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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개천 대학교수, 건축가
‘무색의 공간’, ‘한국 건축의 미와 정신세계’, ‘선의 건축 미학에 관한 연구’ 등 동양 철학과 건축 미학에 관한 여러 논문들을 발표했다. 그는 전통 건축을 지은 사람들과 비슷한 철학과 종교, 건축과 실내디자인의 통합적 배경을 가진 작가 및 학자로서 고건축에 대한 새로운 통찰과 미적 해석하기로 유명하다. 대표작으로는 ‘만해마을’, ‘한길교회’, ‘동국대 법당 대각전’, ‘담양 정토사’, ‘강하미술관’ 등이 있으며, 한국 건축가 협회상, 황금스케일상, 국무총리 표창, 올해의 디자이너상, 대한민국 디자인 대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국민대 조형대학 교수이며, 건축가이자 실내 디자이너다.
▶ 목차 : 002 한국미의 원형을 찾아서
020 천강이 흐르는 예적 질서 _ 병산서원 만대루 '허와 질서'
030 반칸으로 지은 청풍명월 _ 담양 면앙정 '자연과 건축'
038 빛을 실현한 바람의 집 _ 해인사 장경각 '완성과 무명'
046 점으로 이룬 만 칸 허공 _ 여수 진남관 '무와 유'
056 허공으로 지은 공중누각 _ 화암사 우화루 '시간과 공간'
064 무량한 천상 건축 _ 부석사 안양루 '변화와 운동'
076 미적 실용으로 숭고한 화계 _ 수원 화성 '실용과 무용'
084 비움마저 비운 집 _ 선암사 심검당 '형태와 영원'
094 인간이 조영한 우주 _ 경복궁 경회루 '미완과 환영'
104 원융부동의 무량법계 _ 화엄사 각황전 '조화와 통일'
112 회소향대의 천상누각 _ 창덕궁 부용정 '형상과 크기'
120 선리로 투관한 교상누각 _ 송광사 우화각 '순응과 역행'
140 경으로 허명한 천계 _ 도산서당과 전교당 '주관과 객관'
150 고요한 비춤의 절대 추상 _ 법주사 팔상전 '구상과 추상'
158 광풍제월의 맑은 선계 _ 담양 소쇄원 '맑음과 통합'
168 중중무진의 인드라망 _ 봉정사 영산암 '존재와 관계'
176 빛으로 나눈 빛의 회랑 _ 창경궁 수문당과 문정전 회랑 '주관과 도학'
186 염화미소의 공간 _ 통도사 대웅전 '상징과 실체'
198 허에 잠겨 투명한 집 _ 양동마을 심수정 '자율과 생명'
206 천조로 쌓은 건축 만다라 _ 불국사 범영루 '대칭과 비례'
214 덕으로 드러난 건축의 도 _ 창덕궁 인정전 '미와 덕'
226 무무무무 무무무무 _ 거조암 영산전 '무위와 내연'
234 천지와 맞닿은 적멸법궤 _ 범어사 불이문 '경험과 초월'
244 중천에서 밝은 구름의 집 _ 종묘 정전 '침묵과 작위'
256 한국 건축의 공간적 해석
260 추천의 글
▶ 출판사서평
“외형상 작고 평범해 보이는 우리의 전통 건축은 우주만큼 넓고 깊게 체감되는 무한의 건축으로 완성하였고, 물질의 진정한 가치를 구현하였던 예술적 성취들은 현대 미학이 추구하는 이상과도 맥이 닿아 있을 뿐 아니라 그 미적 한계에 새로운 형식을 제안하고 있기도 하며 자연과의 조화가 아닌 자연의 경지를 이룬 건축적 인문 세계를 보태어 자연을 더욱 풍부하게 하였다.” - 김개천
한국의 건축 문화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우선 우리 건축은 너무나 평범해 첫 눈에 들어오지 않고, 서구의 장대한 그것에 비해 다소 허허로운 게 사실이다. 그러나 문화란 그것이 싹트고, 가꿔진 토양의 이치에 따르는 법. 진정한 우리 전통 건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조상들이 이룩한 정신과 학문 세계에 대한 미적 탐구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명묵(明默)의 건축]은 전통 건축을 당대의 철학과 종교, 건축과 실내디자인이 한데 어우러진 결정체로 바라보는 저자의 생각이 녹아 있다. 저자의 글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이 사람만큼 우리의 전통미를 소중하게 읊어낸 사람이 있을까 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저자는 “우리의 미는 자연만큼 아름답고 우주의 신비만큼 현묘한 무공(無空)으로 사람으로서 하늘의 조화를 부리는 신성(神性)의 경지를 추구했다”고 극찬한다. 서양의 유위적 조형으로도, 무위의 조형만으로도 이룩할 수 없었던 세계가 바로 우리만의 전통미라는 것이다.
