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은 오늘 애초 진행 계획이 비재까지 인지라 "화령장전투"를 더한다면,,, 대간에 더해 동북아 새질서를 재편하는 긴박한 한반도 주말 정세에 실로 뜻깊은 족적을 남기고 왔습니다.^^
후기는 포탈 이곳저곳에서 끌어모아 우리가 거니는 구간의 지식을 한 곳으로 모은 식입니다.
지식을 자랑하려 하는게 아닌 최소한 모르고 지나는것 보다는 기왕이면 알고 지나자는 뜻에서 모아본겁니다.
어느 분은 산행내내 앞 사람의 뒷꼭지만 보고 무엇을 보았는지 기억에 남는 게 없다는 분도 계십니다.
조금 모자라는 분은 자랑질을 한다며 이미 다 아는 이야기 장황스레 늘어놓을 필요가 있느냐고도 하십니다.
필요에 따라 취사선택하면 될 문제이고, 대간이 후미가 기준이라면 대간에 따른 지식도 모르는 사람이 기준이 되어야 함은 너무 당연한 일입니다.^^
J3 백두대간 23차 열 구간을 같이 뛰는 애마입니다.
어딜 가나 하드웨어 보다는 소프트웨어, 겉치레보다는 내실입니다.
23차 대원들은 숭성숭성 바람처럼 지나가는 대간길이 아닌 알멩이를 꽉 채우며 선두와 후미가 한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01:21분, 영동을 넘기전 금산 인삼랜드 휴게소에서 든든하게 배를 깔았습니다. 새벽시간대라 한식종류는 시간이 걸리고 면종류가 빠르다고 하네요.
03:13분, 3구간에 기대를 품고 다시 부항령고개에 모였습니다. 새벽 세시 밝은 표정으로 출발전 인증샷을 남깁니다.
04:06분, 우리나라에 백으로 시작하는 산이 많은데 육당 최남선은 일제의 식민사관에 대항하여 정리한 불함문화론에서 백(불함)이란 신, 하늘, 해, 밝음, 광명 등을 뜻하는 고어로 설명되어 집니다.
수리는 원래 고구려 말로 주위에서 제일 높은 곳을 말하는 바, 머리에서 제일 높은 정수리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즉, 부항령에서 출발하여 300m 고도를 높인 백수리산은 "주위에서 제일 높은 신성한 장소"란 뜻으로 해석되어 집니다.
막내님, 대대로대장님, 푸른바다님.... 23차 대간의 선두 핵심조입니다.
박석산을 지나 삼도봉 가기 전에 바닥이 질은지 나무데크가 나옵니다. 백두대간상 유일한 늪지는 다음 구간 비재를 넘어 갈령으로 향할때 지나는 견훤 설화와 관련한 못재입니다.
삼도봉[三道峰](1176m)
충청북도 영동군 상촌면(上村面) 물한리(勿閑里), 전라북도 무주군 설천면(雪川面) 대불리(大佛里), 경상북도 김천시 부항면(釜項面) 해인리(海印里)의 경계에 있는 민주지산의 봉우리.
높이는 1,176m이다. 조선을 8도로 나눈 태종때부터 가지고 있던 이름이다. 충청·전라·경상의 삼도(三道)와 접한다 하여 삼도봉이라 부른다. 석기봉과 삼도봉은 충청북도 영동군 상촌면과 전라북도 무주군 설천면 사이에 있는 민주지산(珉周之山:1,242m)의 봉우리 가운데 하나이다.
등산은 충청북도 영동군 상촌면 물한리, 전라북도 무주군 설천면 대불리, 경상북도 김천시 부항면 해인리 등 3곳에서 시작된다. 국내 최대 원시림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물한계곡이 있으며, 예부터 용소·옥소·의용골·음주골폭포 등이 있어 경치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05:40분, 우리가 빠져나온 능선이 아직 새벽 안개에 잠겨있다. 선두를 따라 골짝님과 구구님이 연달아 삼도봉에 도착한다.
07:18분, 속도를 내어 걷다보니 배가 출출하다. 모두들 각자가 준비한 행동식으로 먹는데 막내님은 그 전쟁터 속에 라면을 끓인다.
대간 졸업과 동시에 막내님이 막걸리와 소주, 무거운 배낭, 라면국물, 잠.... 중에 몇 가지를 극복해 낼 수 있을지 응원을 보내봅니다.^^
우두령[牛頭嶺]
김천에는 2개의 '우두령'이 있는데 하나는 경남 거창군과 하나는 충북 영동군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김천-영동의 우두령은 우두산이라고도 했다는데 지금은 공식 지명이 우두령이다. 산의 능선부 모양이 소머리를 닮아 붙은 이름이라는데 가까이에서는 확인할 길은 없다. 충북 영동 상촌면과 경북 김천 구성면을 연결하는 고개로 김천 외곽지대에 주민들이 영동 상촌면으로 장을 보러 다녔다고도 한다.
과거 우두령은 황악산, 삼도봉, 석기봉, 민주지산 등 높은 산들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어 접근성이 매우 떨어지는 오지였기 때문에 고려말 왜구의 노략질, 임진왜란, 한국전쟁 당시에도 많은 사람들의 은신처가 된 곳이기도 하다.
◆전란의 아픔을 간직한 역사의 현장
우두령은 국토 남단에서 서울로 향하는 교통요충지다. 백두대간에서 비교적 낮은 고개를 넘는 우두령길이 지름길이었다. 이 때문에 우두령이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다. 이로 인해 임진왜란 등 전란, 민란, 6.25전쟁 등이 발생하면 이곳을 차지하기 위한 수많은 전투가 벌어진 역사의 현장이기도 했다.
특히 임진왜란 때 왜군이 전라도로 진출하기 위해 우두령을 넘으려 한다는 첩보를 접하고 당시 의병장 김면과 진주목사 김시민이 함께 관병과 의병을 이끌고 산에 매복해 있다가 이곳에 들어온 왜병 1천500명을 급습해 큰 전과를 올렸다. 사냥꾼과 심마니 등도 대거 전투에 참가해 공을 세웠다는 기록이 전한다. 또 18세기 초 이인좌의 난 때에는 역도들과 관군이 우두령 확보를 위해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며 역도들이 김천역에 있는 역마를 끌고 가는 것을 한명구라는 역리가 꾀를 내 다시 찾아왔다는 무용담도 전한다.
또 민족상잔의 아픔도 간직하고 있다. 6`25전쟁 발발 이듬해인 1951년 2월 중공군의 개입으로 1`4후퇴가 시작된 후 후방의 빨치산들이 대대적인 공세에 나서자, 국군이 공비 토벌작전을 벌였다. 가야산을 중심으로 한 일부 빨치산들이 이곳 우두령 마을에도 내려왔다. 국군 빨치산 토벌대가 거창에서 무고한 양민들을 공비와 내통했다고 무차별 학살했는데 같은 날 거창과 이웃한 이곳 덕석마을에도 공비 토벌대가 들이닥쳐 주민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30여 가구가 살던 마을은 폐허가 되고 지금은 겨우 불탄 집터 등이 마을이 있었음을 짐작게 할 뿐이다. 한 줄기 바람에 스치는 '으악새'의 울음이 무고한 학살 양민들의 원혼을 달래주는 듯하다.
