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왕인박사의 비를 보고
왕인박사 비
그 중에서도 일본에 천자문 등을 전하여 준 왕인박사의 비를 꼭 봐야 되겠다는 각오로 동물원과 키요미즈 관음당은 스쳐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숲속의 산책길을 지도를 양손에 들고 왕인박사 비를 이리저리 찾아보았지만 쉽게 찾을 수가 없었다. 근근이 찾은 조그만 안내판에 표시된 위치를 보고 찾아 돌아다니다 근처에서 영업하는 사람이나 공원관리에 종사하는 사람, 경찰에게까지 물어보아도 아무도 모른다. 우리들의 의견도 엇갈렸다. 손대장은 우리의 이야기에 별 신경을 쓰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이리 저리 가더니 드디어 찾아내었다. 공원의 나무숲 사이에 2평도 채 안 되는 부지에 나지막한 대를 세우고 그 위에 높이가 1m 남짓한 조그만 비를 세워두었다. 실망스러웠다. 주위에 있는 사람조차도 그 이름이나 위치를 모르는 것이 무리가 아니었다. 우리에겐 자랑스러운 조상이지만 일본 사람들은 별로 무게 있게 생각하지 않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낙동강 하구의 김 양식장을 비롯하여 왜놈들의 발길이 닿았던 곳곳에 그들이 갖가지 공적비를 세워둔 것과 비교하면 너무 푸대접이다.
이곳에서 남쪽으로 100여m 쯤 내려온 곳에 사이고 다까모리의 동상이 있었다. 그는 일본 근대화의 초석이 된 메이지유신의 핵심 인물로 일본의 근대화를 위해 조선을 침략해야 한다는 정한론을 주장하여 일본에서는 위대한 인물로 숭앙을 받고 있으나 우리에게는 달갑잖은 인물이다. 얼마 전 K-1인가 하는 격투기에서 최홍만과 싸우던 일본 쓰모의 패자 아케보노를 닮은 인상으로 배가 나온 뚱뚱하고 작달막한 몸매, 크고 둥글둥글하고 큰 머리통과 살찐 얼굴에 부리부리한 눈, 영판 일본 사무라이의 상징처럼 보였다. 목욕가운 비슷한 옷에 칼까지 차고 있다. 요즘 같으면 비곗덩어리라고 손가락질이나 받음직 하였다.
공원 곳곳에는 소풍객들이 끼리끼리 모여서 점심을 먹기 시작한지도 벌써 이었다.
(라) 우에노 시장에서 회덮밥을 먹다.
우리는 길을 건너서 재래시장인 우에로 시장을 찾아갔다. 좁은 골목길의 양편으로 두어 평정도 되는 작은 가게들이 빽빽하게 줄지어 있는데 그 좁은 길에는 사람이 미어지게 많다. 오월 초순의 한낮의 기온은 상당히 높아 땀도 흐르는데 사람에 밀려간다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었다. 온갖 먹을거리와 잡화 부식품들이 있었다. 아이스크림가게를 보고도 접근할 수 없어 살 수가 없었다. 회계를 담당한 춘길이가 다음에 보이면 하나씩 사준다고 했지만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옷 종류도 우리의 시장과 모양이나 가격 면에서 별 차이를 느끼지 못해 구태여 구입할 필요가 없었다. 시장 골목을 한 바퀴 돈 다음 우리는 식당을 지날 때 메뉴판에 일본 글씨로 쓰인 ‘사시미’가 마음에 들어 그 식당에 들어갔다. 우리나라 학교 복도의 폭 정도 쯤 되고 길이는 6-7m 정도인 좁은 식당의 아래층에는 손님이 만원이어서 우리는 2층으로 올라갔다. 자리를 잡고 650¥짜리 사시미 정식(회덮밥?)을 시켰더니 흰 쌀밥에 손가락만한 길이에 폭은 손가락보다 조금 넓은 참치 5쪽, 된장국, 등 5접시인가의 식단이 나왔다. 먹으니 요기는 충분히 되었다.
