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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로의 계단 -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
하나님의 아들밖에는 아무도 우리의 구속을 완성시킬 수 없나니, 이는 아버지의 품에 있는 자만이 능히 아버지를 나타낼 수 있음이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의 높이와 깊이를 아는 자라야, 그것을 드러낼 수 있다. 타락한 인류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드리신 무한한 희생이 아니고는, 잃어버린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할 것이 없는 것이다.(SC 14.2)
우리의 구속을 위하여 갚으신 대가 곧, 그 아들을 주사 우리를 위하여 죽게 하신 하늘 아버지의 희생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어떠한 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의 고상한 관념을, 우리로 가지게 하는 것이다.
성신의 감동을 받은 사도 ‘요한’은 멸망할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높이와 깊이와 넓이를 보았을 때에, 찬탄과 존경의 마음이 충만하여 이 사랑의 위대함과 그윽함을, 표현할 적당한 언사를 찾지 못하여 세상을 향하여 “보라”고 부르짖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요일3:1).
이것은 사람을 얼마나 가치 있게 보심인가! 범죄로 말미암아서는 인류가 사단의 백성이 되었으나, 그리스도의 속죄의 희생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아담’의 자손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인성을 쓰심으로, 인생을 고상하게 하셨다.
타락한 인류가 그리스도로 더불어 연합함으로 과연, “하나님의 자녀”라는 명분을 얻기에 합당한 처지에 놓였다.(SC 15.1) 시인이나 박물학자들은 천연계에 관하여, 여러 가지로 말할 것이 있을 것이다. 이 땅의 미(美)를 가장 높은 감상(鑑賞)으로, 즐길 자는 그리스도인이다. 왜냐하면 그는 그것들이 자기의 하늘 아버지가 손수 만드신 것임을 알고, 꽃과 관목(灌木)과 수목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 때문이다.
산과 골짜기와 강과 바다가 하나님의 인류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라고 인정하지 않는 자는, 아무라도 그것들에 대한 깊은 뜻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SC 87.1)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제공하여 주신, 마음에 생각할 명랑한 제목들에 대하여 감사하자.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복된 보증들을 모아 가지고 그것들을 늘 바라보자.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을 사단의 권세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의 신성을 인성으로 옷 입으시고 그 아버지의 보좌를 떠나신 것과, 그가 우리를 위하여 승리하심으로 인류에게 하늘 문을 열어 주시고,
하나님께서 그분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알현실(謁見室:하나님을 뵈옵는 기도의 자리)을 사람에게 보여 주시는 것과— 타락한 인류가 죄로 인하여 빠진 그 멸망의 구렁텅이에서 건져 내사, 다시 무한하신 하나님께로 연합하게 하시는 것과, 또 인류가 우리 구주에 대한 신앙을 시험하는 그 시험을 견디고,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고 그의 보좌에 함께 앉기까지 높임을 받는 것—
이러한 것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깊이 묵상하기를 원하시는 제목들이다.(SC 118.1)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제자들에게 무성하게 자라서, 천부께서 부여하신 아담한 미(美)를 빛내는 들의 꽃들은 인류에게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가르치셨다. 그는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마6:28)고 말씀하셨다.
이 들의 꽃들의 미와 아담함은, ‘솔로몬’의 영화보다도 훨씬 뛰어난다. 예술적 기술을 다하여 만든 가장 화려한 성장(盛裝:화려한 모습)이라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꽃들의 자연적인 우아(優雅)와, 눈부신 미(美)와는 도무지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마 6:30)라고 하셨다. 신령한 예술가이신 하나님께서 하루 동안에 없어지는 단순한 꽃에게도, 아름다운 여러 가지 색채로 단장하게 하셨거든 하물며 그분의 형상으로 지으신, 사람들을 위하여서야 얼마나 더욱 크게 돌보실 것인가?