10:00분, 바람재는 백두대간 상에 있는 경상북도 김천시 대항면 주례리와 충청북도 영동군 상촌면 궁촌리를 연결하는 고개이다.
1,000m가 넘는 봉우리 사이에 상대적으로 고도가 낮은 안부에 자리잡고 있다. 바람재의 동쪽 사면에서는 하원천이 서쪽 사면에서는 궁촌천이 발원한다. 바람재는 북쪽 괘방령이나 남쪽 우두령에 비해 높고 험준하여 현재 임도만 개설되어 있다. 지형조건으로 인해 풍속이 빠른 바람이 부는 곳이어서 바람재라는 이름이 붙었다는데 바람에 날린 정상석 글씨 또한 이를 실감나게 한다.
개인적으로 산친구들을 사귀기 위해 야생화 공부를 하면서 김천에 사시는 은퇴한 선생님이 운영하는 "바람재들꽃"에 가입하여 현재까지 공부하고 있다. 미구에 산에서 들려오는 아름다운 새소리의 주인공을 알아내는 어플도 나오기를 고대하면서....
10:43분, 23차 대간팀 선두를 이끄는 케이플러스님!!!
제주도 올레길을 원샷킬하고 금욜 아침 올라와 얼마 쉬지도 못하고 발목이 부은 상태로 3구간에 참여, 다리에 힘이 없어 미끄러지고 엉덩방아를 찧으며 그래도 선두에서 꿋꿋하게 팀을 이끈다.
케이플러스님보다 더 앞질러 나가는 숨은병기 땅벌님이 계시지만 땅벌님은 장거리 경험이 작아 힘닿는 대로 빠르게 질주하는 식인지라 페이스조절이 어려워 케이플러스님과 땅벌님이 선두에서 앞뒤로 리드를 담당하고 있다.
직지사[直指寺]
경상북도 김천시 대항면(代項面) 황악산(黃嶽山)에 있는 사찰.
고구려의 아도(阿道)가 지었다는 설이 있으나 현재 사적비(寺蹟碑)가 허물어져 확실한 것은 알 수 없고, 418년(눌지왕 2)에 묵호자(墨胡子)가 경북 구미시에 있는 도리사(桃李寺)와 함께 창건했다고 전한다. 이때는 신라에서 불교가 공인되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처음 창건하였을 때는 지금처럼 큰 규모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 후 645년(선덕여왕 14)에 자장(慈藏)이, 930년(경순왕 4)에는 천묵(天默)이 중수하고, 936년(태조 19)에 능여(能如)가 고려 태조의 도움을 받아 중건하였는데, 임진왜란 때 불에 거의 타버려 1610년(광해군 2)에 복구에 들어가 60여 년 후 작업을 끝맺었다.
절 이름에서 나타나듯 직지사는 선종사찰이다. 불교의 종파는 크게 나누어 교종과 선종으로 나누어지고 교종은 불교의 경전에 의지해 깨달음을 구하는 종파이고 선종은 참선에 의지해 부처를 이루려는 종파이다. 선종 집안의 가풍은 ‘문자에 의지하지 않고 바로 마음을 가르쳐 본래의 성품을 보아 부처를 이룬다(不立文字直指人心見性成佛)’는 것으로 여기에서 ‘직지’ 두 글자를 따서 사찰로 삼은 것이다. 직지사라는 절 이름은 능여가 절터를 잴 때 자를 쓰지 않고 직접 자기 손으로 측량한 데서 붙여졌다고도 한다. 조선시대에 학조(學祖)가 주지로 있었고, 유정(惟政)이 여기서 승려가 되었다.
경내에는 석조약사여래좌상(보물 319), 대웅전 앞 3층석탑(보물 606), 비로전 앞 3층석탑(보물 607), 대웅전 삼존불 탱화 3폭(보물 670), 청풍료(淸風寮) 앞 3층석탑(보물 1186) 등의 문화재가 있다.
조선 중기의 고승. 풍천 임씨. 속명은 응규(應奎). 자는 이환(離幻), 호는 사명당(四溟堂). 또는 송운(松雲), 별호는 종봉(鍾峯). 경상남도 밀양출신. 수성(守成)의 아들이다. 1558년(명종 13)에 어머니가 죽고, 1559년에 아버지가 죽자 김천 직지사(直指寺)로 출가하여 신묵(信默)의 제자가 되었다. 그뒤 직지사의 주지를 지냈으며, 1575년(선조 8) 선종의 중망(衆望)에 의하여 선종수사찰(禪宗首寺刹)인 봉은사(奉恩寺)의 주지로 천거되었으나 사양하고, 묘향산 보현사(普賢寺)의 휴정(休靜)을 찾아가서 선리(禪理)를 참구하였다. 1578년부터 팔공산·금강산·청량산·태백산 등을 다니면서 선을 닦았으며, 1586년 옥천산 상동암(上東庵)에서 오도하였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정의 근왕문(勤王文)과 스승 휴정의 격문을 받고 의승병을 모아 순안으로 가서 휴정과 합류하였다.
그곳에서 의승도대장(義僧都大將)이 되어 의승병 2,000명을 이끌고 평양성과 중화(中和) 사이의 길을 차단하여 평양성 탈환의 전초 역할을 담당하였다. 1593년 1월 명나라 구원군이 주축이 되었던 평양성 탈환의 혈전에 참가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고, 그해 3월 서울 근교의 삼각산 노원평(蘆原坪) 및 우관동 전투에서도 크게 전공을 세웠다. 선조는 그의 전공을 포장하여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를 제수하였다.
그뒤 네 차례에 걸쳐 적진에 들어가서 가토(加藤淸正)와 회담을 갖고, 특히 2차의 적진 담판을 마치고 돌아와 선조에게 그 전말과 적정을 알리는 <토적보민사소(討賊保民事疏)>를 올렸는데, 이 상소문은 문장이 웅려하고 그 논조가 정연하여 보민토적(保民討賊)의 이론을 전개함은 물론, 그 실천방도를 제시하였다.
그는 국방에 있어서도 깊은 관심을 표현하여 산성수축에 착안하였으며, 항상 산성개축에 힘을 다하였다. 그가 수축한 산성은 팔공산성(八公山城) · 금오산성(金烏山城) · 용기산성(龍起山城) · 악견산성(岳堅山城) · 이숭산성(李崇山城) · 부산성(釜山城) 및 남한산성 등이다. 그리고 군기제조에도 힘을 기울여 해인사 부근의 야로(冶爐)에서 활촉 등의 무기를 만들었고, 투항한 왜군 조총병을 비변사에 인도하여 화약제조법과 조총사용법을 가르치도록 하였다.
1604년 2월 오대산에서 스승 휴정의 부음을 받고 묘향산으로 가던 중 선조의 부름을 받고 조정으로 가서 일본과의 강화를 위한 사신으로 임명받았다. 1604년 8월 일본으로 가서 8개월 동안 노력하여 성공적인 외교성과를 거두었고, 전란 때 잡혀간 3,000여명의 동포를 데리고 1605년 4월에 귀국하였다.