식당을 나와 가까운 거리에 있는 우에노역으로 가서 가방을 찾아야 했다. 손대장은 여러 개의 출입구 가운데 어떻게 잘 기억하고 있었는지 길을 한참을 돌아 여러 개의 출입구 중에서 가방을 보관해 둔 곳을 정확히 찾아낸다. 역구내로 입장하는 것도 표가 없으면 안 되는데 가방 찾으러 간다는 취지의 말을 안내원에게 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니 입장시켜 준다. 그리고 나리따 공항행 열차를 탔다.
(바) 종점은 나리따공항역이다.
약 90분이라는 긴 시간 중 70분은 잠 속에서 나머지 시간은 눈을 뜨고 열차 여행을 했다. 자다가 눈을 뜨니 열차가 쉬는데 기둥에 쓰인 글씨를 보니 なりた(나리따)였다. 급히 ‘여기가 나리따다’하는 소리에 모두 눈을 뜨고 보니 틀림없이 ‘나리따’이다. 모두 가방을 들고 급히 내렸다. 내려서 보니 뭔가 이상하다. 올 때 지났던 공항역과는 분위기가 달랐다. 또 종점과 공항역이라는 분위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역무원에게 물으니 공항은 두 역을 더 가야 있는데 20분 뒤에 오는 열차를 타고 가라고 일러 준다. 알고 보니 이곳은 ‘나리따’라는 마을의 역이고 공항 역은 이름이 ‘나리따공항’이다.
(사) 30만 피트 상공에서 일몰을 보다.
이런 곡절을 겪고 나리따 공항에 도착하여 안내판을 따라 3층까지 올라가서 출국수속을 문의하니 안내원이 제1터미널로 가라고 일러준다. 이곳은 제2터미널로 한국행 터미널이 아니란다. 혹시 시간에 늦을까봐 종종걸음으로 제1터미널로 가는 버스가 대기하고 있는 곳에 도착하니 버스는 곧 출발하였다. 1,2 터미널 사이는 상당히 먼 거리였다.
우리의 떠남을 도꾜 시민 전체가 아쉬워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던 모양이다. 배낭을 수하물 보관소에 보관할 때 보관소를 찾는 데 애를 먹인 일, 또 열쇠를 잘 못 잠가 담당 기사를 부르고 보관료를 다시 받아내고 하게 하여 욕을 보인 일, 공항에 오는 도중 역을 잘 못 알아 두 정거장이나 미리 내렸던 일, 또 제2터미널로 잘 못 가서 뛰고 달리고 해서 1터미널에 도착한 일 등, 시간 여유 있게 왔기에 다행이지 만약 그렇지 않았더라면 경제적 시간적 막대한 손실을……. 생각만 하여도 끔직하다. 이렇게 집요하게 붙잡는 도꾜 시민전체의 간절한 손길을 뿌리치고 18시10분에 SW29편 항공기를 창공에 올렸다.
길거리에서 어느 누구라도 붙잡고 아무 망설임이나 두려움이 없이 길을 물어도 될 정도로 친절했던 일본 국민, 길거리 어느 구석이나 보판 어느 곳을 둘러 봐도 조금도 허술하게 아스팔트 포장이나 시공한 곳이라고는 찾을 수 없고 공원이나 거리의 나무 하나 하나도 단정히 정지 정돈되지 않은 것을 남겨 두지 않는 철저한 국민성의 나라, 조상들 중 큰 업적을 남긴 사람은 신격화하여 신사에 모셔놓고 존경하고 참배할 정도로 조상과 전통을 존중하고 잘 유지하고 있는 나라, 나름대로의 긴 역사를 간직하고 상당히 높은 수준의 예술과 문화를 잘 보존하며 이들을 통하여 국민의 자부심과 애국심을 고취하는 나라, 선진국이란 말을 경제력만으로 획득한 졸부의 나라가 아님을 실감할 수 있는 나라, 이러한 인식을 가슴에 담은 채 사랑하는 내 조국을 향해 공중에 몸을 띄운 것이다.
기내 좌석을 잡고 보니 손, 양, 김은 뒷줄에, 나만 혼자 앞줄에 앉았다. 내 좌석은 가운데 통로 쪽이었고 창 쪽 두 좌석은 아주머니 두 분이 차지하였다. 모녀지간 이란다. 북구 학장동 사람들인데 일본에 있는 아들집을 다녀오는 길이란다. 아들은 아직 30이전인데 일본에 어학연수 차 갔다가 일본 처녀와 결혼하고 그 곳에서 한국계 회사에 취직하여 잘 살고 있다는데, 이야기 도중 어깨에 상당히 힘이 들어있음이 느껴진다.