이 그리스도의 교훈은 믿음이 없는 자들의 염려하는 생각과 번민과 의심을, 책하는 견책이 되는 것이다.(SC 123.2) 말 한 마디, 행동 하나하나는 그리스도를 위한 사업이다.
이 사업에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있으며, 인간에 대한 믿음 또한 있게 되는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목숨까지 바치신 영혼들에 대한, 믿음이 없으셨다면 정녕 그분께서는 인류를 위하여, 그분의 생명을 내놓으시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분께서 인류에게 표하신 사랑에 수많은 인간들이, 화답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분은 알고 계셨다. 그리스도께서는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을 열망하는 마음은 하나님의 목소리를 식별하게 할 것이다. 그분의 은혜와 사랑을 받고도 그에 응답하지 않는 영혼들에게는 하나님께서도 응답하시지 않으신다. 그분께서는 영혼들이 응답하기를 갈망하신다.(LHU 221.4)
구원의 가치를 완전히 깨닫기 위해서는, 거기에 지불된 값을 이해함이 필요하다.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한 제한된 인식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속죄의 위대한 사업을 경하게[가볍게] 평가한다. 인간 구원의 영광스러운 계획은 성부의 무한하신 사랑을 통하여 성취되었다.
이 거룩한 계획을 통하여, 우리는 타락한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놀라운 표현을 본다.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을 선물로 주심에 나타난 그러한 사랑은 거룩한 천사들을 놀라게 하였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이 구주는 아버지의 영광의 광채요, 그 본체의 형상이셨다. 그분은 거룩한 위엄, 완전, 그리고 탁월함을 소유하셨다. 그분은 하나님과 동등하셨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골1:19).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6-8).(1TT 219.1)
하나님은 자비로우시다. 그분의 요구는 합리적이며, 그분의 품성의 선하심과 자비하심에 일치된다. 안식일의 목적은, 모든 인류에게 유익을 주기 위함이다. 사람이 안식일에 맞추어지도록, 창조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안식일이 사람의 창조 후에 사람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제정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엿새 동안 세상을 만드신 후 안식하셨으며, 창조하시고 만드시던 모든 작업으로부터 안식하신 그 날을, 거룩하게 하시고 축복하셨다. 그분은 사람이 노동에서 안식하도록 하셨고, 또한 사람이 아래로 지상을 내려 보며 위로 하늘을 쳐다볼 때,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들을 엿새 동안창조하시고, 이레째 되는 날 안식하셨다는 것을 상기하게 하셨다.
그리하여 그가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에 대한 이 실체적인 증거를 볼 때, 그의 마음이 그를 창조하신 분에 대한 사랑과 경외심으로 차도록, 이 특별한 날을 구별하셨다.(1TT 279.1)
남녀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지 않고서는, 타락한 식욕과 방탕한 정욕을 자행함으로, 자연 법칙을 범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분은 우리로 하여금 그분이 우리 몸에, 세우신 법칙을 범하는 우리의 죄를 보도록, 건강 개혁의 빛을 우리 위에 비치게 허락하셨다.
우리의 모든 기쁨과 고난은 자연법칙을 순종하느냐, 범하느냐에 달려 있다. 우리의 은혜로운 하늘 아버지께서는, 그분이 설립하신 법칙을 어떤 이들은 알면서, 또한 다른 많은 이들은 모르고 범하며, 살고 있는 인간의 비참한 상태를 보신다.
그리고 인류에 대한 사랑과 동정 가운데, 빛이 건강개혁 위에 비치도록 하신다. 그분은 그분의 계명과 그것을 범할 때 따를, 형벌을 공표하셔서 모든 자들이 배우고, 자연법칙에 조화되게 사는 일에 주의하게 하신다.