그해 6월 국왕에게 복명하고 10월에 묘향산에 들어가 비로소 휴정의 영전에 절하였다. 그뒤 병을 얻어 해인사에서 요양하다가 1610년 8월 26일 설법하고 결가부좌한 채 입적하였다. 제자들이 다비하여 홍제암(弘濟庵) 옆에 부도와 비를 세웠다.
직지사는 16세 소년 임응규가 처음으로 승려가 된 절이고, 월정사는 대사가 오랜 기간 수도 생활을 한 곳이다. 건봉사는 임진왜란을 맞아 대사가 승병을 일으켜 창의한 곳이고, 대전사와 동화사는 승병을 훈련시킨 곳이다. 해인사는 대사가 이승의 마지막 시간을 보낸 곳이며, 표충사는 사명대사, 서산대사, 기허대사를 모시는 사당이 설치되어 있는 곳이다.
11:50분, 여우와는 무관한 여시굴산, 굴의 입구로 보아서는 호랑이가 살았을법 한데 여시굴산이란다. 자연적인 굴인지 채광을 시도한 굴인지도 알 수 없다. `현오와걷는백두대간`에서 저자는 `여시`는 우리 말로 `엿다, 옅다`에서 비롯되었다며 따라서 이 여시골산의 경우 `물이 깊지 않은 골짜기를 끼고 있는 산`이란 의미로 해석하였다. 한편 이 아래로는 우라나라에서 제일 긴 KTX `황악터널`이 지난다.
괘방령[掛榜嶺]
괘방령은 경상북도 김천시 대항면 복전리와 충청북도 영동군 매곡면 어촌리를 잇는 고갯길이다. 백두대간 산줄기로는 황악산(1,111m)와 가성산(730m) 사이에 위치한다. 높이는 300m가량 된다. 괘방령 정상은 낙동강과 금강의 분수계 역할을 한다. 김천 쪽으로 흐른 물은 직지천을 지나 감천으로 흘러든 뒤 낙동강에 합류하고, 영동 쪽으로 흐른 물은 어촌천이 되어 초강천으로 흐른 뒤 금강에 합류한다.
지방도 906호선이 지나는 괘방령은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를 보면 괘방령(掛榜嶺)이라 기록되어 있다. 『산경표(山經表)』에는 계방산(桂榜山)이라 적혀 있다. 현지 주민들은 ‘괘뱅이’라고 발음한다. 요즘 나오는 일부 지도에는 궤방령(机榜嶺)이나 개방령이라 적혀 있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괘뱅이’라는 발음을 한자로 옮기면서 생긴 차이점으로 보인다.
이웃한 추풍령이 관로(官路)라면, 이곳은 간섭 받기 싫어하는 장사꾼들이 이용하는 상로(商路)였다. 또 조선 시대 영남의 유생들이 과거 보러 한양 갈 때 추풍령을 넘으면 추풍낙엽처럼 낙방한다는 속설 때문에 마음 약한 유생들은 추풍령 대신 이 괘방령을 넘었다 전해진다. 괘방령의 ‘방(榜)’자가 합격자 발표 때 붙이는 방과 같은 글자라는 사실이 이들을 괘방령으로 끌어들였던 것이다.
또한 괘방령 정상에서 북쪽으로 1㎞ 정도 떨어진 곳에 의병장 박이룡(朴以龍·1533~?)의 위패를 모신 황의사(黃衣祀)가 길에서 약간 들어간 곳에 위치하고 있다. 박이룡은 충주가 본관으로, 임진왜란 때 괘방령을 근거지로 일대 전투에서 왜군을 섬멸했다. 왜군들은 한양 진격 때는 추풍령을 넘었지만 퇴각 때는 괘방령을 이용하다 박이룡 장군 등과 마주쳤다. 학계에서는 이를 지례전투라고 부르고 있다. 이때 박이룡은 황간 의병장 자격으로 지례전투에 참가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카페지기이신 배방장님과 정다운님, 이글스님, 수행중님이 트럭을 이용, 얼음물에 파닥파닥 뛰노는 보급품을 가득 싣고 단체로 위문을 와주셨네요. 시야시된 맥주, 콜라, 물뼈다귀 음료, 달고 시원한 설탕수박!!!
전국지부를 가진 J3만의 독보적 퐁경이기도 한데요. 얼마전 대간과 정맥을 졸업하신 이글스님이 전국 조선팔도를 다 돌아다니면서 신세진걸 갚을려면 아직 멀었다며 한북정맥을 하면서 수도권지부 지원에 감사함을 같이 전달해 주셨습니다.^^
엉거주춤한 대원과 바짝 수그린 방장님!
적당하게 살도 찌우고 가다마이 걸치면 지역에선 행세꽤나 하실 분이건만 산으로 강으로 역마살을 쫒아 전국을 돌아다니신다.
산과 강에 이어 전국토의 외곽을 둘르시는데 동해, 남해, 서해를 끝마치고 마지막으로 휴전선 DMZ를 통과중이시다. 어디서 멈출것인지 다음 행보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괘방령과 추풍령 사이 가성산과 눌의산을 넘어가야 한다.
대간 어느 한 곳 아름답지 않은 곳이 있으랴마는 장미꽃에 가시일까 어느 한 곳 쉬운 곳 또한 없다.
눌의산[訥誼山]
눌의산 정상에서 구미 금오산을 살필 수도 있다.
금오산은 대덕산 아래 초점산에서 갈래쳐 나가는 수도지맥 수도산에서 금오지맥으로 또다시 갈래를 쳐 대간과 나란히 북쪽으로 향하기에 눌의산에서 조망이 가능하다.
눌의산 정상은 충청북도 영동군 추풍령면과 경북 김천시 봉산면 사이에 있는 봉수대이다.
조선조 황간현(黃澗縣) 소속의 봉수대로, 추풍령면 추풍령리 은편마을 뒤 눌이항산(743m)에 봉수대 터가 있다. 눌이항산은 눌의산, 누리산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눌이항산봉수는 서울까지 전달되는 다섯 가지 봉화로 중 동래에서 영천, 음성, 충주를 거쳐 서울 목멱산(남산)으로 연결되는 제2거봉화로의 간봉(間烽)에 속한다. 경상도 금산(김천) 고성산(高城山)의 신호를 받아 소이산으로 전달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그 기록이 있다.
별장 2명, 감관 10명, 봉군 50명, 보 150명이 소속되어 같은 현내의 소이산봉수와 함께 운영하였고, 1894년(고종 31) 봉수제가 폐지될 때까지 존속하였다.
현재 봉수대의 흔적은 완전히 파괴되었고 그 자리에 헬기장이 자리잡고 있는 상태이다. 주위에서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에 걸쳐 사용되었던 것으로 짐작되는 토기와 기와 조각이 발견되었다.
