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 내려온 지 2개월이 지났다. 처음 내려오기 전에 생각한 것은 수업도 하고 틈틈이 카페 영업도 할 겸 여유로운 마음으로 왔다. 준비하는 과정에 커피 바리스타 2급 자격증을 취득했을 때는 속으로 웃었다. 이것저것 대충 준비를 하고 들뜬 마음으로 제주로 내려왔다. 도회지 이방인은 대학 기숙사에 서식하며 가게 이전 날짜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전에 미리 의견 교환이 있었던 터라 몇 가지 메뉴를 더 추가하기로 마음먹고 예전 실력을 가다듬으며 무뎌진 칼을 갈고 있었다.
지리도 익힐 겸 몇 차례 카페를 들락거리며 장사하는 것을 지켜보기도 하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대충 허물없는 사이가 되어갔다. 어떻게 보면 카페를 운영하는 분은 여동생 남편의 외삼촌이라 나하고 그다지 가까운 사이는 아니다. 재일 교포인 매제는 일본에서 태어나 이곳 사정을 모르고 한국말도 잘 하지 못한다. 어머니 성화로 고향인 제주에 카페를 차렸지만 금전적인 도움만 줬을 뿐이고 건물을 짓고 장사를 하는 건 외삼촌인 것이다. 한때 장사가 잘 돼서 큰돈을 벌었지만 코로나 시국에 엄청난 타격을 받았다.
월세 감당이 안 돼 누나(여동생 시어머니)에게 사정해서 월세를 내려달라고 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매제와 여동생은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대폭적인 월세 경감과 함께 갖은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가게는 30평이 조금 넘는데 절반을 분리해서 한 쪽은 민속품과 토산품 등 잡화 물품을 팔고 한 쪽은 카페로 운영 중이었다. 잡화점은 외삼촌 부부와 막내아들이 운영하고 카페는 작은 아들이 운영 중이었다. 가족이 모두 가게에서 생활하며 장사를 하는 것이었다. 그러던 중 코로나 시국에 아들 중 누군가가 텅 빈 가게를 지키기 지루해 밖으로 나돌기 시작했다.
어딜 가나 돈 냄새 맡는 인간들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다가 호구 냄새를 맡으면 바로 작업 들어가는 것은 익히 알려진 일이다. 처음엔 사정없이 잃어주고 삼삼한 언니까지 붙여주니 아들은 그저 황홀경에 빠져들어 흠뻑 젖고 물신 들이키며 이 세상은 내 것이라는 꿈을 꾸게 되었다. 어디까지나 꿈은 꿈일 뿐 깨고 나면 좋든 싫든 헛것이고 말짱 개꿈일 뿐이다. 그런데 어쩌랴 개꿈으로 끝나기엔 현실 상황은 너무 멀리 가버렸다. 갑자기 잃어버린 본전이 생각나고 처음처럼 모든 것은 내게 돌아오리라는 믿음에 썩은 동아줄에 말라버린 패를 쥐게 된 것이다.
결국 사채까지 손을 적시고 나서 뒷감당이 안 된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눈앞이 캄캄했다. 가게 앞에는 건달들이 지겟다리 괴고 파리채를 흔들며 채권추심을 하기 시작했다. 가족들은 혼이 나갔고 처음 겪어보는 채권 추심의 악랄한 행동과 비행 앞에 속절없이 삶이 무너져내렸다. 카페는 폐업 신고를 하고 문을 닫아걸었지만 집요한 추심 앞에 많은 것을 내어주어야 했다. 한바탕 소나기가 지나가고 다시금 영업을 시작하려니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으며 가족들 보기도 민망하고 죄를 지은 몸은 어디에도 둘 곳이 없었다.
그러던 중에 가게를 비워달라는 요청이 있어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낙담하여 더 이상 장사해 봐야 좋은 꼴 못 본다며 마음의 정리를 하셨다. 그러나 부모 마음은 자식을 버리지 못하는 법이라 가게를 인도하는 날이 다가올수록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상심이 가득한 어느 날 오후 날씨는 더럽게 좋았고 관광객은 쌍쌍이 춤을 추며 몰려들었다. 그중에 어리바리한 할배가 트럭을 끌고 나타났다. 가만 보니 인수받는 바로 그 화상이었다. 화물 적재함에는 조그마한 공장 하나를 차려도 될 법한 공구와 기타 장비를 싣고 온 것이다.