그분께서는 그분의 계명을 매우 명백하게 공포하시고 극히 뛰어나게 하시므로, 그것은 마치 산 위에 세워진 도시와 같다. 하고자만 한다면,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 백치들이나 책임을 모면할 것이다. 자연 법칙을 명백히 하고 그에 순종하도록 장려하는 것이 주님의 오심을 위하여 한 백성을 준비시키는 세째 천사의 기별에 동반하는 사업이다.(1TT 320.2)
'바울'은 주님의 방법을 채택하였음— 그(바울)는 이방인들에게 그리스도를 저들의 유일한 구원의 소망으로 증거 하였으나, 율법에 관해서는 처음부터 어떤 뚜렷한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우리의 세상을 위해서 주신 하나님의 선물로, 증거 하므로 저희 마음이 뜨거워지고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 하기 위하여 무한한 희생의 대가를 치르신, 구주의 사업을 깨우쳐 준 후에 그는 가장 웅변적인 단순성으로, 유대인들이나 이방인들이 모두 주님께 마음을 바침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게 하신, 전 인류를 위한 사랑을 증거 했다.
저들의 마음이 녹아지고 누그러져서 저들이 주님께 저희 자신을 바치게 될 때, ‘바울’은 저들의 순종의 시금석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제시하였다 영혼들을 구원하는 주님의 방법을 채택한 것이, 바로 ‘바울’의 일하는 방법이었다.(1895)(Ev 230.4/전도)
이 세상에 굶주림이 이를 것이며 개국 이래로, 결코 없었던 환난의 때가 오고야 말 것이다. 전쟁과 전쟁에 대한 소문이 있을 것이며, 사람들의 얼굴은 창백하게 될 것이다. 그대들은 고통을 당하게 될는지 모르며, 때때로 굶주리는 쓰라림을 맛보게 될는지 모르나, 하나님께서는 고통 가운데 있는 그대들을, 잊지 않으실 것이다.
주님께서는 그대들의 믿음을 시험하실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즐겁게 하기 위하여, 살아서는 안 된다.
우리가 이 지상에 살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나타내기 위함이며, 인류에게 주님과 주님의 능력을 대표하기 위함이다.— 원고37,1894년(Ev 240.4) 믿는 여성들이 영혼들에 대한 책임을 느낄 때 — 나는 그대처럼 경험이 있는 여성이 하나님의 지도를 따라, 주님을 위하여 여성들이 연합해서, 할 수 있는 분야의 사업을 착수하는데, 그대의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고통을 당하고 있는 인류에게 봉사하고, 저들을 향상시키며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단순하게 믿는 믿음을 갖는 방법을, 가르치는 사업에 분명히 많은 여성들이 참여해야 한다. 영혼들이 저들 자신을 주 예수님께 바치고 완전히 복종시킬 때에, 저들은 교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Ev 465.2)
인류에게 대한 우리 의무라는 큰 과제는 심각하며, 가장 큰 분량의 선을 성취함에 있어서 일하는 방법을 결정하는 데는, 하나님의 은혜가 크게 요구된다.
누구나 다 가장 미천한 계급의 사람들을 위하여 수고함으로, 저희 사업을 시작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로지 이런 부류의 사람들만을 위하여 헌신하라고, 그분의 일꾼들에게 교육과 훈련을 받도록 요구하지 않으신다.(Ev 548.2) 그리스도의 말씀 가운데는, 중요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 산상보훈은 위대한 작품일 뿐만 아니라 너무나 단순하여, 어린 아이까지라도 오해하지 않고 배울 수 있게 하였다.
팔복을 교훈하신 산은 그리스도께서 언제나 서 계셨던, 영적수준에 대한 하나의 상징이다. 주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아 말씀하신 것이며, 주님께서는 천국의 권위를 가지시고 말씀하셨다. 주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6:63)고 말씀하셨다.
주님의 교훈 가운데는 인간의 고상한 포부와 가장 탁월한 연구로도, 비교되지 않는 고결하고 심원한 진리로 가득 차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인류에게 다가오고 있는 두려운 멸망에 대해서, 민감하셨으며 그분 자신의 의로써 영혼들을 구원하시고 소망에 대한, 절대적인 보장과 완전한 위안을 주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다.(CT 439.1)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정하신 가치에 대한 지식을, 가르치는 교육이야말로 건전하고 긴요한 것이다. 우리 학교의 학생들은 저희들 자신이 하나님의 목전에서, 가치 있는 존재이며 무한한 값으로 사신 바 되었음을 배워야 한다.