연세가 70이 넘으신 황금송님은 23차 대간팀 최연장자로 본인만의 페이스를 유지하며 구간을 선두보다 항상 1~2시간 먼저 마무리하시고 휴식을 즐기신다.
추풍령이 가까워지자 밭떼기에 살구나무도 보이고, 버찌에 오디에 다닥다닥 조발조발 열린 어린 시절 먹거리에 잠시 동심으로 돌아가 천연의 간식거리를 맛볼 수 있었다.
역사 - 수많은 전투 벌어졌던 추풍령
삼국사기(三國史記) 권5의 신라 진덕왕(眞德王) 원년(647) 10월조 기사에 의하면, 이미 고대 시절부터 이 고개 근처에서 일대회전(一大會戰)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0월에 백제병(百濟兵)이 무산성(茂山城·무주군 무풍), 감물성(甘勿城·김천시 어모), 동잠성(桐岑城·김천시 남산동으로 추정)의 3성(城)을 에워싸므로 왕이 김유신(金庾信)으로 하여금 보병(步兵)과 기병(騎兵) 1만(萬)을 거느리고 가서 막게 하였다.’
추풍령 일대에서는 임진왜란 때도 두 해에 걸쳐 큰 전투가 있었다. 곧 1592년 4월 19일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가 이끄는 대규모 왜군이 이곳 추풍령 일대로 북상하며 공격해 올 때 경상우방어사(慶尙右防禦使) 조경(趙儆)과 조방장(助防將) 양사준(梁思俊)이 경상우도 지역의 관군을 이끌고 이 일대 추풍역을 지키며 대적하였으나 왜군 복병의 기습 공격을 받아 관군이 패퇴하면서 방어사 조경까지 왜군의 포로가 되었다.
이때 방어사 휘하에 돌격장으로 있던 세칭 신장(神將)으로 일컬어지던 정기룡(鄭起龍·1562~1622) 장군이 죽음을 무릅쓰고 적진 깊숙이 뛰어들어가 좌충우돌하면서 조경을 구출하고 동시에 적병 100여명을 참살한 바 있다.
‘여지도서(輿地圖書)’ 금산군 추풍역조에 의하면 그 당시 정기룡이 방어사 조경을 구출하고 그의 끊어진 우측 손가락 3개까지도 적진에서 수습해 가지고 돌아오는 대활약상이 잘 묘사되어 있다. 인근 고을 상주시(尙州市) 사벌면에 그의 묘소와 사당인 충의사(忠毅祠) 및 유물 전시관이 자리하고 있다.
이듬해 1593년 5월에도 경상좌도병마절도사를 지낸 장필무(張弼武)의 둘째아들 장지현(張智賢·1536~1593)이 의병장으로 경상도관찰사 윤선각(尹先覺)의 비장(裨將)이 되어 부하 수천명을 거느리고 이곳 추풍령에서 2만 왜군을 맞아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적군을 물리쳤으나 다시 금산(錦山) 방면에서 진격하여 오는 구로다 나가마사가 이끄는 대규모 왜군의 협공을 받아 마침내 사촌동생 호현(好賢)과 함께 장렬히 전사하였다.
황소뿔에 광솔불을 붙여 전투(추풍령고개)
추풍령고개를 바람도 쉬어가고, 구름도 자고 가는 고개로 알고 넘는 것보다는
역사의 한 토막을 더 생각하고 넘으면, 추풍령 고개 근처에 있는 민들레 한 포기, 억새풀 한 포기가 그냥 풀일 수만은 없는 관심을 갖게 될 것으로 보인다.
추풍령고개를 그냥 훌쩍 넘는 것보다는 임진왜란 때, 장지현 장군이 왜군을 맞아 황소뿔에 광솔불을 붙여서 왜군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해주고, 초전부터 조선을 침략해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심어준 전기를 알아보자.
추풍령고개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군사적인 주요 요새로 추풍령고개를 전쟁시에 함부로 내어줄 수가 없는 고개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 [이이 율곡]은 10만 양병설을 주장했었는데, 서애 유성룡까지 이이 율곡의 10만 양병설의 주장을 이해하지 않을 정도였으니 다른 신하들이야 무어 말을 할 것이 아니었다.
이이 율곡은, 서애까지 진심을 몰라주는 것에 대하여 심한 배신감과 홧병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고 결과적으로 이이 율곡은 49세에 돌아가시는 결과가 되었다.
추풍령에 자리 잡고 있는 충절사(忠節祠)에 향사된 의병장 삼괴당 장지현 장군은 충효겸전한 우리 겨레의 천추의 스승이다.
임진왜란 1592년에 조국을 수호하려고 창의하여 2천여 의병을 지휘하여 추풍령에서 적군을 방어할제 사력을 기울여 싸운 나머지 피아의 시체가 산을 이루고 피가 흘러 내를 붉게 물들였었나니 고군분투 중과부적으로 장렬하게 산화하셨다.
그의 나이 58세였으며 종제(從弟) 호현(好賢)을 비롯한 2천여 의병들이 모두 산화하였다. 장지현 의병장은 병마절도사 청백리 백야 양정공 장필무의 둘째 아들로 조선조 중종 31년 병신 7월 17일 영동읍 매천리에서 태어났고 그의 형 오류정 장의현은 경기도 수군절도사에 올랐던 인물이었다. 선조 23년(1590년)함경도 병마절도사 신립장군의 부장이 되어 변방 토벌에 공을 세우고 평난 원종 공신록에 이름이 올랐었다. 다음해 사헌부 감찰에까지 올랐었다. 그러나 날로 심해가는 당파싸움에 환멸을 느껴 벼슬을 버리고 시골로 낙향하였다.
옥천에 있는 중봉 조헌을 찾아가 의논하고 옥천, 황간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훈련을 하였다. 그로부터 1년 남짓 지난 1592년(임진) 4월에 왜란은 터졌다. 왜장 구로다와 모도리가 이끄는 5만여 왜군이 파죽지세로 동래성을 떨어뜨리고 경상도를 돌파 추풍령을 향해서 올라왔다. 왜장 구로다가 이끄는 2만의 왜군을 맞게 되어 이세영장군이 이끄는 관군과 합세한 장장군의 의병대는 요새에서 서전을 시작, 돌을 굴리고황소 뿔에 광솔불을 붙여 일제히 내려 몰았다.
