 나이는 직장을 안다닌다고 돈을 못 번다고 흉도 안 되고 부담도 없다. 남 같지 않다고 자책할 필요는 더 없다. 일의 족쇄에서 풀려난 자유가 이 나이에 있다. 하기 싫은 일은 더 이상 안 해도 되고 억지로 눈치 보며 맞춰서 살아갈 필요도 없다. 이제야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알아서 비로소 챙기고 즐길 수 있는 시간이 도래한 것이다.
이 나이 백수는 참고 견딜 수 있다면 덕목이고 행복이다. 욕망 때문 죽을 고비를 넘은 적은 없던가. 햇수 60년, 70년, 버텨준 세월이 그저 고맙고 감개무량하다. 어디 욕망이 한없이 부글부글 끓을 줄 알았더냐. 덜 보이고 덜 들리고 덜 걷게 되는 현상은 신이 내려준 교시다. 그 대신 신은 그간 보고 배우고 듣고 본 모든 것을 더 많이 느끼고 생각하는 시간을 우리에게 주었다. 억눌린 삶의 고뇌로부터의 자유, 이 보다 값진 선물이 있을까. 삶의 한 멍에로부터 풀려난 자유, 이 나이에 걸맞게 만끽하는 것이 내 경우는 여행이다. 여행은 틀을 벗어난 자유를 말하고 자유는 틀과 규격에서 벗어나는 평시 삶이 아닌 일탈을 말한다. 여행은 자유로움이다.
나는 그렇게 반성문도 쓰고 여행도 다니며 기행문도 열심히 쓴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는 아날로그에 디지털을 모두 겪은 몇 안 되는 세대로서 7080의 거센 민주화의 물결도 산업발전도 하다못해 우리나라에서 열린 올림픽도 모두 다 맛 본 행운아이다. 위태위태하였으면서도 지금도 여전히 건재하니 나만한 행운아가 이 세상에 어디 흔할까. 나는 지금 다시 태어난 그 기분으로 하루하루를 새날처럼 그야말로 열심히 가꾸며 자숙하며 반성문을 쓴다. 말한 바 바로 내가 다름 아닌 이 세상 로또다. 정말 이렇게 세상살이가 달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다.
일상과 일탈
하늘로 치솟는 비행기 . 동시에 느껴지는 홀가분한 기분 . 조금 전 까지도 바동대던 나의 일상의 남은 것 , 휴대폰이 잠기고 일상의 꽉 찬 머릿속 시간들을 지우고 나니 그동안 옥죄어 오던 일상이란 것도 별것은 아니었다 . 하늘 아래를 보니 불쑥 왜 그리 사는 것이었는지 모를 일이다 싶어졌다 .
늘 맞닿는 것들과의 어우러진 삶 , 그래서 당연히 잘 알 것 같은 것들이다 싶은데도 따지고 확인하고 알아 두고 해야 할 것들이 매일같이 줄지 않고 쏟아지는 것은 왜인지 모를 것이다 자칫해서는 사고가 발생하고 위험이 상존하는 일상 속에 파뭍여 나는 속절없이 늙어가고 있다. 그러기에 일상은 늘 따져서 찾고 알아두고 확인해서 채우고 알아서 손해 안 보게 처신을 매일같이 반복하는 것의 준말이 아닐까 . 아니 성과와 보람이라는 허울 속에 여전히 부족하여 손해나고 조바심에 일 , 걱정 투성이로 오늘을 견디며 내일에게 불안을 떠넘기며 그러면서 사는 여정이라고 말해도 맞지 싶다 .
그런 와중에 모처럼 얻은 십여 일의 여정이라니 . 사막에서 만난 오아시스가 따로 없을 테다 . 일상과는 전혀 다른 색다른 것들로 채워질 빈 시간과 공간들 . 우리는 이를 일탈이라고 한다 . 설레는 소년의 마음으로 사는 일탈은 하루 이틀이 금세다 . 일상이 까마득한 옛날이 되어버린 것 같은 기분 , 그것만으로도 고소하고 흥미진진하다 . 호기어린 눈빛으로 쏘다니며 보고 느끼며 만끽했다 . 모를 것을 모른 대로 문제 될 것이 없으며 딱히 일상이 아니니 손해 날 것도 없고 조바심도 따로 없다 .
그런데 족하다 싶은데도 시간이 지날수록 개운하지가 않다 . 바삐 흐르는 시간 속 7 일째 되는 날 부터서는 증상이 더욱 두드러진다 . 내 일탈은 수명이 고작 7 일인가보다 . 집식구가 보고 싶고 아들들이 보고 싶다 . 내 대신 잘들 하고 있겠지 싶으면서도 은근히 걱정도 된다 . 그러더니 하루하루 돌아갈 날이 가까워지니 이제는 일상이 그립다 . 정해진 느낌으로 정한 일을 한다는 것이 대견스럽고 예뻐도 보인다 .