또한 저들은 인간의 모든 재능을 바르게 사용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저들은 그리스도를 옷 입어야 하며 저들의 모든 능력은, 주님의 사업을 위해서 끈기 있게 수고하는 데 사용될 것이다.(CT 451.3)
의사의 모본은 자기 자신의 가르침에 못지않게, 정의의 편에 서는 적극적인 힘이 되어야 한다. 개혁사업은 실천적인 생애로 자제력을 실증해 보이는, 남녀들을 부르고 있다. 원칙들을 실천하는 우리들의 생애가 무엇보다도, 가치 있는 것임을 깨우쳐 주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가 인류에게 상실한 왕권을 회복시켜 주고, 저들 스스로 자신을 지배하는 데 있어서 실제적인 증거를, 보여주도록 이 세상은 요구하고 있다. 그리스도와 같은 생애에 나타난 복음의 구원하는 능력에 대한, 지식처럼 이 세상이 간절히 요구하는 것은 없다(치료봉사132-3).(CT 491.3)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나태, 미숙한 정신, 둔한 사상 및 희미한 기억력으로, 만족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교사가 성공에 대한 단순한 평가를, 불만스럽게 여기고 지식을 얻는 일에 있어서 지속적인 근면의 필요를, 깨닫기를 바라신다.
우리 몸과 영혼은, 하나님께서 사신 것이므로 그분의 것이다. 그분께서는 우리들에게 재능을 주셨으며, 더욱 많은 재능을 얻을 수 있게 하셨고, 우리들이 모든 생활면에서 우리들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도 도울 수 있게 하셨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빌려주신 은사들을 계발시키고, 강화시키는 일은 각자가 해야 할 사명이다.
만약 모든 사람이 이 사실을 인식한다면, 우리 학교에서 또는 우리 교회들과 선교지에서 얼마나, 엄청난 변화들을 볼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빈약한 지식, 보잘것없는 달성으로 만족하며 간신히 합격할 수 있는 정도의, 실력으로 만족 해 한다.
‘다니엘’과 같은 인물, 영향력이 있는 인물, 인류에게 복이 되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일하므로 품성의 조화를 이룬 인물, 그러한 인물들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는 자들이 많지 않으며, 그 결과로써 이 시대에 크게 결핍되지 않은, 인재들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CT 506.1)
희생 제사들은 사람에게 그의 죄를 항상 상기시켜 주고, 자신의 죄에 대한 참회가 동반된 시인과 약속된 구속주를 믿는, 그의 신앙의 고백이 되도록 하나님에 의하여 제정되었다. 그것들은 타락한 인류에게 죽음을 가져온 것은 죄라는, 엄숙한 진리를 깊이 명심시키려고 제정되었다.
‘아담’에게 있어서 첫 희생 제사는, 가장 고통스러운 의식이었다. 그의 손은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생명을, 취하기 위해 들려져야만 하였다. 그는 이 때 죽음을, 처음으로 목도하였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께 순종하였었더라면 사람이나 짐승이, 죽는 일이 없었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무죄한 동물을 희생 제물로 죽이면서, 그는 자기의 죄가 흠 없는 하나님의 어린양의 피를, 흘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생각하고 떨었다. 이 장면을 보고 그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의 죽음밖에는, 속죄할 수 없는 그의 죄의 중함을 더욱 깊고, 더욱 생생하게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범죄 한 자를 구원하시려고 이처럼 놀라운 속전(贖錢:죄속함의 값)을 지불하려 하시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선하심에 경탄하였다. 한 희망의 별이 어둡고 무서운 장래를 비추어 주었으며, 미래의 완전한 황폐의 공포를 제거해 주었다.(PP 68.1)
그리스도께서 타락한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자신을 낮추신다는 것은 온 우주가 경탄할 일이었다. 별에서 별로, 세계에서 세계로 다니시면서 만물을 감독하시고, 그분의 섭리로 창조하신 광대한 우주의 각계각층의 존재들에게, 그들의 필요를 공급하시는 그분께서 그분의 영광을 떠나, 몸소 인성을 취하시기로 동의하신 것은 죄 없는 다른 세계들의, 지적 존재자들이 이해하기를 원하는 신비였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우리 세상에 오셨을 때에, 온 우주는 그분께서 말구유에서 ‘갈바리’에 이르기까지, 피 묻은 길을 한 걸음 한 걸음 옮겨 놓으시며, 가로지르시는 모습을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았다.
