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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3일
말씀 : 에스겔36:26
제목 : 중생의 의미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런 질문을 받기도 하고 또 자신이 스스로 해보기도 합니다. 그것은 바로 “당신은 거듭나셨습니까?” “Are you born again?”입니다. 신학적으로는 ‘중생’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 시간 중생, 즉 거듭남에 대해 말씀드리는 이유는 거듭난 후의 삶을 다루기 위해서입니다. 사실 이 중생에 대해 강조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요한복음 3장 5절은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 주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여기서의 ‘거듭남’이라는 말은 다시 태어난다는 뜻인데 이 말은 어떤 전제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죽음’입니다. 죽음이 전제되지 않으면 거듭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먼저 죽어야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성경은 그것을 우리의 영혼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2장 1절에서 우리가 죄와 허물로 죽었는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살리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렇다면 우리의 영혼이 죽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죄로 인하여 우리 영혼의 생명력이 사라졌고 하나님과 우리의 영적 관계 또한 끊어졌음을 뜻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로마서 6장 23절의 말씀은 죄로 인하여 우리 영혼과 육신의 영원한 죽음이 초래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거듭난다는 것은 죄로 인하여 죽었던 우리의 영혼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죽은 영혼을 다시 살게 하시는 분은 누구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살릴 수 있습니다. 죽은 영혼이 스스로를 어떻게 다시 살려낼 수 있겠습니까? 죽은 영혼에게 새로운 생명력을 주셔서 되살리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거듭남, 중생은 오로지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여기서의 ‘물’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여러 가지 해석들이 분분하지만 성령은 반드시 말씀과 더불어 역사하시기에 여기서의 ‘물’은 ‘말씀’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가장 적절합니다. 약1:18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이렇게 말씀하심으로 우리 영혼의 거듭남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임을 확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거듭남, 중생은 성령님께서 말씀을 사용하여 이루시는 역사이며 사건입니다.
또한 성령님은 우리의 영혼을 거듭나게 하신 후 우리 영혼 안에 내주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우리 영혼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은 우리의 죄로 인하여 근심하실지언정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으십니다. 성령님의 내주는 영구적인 것임을 아셔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인치심을 통해 우리의 영혼이 완전한 하나님의 소유임을 확정하십니다. 엡1:13-14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한번 거듭난 영혼은 결코 다시 죽을 수 없습니다.
거듭남, 중생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생명, 마음, 이해, 성향, 해석, 소욕을 얻게 되어 내주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겔36: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거듭남의 교리를 생생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교훈적 말씀을 이해해야 할 뿐만 아니라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해야 합니다.
거듭남, 중생은 성령의 초자연적인 사역이라는 것을 앞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이 거듭남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죽은 죄인이 살아나고, 부패한 본성을 회개하며, 나아가 복음 전파의 명령에 반응하는 것입니다. 에스겔서의 중생의 역사는 존재론적인 변화 모두를 포함합니다. 즉 개인의 본성이 완전히 무너지고 해체되어 다시 창조되는 것입니다. 영적 자극에 반응하지 못하는 돌 같은 마음이 반응 가능한 부드러운 마음으로 변합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한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사람과 똑같이 만든 조각상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조각상은 지성과 감성을 지닌 인간과 똑같이 생겼지만 돌이기 때문에 생명은 없습니다. 발로 차고 때리고 찔러도 반응하지 않습니다. 생명이 없는 돌이기 때문에 어떤 자극에도 반응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살아있는 몸은 자극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습니다. 피부에 와 닿는 부드러운 바람도 느낄 수 있으며, 손가락에 무엇인가 조금만 닿거나 손등에 벌레가 붙어 있어도 금방 반응합니다. 즉 살아있는 몸은 모든 것에 반응하게 되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죄인은 영적으로 죽어있기 때문에 영적 자극에 반응할 수 없습니다. 물론 그런 능력이 없다고 해서 하나님 앞에서 책임져야 할 죄의 모든 형태를 모면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미 영적으로 죽은 자들은 어떤 자극을 가해도 반응을 할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죄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없고, 말씀을 전해도 들을 수 없습니다. 불의를 사랑하고 자율을 고집하는 본성을 지닌 인간은 하나님을 적대시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인정할 수도, 율법에 복종할 수도 없습니다.
이는 요셉과 그의 형제들의 관계에서도 여실히 드러납니다.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미워했습니다. 요셉에게 친절히 대할 수도 있었고 사랑할 수도, 도와줄 수도 있었지만 그에 대한 증오심 때문에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친절하게 대하지 않았던 것은 그럴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며 그런 마음이 없었던 것은 동생에 대한 증오심 때문입니다. 즉 올바른 판단의 감각도, 반응도 없었습니다.
