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오동 전투는 1920년 6월 7일 중국 지린성 왕칭현 봉오동에서 홍범도[洪範圖, 1868.8.27~ 1943.10.25] , 최진동, 안무 등이 이끈 대한독립군 연합 부대가 일본군 제19사단의 월강추격대대를 무찌르고 크게 승리한 전투다.
또한 청산리 전투는 1920년 10월 21∼26일, 김좌진[金佐鎭, 1889.11.24(음) ~ 1929.12.25(음)]이 이끄는 북로군정서 군과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 등이 주축이 된 독립군 연합부대가 만주 허룽현[和龍縣] 청산리 백운평(白雲坪) 천수평(泉水坪) 완루구(完樓溝) 등지의 10여 차례에 걸친 전투에서 일본군을 대파한 싸움을 말한다.
우리나라 친일 역사학자들이 가장 재롱을 떠는 것 중 하나가 일본이 깨진 것은 반드시 누구 때문이란 핑계를 달아 그 사람 때문에 재수없이 졌다는 식의 논리를 펴고 있다. 또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전투와 전쟁에 있어 국민의 호응이 없으면 어떤 전투, 전쟁도 이길 수가 없는 것을 잊어 먹게 한국의 친일 역사학자들을 세뇌시킨 결과 우리민족의 대동단결을 교묘하게 원초부터 절단 내고 있다.
친일파란 어쩔 수 없이 일본의 앞잡이가 된 것이지 본인은 그렇지 않다고 이구동성 말하지만 그 뿌리는 조국과 민족은 어떻게 되더라도 내 가족 친지만 잘 먹고 살면 된다는 이기적인 사람들로 그 뿌리가 조선의 사대부들로써 일제 강점시 자동적으로 친일파 통치자가 되어 민족을 능멸한 자들로 그중 가장 위험한 부류가 친일 역사학자라고 생각한다. 특히 일본놈들이 만든 친일사관에 의거 거의 대다수가 일본의 이념에 찬동하며 한국은 일본에 종살이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논리를 지금까지 펴왔던 것이다.
예를 들어 3.1 독립선언서 서명자 33인중 만해 한용운(1879.8.29~1944. 6.29) 단 한 분을 빼고 몽탕 친일파로 변절했다. 33인중 해방 후 자신이 친일파임을 사죄한 사람은 초대 고려대 총장을 역임한 현상윤(1893~?) 단 한 분 뿐이었다. 이것이 대한민국 Leader의 현주소로 50~60년대 매년 3.1절 기념식에서 독립선언서 낭독을 33인중 한분이라고 소개하며 친일파였다는 사실을 쏙 뺀 저의는 지도층 거의가 친일파였었기 때문에 두리둥실 넘어 갔던 것이다.
친일 역사학자들의 재롱 중 하나는 이순신 장군이 판옥선(거북선) 13척으로 133척이 넘는 전함을 가진 일본해군을 이겼다는 성경에서 말하는 모세의 기적과 같이 들먹이며 장군을 귀신화 하는데 성공하고 있다. 이게 말이 된다고 가르치는 놈들 땜에 장군을 폄하하고 있는 것을 모르고 맹목적으로 귀신이니까 당연히 이긴 것으로 그냥 넘어가고 있다. 병신들처럼!