하늘은 그분이 받으신 능욕과 멸시를 주목하였고, 그것이 사단의 선동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알았다. 그들은 서로 적대적인 세력의, 역사(役事:선악의 대결)가 진행되는 것을 주목하였다. 사단은 인류에게 계속적으로 흑암과 슬픔과 고통을 가져다주려고, 노력하고 있었고 그리스도께서는 그것을 막고 계셨다. 그들은 빛과 어둠 사이의 투쟁이, 더욱 격렬해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시며 고통 중에, “다 이루었다”(요19:30)고 부르짖으실 때에 승리의 함성이, 온 하늘과 모든 세계에 울려 퍼졌다. 그렇게 오랫동안 이 세상에서 진행되어 오던, 대 쟁투의 승부가 그 때 판가름이 났다.
승리자는 그리스도이셨다. 그분의 죽음은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이 사람을 위하여 자기 부인과, 희생의 정신을 발휘하실 만큼 충분한 사랑을 가지셨는지에 대한, 의문을 풀어 주었다.
사단은 거짓말쟁이요 살인자로서의, 자신의 참 성격을 드러냈다. 하늘의 지적 존재자들을 통치하도록 허용되었었더라면, 사단은 자기의 권세 하에 있는 사람들을 다스렸던, 바로 그 동일한 정신을 나타내었을 것이라는 사실이 밝히 드러났다. 충성스러운 우주는 목소리를 합하여, 하나님의 통치를 찬양하였다.(PP 69.3)
‘아담’의 아들 ‘가인’과 ‘아벨’은, 품성이 현격하게 달랐다. ‘아벨’은 하나님께 충성하는 정신을 가졌으며, 타락한 인류를 다루시는 창조주의 공의와 자비를 보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구속의 소망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가인’은 반역의 감정을 품었으며, ‘아담’의 죄로 인하여 땅과 인류에게 선고된 저주 때문에, 하나님께 대하여 불평하였다. 그는 자신의 마음이 사단을 타락으로 이끈 동일한 방향으로, 흐르도록 허용하였다. 그는 자기 찬양의 갈망과, 하나님의 공의와 권위에 대한 의심을 품었다.(PP 71.1)
첫 살인자의 생명을 취하지 않으심으로 하나님께서는, 온 우주 앞에 대 쟁투에 관계가 있는 한 교훈을 제시하셨다. ‘가인’과 그의 후손들의 어두운 역사는, 죄인들을 영원히 살게 하여 하나님께 대한 반역을 계속하도록 허락한다면, 그 결과가 어떠했을 지에 대한 예증이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은 악인들을 더 그들의 악행에 담대하게 만들고, 도전적으로 만들 뿐이었다. ‘가인’에게 선고가 내린 지 15세기 후에 온 우주는 세상에 범람한 범죄와 부패 가운데서, ‘가인’의 감화와 모본의 결과를 목격하였다.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타락한 인류에게 내린 사형선고는, 정당하고 자비스러운 처사라는 것이 명백하게 드러났다. 사람들이 죄 중에 오래 살면, 살수록 더 타락하게 되었다. 재갈을 물리지 않은 악의 생애를 단축시키고, 굳어진 반역정신을 가진 자들의 감화를 세상에서 제거하신 하나님의 선고는, 저주가 아니라 오히려 축복이었다.(PP 78.2)
‘에녹’을 승천시키심으로 주께서는, 중대한 공과를 가르치실 계획이셨다. ‘아담’의 죄가 초래한 무서운 결과들 때문에, 사람들이 낙담에 빠질 위험이 있었다.