불붙은 황소 때가 쏜살같이 적진을 향해서 돌진 육박전을 전개하여 순식간에 적은 5천이 넘는 시체를 버려둔 채 김천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전열을 정비하고, 제2방어진인 오룡동으로 이동하여 재침에 대비하였다. 이번에는 왜병이 약 4만이 넘는 대군이었다. 우리의 병력으로는 도저히 당해 낼 수가 없었다. 당시 군량관(軍糧官)이었던 황간 현감 정선복의 난중일기에 보면 그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5월 1일 장장군은 산꼭대기에서 정선복 현감을 불러 김천 쪽을 가리키며, “저 오가는 불빛이 내일 새벽쯤에는 이곳으로 왜병이 돌진해 올 징조이니 어떻게 하겠오” 하고 물으니 현감이 “공의 군령이 엄숙하고 위엄이 있는 것을 보니 조방장이나 다름 없소 내가 무엇을 말 할 수 있으리오” 하고 모든 것을 장장군의 지시대로 맡기겠다하니 장장군은 황간 현감을 향해 말하기를 "오늘 밤 적군의 동태를 살피건대, 우리보다 수십 배가 넘어 보이고 내일이면 총공세를 취할 것으로 보이니 나는 이미 죽음을 각오하였소 최후의 일각까지 왜군을 저지시킬 것이니 그대는 잠시 이 자리를 피해서 내일을 기약하여 권토중래(捲土重來)를 기약함이 작전상 최상의 전법일 것이요”
2천 의병들과 더불어 조국의 수호신으로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그때 7월 26일 조정에서는 통정대부(무관으로서 최고의 벼슬)병조참의를 증직하고 영동의 화암서원과 전북 무주 죽계서원에 배향되었다.
20:27분, 작동리와 작점리...
김천은 초점산에서 만나 웅이산까지 줄곧 대간길과 함께한다. 이곳 김천 어모면 능치리 또한 김천에서 영동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이다. 임진왜란 이후 칡덩굴이 우거지고 새소리가 가득찬 이곳에 사람이 옮겨와 살기 시작하였다 한다. 그곳 정자가 있는 능치고개에 어떤 일인지 백두대간보호법이 발효되었음에도 산이 파헤쳐지고 있다.
[중화지구] 중화지구는 황악산과 속리산 사이, 1000미터 이상의 산이 없는 백두대간 중 가장 기세가 낮은 추풍령에서 화령재까지를 지칭한다. 백두대간을 넘어온 경상도 여섯 고을 화서면, 화북면, 화동면, 화남면, 이 네 개 면은 본래 화령현이고, 모동면과 모서면은 옛날의 중모현이다. 중화란 바로 옛날 상주목에 속했던 화령현과 중모현을 이르는 말이다. 이 중화지구대는 충북 사투리와 경북 사투리가 섞인 형태의 말씨를 쓰고 있으며, 표고가 낮으면서 기온이 3~5도 차이가 나는 고원지대의 특성으로 포도, 배, 사과 등의 과일이 많이 재배되고 있다. 낮은 산줄기로 이어진 두 곳(화령縣, 중모縣)인 중화지구대는 백두대간 중 가장 고도가 낮은 곳이다.
용문산(710m)
경상북도 김천시 어모면 능치리와 충청북도 영동군 추풍령면 웅북리에 걸쳐 있는 산.
용문산은 김천시 어모면 능치리 용문산마을에서 서쪽으로 약 700m 떨어진 산으로 높이는 710m이다. 「1:25000 지형도」에는 표시되지 않은 산이지만 용문산기도원[일명 용문산신앙촌] 때문에 널리 알려져 있다. 경상북도 상주군 공성면 백학산, 국수봉에서 뻗어 나온 백두대간 산줄기가 용문산을 지나 갈현(葛峴), 사기점고개, 추풍령(秋風嶺)으로 이어진다. 용문산 일대 백두대간 산줄기 높이는 500~700m로 대체로 낮은 산지를 이룬다.
능선은 정상부를 중심으로 남북 방향으로 뻗어 있고, 동쪽 비탈면인 용문산마을에서는 어모면의 주요 하천이자 어모면을 대표하는 지명인 아천(牙川)이 발원하여 골짜기를 따라 남쪽으로 흐르다가 갈현 부근에서 발원한 아천의 다른 지류와 합류하여 동쪽으로 흘러 아천 본류를 이룬다. 영동군에 속하는 용문산 서쪽 비탈면에서 발원한 하천은 반계천과 추풍령천을 이루어 초강으로 흘러든다.
용문산 정상부와 능선 일대는 주변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경사가 급하고 고도가 높으며 도로가 개설되어 있지 않아 지형 및 생태 환경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용문산 동쪽 비탈면에 있는 용문산마을은 1940년경 기도원으로 출발하여 현재는 지역 최대의 신앙촌을 이루고 있다. 어모면 소재지에서 12㎞ 떨어진 용문산 깊은 골짜기에 자리 잡았음에도 1990년대에는 300여 가구에 1,000여 명이 상주하였고, 전국의 신도 3만여 명이 연중행사로 큰 집회를 열기도 했다. 2010년 5월 현재 약 200여 명이 상주하고 있다.
상주시 공성면과 김천 어모면, 충북 영동 추풍령면 경계에 걸쳐 있고 낙동강과 금강의 분수령이자 상주 남천의 발원지인 해발 795m의 산이름이 상주 지역민들에게 귀에 익은 '웅이산(熊耳山)'으로 확정됐다. 상주시 요청으로 2012. 6. 1일 국토지리정보원이 국가지명위원회를 열어 김천에서는 '용문산', '웅산' 상주에서는 '곰실', '웅이산', 영동에서는 '국수봉'으로 불려졌던 산이름을 '웅이산'으로 확정 고시했다.
용문산 정상석이 있는 멧돌봉을 지나 안부로 내리면 이정표에 샘터 표시가 쓰여있다. 우측 아래로 70m 지점에 샘터가 있는데 여름철에 긴요한 곳이니 꼭 기억해 두자. 된비알을 10분 정도 오르면 경북 김천과 상주, 충북 영동의 경계가 만나는 산봉우리에 오른다. 웅이산(국수봉)이 이젠 얼마 남지 않았다. 기양지맥(대한산경표의 감천지맥)은 백두대간 국수봉(794.2m)의 남쪽 600m에서 갈라져 백운산과 기양산, 형제봉을 지나 낙동강의 지류 감천에서 맥을 정리하는 45.8㎞의 산줄기. 감천의 북쪽 울타리 역할을 하는 산줄기이다. 웅이산(국수봉)에서 백두대간은 경북과 충북의 도계를 벗어나 잠시 상주쪽으로 들어간다. 조그마한 민영봉을 넘으면 큰재에 도착한다.
큰재(320m)
해발 300m가 겨우 넘는 금강과 낙동강의 수계로 상주 공성면과 모동면을 연결하는 2차선 아스팔트 포장도로 고개이다. 공성면의 3번 국도와 모동면의 977번 지방도로를 연결하는 920번 지방도로가 백두대간의 주능선을 가로지르는 곳이다. 고개마루에는 폐교가 된 옥산초등학교 인성분교가 있다. 정문에 설치된 안내판을 보니 지금은 '부산 녹색연합 생태학교' 겸 '백두대간 교육센터'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백두대간 교육센터라 대간쟁이가 주인공임을 아는 것일까? 학교 분수대처럼 생긴 수도꼭지가 양쪽으로 12개 가량 늘어서 있다. 공중화장실 안쪽, 장애인화장실에 있는 수도꼭지도 한밤중엔 사용할 만 하다. 물론 깨끗하게 아니온듯 사용해야 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 재는 행정구역상 상주시 모동면 신곡리에 속한다. 도로를 가운데 두고 상남실과 하남실로 나뉜다. 고개마루에까지 논이 올라와 있다.
