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란이 피기까지는
- 모란이 피기까지는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즉 나의 봄을 기둘리고 잇슬테요
모란이 뚝뚝 떠러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흰 서름에 잠길테요
五月 어느날 그 하로 무덥든 날
떠러져 누운 꼿닢마져 시드러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최도 업서지고
뻐처오르든 내 보람 서운케 믄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해는 다 가고 말아
三百예순날 하냥 섭섭해 우옵네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즉 기둘리고 잇슬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김영랑(金永郞, 1903~1950)으로 알고 있는 시인의 본명은 본관 김해.윤식 ( 允植 ) 입니다.
영랑은 아호인데 시문학 ( 詩文學 )’ 에 작품을 발표하면서부터 사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지주인 아버지 종호(鍾湖)와 어머니 김경무(金敬武) 사이의 5남매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1915년 강진보통학교를 마치고 이듬해 결혼했으나 1년 반 만에 아내를 잃었다.
그해 어머니의 도움으로 서울에 올라와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영어를 배우다가 1917년 휘문의숙에 입학했다.
휘문의숙 3학년 때 3·1운동이 일어나 학교를 그만두고 강진에서 의거하려다 체포되어 6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1920년 일본으로 건너가 아오야마[靑山] 학원 중학부를 거쳐 같은 학원 영문학과에서 공부했으나,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했다.
유학중 무정부주의 혁명가인 박열과 사귀었고 괴테, 키츠 등의 외국문학에 깊이 빠져 있었다.
그뒤 고향에 머물면서 1925년 김귀련(金貴蓮)과 재혼했다. 1930년 정지용과 함께 박용철이 주재하던 〈시문학〉 동인으로 참여했다.
일제 말기에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하는 곧은 절개를 보여주었다.
8·15해방 후 강진에서 대한독립촉성국민회를 결성하고 대한청년단 단장을 지냈으며, 1948년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1949년 공보처 출판국장을 지내는 등 우익보수주의자의 입장에서 정치에 참여했다.
평소에 국악이나 아악, 서양명곡을 즐겨 들었다. 비교적 여유있는 삶을 살다가 1950년 9·28수복 때 유탄에 맞아 죽었다.
묘지는 서울 망우리에 있고, 광주광역시에 있는 공원에 시비가 세워졌다.
소월과 함께 한국 서정시의 대표 시인으로 불리는 김영랑은 1903년 전라남도 강진에서 태어났다.
지주의 아들로 태어난 영랑은 여유 있는 생활을 유지하면서 한 생애를 고향 강진에서 지내면서 시 창작에 전념하였다.
1916년 휘문의숙에 입학한 영랑은 월탄, 노작, 지용, 상허 등의 선후배들과 교류하면서 문학적 열정을 키워나갔다.
14세 때 부모의 뜻에 따라 조혼을 한 영랑은 이때 그의 아내의 죽음을 경험하게 되는데,
아내를 사별한 슬픔은 그의 초기시의 애상적 정조로 표현되기도 한다.
영랑은 1917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선언서를 구두 속에 감추고 고향으로 내려가다
일경에 체포되어 대구 형무소에서 6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1920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청산학원에 입학하여 평생의 문우인 용아 박용철을 만나게 된다.
성악을 공부하고자 했던 영랑은 부친의 만류로 영문학을 전공하였으며,
이때 키이츠, 셸리 등 낭만 시인을 접하면서 그의 시의 서정적이고 낭만적인 경향이 형성되기 시작한다.
1923년 관동대진재로 인해 귀향한 영랑은 정원에 수백 그루의 목련을 심어 완상하며,
현금과 북 등의 악기를 직접 연주하는 한편, 민요가락에 심취하고 당대의 명창인 임방울과 이화중선의 노랫가락을 즐겼다.
이러한 민요의 전통적인 율조나 정서에 대한 탐닉은 그의 초기 시에서 애상적 정조와 리듬에 대한 의식으로 표출된다.
시 「북」에는 이러한 ‘소리’로 상징되는 전통 미학적 세계에 대한 지향이 강하게 드러나 있다.
귀국 후 박용철과의 서신을 교환하며 습작을 계속하던 영랑은 그와 더불어 《시문학》을 창간하게 된다.
《시문학》은 ‘민족 언어의 완성’이라는 과제를 내걸고 식민지 상황 하에서 위기에 놓인 모국어를 문학적 언어로 되살리고자 하였다.
영랑은 《시문학》과 박용철이 간행한 문예지인 《문학》에 「동백닙에 빛나는 마음」과 「모란이 피기까지는」 등
37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활발하게 활동한다. 친구인 박용철에 의해 1935년 첫시집『영랑시집』이 출간되었다.
'북쪽에는 소월이 있고 남쪽에는 영랑이 있다.'는 말 그대로 영랑 김윤식 시인은 우리나라 대표적인 서정시인.
영랑은 서정시인이자 또 일제때 독립운동에도 참여했던 민족시인이다. 그래서 영랑의 시는 서정시에 머무르지 않는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당시 휘문중학교에 다니던 열여섯살 영랑은 구두밑창에 독립선언문을 숨겨 강진에 내려와
만세운동을 준비중 왜경에 발각돼 6개월의 옥고를 치뤘는가 하면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도 거부한 올 곧은 민족시인.
우리 남도인이 용아 박용철 시인과 함께 영랑 시인을 추앙하며 자랑스러워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의 산실인 이 곳 영랑생가는 모란으로 뒤덮여 있다. 대문앞에도 마당앞에도 사랑채앞에도 돌담밑에도 온통 모란이다.
그런데 나는 이 곳을 여러차례 들렀지만 한 번도 피어 있는 모란을 본 일이 없다.
모란이 지고 말면 그 뿐 내 한해는 다 가고 말아 그래서 영랑이 하냥 섭섭해 울었다는 그 삼백예순날에만 찾아 갔던 모양이다.
문득 생각나 찾아 간 영랑 생가. 모란이 활짝 피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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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노래, 꽃!
진솔이 님 자쿠 정들라 해서 큰일이네요.
진솔이님 정말 감사합니다. 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는 젤 좋아하는 시입니다.
모란과 멋진노래 잘 감상합니다.
아카시아에이어 요즘 모란 사랑에 빠졌네요.담엔 찔레꽃이예요.ㅎㅎ
진솔님 제가 오늘 섹소폰 연주회 구경갔다가
산속 펜션에서 지인부부동반들과 한잔하고 놀다가 왔어요.
나중에 이곳에 휴가도 와보세요.^^
모란이 피기까지,, 우리가 좋아하는 시정시.
함께 올려 준 모란꽃이 정말 멋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