올 것이 왔구나, 하고 체념하며 창고 문을 열어 주었고 야릇한 할배는 싣고 온 짐을 창고에 내려놓았다. 가게를 인수하고 허술한 곳을 손본다고 했는데 이건 공장 하나를 차려도 될만한 공구와 장비를 내려놓으니 뒤로 넘어갈 지경이 되었다. 할배는 그 간의 이곳 사정을 모르니 의기양양해서 설레발이를 치는데 가게 식구들은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할배 역시 사람인지라 서늘한 바람이 스치는 걸 느낄 수 있었고 그동안 사회생활 경험으로 슬픔에 저 하늘이 있는 걸 눈치챘지만 짐짓 모르쇠로 쌩까고 발길을 돌렸다.
학교 수업이 없는 날 할배는 가게 근처에 트럭을 세우고 가게 안의 상황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토산품 가게는 정신없이 바쁜데 카페는 한산하고 젊은 사람 혼자 초점 없는 눈빛을 허공에 던지며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한참을 머물며 상황을 파악한 할배는 여동생에게 전화를 걸었고 대충 사건의 내막을 알 수 있었다. 뭔지 모를 의문스러운 행동들도 쉽게 이해가 가고 한순간 실수로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젊은이의 고뇌도 읽을 수 있었다. 사람이 살자고 하는 일이지만 남의 밥에 물 안 말고 내 다리 내가 긁는다는 신념으로 살아온 할배는 생각을 정리했다.
또다시 날씨가 더럽게 좋은 어느 날 할배는 카페로 향했다. 혼자 덩그러니 가게를 지키던 젊은이는 화들짝 놀라 일어서며 아버님이 출타 중이시라고 전화를 한다. 할배는 아버님 바쁘신데 연락하지 말라고 하며 잠깐 이야기를 하자고 한다. 할배는 " 오늘 공구 다 싣고 갈 거다, 그리고 이곳에서 인수인계 안 받고 장사도 안 한다. 나름대로 할 일 찾아 할 테니 가게는 자네가 해라 " "사람이 살다 보면 별일 다 일어난다, 그렇게 사는 게 인생이고 경험이니 부디 열심히 일해서 잘 먹고 잘 살아라. 잘 지내라 나는 간다" 하고 할배는 창고의 물건을 트럭에 싣는다.
"내가 이곳에서 장사한다고 약을 많이 팔았다, 혹시 나 찾는 사람 오면 학교 공부 바빠서 도서관에 있다고 전해라" 짧은 말을 남기고 가게를 돌아 나온다. 천지연 폭포 유원지 입구에 인간들이 바글바글하고 날씨는 더럽게 좋다. 할배도 더럽게 웃으며 트럭을 몰고 떠난다. "남의 밥에 물 말지 말고 동냥은 못해도 깡통은 찌그리는 게 아니다"!!
첫댓글 영업 개시도 안하고 중단하셨군요.
할배의 커피맛이 궁금했는데,
그래도 청춘 하나 살리셨으니
잘했네요.
역시 할배!!!
유럽여행은 잘 다녀 오셨는지요? 가게는 바쁠 때 가서 도와주기로 했어요. 내 손님을 실망시킬 수 없어 일단 나와바리로 접수를 했어요. 거기도 가끔 설겆이 할 부류들이 있어서...ㅎ
@늑대 이성직 담주 토요일 출발해요. ㅎㅎ
설겆이 잘 부탁!!
반은 졸면서 보니 족보도 복잡하고 무슨 말인지 헷갈렸는데 결론은 카페 영업을 중단했다는 거네요.
네, 당분간 다른 일을 하겠습니다.
그래도 정의롭고 정이 많은 할배입니다.
제주도에서의 인생이 흥미롭게 그려집니다.
잘 읽었습니다~^^
버벅대다 보면 대충 흘러 가겠지요.^^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