인류에게 무서운 저주가 지워져 있고, 우리 모든 사람이 죽을 운명에 처한 이상, “우리가 주를 두려워하고 그분의 법령을 지킨들 무엇이 유익하리요?”라고, 많은 사람들이 부르짖으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주시고, ‘셋’에 의하여 반복되고, ‘에녹’에 의하여 실천된 교훈들은 우울과 흑암을 일소하였으며, ‘아담’을 통하여 죽음이 온 것처럼 약속된 구속주를 통하여, 불사불멸의 생명이 이를 것이라는 소망을 사람들에게 주었다.
사단은 의인에 대한 보상이나 악인에 대한 형벌이 없다는 것과, 사람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준수하기는 불가능하다는, 신념을 사람들에게 역설하고 있었다.
그러나 ‘에녹’의 경우로 하나님께서는,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히11:6)시라는 것을 선언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을 위하여, 어떤 일을 행하실지를 보여 주신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하는 것이 가능하며, 죄 많고 부패한 자들 가운데서 살 때에라도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유혹을 물리치고 순결하고, 거룩하게 될 수 있다는 가르침을 받았다. 그들은 그의 모본 가운데서, 그런 생애의 복됨을 보았다.
그리고 그의 승천은 순종하는 자는, 기쁨과 영광과 불멸의 생명을 상급으로 받고, 범법자는 정죄와 재앙과 죽음의 판결을 받는다는, 장래에 관한 그의 예언이 진리라는 증거였다.(PP 88.2) 죄 많은 인류에 대한. 자비의 간청은 그쳐졌다. 들의 짐승들과 공중의 새들은 피난처로 들어갔고, ‘노아’와 그의 가족은 ‘방주’ 안에 있었다. “여호와께서 그를 닫아 넣으”(창 7:16)셨다. 눈부신 섬광이 나타나고 번개보다 더 환한 영광의 구름이, 하늘에서 내려와 ‘방주’ 문 앞에 떠돌았다.
‘방주’ 안에 들어간 사람들이 닫을 수 없는 육중한 문이, 눈에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하여 천천히 닫혔다.
‘노아’는 방주 안에 들어가 있었고, 하나님의 긍휼을 거절한 자들은, 닫힌 방주 밖에 있었다. 하늘의 인(印)이 그 문에 찍혔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닫으셨으며, 하나님께서만 그것을 여실 수 있었다.
그와 같이 하늘 구름을 타시고 오시기 전,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위한 그분의 중보를 그치실 때에, 자비의 문은 닫힐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은혜가 더 이상 악인들을 제어하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의 자비를 거절해 온 자들은, 사단에게 완전히 지배될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멸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마치 ‘노아’가 닫힌 ‘방주’ 안에 있었던 것처럼, 의인들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될 것이다.(PP 98.2)
이 율법은 그 때에 ‘히브리’ 사람들의, 유익만을 위해서 반포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히브리’ 사람들을 그분의 율법의 수호자와 관리자로 삼으심으로, 그들을 영화롭게 하셨으나 그것은 온 세계를 위한, 신성한 위탁물로 간수되어야 했다.