♣ 한국 전통 건축에서 발견한 아름다움_‘침묵의 미(明默)’
“전통 건축을 이해한다는 것은 우리 민족이 성취한 건축의 가치와 아름다움에 대한 이해를 말한다.” 저자는 단언한다. 전통 건축을 바라보고, 그 의미를 되짚는 일이야말로 우리 조상들의 삶의 방식과 시대정신, 종교와 학문, 그리고 예술에 대한 지적 통찰력을 고양시키는 일이라고 확신하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병산서원 만대루에서 시작하여 종묘의 정전에 이르기까지 우리 전통 건축의 정수라고 여겨지는 스물네 채의 옛 집들을 향한 그의 시선은 우리 건축을 ‘보는 방법’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른바 현대 건축으로 촘촘히 채워진 이 도시 속에서 전통 건축을 향한 저자의 애정은 한국미의 완형(完形)과 그 정신세계를 탐색하는 지난한 여정으로 불려도 좋을 것이다.
♣ 한국 전통 건축의 정수를 찾은 두 사람의 여행
현문 스님의 고백처럼 [명묵의 건축]은 우리 전통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스물네 채의 옛 집으로 독자를 안내한다. 병산서원 만대루에서 시작해 종묘 정전으로 끝나는 이 아름다운 여행은 단순히 건축에 관한 이야기를 넘어, 한국의 미적 세계로 그 지평을 넓히기에 충분하다. 물론 이 여행이 더욱 풍성할 수 있었던 데에는 좋은 사진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았던 관조 스님의 존재 때문이다. 글로 쓰는 담백한 설명과 직접 가보듯 보여주는 사진의 미학을 성공적으로 결합은 한국 전통 건축의 정수를 찾은 두 사람과의 동행을 가능케 한다.
♣ 적은 것으로 크게’ ‘비워서 채우는’ 동양건축은 禪의 세계 추구
우리 문화의 한 부분인 전통건축을 이해한다는 것은 우리 민족의 건축적 가치와 아름다움에 대한 이해일 뿐 아니라 그들의 삶의 방식과 시대의 신념, 종교와 학문 그리고 예술에 대한 지적 통찰력까지 고양시키는 것으로, 그 건축적 이상들은 오늘날에는 물 론 다음 시대에도 여전히 삶의 효용과 가치를 가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이 유로 한국미의 보편적 원형을 탐구하려는 그간의 노력에 덧붙여 통도사 대웅전에서 시 작하여 종묘의 정전에 이르기까지 당대의 가장 탁월한 건축가들이 지었을 것이라고 추정되는 24채의 한국의 옛집들을 통해 한국미의 완형(完形)과 그 정신세계에 대해 조심스럽고 간절한 심정으로 연재를 시작하는 용기를 내어본다.
♣ 건축은 서구적 용어
근세 100여 년간 서구적 삶의 방식과 그 문화의 동질화를 추구해 온 오늘의 우리는 믿기 어려울 만큼 서구적 관념으로 많은 것을 인식하고 있다. 현대건축에서 즐겨 쓰는 개념인 건축(Architecture), 공간(Space), 시간(Time) 그리고 조경(Landscape) 등의 언어는 서양적 개념의 분화된 의미이나, 전통건축에서 집이란 물질과 공간, 시간 그리고 건축과 조경 등의 개념이 합일된 동의어의 개념으로 쓰였다. 집 우(宇)와 집 주(宙)의 집은 우주이고 천지(天地)이며, 스스로 성주괴멸(成住壞滅)하는 자연이었다.