개터재(380m)
유용하게 식량을 제공할 날짐승들이 많아 개터재란 이름이 붙여졌다는 설과, 산세가 마치 개들이 모여 살고 있는 형국이라 붙여졌다는 설이 있다. 또한 부근의 봉산마을, 효곡마을, 왕실마을 사람들이 농사를 짓기 위해 넘나들던 고개라 해서 봉산재, 효곡재, 왕실재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선두 대원들이 백학산으로 오른다. 대간을 하며 100km를 하나 잡아보나 싶었는데 후미에 여의치 않은 사정이 있는 모양이다. 구름이 끼어 햇볕이 나지 않고 바람이 꽤 많이 불어 하늘이 주는 기회이건만 괘방령에서 오늘 구간을 조정하자는 의견이 제시됐다. 오늘 구간 신의터재까지 얼마남지 않았다.
백학산(615m)
상주시 공성면과 모서면의 경계선에 있는 산, 백두대간 중 가장 고도가 낮은 지역인 중화지구권역은 해발고도가 200m~600m 정도의 낮은 지역입니다. 가장 높은 백학산도 그 높이가 615m에 불과합니다. 대부분의 백두대간은 도(道)나 시군(市郡)의 경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큰재에서 지기재에 이르는 이 구간은 경북 상주시에 속해 있습니다. 백학산구간은 흔한 마을의 뒷산처럼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금강과 낙동강을 가르는 분수계(分水界)입니다. 물을 가르는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의 원리를 담고 있는 백두대간(白頭大幹)임에 틀림없습니다.
백수리산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백은 밝음, 신, 해, 하늘, 광명을 뜻하는 고대어 "밝"이고
두름은 `두르다, 에워싸다`의 명사형이 `두름`이니 발음이 두루미와 비슷하고 이를 한자어로 갖다 쓰다보니 두루미 `학(鶴)`자 계열의 산이 생기게 된 것이라는 해석이 있고보면 백학산은 `모동과 모서를 둘러싸고 있는 신령스런 산`이라는 의미로 해석이 가능하다.
목욕탕을 예약하니 대원들이 힘이 불끈 솟는 모양새다. 화령시내 삼겹살집에서 소주한잔 나누자는 말이 나오자 날개가 돋친듯 뛰어간다.
힘들게 80여km를 달려온 대원들이 간절하게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나폴레옹은 알프스를 넘으며 이태리에 가면 술과 여자가 기다리고 있다며 군인들의 사기를 올렸다는데...
그러나 막상 신의터재에 도착하니 총대장님이 달갑지않게 생각할 수도 있다며 목욕만 하고 다시 돌아와 뒤풀이는 신의터재에서 후미를 기다려 같이하잔다. 목욕도 마음대로 못하고, 일찍 끝난 선두조끼리 쇠주한잔 따로 나누지 못할 이유가 있을까 싶다. 대원들의 단합과는 별게의 문제인데 총대장님이 삐지지나 않을까 눈치를 살피는 모양새다.
화령으로 움직이는데 운전기사도 비협조적이다. 택시라도 불러 예약해둔 목욕탕을 갈 태세이다보니 운전기사가 어려운 입장을 호소하며 "저좀 살려주세요~" 하며 엄살을 피운다. 수고비가 필요하다는 말에 임시총무가 갹출하여 건네니 그제사 입꼬리가 올라간다. ㅋ
백학산을 뛰어 내려와 현재 걷고있는 시멘트 임도에서 앞에 보이는 야트막한 고개 하나를 넘으면 육교형태의 윗왕실재가 나옵니다.
거기서 다시 또 한 고개를 넘으면 개머리재, 대간길은 개머리재에서 안심산 옆을 지나 또 한 고개를 넘으면 신의터재입니다.
10:41분, 서서히 끝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제 지기재만 넘으면 3구간의 마지막이다.
중화지구대 마실길에서는 오르막이 오르막이 아닙니다.
오르막도 없이 선두가 얼마나 뛰던지... 나도 이때 한번 뛰어보자 하며 선두 따라잡으랴... 이정표 사진 한장 남기기가 여간 큰 일이 아니었습니다.^^
의병장 김준신
신의터재는 해발 280m로 일제에 의해 어산재라 바꿔 볼리다 지난 95년 광복 50주년을 맞아 일제 잔재 청산 작업의 일환으로 고유 지명을 되찾았다. 신의터재의 유래는 인근 상주시 화동면 판곡리 낙화담의 슬픈 이야기와 그 맥을 함께한다. 임진왜란 때 최초의 의병장인 32세의 김준신이 이곳 신의터재에서 창의의 깃발을 높이 올려 상주성에서 수많은 왜적을 죽이자 왜병들이 이를 보복하기 위해 김준신의 고향 판곡리에 침입해 마을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학살했는데, 당시 부녀자들은 욕을 당하지 않으려고 낙화담 너른 못에 몸을 던져 죽었다 해서 낙화담이란 이름을 얻게 됐다고 한다. 그리고 오늘 지나는 고개를 다시 신의(信義)터재로 이름지었으며, 오늘 우리가 가는 윤지미산의 좌측 마을이 의사가 태어난 고향 판곡리이며, 낙화암이 있는 판곡저수지도 볼 수 있다.
경상북도 기념물 제77호로 지정된 상주 임란북천전적지(尙州 壬亂北川戰跡地)는, 임진왜란 당시 중앙관군과 왜군이 최초로 전투에서 순국한 사람들을 기리는 곳입니다. 북천이란 상주 시내를 흐르는 하천의 이름이며 이곳 자산이란 마을에서 격전을 벌였던 장소입니다. "임란북천 전적지"는 임진왜란 당시 북천지역에서 전투를 벌였던 장소란 뜻으로, 1592년 임진년 4월13일, 아침에 대마도를 출발한 왜군 선봉은 부산 앞 바다로 침공하여, 4월14일 부산진성, 15일 동래성을 함락한 왜군은 19일엔 언양성을 넘어뜨리고, 22일 영천성을 거쳐 별다른 저항도 없이 북진에 북진을 거듭 하였고, 그사이 조선은 18일에 유성룡을 도체찰사, 신립을 도순변사, 이일을 순변사로 임명해 백두대간의 조령, 죽령, 추풍령에 방어선을 편성하여, 왜군을 막기 위해 남진한 조선군은 23일 상주에 도착했으나 이때 병력은 고작 60여 명 정도였으며, 상주 판관 권길과 호장 박걸이 밤새워 소집한 잔병과 장정은 800여 명에 불과 했습니다.
그런데 왜군은 무려 17,000명 이때 이미 의병을 일으켜 상주에 있던 김준신 의병장 등은 상주성 사수를 주장하였으나, 순변사 이일(李鎰,1538∼1601)은 성을 버리고 북천에서 적을 막기로 합니다.
