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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입니다. 지난 며칠의 날씨는 그야말로 환상적이었습니다. 과연 여왕의 위엄을 보여준 듯 하였습니다. 이제 또 잠시 쉬어갑니다. 기온도 차이가 커진답니다. 널뛰기를 하고 있나봅니다. 이제 많이 익숙해져 있기는 합니다. 이런 환경에 맞춰 살아온 민족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자연환경뿐만 아니라 사회 환경에도 적응력이 뛰어난 듯싶습니다. 어쩌면 그래, 그래봤자 몇 년이다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지요. ㅋㅋ 사실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하루가 여삼추인데 말입니다.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그냥 사는 거지요. 아무튼 배춧잎 하나 가지고도 점심 한 끼 해결하기 어려운 실정이 되었답니다. 뭔가 나아질 기미도 아직은 없나봅니다. 역시 날씨 탓인가요?
가정의 달이라고 하듯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 등등 날들도 많은 달입니다. 어린이가 어버이 되고 노인 되어 떠나는 일생이 그다지 길지도 않은데 참으로 굴곡도 많습니다. 그래서 심심하지 않은 인생을 지낼 수 있겠지만 힘들 때는 심심할 여유도 없지요. 하루하루 사는 것을 기적으로 안고 버팁니다. 그런데 지난 세기보다도 이번 세기에 들어서 스스로 인생 하직하는 비율이 높아진 이유는 뭘까요? 세상은 살기 좋게 발전하고 있다는데 이상합니다. 몸이 편하니 맘이 불편한가요? 거참! 아무튼 서두르지 않아도 오고 있습니다. 그냥 버티지요. 5월입니다. 하늘을 바라보며 하늘에 꿈을 그리며 이 한 달을 이겨보려고 합니다. 함께 갈까요? 건강하세요. ^)^
2024년 5월 4일 김종우 목사 드림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니라” (로마서 13 : 4)
<범죄도시 4>
짧지 않은 인생을 살아오면서 비행기 타 본 경험은 몇 번 되지도 않습니다. 앞으로도 기회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잘 알듯이 비행기 탑승할 때는 무기가 될 만한 기구를 지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범죄를 계획하는 사람에게는 하다못해 연필도 흉기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영화를 보면서 발견한 것은 비행기 안에 주방이 있다는 것입니다. 주방기구는 얼마든지 살인용 무기가 될 수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러니 범죄자에게 주방이 점령당해서는 안 되겠구나 싶었습니다. 비행기 피납을 주제로 한 이야기들을 여러 편 보았지만 아직 주방을 본 적은 없는 듯합니다. 왜? 글쎄요,
세상이 넓기도 하지만 이제는 아주 좁게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범죄도 한 나라에 국한하지 않고 세상을 누비며 벌어지고 있습니다. 하기야 진작 좁아진 세상이지만 가만 앉아서도 세상을 주무르는 시대가 되었으니 할 말 없습니다. 요즘은 인터넷 직구로 세계 여기저기서 물건들이 쉽게 오고갑니다. 그런데 물건보다 더 빠르고 쉽게 주고받는 것들이 생깁니다. 세상이 발달하니 범죄도 따라서 발전(?)합니다. 대사 중에 나오는 이야기지만 매우 공감이 갑니다. 실제도 그러하니까요. 법이 사건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건은 저질러지지만 법은 여러 사람이 합의를 해야 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시간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법이 제정되면 범죄는 이미 진화되어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수사도 범죄를 따라 진화해야 합니다. 마땅한 일이지요. 문제는 기존 인력이 벅차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새로운 인력을 보강해야 합니다. 그러니 구시대 수사관과 신시대 수사관의 협력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소위 손발이 잘 맞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럴지라도 신시대 수사관의 도움을 선배 수사관들이 잘 이해하고 따라갈 수 있을지 걱정되기도 합니다. 자기 직업을 살리고 지키려면 나이 탓하지 말고 계속 배워야 합니다. 물론 수사관들에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회생활 특히 직장생활에서 도태되지 않으려면 계속 신문물을 배워야 합니다. 발전해가는 세상에서 살아가기 점점 더 힘들어지는 기분입니다.
영화를 보기 전에 인터넷에 뜬 누군가의 평을 읽었습니다. 그다지 좋은 점수를 주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예약을 취소해요? 그건 그 사람의 전문적인 시각이고 관객은 전문성을 찾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잘 알듯이 이 영화는 특별한 감동을 선사하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대부분 그런 것은 바라지도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 다소 고차원적인 감상은 필요 없습니다. 그저 재밌으면 됩니다. 신나고 시원하고 속이 후련해지면 끝입니다. 질질 끌지도 말고 적당히 속도를 내서 지루하지 않게 두들겨 패주면 된다는 말입니다. 이 답답한 현실을 잠간이라도 잊고 직접은 아니더라도 시원하게 몸 좀 풀고 나오면 되는 것입니다. 사실 몸이 아니라 기분이지만.