이렇게 증오심 때문에 호의를 무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옥에 갇힌 정치인 중에 특사로 내보내주겠다고 하는데도 대통령에 대한 증오 때문에 그렇게 하지 말라고 거부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결국 특사로 나오긴 했지만 감사는 절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듯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의 문제는 왕에 대한 증오심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나오지 않는 이유는 그분께 나올 의향이 없기 때문이고, 그분 앞에 나올 의향이 없는 이유는 불의를 좋아하며 그분을 증오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하나의 ‘돌’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생명이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성령의 초자연적인 사역이 없으면 복음의 부름에 응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더 명확하게 나타나면 모든 사람들이 믿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불순종의 영을 가진 존재들은 도덕적 부패와 영적 어두움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말씀이 얼마나 중요하고 진리가 얼마나 소중한지 알지 못합니다. 자기들이 저지른 죄가 얼마나 심각한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아무리 명확하게 보여주어도 볼 수 있는 눈이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죽었기 때문에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습니다. 성경은 그들이 유일무이한 그리스도의 인격이나 그분의 가르침에 담긴 참된 가치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사53: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예수님은 존경하며 우러러볼 만한 외모나 매력을 갖추시지 못했습니다. 고전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거나 진리를 분별할 수 없고 오히려 진리를 어리석게 여길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만약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이 영적 어두움이 걷혀 그리스도를 보고 그분의 가르침을 더 깊이 이해했다 하더라도 이 또한 여전히 큰 문제가 되는 이유는 의를 적대시하고 죄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그들의 태도 때문입니다. 성경은 인간은 철저하게 타락한 존재라고 말합니다. 타락한 인간들은 하나님을 미워하고 그분의 의로운 율법을 멸시합니다. 이런 죄의 성향 때문에 아무리 그리스도의 진리의 말씀을 통해 불의한 사람이 변하여 의로운 자의 삶을 본다 하더라도 그는 그것으로 인해 그리스도를 찾는 것이 아니라 그분에게서 더 멀어져 어두움에 거하는 것을 좋아할 수밖에 없습니다. 요5:19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사람들의 악한 행위에 대한 고발의 이유를 분명히 밝히고 계십니다. 빛으로 오셨지만 어두움을 더 사랑하고 악을 행하는 자들이 자기들의 악이 드러날까 봐 빛을 미워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가까이하고 그분을 받아들이려면 먼저 그 사람 안에서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그 변화는 사람들의 의지나 강요나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거듭남, 중생이라는 성령의 초자연적인 재창조 사역이 필요합니다.
방송에서 몽골의 유목민 생활을 방영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중 양이나 염소를 잡아먹는 늑대와의 전쟁을 치르는 몇 가지 방법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첫째, 늑대들을 죽이는 것입니다. 총이나 덫으로 늑대를 잡아서 죽입니다. 둘째, 늑대를 잡아 우리 안에 가두는 것입니다. 가죽을 팔아 돈을 벌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면 우리 안에 있는 늑대가 성품이 변화되어 개와 같이 온순한 동물이 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본성은 절대로 바뀌지 않습니다.
셋째, 그래서 어미는 죽이고 새끼들은 데려다 키웁니다. 어릴 때부터 키우면 순한 동물들이 될 것으로 기대하면 오산입니다. 처음에는 개와 같이 성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1년이 지나면 죽여야 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1년 후부터 늑대의 본성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본성은 안 바뀐다는 말입니다. 늑대를 잡아 훈련시키면 주인은 따를 수 있을지 몰라도 다른 사람들이나 양과 같은 짐승들을 볼 때 본능이 살아난다고 합니다. 그래서 몽골 사람들은 늑대는 길들일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즉 늑대의 본성이 바뀌지 않으면 절대로 사람들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없다는 말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인간도 본성이 바뀌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영생은 하나님의 영역이기에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늑대가 양과 함께 뛰어놀기 위해서는 늑대의 본성이 바뀌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아니면 인간의 본성은 바뀔 수 없습니다. 늑대와 마찬가지로 인간도 새롭게 창조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찰스 스펄전 목사님은 회개하지 않은 사람과 거듭난 사람과의 차이를 이렇게 비유했습니다. 돼지에게 두 종류의 먹이를 주었습니다. 한쪽에는 최상의 음식으로 진수성찬을 차려놓았고 다른 한편에는 음식 찌꺼기를 담은 통을 놓아두었습니다. 여기에 돼지를 풀어놓았을 때 어느 쪽으로 가서 음식을 먹었을까요? 깨끗하게 차려놓은 진수성찬이 아닌 음식 찌꺼기를 게걸스럽게 먹었습니다. 돼지는 이런 찌꺼기 음식을 먹어도 병에 걸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그 장면을 보고있어도 수치스럽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돼지가 사람으로 바뀌었다고 합시다. 물론 그럴 수는 없지만 스펄전 목사님이 그렇게 가정한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요? 인간이 된 돼지는 이전에 간절히 원했던 것을 역겹게 느끼고, 전과 달리 음식 찌꺼기 냄새에 몸서리칠 것이며, 돼지였을 때 먹었던 모든 것을 토해낼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에게는 도저히 먹을 수 없는 음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행동을 지켜보는 사람들을 의식하게 될 것입니다. 자기의 행동을 몹시 수치스럽게 생각할 것이며 괴로워할 것입니다. 또한 돼지가 인간으로 변화된 그 사건을 절대로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축복이 과연 무엇인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 유쾌한 예화는 아니지만 거듭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차이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여겨서 말씀드렸습니다. 성경은 우리 모두가 죄악 가운데 잉태되었고 회심하기 전에는 물을 마시듯 악을 저질렀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욥15:16 ‘하물며 악을 저지르기를 물 마심 같이 하는 가증하고 부패한 사람을 용납하시겠느냐’