1592년 4월25일 조선군은 북천에 진을 치고 고니시가 이끄는 왜병 정예군 17,000여 명에 대항하는데, 순변사 이일(李鎰)은 포진도 하기 전에 적의 급습을 받자 도주해 버리지만, 종사관 윤섬, 이경류 등과 판관 권길, 사근도찰방 김종무, 호장 박걸, 의병장 김준신 등을 비롯한 800여 장병은 한발도 물러서지 않고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패하여 북천은 이들의 피로 붉게 변했습니다. 나중에 이곳을 철환산(鐵丸山)이라 했으며, 이들이 빠져 죽은 연못을 학사담(學士潭)이라 불렀습니다.
상주 판곡리는 고려시대 이후 청도 김씨의 세거지였다. 김준신 의사 제단비(金俊臣義士祭壇碑)는 의병장 김준신을 추모하기 위해 그가 출생한 이곳에 설치했다. 1850년(철종 1)에 제단비를 세우고 그 후 첨모재(瞻慕齋)를 건립했으며, 1993년에 첨모재를 중건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김준신은 32세의 나이에 분연히 일어나 의병을 소집하여 솔령장이 되었다. 그는 의병을 이끌고 칠곡군 석전리까지 진격했다가 다시 상주에 있는 본진으로 돌아와 상주성을 사수하면서 일본군을 격퇴했으나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을 당해내지 못하고 1592년 4월 25일 북천전투에서 전사했다. 당시 선조 임금의 명을 받고 상주까지 온 중앙군의 순변사 이일과 상주목사 김해는 피신했지만 상주 사람들은 북천전투에서 싸우다가 대부분 순국했다.
제단비 옆에는 연못 낙화담(落花潭)이 있다. 김준신의 활약에 분노한 일본군이 판곡리를 찾아가 김씨 일가를 멸하려 하자 죽어도 일본군의 손에는 죽을 수 없다 하여 김씨 문중의 부녀자들이 낙화담에 투신하여 자결했다.
김준신의 행적은 『선조실록』과 『선무원종공신녹원』에는 누락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영조 임금과 정조 임금 때 상주 유림의 건의로 충의단을 세워 당시 순절 장사들을 봉향할 때 김준신의 충절 또한 높이 평가하여 윤섬, 이경류, 박호와 함께 배향했다.
정조 임금은 김준신에게 ‘의사(義士)’라는 칭호를 내렸으며, 위패는 그때 설립한 충의단에 봉향했다. 김준신은 1820년(순조 20)에 사헌부 집의에 추증되었다. 제단비는 1986년에 새로 건립된 비각 안에 보존되어 있으며, 비문에는 정조 임금의 교서내용이 새겨져 있다. 제단비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겹처마 맞배지붕이다. 제단비는 1995년 12월 1일 경상북도 기념물 제113호로 지정되었다.
신은현(新恩峴), 의병장 김준신을 기려 신은현이라 이름 붙였다는 내용이 예전의 신의터재 표지석 뒷면에 쓰여 있습니다.
신의티에는 아쉬운 대로 이용할 수 있는 음용수 식수대가 있고, 간이화장실도 있고, 열댓명이 둘러 앉을 수 있는 팔각정도 있습니다.
힌트를 준다면 문제 유형은 대충~ 하나) 쇠뿔에 광솔불을 매단 이유는 무엇일까요? 두울) 황소뿔에 광솔불을 매달고 적진으로 내몰기엔 내리막과 오르막 중 어떤게 유리할까요? 세엣) 위 문제와 관련, 야간전투와 주간 전투 중 어떤게 유리할까요? 네엣) 위 문제와 관련, 공세적 작전과 방어적 작전 중 어떤게 유리할까요?
힘든 대간길 걸으랴, 역사 공부까지 하다가 후기 쓰시느랴 고생이 심하네요 예전에 일반 산악회 대장 할 때는 많은것을 찾아 설명하느랴 자료 수집도 많이 했는데... 그짓 안하니, 요즘은 영... 사진만 열심히 담아 오지요, 사진 담다보면 후미에서 늘 뛰어야 하고... 80km 정도가면 보통 180장 이상 담아 오는데, 날씨 좋으면 200장 넘습니다...후기 역사 공부가지 읽느랴 시간이 걸리네요. 덕분에 많은 공부 하고 갑니다,,, 하루 지나면 다 잃어 버리지만,,,, 화성이라는 아름다운 ㅇㅅ 老 松
풍라라님의 대간기는 한번만 읽기에는 죄송하군요.^^ 흔히들 산행기 쓰는 것이 산행하는 것 보다 힘이 든다. 하는데... 일리 있는 말이지요. 그리고 산행의 완성은 산행기에 있다. 뭐 그런 말도 있는데... 없습니까? 없으면 수행중이 하는 말입니다.^^ 이 정도의 산행기는 ' 걸음걸음 알뜰히 걸었다.' 해도 좋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첫댓글 뭐가 잘못된듯 싶은디요
총시간은 거의 같은디
운동시간이 다른분들에비해 엄청많고 쉬는시간은 엄청 적고
주무시면서도 꿈속에서 걸으신듯 싶네요~~ㅎ
수고하셨씀다
ㅎㅎㅎ~ 쉴때 트랭글을 정지시켜 두었거든요.^^
출발할때 다시 누르고~ 난 잘못이 없어요~~^^
아마 정지해놓은 시간도 운동시간으로 잡힌듯요
그래서 평균속도도 낮게 나온것 같네요
담부턴 쉴때 꺼야겠어요.^^
출발할땐 꼭 켜야될텐데 그게 걱정이네요.^^
제건 폴더폰이라 안꺼도 안 튑니다~~ㅎ
학교 다닐 때도 안하던 공부를 퐁라라땜세 했더니 머리가 지끈거리네...ㅎㅎ
함께 한 시간 즐거웠구 2주후에는 나 버리지 말구 끌고가줘 ^^;;
어이구~~ 형님~ 남 돌볼 여력이 없어유~^^
저도 선두 꼬랑지 잡느라 죽자사자 간다니께요~^^ ㅋㅋ
읽으면서
걸어온길을 다시보면서 역사공부도 같이할수 있는 시간이였습니다
정성가득한 후기 수고하셨습니다 ^^
서둘러 체력장 다녀올랍니다.^^
어제 술먹은 기억은 빼고 구구님이 사주신 장어힘으로 1등급 따올께요~^^
1등급은 따논 당상~~
화이팅 입니다 ^^
악력 56, 1분에 푸샵 100회, 윗몸일키기 81회^^
살살 해줬는데 악력은 맘에 영 안들어요~^^
100m는 오전에 비가와서 담에 한다네요.^^
이걸 언제 다 썼대요.
책 으로 한권이네.
수고 많이 했읍니다.
진부에 설 때까지 안전산행 이어가시기 바랍니다
다음엔 일산 형님처럼 함 뛰볼라고요.^^
청화산 올라가면 조항산-밀재까지 오르내림은 크지않다는 기억인데 맞을려나 모르겠어요~^^
버스에서 쉴때 마다 헨폰 잡고 있기에 뭘하나 어께넘어로 보니 산행내용 메모하고 있는 퐁라라....
학교다닐때 그리 공부했음 지금 경찰 청장할껄....푸하하
산행하랴....사진 남기랴...메모하랴....
느무느무 바쁜 퐁라라님 진정 멋진 산꾼입니다....