이 시각 아들은 학교 책상에 앉아 공부를 것이고 집식구는 화초에 물을 주고 있을 것이다 . 내가 그곳에 있다면 지금쯤 회의를 끝내고 무엇인가 확인을 하고 전화도 하고 남 모르게 졸기도 할 것이다 . 급기야 실천하는 일 없는 일상의 소중함을 제대로 알게 한 허영에 찬 그림이 일탈이라는 망발도 생긴다 . 일의 소중함 , 일이 없다하여도 정해진 룰을 갖는 정돈된 의식을 갖는 마음의 포근함이 안정적으로 사는 게 일상이었다 . 그러면서 또 일상으로의 귀환이다 .
일상으로의 귀환이라는 이글은 내 나이 사십대 초반에 쓴 글이니 아마 그 무렵은 지친 일상의 복귀 훈령으로 일주일만으로도 족했던 모양이다 . 그때는 정말 여름휴가가 길어야 7 일 밖에는 안됐다 . 의욕이 넘치던 시절이라 그랬을 테지만 그 나이 넘어서 느끼는 일상에 대한 상념은 거의 병적 수준이다 . 이 또한 내 글 속에 있다 .
막차에 올랐다 . 차를 놓치면 당장 오늘의 끝이 미묘해진다 . 이를 잃으면 객심으로 가득 찬 머쓱한 몰골의 내일이 지금의 나를 탓하고 말 것이다 . 어제가 오늘 같고 내일이 또 어제 같은 시간의 반복 , 이 세상엔 의외로 막다른 시간에 놓인 것들이 많다 . 죄수에게 죽음을 알리는 판결문이 그렇고 중환자실 수술대에 오른 환자의 적막이 또한 막다른 시간 끝에 멈추어 있다 . 막다른 곳을 향하는 것으로 치자면 그 어느 누구도 그 사슬에서 온전하지는 않다 .
이 막다름은 끝은커녕 시작조차도 아닐지 모른다 . 지겨움에 지쳐 늘 막차 행세다 . 웽웽 소리 높이며 달려드는 앰블런스의 찢어지는 목청 같은 저 위급함 그리고 저급함이라니 . 광폭 횡단하는 왱왱소리를 멈출 방도는 없는 것일까 . 뒤 미쳐 따라 나서는 처참한 지경의 불길함은 어쩌면 좋단 말인가 . 시간이 말을 한다면 차라리 좋겠다 .
오늘을 겨우 지킨 초췌한 모습이 창에 어른거리며 억지로 하루를 보낸 갈증에 숨이 턱턱 막혀 온다 . 내일을 제대로 맞이할 수나 있을까 . 참으로 속 좁고 안타까운 몰골이 아닐 수 없다 . 나는 그 존재 가치로 늘 삶이 이 모양이다 . 숨통을 단숨에 조인 참혹함과 암담함으로 캄캄한 나락의 끝에 선 나 , 그렇게 나는 막차를 타고 급히 매일 어디론가 향하고 있다 . 만약 밤을 밟는 철길이 끊기기라도 한다면 . 창 밖 어딘지 모를 곳에서 비춰지는 아련한 불빛이 가련하다 싶다 . 하지만 내 마음도 저 불빛처럼 오늘을 말하며 또 내일을 기다리는 것이다 . 도착은 멀지만 그래도 갈 길은 있으며 갈 때까지는 여직 바쁘다 . 내가 바라는 새 날의 먼동을 향하여 .
가상적이긴 하지만 거의 중병 신세로 지친 내 모습이 그대로 투영되고 있다 . 그 쯤 나이에 처한 처방을 이 세상은 잘도 알아 정년퇴직이라는 것을 둔 것도 같다 . 그러면 백수가 되어서는 편해지는 것일까 . 그럴 리 없다 . 아마도 저 상태라면 일주일 휴가도 족하니 재취업을 시켜주세요 하며 달라붙을 것이다 . 참으로 인생이 딱하다 . 본질적으로 생각을 고쳐먹자 했다 . 이제는 일상이나 일탈이 아니라 바로 초탈이다...
첫댓글 아휴..놀랍습니다.
대단한 행운아이십니다. 하루하루 새날로 살아가시는, 세상살이가 달디단 로또의 나날들을 응원합니다.
한 층 밝아진 제 모습.. 스스로도 대견하다여깁니다...ㅎㅎㅎㅎ
'로또인생'이란 옥고의 제목만 보면 신나는 '인생역전'일 듯 싶은데, 마지막 대목에 이르러 '반성문을 쓴다'고 겸손해 하시니, 역시 수필문학인다운 인품을 엿봅니다. 폭포수 같은 왕성한 필력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조금은 알 듯합니다.
아이고 아닙니다.... 선생님이 그리 말씀하시니 면구해지네요....최원현선생님한테 예전 대전에 글잘 쓰는 경찰관이 한 분 있다고 들었는데 그분이 바로 선생님인줄은 몰랐습니다....얼마전 불쑥 최선생님이 전화가 왔었지요...
조성원 선생님의 2019년이 기대됩니다. 지금까지도 감탄했는데 앞으로는 얼마나 더 빛날까요?
힘든 병마를 겪어내고 더 멋진 모습으로 돌아오셨으니 신이 살려주신 이유를 저희도 함께 누릴 수 있게 해주세요~^^*
무슨 제게 기대라뇨... 잘못 짚으신겁니다...그냥 반석동에서 조용히 살으렵니다... 가끔 세종시 도서관에 코스트 코어나 찾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