사55:1-2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돼지가 구정물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듯 우리 또한 죄악이 가득한 곳을 좋아합니다. 즉 우리의 타락한 성품, 도덕적으로 부패한 본성과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돌 같은 고집으로 똘똘 뭉쳐있는 우리는 죄 가운데서 죽은 존재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반대되는 마귀의 뜻을 따라 살았습니다. 타락한 본성에 이끌렸으며 육신의 욕심을 따라 지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고 에베소서 2장 3절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그러나 아무것도 회복할 수 없고 아무런 희망도 찾아볼 수 없는 상태의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개입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셔서 성령을 통해 우리를 새로운 삶으로 이끄셨습니다. 죽은 영을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살리셨고, 죄 많은 인생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의로운 자라고 공포하셨으며,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시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의 본성뿐만 아니라 감성과 의지까지 변화시켰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태어났다, 거듭났다, 중생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침내 우리는 악을 도모하거나 즐기지 않고 의에 굶주린 자로 목말라하며 그분을 찾고 구하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새롭게 창조되어 거듭난 사람들의 삶은 이럴 수밖에 없습니다. 즐기던 죄를 미워하고, 전에 멀리했던 의를 사랑하고, 불순종의 태도를 부끄러워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자랑하는 자들로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비록 버리고 단절한 육신의 욕심과 더러움의 유혹에서 온전히 자유로운 사람들이 아니지만, 유혹을 받아 잠시 죄에 머물더라도 그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깨닫고 더럽고 썩었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려서 그곳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몸부림칠 뿐만 아니라 돌이켜 통회하고 자복하며 새로운 삶에 늘 거하기를 원하는 자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가지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왜 신앙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영생과 거듭남에 대해 말씀드릴까요? 이것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기로 결심함에 있어서 ‘거듭남을 기독교의 교리로 받아들이는가? 다시 말해서 ‘기독교라는 제도’에 함께하기 위해 그리스도를 구주로 언급했는가?‘와 ’진정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는가?‘는 완전히 다른 문제입니다. 즉 거듭난 후, 중생한 후에 내 삶이 변화되었느냐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옛 삶과 새로운 삶은 영역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패턴이 다르고 삶의 방법과 목적이 다릅니다. 그런데 입으로는 고백했는데 삶이 전혀 바뀌지 않았다면, 말씀에 전혀 반응하지 않는다면 진정으로 우리가 거듭났는지를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갈6:15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할례를 받았느냐 안 받았느냐, 다른 말로 침례를 받았느냐 안 받았느냐, 성찬식에 참여하는 자 또는 집사가 되었느냐와 같은 형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났느냐가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고후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느냐는 말입니다.
거듭남은 인간의 의지나 감정에 의존해서 고백을 받아내는 것이 아닙니다. 설득이나 강요나 교묘한 언변으로 사람을 구원시킬 수 없다는 뜻입니다.
마른 뼈를 살려내어 살을 붙이고 영혼을 불어넣듯 하나님께서 새롭게 창조하시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롬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믿어지도록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십자가 아래 엎드려 말씀의 빛을 마음에 비춰 우리의 더럽고 추악한 죄를 발견하게 되면 통회와 자백으로 우리를 정결케 하시는 십자가를 의지할 뿐만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신 그 크신 사랑의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 거듭남과 중생의 새로운 삶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의 목적과 우리가 이 땅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와 부활을 성령께서 알게 하시며 이로 인한 감격과 감사가 복음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런 복된 삶이 그리스도와 부활 그리고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약속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