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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불완전한 사랑과 관련해서 내가 너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도저히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없는 것은 사람들이 스스로 위안을 얻고자 나를 사랑하는 일에 얼마나 심하게 미혹당할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너는 내 종들이 나를 불완전하게 사랑할 때 나를 사랑한다기보다 이 위안을 더 사랑하고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네가 이처럼 불완전한 상태를 확인하려면 우선 사람들이 영적 또는 물질적 위안거리를 빼앗겼을 때 그들을 가만히 지켜보아라. 예를 들어 세속적인 사람은 영화를 누릴 당시에는 간혹 경건하게 행동을 하기도 하지만, 일단 시련(내가 그들의 선익을 위해 보내는)이 닥치면 이제까지 해오던 별볼일 없는 선행을 두고도 마음이 흔들린다. 그래서 네가 그들에게 “무슨 일로 불안해하느냐?"고 물으면 이렇게 대답한다. “내가 여지껏 해오던 선행이 효력을 상실한 것 같다. 그래서 그 일이 이전하고 똑같은 마음과 정신으로 이루어지질 않는다. 이유는 이러이러한 시련이 내 앞길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모르면 몰라도 이전에는 훨씬 많은 선행을 했고, 하면서도 지금보다는 마음이 훨씬 평화롭고 차분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정작 그들을 속이고 있는 것은 그들의 이기적인 자기 만족인 것이다.
시련이 범인이라든가 그들이 이전보다 덜 사랑하거나 덜 실천한다든가 하는 말은 틀린 말이다. 그들이 시련기에 행하는 일 역시 위안을 누리던 이전과 다름없는 가치를 지닌다. 아니, 그들이 인내심만 발휘한다면 오히려 더 큰 가치를 지닐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런 결과가 생기는 이유는 그들이 번영기에 누리던 자기 만족 때문이다. 그들은 그때 꽤나 상당한 덕행으로 나를 사랑했고, 그래서 별다른 노력 없이도 자기네 마음을 달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만족감을 얻던 어떤 것을 박탈당한 지금, 그들 눈에는 이제까지 그들이 자기네 노력으로 얻던 만족감이 모조리 사라져 버린 것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않은 것이다.
그들은 정원이 주는 기쁨 때문에 정원을 가꾸면서 만족을 얻는 사람이나 같다. 그 사람 눈에는 자신이 얻는 만족감이 일에서 오는 것 처럼 보이지만 실상 그의 만족감은 정원이 그에게 주는 기쁨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가 일에서라기보다 정원에서 더 많은 기쁨을 얻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정원이 사라지면 당연히 기쁨을 빼앗겼다고 느낄테니 말이다. 만일 그의 주된 기쁨이 일하는 데 있었다면 기쁨을 잃지 않아야 맞다. 왜냐하면 이 사람이 정원을 빼앗긴 것처럼 영화는 사라질 수 있다고 하더라도, 본인이 스스로 작정하지 않는한 선행을 실천하지 못하는 일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사람들은 자신의 이기적인 정열때문에 하는 일에 미혹당하고 있는 셈이다. 그들이 곧잘 이런 말을 하는 이유도 여기 있다. “내가 알기로 나는 이런 시련을 당하기 전까지만 해도 지금보다 훨씬 일을 잘했고 거기에서 받은 위안도 훨씬 컸다. 선행은 그처럼 할 만한 가치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래봤자 내게 아무런 이익도 없고, 눈곱만한 기쁨도 없는 실정이다.” 그들의 생각이나 말은 모두 잘못된 것이다. 만일 그들이 선을 행하면서 얻은 기쁨이 덕과 직결되는 그 선에 대한 사랑에서 나온 것이었다면 그들은 기쁨을 잃는 일이 결코 없었을 것이다. 아니, 실제로 그들의 기쁨은 더욱 커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행하는 선행은 그들 자신의 육감적인 안정에 기초를 두고 있었고, 그래서 기쁨이 그들을 저버리고 사라진 것이다.
바로 이것이 일반 사람이 자기네 선행에 미혹당하는 경위다. 그러니까 그들을 속이고 있는 것은 그들 자신, 그들의 이기적이고 육정적인 자기 만족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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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 종들은 그들의 사랑이 비록 불완전하다 할지라도 내게서 얻는 위안과 자기 만족 때문이 아니라 사랑 그 자체를 위해 나를 찾고 사랑한다. 그리고 나는 그 모든 선행에 보답한다. 보상의 크기는 받는 자의 사랑에 준한다. 나는 기도중에 영적 위안을 내리되 이번에는 이런 방법으로, 다음에는 다른 방법으로 내린다. 다만 영혼이 이 위안을 어리석게 받아들여 나보다 내 선물에 더 큰 관심을 보이는 것은 내 의향에서 빗나간 소치다. 나는 그녀가 자격이 없음에도 사랑어린 자애 때문에 선물을 준 것이기에 그녀는 누리는 위안의 기쁨보다 이 사랑어린 자애에 더 깊은 관심을 보여야 마땅하다. 만일 그녀가 어리석게도 자신에 대한 나의 사랑은 생각하지 않고 오직 자기 만족만을 누리려 든다면, 그녀는 지금 내가 이야기 하고 있는 미혹과 피해만 거두어들이고 말 것이다.