“십계명”의 계율은 온 인류에게 적용되는 것이며, 만민을 위한 교훈과 통치원칙으로 주신 것이다. 간결하면서도 포괄적이며 권위 있는 “십계명”은 하나님과 이웃 사람에 대한, 사람의 의무를 총망라하고 있으며, 모든 조항이 다 근본적인 사랑의 대원칙에 기초를 두고 있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눅10:27;신6:4,5;레19:18). “십계명” 가운데는 이 원칙들이 구체적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그것들은 사람의 상태나 환경에 적용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PP 305.2)
의문의 율법(ceremonial law)에 대한 성경 절을, 도덕적 율법(moral law)이 폐지되었다는 증거로 사용함으로, 이 두 율법을 혼탁 시키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을, 왜곡하는 것이다.
이 두 제도 사이의 차이는, 너무나 뚜렷하고도 명백하다. 이 의식의 제도는 그리스도 즉, 그분의 희생과 그분의 제사장 직분을, 가리키는 상징들로 구성되었다. 이 의문의 율법은 그 희생 제도와 규례(規例-ordinance)와 함께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모형이 실물을 만날 때까지, ‘히브리’ 사람들에 의하여 이행되어야 할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시면, 모든 희생 제물들을 바칠 필요가 없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골 2:14)신 율법이다.
그러나 “십계명”의 율법에 대하여 시편 기자는, “여호와여 주의 말씀이 영원히 하늘에 굳게 섰”(시119:89)나이다. 라고 선언한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도 친히 내가, “율법...을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고 말씀하시고,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5:17,18)고, 가능한 한 크게 강조하여 주장하셨다.
여기서 그분은 과거에 하나님의 율법의 요구가 어떠했으며, 그 당시에 어떠했는지를 가르치실 뿐만 아니라 이 요구는, 천지가 존속하는 한 보존되리라는 것을 가르치셨다. 하나님의 율법은, 그분의 보좌와 같이 변하지 아니한다. 그것은 각 시대를 통하여 인류에게, 율법의 요구를 주장할 것이다.(PP 365.1)
‘이스라엘’ 백성들은 초막절에 그들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원하시고, 광야의 순례생활 동안 친절히 돌보아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회상하고, 그분을 찬양하였다. 또한 그들은 대 속죄일의 의식을 행한 직후에, 사죄와 가납하심을 입은 것을 인식하고 기뻐하였다.
그처럼 이제 여호와의 구속받은 자들은,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 하는”(롬8:22) 저주의 속박에서, 영원히 구원 얻어 안전히 하늘 ‘가나안’에 모일 때에, 말로 다할 수 없는 즐거움과, 충만한 영광 중에 기뻐할 것이다. 그 때에는 인류에 대한 그리스도의 대속사업은 완성되고ㅡ 인류의 죄는 영원히 도말될 것이다.(PP 542.1)
그리스도의 죽음은,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입증한다. 그것이 우리의 구원의 보증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십자가를 제거하는 것은, 하늘에서 태양을 없애는 것과 같을 것이다. 십자가는 우리를 하나님께로 가까이 인도할뿐더러,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해준다.
여호와께서는 부성애의 동정심을 가지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인류를 영원한 사망에서 구하고자 아들이 참은 그 고통을 보시며, 그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를 받아 주신다. (AA 209.3)
종종 인간의 권리가 인정을 받지 못하던 계급 제도가 있던, 그 시대에 ‘바울’은 인간의 형제 관계에 관한 대 진리를 제시하고, 하나님께서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 셨다고 선언하였다. 하나님 보시기에 만민은 평등하므로 모든 인간은, 창조주에게 최고의 충성을 바쳐야 한다. 그 후에 인류에게 대한 하나님의 모든 행동을 통하여, 사도는 어떻게 그분의 은혜와 자비의 목적이, 금실처럼 이어지는가를 보여주었다.
그분은 “저희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이는 사람들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 하시도다.”(행17:26,27).(AA 238.2)
사도는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에 대하여, 말할 수 있는 훌륭한 자격을 갖추고 있었다. 이는 그가 그리스도의 지상봉사의 기간에,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많은 일들을 보고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신자들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저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이 소리는 우리가 저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서 나옴을 들은 것이라”(벧후1:16~18)고 말하였다.(AA 53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