그리하여 집을 짓는다는 것은 창덕궁 주합루(宙合樓)의 당호에서 보듯 건물만을 짓는 것이 아닌 천리적(天理的) 생명성을 이룩한 공(空)의 형식으로 천지(天地)를 조영한 우주와 합(合)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전통건축의 흉내를 낸 기와건물들 까지도 서구인들이 추구했던 개념의 건물을 맹목적으로 짓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대 후반 처음 유럽을 여행하면서 그들이 이룩한 건축적 장대함, 정교하고 화려한 장식, 인간을 압도하는 고딕 성당의 내부 공간 등 그 경이로운 감동에 얼마나 놀랐던가.
그리고 생각하기를 왜 우리에겐 작고 평범하고 똑같은 집들밖에 없는가? 중국과 일본의 궁성과 탑들만 보아도 장중하지 않은가라고 반문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였다. 나라가 작고 검소하여 집들이 작았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지리적 풍토와 사회 환경적 여건과 정신사적 관점의 이해 모두가 필요하게 된다. 사실 건물의 개념에서 벗어나 서구에서 200여 년 전에나 인식했던 공간이라는 개념은 물질로 이룩된 비어있는 사이의 관계였다. “그릇의 효용은 비어있음에 있다”는 노자의 말처럼 건축적 공간이란 비어있음의 구성과 처리였다. 그리하여 장대한 비어있음은 필연적으로 장대한 완성의 형태를 지향하는 건축을 추구하게 되었다.
♣ 건축은 우주와 합하는 일
이와 대조적인 동양의 건축은 그릇의 빈 공간과 같은 고정된 모습의 크기와 형상으로 존재하는 건축을 만들지는 않았다. 그들은 《아함경》에서 보듯 이것과 저것은 관계 속에서 생과 멸을 되풀이한다는 순환적 물질과 공간관을 가지고 있었기에 물체와 비어있음의 대대적 (對待的) 개념이 아닌, 비어있는 물질의 체계로 생명의 기운인 기(氣)가 차있는 태극의 허(虛)를 추구하였다. 그것은 비어있음으로 충만한 비어있음을 이룬 관계적 실체로서, 항상 여여(如如)한 구족의 상태로 인간과 자연의 원리와 같은 이(理)와 기(氣)의 충일한 상태를 조영하려 하였다.
건축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자 한 것이 아니라, 자연의 경지를 이룬 인문세계(人文世界)를 보태어 자연을 더욱 풍부하게 하였다. 그것은 건축이 자연이고 자연이 건축으로 치환되는 자연을 완성하는 경지로 근대의 어떤 예술도 이룩하지 못했던 예술적 성취이다. 또한 큰 것으로는 큰 것을 이룩할 수 없었기에 작은 집에서 큰 것을 향한 회소향대(回小向大)의 조형정신으로 가장 장대한 것을 이룩하기 위해서 그렇게도 작고 범범(凡凡)하였다.
이러한 집은 외형적으로는 작지만 내형적으로는 우주만큼 넓고 깊게 체득되는 건축이었으며, 호화롭기는 물체에 원래 간직되어 있는 깨끗한 마음을 드러나게 하는 장식으로서, 자연이 이룩한 경지의 화(華)를 추구하였다. 그러한 예는 신라 무열왕릉 비의 이수에 조각된 여섯용의 모습에서도 볼 수 있는데 용들은 서로 몸이 붙어 꼼짝도 하지 못하면서 일제히 머리를 땅으로 수그린 채 삼매에 빠진 듯한 정지된 모습으로 여의주를 받들어 합장하고 있다.
그것은 일체의 미망에서 해방된 관념 이전의 상태를 구현하고 있는 모습으로, 바라보고 있는 이조차 그 순간 무아(無我)의 경지로 만들어버린다. 그러나 숨막힐 듯 정지한 용의 내부에는 꼬리와 발들이 힘차게 엮여져 강온한 생명성과 역동성을 이룩하고 있는데 그것은 정(靜)인 동시에 동(動)이 되는 공시성(共時性)의 경지로 중국과 일본에서도 그 예를 찾아보기 힘들다. 또한 봉덕사 신종의 공양천인은 휘돌아 앉은 정지의 모습으로 근육질까지 표현된 듯한 사실적 조영으로 인간의 몸이 아닌 천인의 모습을 구현한 사실적 추상의 세계이며, 그 소리는 사람을 깨닫게 하는 원음(圓音)의 경지이다.