이 정신으로 9정맥 가즈아~~~
사람에겐 운명과 팔자가 있는데 개척하면 운명이고 푸념하면 팔잔기라~^^
9정맥도 80km씩 간다면 코올~~ ^^
나두 같이가요 ㅎㅎ대간 7번끝나면 갈때가 없어서ㅠㅠ 정맥해야죠 10명만 모아서 빡시게 ~~
헙~!!! 절반은 짤린다는건가용~ 합격 가이드라인은?^^
저보다 잘가면 합격 ㅋㅋ
많은 공부해서 자료수집 많이 하셨습니다
산행하시느라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다음구간 산행시 다시 또 뵙도록 하겠습니다
네~ 대대장님!
기력 완전히 회복하셔서 담구간부턴 선두 리딩해주셔야죠~^^
퐁라라님 후기보다 지쳤음 남겨뒀다 나중에 마저 읽을게요 ㅎㅎ 수고 많으셨어요 그리고 저한테 늦었다고 시말서 쓰라고 하셔서 속상했음돠 저두 늦고 싶어서늦는것 아니거든요 암튼제일 만만한 총무 그만 괴롭히샴ㅠㅠ 이번주 더연습해서 다음구간 확실히 선두 몰이 하겠음돠 시말서 안써도 되죠 ㅎㅎ
시말서가 아니고 경위서~ 궁금할 법도 했지용~^^ 글고 갑장이 젤 만만함. ㅋㅋㅋ
네 나중에 까고문님이 서울올라오면서 이야기 해주셔서 ㅎㅎ
경위서 한장 복사해서 나도 주삼...
나도 꼭 봐야겠써~~
컥 그런것 없음
“퐁라라와 함께하는 백두대간”이란 제목으로 잘 정리해서 책 한권 내세요.
진정 하고싶어도 아무나 못하는 일들인데 정성이 대단하십니다.
산행, 정리 ,후기 고생많으셨습니다.
수고하세요
네 레드캡님!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짚을건 짚고 가야겠기에 주섬주섬 모아봤습니다.^^
다음 구간엔 국공과의 시간조율 문제가 있고, 위험구간도 많으니 선두 후미 간극이 좁아질거라 봅니다.
레드캡님과 같이 간다니 괜히 기분이 좋아질라 하네요.^^
힘든대간뛰라 후기쓰랴
퐁라라친구 많습니다
역시 대단해
다음 구간에 문제를 출제해갈테니 정독햐~ ㅋㅋ
힌트를 준다면 문제 유형은 대충~
하나) 쇠뿔에 광솔불을 매단 이유는 무엇일까요?
두울) 황소뿔에 광솔불을 매달고 적진으로 내몰기엔 내리막과 오르막 중 어떤게 유리할까요?
세엣) 위 문제와 관련, 야간전투와 주간 전투 중 어떤게 유리할까요?
네엣) 위 문제와 관련, 공세적 작전과 방어적 작전 중 어떤게 유리할까요?
HID에겐 껌일라나? ^^
문제힘들어 ㅋㅋ살금살금가즈아..
힘든 대간길 걸으랴, 역사 공부까지 하다가 후기 쓰시느랴 고생이 심하네요 사진만 열심히 담아 오지요, 사진 담다보면 후미에서 늘 뛰어야 하고...ㅇㅅ 老 松
예전에 일반 산악회 대장 할 때는 많은것을 찾아 설명하느랴 자료 수집도 많이 했는데...
그짓 안하니, 요즘은 영...
80km 정도가면 보통 180장 이상 담아 오는데, 날씨 좋으면 200장 넘습니다...후기 역사 공부가지 읽느랴 시간이 걸리네요.
덕분에 많은 공부 하고 갑니다,,, 하루 지나면 다 잃어 버리지만,,,, 화성이라는 아름다운
네, 큰형님!!^^ 소일거리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주변 관광도 같이하면 더 좋을텐데, 그게 많이 아쉽습니다.^^
풍라라님의 대간기는 한번만 읽기에는 죄송하군요.^^ 흔히들 산행기 쓰는 것이 산행하는 것 보다 힘이 든다. 하는데... 일리 있는 말이지요.
그리고 산행의 완성은 산행기에 있다. 뭐 그런 말도 있는데... 없습니까? 없으면 수행중이 하는 말입니다.^^ 이 정도의 산행기는 ' 걸음걸음 알뜰히 걸었다.' 해도 좋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칭찬 맞으시죠~^^
가기 전 책을 두번 읽고, 다녀와서 네이양 뒤적이느라 시간을 좀 허비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많은 노력이 보이는 길고 긴 대단한 후기글이네요...
선두팀의 기다림이 이런걸까요???
수고많이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안산형님!
진드기퇴치제 마음이 더 고마웠습니다.^^
대간에 따른 지식도 모르는 사람이 기준이 되어야 함은
가 나서 수상타
애환 어리지 않은 산하가 어디 있으랴
질곡 깊은 역사에 넌더리
애써 외면하는
콕콕 헤집어 아프지만 그래도 앞으로의 전도앙망을 위해서
감수해야 하는디
아직도 역사는 진행중
이번에는 뙤놈들이 먹을려나
돌아가는 꼬라지가
하
주제 소제 파악 못하는 인들의 원성 괘념치 마시고
아낌없이 다 풀어 놓기를 앙망합니다
산행은 가볍게
후기는 알쓸신잡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 ㅋ^^
뒤풀이를 거하게 쏴주셔서 잘 먹었습니다~^^
개혀는 사람끼리 4~5차 중간 주말에 함 뭉쳐보시죠~^^ ㅋㅋㅋ
퐁라라님 덕분에 덤으로 역사공부까지...정성 가득한 긴 산행기 쓰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정성보단 그냥 제 취미에요~^^
연구할 능력은 안 되고 알려진 사실이나마 더듬고 가야죠~^^
에드캡님 말씀처럼 대간산행기 책으로 내셔도 되겠습니다.
베스트셀러 가 될지는 미지수이겠지만.....
입소문 타면 대박날 수 있으니 잘 써 보시지요.
또 한구간 마치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네~ 총대장님!^^
책으로 이미 나와있는 사실을 짜깁기했을 뿐입니다.^^
제가 추위보단 더위에 강해서 국공에 로드킬?만 피하면 술술 진행하리라 봅니다. 감사합니다.^^
세세한 설명과 함께 역사적 사실까지 잘
정리해서 올려주니 몰랐더부분 많이 배웁니다
긴거리 우리나라 등줄길 대간길 걷는다고
고생하셨습니다
네~ 산이지부장님!!^^
회를 더할수록 걷는데 자신감이 부쩍부쩍 더 생깁니다. 잼나고 신나고~^^
23차 대간팀을 정맥까지 계속 이어보자는 의견도 나오네요.^^ 응원 감사드립니다.^^
후기를 꼼꼼하게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요즘 바빠서 많은 시간을 들일 수가 없네요.
사총님은 지원담당에 선두대장에 글찮아도 1인다역입니다.^^
게다가 후기부담까지 지우면 개인시간이 없을것 같으니 염려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