장군은 머리는 차고 가슴은 따듯한 사람이었고 공과 사를 엄격히 다뤄서 백성들을 단합시켜 전쟁에 참여시키는데 가장 다루기 힘든 사대부 즉 양반들이 장군을 믿고 따르며 자기들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어선 600여척을 장군께 자진해서 헌납하고 전쟁에 참여하는 그 정신이 어디서 나왔었는가? 명량 울돌목의 기적은 이 조그만 어선들이 빠른 물살을 이용해서 왜선과 부딪침으로 기선을 제압할 정도를 넘어 왜군을 지리멸렬支離滅裂하게 만들 수 있었던 것이 가장 큰 것이다. 그 난장판을 장군은 비록 13척의 판옥선(거북선)이지만 적진을 종횡무진 휘저을 수가 있었고 또한 중요한 것은 판옥선 자체가 전방 측방 좌우로 함포 2문씩 6문을 장착한 무적의 전투 함선이었고 조그만 함포 2문을 겨우 전방에 배치한 일본 전투함보다 월등한 과학의 해군이었기에 쏘기만 하면 백발백중이 가능하면서 사거리가 거의 1.5배인 함포를 가지고 일본 전투함을 격파할 수 있었던 과학의 해군이었기에 전투를 이길 수가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임진전쟁때 대포에서 일본을 압도하는 과학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전쟁에 응용한 3대 대첩(한산도, 행주, 진주) 및 전주성 대첩은 왜군을 맞아 포로서 대결한 결과 조총으로 꼬무락거리는 왜적을 크게 무찌를 수가 있었던 것이다. 즉 과학의 조선을 그냥 역사에 남기기가 싫은 일본 및 친일 역사학자들이 합작해서 만든 역사가 거꾸로 우릴 병신으로 만들고 있는지도 모르는 바보가 되고 말았다. 즉 전쟁 당시 화승총, 조총, 포, 병참, 전술, 사기 등 모든 것의 종합이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군과 민이 이기겠다는 정신적 합의가 이뤄질 경우 어떤 적도 우릴 경멸할 수가 없었고 그것을 가장 잘 이용한 장군이 이순신이다. 따라서 이를 응원하지 않은 조선의 왕 선조는 자기보다 인기가 많은 장군을 시기하고 모함한 결과를 우린 모두 알고 있다.
또 군 민 관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장군의 힘은 어디서 나왔을까? 이것이 전쟁을 이길 수 있는 원동력인 것이다. “개인은 똑똑한데 뭉치면 힘을 못쓴다”는 일본놈들 식민 통치학에 일제시 배운 친일학자들이 우릴 그렇게 가르쳐서 자학하게 만들었지만 어디 그 근본이 가겠는가? 지금 그 근본을 IMF 금 모으기 운동, 일제시 국채 상환 운동 등에서 두 눈으로 확인 사살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의 왕들은 반역이 두려워 각종 포에 있어 그 포신의 길이와 구경을 제한했었다. 장군은 포신을 손대지 않고 연구개발 시켜 포사거리를 늘려 전투에 참여해서 전쟁을 이긴 죄 즉 무기의 과학화를 역모로 되받아 백의종군하는 기막힌 꼴을 당하면서 선조에게 역모의 죄로써 친히 나국(拿鞠/拿鞫)을 당한다. 다시 생각해보자 이거 이대로 역사에 기술하면 그 역사를 배운 우리 민족의 자각을 그들이 얼마나 두려워 했겠는가? 그 이유는 자기들 보다 우리가 훨씬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즉 식민 통치가 불가능이 문제가 아니라 어느 날 거꾸로 한국이 일본을 먹는 끔찍함이 연상되기 땜에 역사를 교묘하게 날조할 수밖에 없는 불쌍한 놈들이라는 것이다. 사실 그 징후가 지금 시작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디로 가야 살 수가 있는가? 옆 나라 한국밖에는 다른 길이 없기에 언제든지 한국에 진출하고자 그 핑계를 위해서 독도를 지금도 볼모로 잡고 있는 것을 우리나라 친일파들이 입을 꾹 하고 있는 것이다.
어떠한 전투도 국민의 호응을 못 받으면 반드시 지게끔 되어 있는 것이다. 홍장군이 유능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당시 만주 그 땅은 우리 땅이었다. 우리 국민이 우리 군대가 일본과 싸우는데 우리를 지원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이걸 일본놈들이 무시하고 덤비다가 골로 간 것은 당시 일본놈들이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봉오동, 청산리 전투의 보복으로 간도에 터를 잡고 사는 우리 민족을 무참하게 짓밟은 결과 다시 우리땅 연해주로의 이주라는 역사적 사실로 남게 된 것이다. 자유시 사건은 몽탕 일본놈들 때문인 것을 좌익 우익하며 사상 논쟁으로 끌고 들어가는 놈을 봤을 때 아직도 이 친일파들이 죽기는 커녕 친일의 나라로 이끌어 다시한번 일제시와 같이 군림하면서 일본의 앞잡이가 되려는 꿈을 꾸는 이들이 죽기전엔 절대로 안 끝난다.