기내 방송이 3만 피트 상공을 날고 있음을 알린 얼마쯤 뒤에 창밖을 보고 탄성을 지를 뻔 했다. 3만 피트 상공에서 일몰을 본 것이다. 시뻘건 해가 수평선 위에 걸쳐져 있다. 엄청나게 벌겋고 크다고나 할까? 무어라고 표현하기 어려운 광경이다. 순간적인 흥분에 미쳐 자세히 살필 겨를도 없이 옆 아주머니의 등을 쿡쿡 건드려 창 쪽으로 손가락질을 했다. 황홀한 광경도 흥분도 그것으로 끝이었다. 흑갈색의 별로 아름답지 못한 나이든 여인의 머리가 좁은 창문을 가득 채워버린 것이다. 후회는 늦었고 비켜달랄 수도 없다. 잠시 뒤 머리가 치워졌을 때는 태양마저 사라지고 없었다. 친절도 탈이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비행기는 하강을 시작하고 정다운 우리의 땅이 어렴풋이 보인다. 손관선 친구의 치밀한 계획, 상당한 일어실력과 헌신적 노력, 그리고 일행 한 사람 한 사람의 열성적 협조의 결과이다. 앞으로 자손만대까지 우리와 싸우고 경쟁하며 그러면서도 협력하면서 살아가야 할 숙명을 가진 이웃나라 일본의 한 구석 중의 더 작은 한 구석에 대한 이해의 한 조각을 얻었다는 것이 소중한 소득일 것이다. 예고된 시각인 20시 35분에는 김해 공항에서 어려운 일을 해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가족을 만날 수 있었다. 모두의 가슴속에 자부심과 우정이 한 단계 높아졌다. 끝
첫댓글 우리끼리만 보관해 두기 위하여 정리한 글인데 혹시나 관심있는 분이 있을까 하여 올렸습니다. 별 내용없은 글을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잘 읽었어요. 우리 나이에 배낭 여행을 하고 그 기록을 이렇게 꼼꼼하게 작성하여 올려주신 지호님에게 감사드립니다. 감히 말하건대 우리 카페 개설이래 최대 걸작인가 싶소이다. 우리 모두의 안목을 여러 면에서 up 해 주었소.
멀고도 가까운 그 나라, 그래도 배울것은 배우고 받아들여 그 나라를 능가하는 우리나라가 되어야지요. 참 좋은 여행, 정신적인 문화까지 많은 것을 가져 오셨으리라 생각되며 동행하신 분들께도 박수를 보내 드립니다. 좋은 여행기와 사진 잘 보았습니다.
오래 전에 일본사람들이 한국에 여행왔다가 여행기를 남기는 것을 보고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나, 여행을 별로 많이 해 보지도 않았고 또 여행기를 만들어 보지도 않았는데 남계와 같이 여행했을 때 남계의 하는 것을 보고 배운 것인데 이번에 기회가 생겨 만들어 본 것이라네. 그러니 남계가 나의 스승님이라네
蘭谷님의 여행기9회 까지 잘 보았습니다. 글로써 나타낸다는 것이 생각보다는 쉽지 않을 터인데, 빠뜨리지 않고. 현장감있고 흥미롭게 잘 나타나 있어,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 열정에 박수를 보내며,또 다시 기대합니다. 즐거운 나날 되시고 항상 행운이 깃드시길 _()_ 興이가
7순을 눈앞에 두고도 산다는 명분으로 이리저리 헤집고 다니다보니, 까페에 들리지를 못하다가 오늘에야 들어와 지호지조님의 동경 배낭 여행기를 보고 무척 흥미를 느꼈답니다. 여행을 기록으로 남긴다는 것은 남에게 알린다는 의미도 있지만 자신에게는 값진 역사라고 할 수 있지요. 일본이란(나라와 국민) 우리들이 느끼는 것과 같이 보이지만 전혀 다를 때가 많음을 참고하십시오. 20년 간 일본인을 상대로 장사를 하고 있는 나에게는 이번의 배낭여행이 무척 부럽습니다. 지호지조님의 건투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