이러한 조형수준을 갖고 있던 시기의 신라왕들의 능은 아무런 기교가 없는 잡초만 우거진 평범한 언덕이다. 왕의 무덤이지만 아무것도 이룩한 것이 없고 조영한 것도 없이 호석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신라의 왕릉은 가까이 가면 주변의 산과 연이어져 관념적으로나 실제적으로 산처럼 크게 보인다. 피라밋처럼 가장 웅대하고 완성된 형태를 경쟁하듯 지은 것이 아닌 크고 작은 것이 별반 구분이 없는 인간이 만든 또 다른 자연이다. 그러나 봉분에는 잡초들만 춤을 출뿐 마치 조선의 백자와 같이 아무것도 없음으로 오히려 지극히 아름답다.
♣ 밝은 침묵의 세계
여기에 우리의 미를 특징지을 수 있는 미의식의 원형이 있다. 그것은 “조용한 위대‘와 같은 일상적 의미를 넘어선 본적(本寂)의 진여로서 미의 궁극적 이상을 실현하였다. 단순한 고전적 균제미나 소박한 정제미, 조화에 이른 자연감, 혹은 중용이나 기(氣)의 생명감 등 기존에 설명된 아름다움만으로 한국의 조영을 설명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우리의 미는 자연만큼 아름답고 우주의 신비만큼 현묘한 무공(無空)으로, 사람으로서 하늘의 조화를 부리는 신성(神性)의 경지를 추구했다.
그것은 서양의 유위(有爲)적 조형으로는 이룩할 수 없었던 세계이며, 무위(無爲)의 조형만으로도 이룩할 수 없었다. 그래서 비어있는 우주적 질서를 유위인 동시에 무위로서, 유위도 극복하고 무위조차도 초월하고자 하였다. 동양의 건축 중 특히 우리의 전통건축은 평상심과 신성의 세계를 공시적으로 이룩한 세계이며 이것은 형이상학적 도의 신성을 실현한 형이하학으로 산시산(山是山) 수시수(水是水)의 중국선을 극복한, 산은 산으로 나아가고 물은 물로서 나아간, 자연 그 이상의 맑은 아침 햇살(朝鮮) 같은 빛의 현현으로 이룩한 밝은 침묵, 침묵을 강요하는 바 없이 침묵하는 명묵(明默)의 건축이었다.
오래된 것들에는 향기가 있다. 이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대상 중의 하나는 바로 고건축이 아닐까. 오래된 건축물은 그 건축물보다 더 일찍 혹은 더 늦게 자리 잡은 나무와 풀벌레, 연못 등이 어우러져 또 하나의 자연으로 다시 태어나곤 한다.
십년을 경영하여 초려 한 칸 지어내니 / 반 칸은 청풍이요 반 칸은 명월이라 / 강산은 들일 데 없으니 둘러두고 보리라. 조선중기의 문신 면앙 송순이 대사헌직에서 물러나 담양에 한 채의 초당을 짓고 부른 이 시조에는 오래된 건축물에 남아있는 옛 사람들의 풍류가 그대로 녹아있다.
『명묵의 건축』에 소개된 24채의 건축물들에 공통적으로 담긴 것이 있다면 그것은 소나무도 아니요, 황토도 아니며, 기와도 아니다. 바로 건물 속에 空의 의미를 담고, 공간 속에 우주를 열었다는 것이다. 국민대학교 조형대학 교수이자 건축가인 김개천 교수의 신간 『명묵의 건축』을 관통하고 있는 관점은 옛 건축물에 담긴 공(空)의 원리이다.
천년의 흐름에 낡고 허물어질 것 같은 석축 위의 퇴색한 기둥만이 시간이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화암사 우화루), 虛의 체계는 자연을 내부로 유입해 실재를 암암리에 삭제하여 보이지 않는 경계의 차원까지 포용한 무한 차원을 인식하게 한다(병산서원 만대루).