일제는 봉오동, 청산리 전투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만주 조선족 대 소탕작전이 전개가 되어 그 뿌리를 흔들었지만 면면히 이어오는 우리 민족의 정기가 어디 가겠는가? 문제는 이 정기가 역사의식이 거의 제로인 김일성이란 놈이 625 참전 대가로 백두산 천지에 금을 그어 모택동 에게 바침으로써 만주 즉 지금 중국의 최 동북쪽에 위치한 지린성[吉林省]· 랴오닝성[遼寧省] ·헤이룽장성[黑龍江省] 등 3성(동, 서, 북간도)을 모택동에게 그리고 시베리아까지 우리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연해주가 슬그머니 스탈린에게 어물쩍 헌납된 것이다. 이거 통일이 되면 차근차근 당연히 우리 옛 영토를 회복해야 한다. 후손인 우린 적어도 잊지는 말자.
안중근[安重根(1879.9.2~1910.3.26)] 의사께서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이등박문)1841.10.16~ 1909.10.26]를 골로 보낸 이유가 정당한 것은 노일전쟁 당시 만주에 있는 한국인의 전폭적이 호응을 받아 일본이 이긴 것은 일본의 전쟁 대의명분이 러시아 남침을 막아 조선의 독립을 보장한다는 달콤한 꿀 발린 소리였다. 사실 그때까지 일본놈들이 어떤 종자인지 모르고 믿은 죄도 있지만 독립은 커녕 대한제국을 신민지화 한 죄업 때문에 그는 죽어야만 했다. 지금의 일본놈들이 억울한 것은 당시 이등이 죽지 않고 그의 이상과 꿈이었던 서울을 수도로 만주 한국 일본을 아우르는 대제국을 건설하려 했던 그의 꿈이 날아간 이유가 이등의 죽음을 꼽고 있으며 억울하다고 안의사를 저격범 취급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땅 간도를 되찾는 가장 중요한 근거가 봉오동 청산리 전투다. 여기서 이길 수밖에 없었던 우리 국민 우리 국토였기 때문에 독립군과 국민이 일치단결하여 일본을 몰아낼 수 있었던 정말로 귀중한 우리 전투사다. 요새 장군의 흉상 문제로 시끄럽지만 왜 떠드는지 난 전혀 모르겠다. 일본놈들의 경우 지네들 땅이라는 아무런 근거도 없는 독도도 지네 것이라고 재롱을 떠는 마당에 우리 땅 전투의 근거로 우리가 찾아야할 간도의 합법적이고 정당한 근거의 봉오동 청산리 전투의 주역을 더 높이 받들지는 못할 망정 은근슬쩍 없애려는 작태는 그렇게 몰고 가는 놈부터 처단해야 여길 우리가 정당하게 찾을 수 있는 첫걸음이기 때문이다. 전투가 있었던 1920부터 지금 100여년이 지난 지금 정말로 친일 역사학자들의 맹성을 촉구해 본다.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이기자 간이 배 바깥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여기서 또 깜박한 것은 한국인의 지지때문에 이길 수 있었던 전쟁을 자기들이 이룩한 것으로 착각한 것이다. 내용을 들여다보면 기관총을 가진 7만의 러시아 육군이 22만명을 동원한 일본 육군에 밀려 연해주로 퇴각한 것은 사실이나 일본군 8만여명의 희생은 일본으로선 휴전밖에 답이 없었다.
그런데 무서운 것은 러시아가 깨진 것을 절대로 잊지 못하는 민족이라는 것이다. 러일 전쟁 후 만주는 일본 관동군이 장악하였는데 몽골 근처 노몬한에서 1939년 5월 일본군은 몽골군 불법월경으로 충돌하자 상호원조조약을 맺은 소련의 기계화 부대가 일본군을 전멸시켰다. 이에 일본은 만주에 주둔해 있던 항공 ·전차 병력을 총동원하여 대대적인 공세를 취하였으나, G.K.주코프 지휘하의 소련군의 반격을 받아 참패, 사상자가 3만여명에 달하였고 9월 정전협정이 되었다.
우리가 당한 것을 보복한다면 일본이 없어지는 결과만이 답이다. 일본은 사실 속으로 떨고 있으며 친일파들의 마지막 역시 얼마 안 남았다고 생각한다. 제발 공부 좀 해라!
또 우리가 우리땅 간도를 잊어 먹는 출발은 홍범도 김좌진 장군을 잊어 먹는 것과 같다. 이 기회에 반민족 특위를 재 창설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보고싶다!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