무엇보다도 우선 그녀는 자신의 위안에 속고 있는 까닭에 자기가 추구하는 것이 이것이요, 만족을 얻는 자리도 이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그녀가 어떤 길에서 자신에게 주사된 나의 위안과 초대를 체험했다가 그 길이 끝나게 되면 이제까지 왔던 길을 되돌아가 동일한 것을 다시 찾으려 한다. 그러나 나는 늘 같은 방식으로 베풀지 않는다. 그것은 나에게 달리 베풀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내가 베푸는 방법으로는 내 선의에도 어울리고 영혼의 필요에도 부합되는 것들이 아주 많다. 그럼에도 그녀는 어리석게도 내 선물을 한 가지 방법으로만 추구함으로써 성령에게 법칙을 강요하기나 하려는 듯이 덤빈다.
그러나 이것은 올바른 처신 방법이 아니다. 그녀는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다리를 용감하게 건너야 하며, 그러다가 나의 선의가 기쁘게 선물을 제공하는 자리에서, 제공하는 때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내가 그 선물을 되찾아 간다면 그것은 그녀가 진실로 나를 찾고 자신의 자기 만족과는 무관하게 나를 사랑하며 내 자애를, 그녀가 발견하는 그 어떤 즐거움보다 훨씬 소중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데 목적이 있는만큼, 미움에서 비롯된 일이 아니라 사랑에서 비롯된 일인 것이다. 만일 그녀가 반대로 내 방식이 아닌 자신의 방식대로 오직 자기 만족만을 쫓아 달린다면, 그녀의 내적인 눈에서 그 즐거움의 목표가 사라진 것처럼 보일 때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혼란과 고통을 겪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위안을 선택하는 자들이 당하는 처지다. 그들이 일단 그처럼 고정된 방식으로 내 안에서 자기 만족을 찾게 되면 그후로도 줄곧 그런 방식을 밀고 나가려 한다. 그러다가 내가 그와는 다른 방법으로 그들을 찾아가면 그들은 내 방문을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않은 채 오로지 자신이 상상해 온 것만을 갈구하는 지독한 어리석음을 범하기도 한다.
이것은 그들이 내 안에서 발견하는 영적 기쁨에 대한 이기적 욕망이 유발한 그릇된 산물이다. 하지만 그들은 미혹당하고 있다. 언제나 똑같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영혼은 꼼짝하지 않고 서 있을 수는 없다. 앞으로 나아가든가 뒤로 돌아간다. 마찬가지로 마음도 내 안에서 꼼짝하지 않고 서서 내 선이 베푸는 더 많은 것을 누리지 않고 오직 한 가지 기쁨만을 맛볼 수 없다. 그리고 나는 이런 선물들을 아주 다양한 방법으로 제공한다. 나는 때로 영적 즐거움을 자기 만족으로 제공한다. 그런가 하면 때로는 죄에 대한 반감과 통회를 제공하여 당사자가 내적으로 시련당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만들기도 한다. 나는 때때로 영혼이 나의 현존을 감지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그녀 안에 머물기도 한다. 그리고 때로는 나의 '진리', 육화된 말씀이 그녀의 마음의 눈에 다양한 형태로 모습을 드러내게 하되, 그녀가 그와 더불어 이같은 영상에 반드시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는 기쁨과 열정을 감지하지 못하게 하는 수도 있다. 그런가 하면 그녀가 아무것도 보지 못하면서도 엄청난 기쁨을 맛보도록 하기도 한다. 나는 이 모든 일을 사랑때문에, 그러니까 그녀를 받쳐주고 그녀가 겸손의 덕과 인내를 키우도록 만들고 그녀가 나에게 법칙을 강요하려 들어서는 안 되며 그녀의 목표는 위안이 아니라 나를 토대로 하여 세우는 성덕에 있다는 사실을 가르치기 위해 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녀는 때를 가리지 말고 내가 베푸는 그 사랑어린 애정을 겸손하게 받아들이고, 내가 그녀의 안녕을 위해 긴요하거나 그녀를 위대한 완덕으로 이끄는 데 필요해서 베풀고 있다는 사실을 굳은 신앙으로 믿어야 한다.
그러자면 그녀는 늘 겸손해야 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내 자애에서 나오는 사랑 안에 머물러야 하며, 그 안에서 기쁨과 기쁨의 소멸을 자신의 뜻이 아닌 내 뜻의 표현으로 수용해야 한다. 이것이 미혹을 피하고 만사를 나에게서 나오는 사랑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방법이다. 나는 그들의 목표요, 그들은 나의 온유한 뜻을 토대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에나의 카타리나 '대화' / 성찬성 옮김 / 바오로딸 201-205p
첫댓글 그러자면 그녀는 늘 겸손해야 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내 자애에서 나오는 사랑 안에 머물러야 하며, 그 안에서 기쁨과 기쁨의 소멸을 자신의 뜻이 아닌 내 뜻의 표현으로 수용해야 한다. 이것이 미혹을 피하고 만사를 나에게서 나오는 사랑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방법이 다. 나는 그들의 목표요, 그들은 나의 온유한 뜻을 토대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