화암사 우화루는 ‘허공으로 지은 공중누각’으로, 선암사 심검당은 ‘비움마저 비운 집’으로 그려진다. 이 책에는 이 밖에도 여수 진남관, 부석사 안양루, 수원 화성, 화엄사 각황전, 경복궁 경회루, 불국사 범영루, 종묘 정전 등 한국의 대표적인 건축물들이 김개천 교수의 글과 관조 스님의 사진을 통해 재조명되고 있다.
‘한국 전통의 명건축 24선’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지만 이 책은 건축에 관한 소개서라기보다는 건축물을 바라보는 김개천 교수의 사론집 내지 건축철학서에 가깝다. 김개천 교수 또한 이 책의 서문에 ‘한국미의 원형을 찾아서’라는 제목을 달고 “24채의 한국의 옛 집들을 통해 한국미의 완형(完形)과 그 정신세계를 탐색하는 길을 떠난다. 그 길은 건축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 건축을 통해 받은 감명을 나누고자 하는 이야기”라고 설명하고 있다.
인간의 욕망에 순응해 날로 높아만 가는 대형 주거 단지에는 자연과의 대화는커녕 타인과 눈을 맞추려는 배려조차 찾아볼 수 없다. 그래서 공간과 건축재, 자연의 會通은 더욱 애틋하고 그리운 대상일지도 모르겠다. “건축의 이상은 자연과의 조화로운 것이 아니라 자연의 완성에 있다”는 김개천 교수의 고건축 미학은 우리 시대 건축의 ‘오래된 미래’가 녹아있는 곳들을 다시 한 번 새롭게 돌아보게 한다.
▶ <명묵의 건축> 서평-이용재 왈|작성자 이용재
"우주는 인간의 행불행에 관심이 없다. 모든 욕망을 없애 버리고 적의도 호의도 없는 비어있음으로 영원한 것만을 확보한 공간" 이게 책상에서 이해되겠는가. 김개천은 ‘근대건축의 이상이었던 거의 없는 듯한 상태로 거의 가득한 상태를 이루는 것에서 더 나아가 충만한 비어있음을' 이곳 만해마을에서 실현한다.
만해마을은 '자연과 조화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완성'한다. '조화가 이상이라면 건축을 하지 않는 것만큼 자연과 조화로운 것은 없다.' 내린천 이상의 것으로 내린천을 더욱 풍부하게 할 수 있을 때 만해마을은 내린천과 하나가 된다. 자연이 시키는 대로 하면 된다. 만해마을에서 자연과 건축 그리고 인간은 빛으로 하나가 된다.
자 봐라. 건축을 버리자. 우주를 전공하자. 서구의 논리적인 틀에서 벗어나자. 분석 좀 고만하자. 책상을 떠나자. 자연으로 돌아가자. 한국건축은 그야말로 '도'다. 왜 꼭 건축을 눈으로만 보냐. 가슴은 뒀다 뭐하냐. 왜 건축을 자신의 논리에 가두려고만 하냐. 머리 좀 쉬게 해주고 발로 좀 뛰자. 해탈이라는 말이 뭔 말인지 모르냐. 그럼 좀 배우자. 이 책이 친절하게 안내하고 있다.
김개천교수가 병산서원에서 읊조리던 '누마루의 높은 곳에서 물을 내려다보고 산을 마주하게하여 높은 산을 낮게 만드는 건축으로 자연을 완성한다'는 싯귀는 정토사에서 바라본 연못정경에도 그대로 재현된다. 그의 24편에 이르는 싯귀들은 서로 다른 작품 아무데나 퍼 날라도 어울리는 한편의 울림이며 그 싯귀들은 그의 작품에 퍼 날라도 역시 한 편의 감동이 된다.
글 못 쓰는 인간들은 들으라. '건축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자 하기보다, 자연의 경지를 이룬 인문세계를 보태어 자연을 더욱 풍부하게 하고 있다' 이게 이 책의 결론이다. '건축은 인간이 만든 또 다른 자연'이다. 서구건축 베끼기와 서구이론 베끼기에 몰두하는 인간들이 이 책을 이해하기는 애당초 불가능하다. 그럼 우찌해야 하나. 간단하다. 버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