한 청소년의 시신이 필리핀에서 국내로 들어왔습니다. 분명한 살인입니다. 그것도 전문적인 살인입니다. ‘마석도’ 형사는 시신을 확인하고 부검 결과도 듣습니다. 그리고 아이의 어머니도 만납니다. 아들 하나 바라보고 살던 그 어머니도 스스로 세상을 하직합니다. 아이를 그렇게 만든 범인을 찾아달라는 유언을 형사에게 남기고 말입니다. 한 가정의 비극을 마주하며 형사는 다짐합니다. 반드시 잡으리라. 이야기의 시작입니다. 그러나 속으로 들어가면서 이게 보통 사건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살인은 전문적인 칼잡이이고 돈으로 그를 움직이는 또 다른 머리가 있다는 사실도 캐냅니다. 이들은 마약이 아니라 도박게임을 빌미로 돈을 갈취하고 있습니다.
이 대단한 악덕 인터넷 도박업체를 잡으려면 그만한 기술이 갖춰져 있어야 합니다. 결국은 돈을 모으자는 것이니 돈이 미끼입니다. 보이지 않는 이 놈들을 나타나게 하려면 경쟁업체를 만들어서 찾아오게 만드는 것입니다. 독점해서 떼돈을 벌고 있는데 엉뚱한 놈이 껴들어 나눠먹게 된다면 가만둘 수 없는 일입니다. 사람의 욕심이 그런 것이지요. 내가 다 가질 수 있는 것을 다른 놈이 껴들어 빼앗아간다면 용서할 수 없습니다. 경쟁은 둘째 치고 자칫 밖으로 노출될 가능성이 두 배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제거해야지요. 그러니 찾아서 뒤집어놔야 합니다. 형사들은 바로 그것을 노리는 것이고, 오기를 기다립니다. 한 무리는 잡았지만 정작 살인마는 이미 자리를 떴습니다.
이 살인마를 더욱 잔혹하고 무자비한 놈으로 만들어야 그 마지막을 그만큼 더 시원하게 끝낼 수 있습니다. 관객이 바라는 것도 바로 그것이지요. 뻔한 이야기라도 바로 그것을 기대하고 보는 것입니다. 더구나 탕탕거리는 총이 아니라 직접 몸으로 부딪치는 맛이 다릅니다. 희한한 마블영화가 이루어내지 못하는 재미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어떤 기구를 사용하는 것과 몸으로 직접 때려잡는 것은 느낌이 다릅니다. 그것을 알고 기대합니다. 총을 쏴서 처리하는 것과 두들겨 패주는 것, 묘미가 다르지요. 아마도 대부분 그것을 알고 기대하고 보리라 생각합니다. 영화 ‘범죄도시4’(THE ROUNDUP : PUNISHMENT)를 보았습니다.
그래도 가시렵니까?
세상을 살아가며 내내 평안하고 평탄한 삶을 사는 사람은 아마도 거의 없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 나름대로 굴곡이 있는 삶을 살아갑니다.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습니다. 그냥 즐겁고 행복한 때가 있는가 하면 어렵고 힘든 때가 있습니다. 세상 말로 죽고 싶다 할 정도로 힘든 때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한 평생 억척스럽게 살며 모은 돈을 하루아침에 사기꾼에게 날리고 나면 정말 살맛 안 날 것입니다. 그렇게 경고를 하고 사회적 물의가 몇 번이나 생기는데도 여전히 다단계 사업에 끌려 들어가 재산 탕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욕심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고 빨리 물러서면 좋았을 텐데 놓칩니다. 일단 하늘이 노래지고 살맛을 잃어버릴 것입니다. 아무튼 목숨이 붙어있다면 그래도 희망이 있지요. 그런데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상태라면 어떨까요? 정말 다급하지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덤빌 것입니다. 옛날 어른들이 해주는 이야기 가운데 기억나는 것이 있습니다. 집에 불이 나면 요강을 들고 뛴답니다. 사람의 당황한 상태를 이야기해주는 것이지요.
진퇴양난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는 말입니다. 꼼짝없이 죽게 되었다 하면 사람은 어떤 반응을 할까요? 사실 아무도 모릅니다. 평소에 아무리 대담하게 말해도 당장 자신이 당하면 어떻게 반응할지 모르는 일입니다. 이래저래 노력해 봐도 아무런 효험이 없다면 결국 포기하고 주저앉겠지요. 위험 가운데서도 가장 두려운 것은 바다 한가운데서 발생하는 위험이나 비행기 타고 가다가 공중에서 당하는 위험일 것입니다. 헤어날 길이 없으니까요. 그런 위기에 처한 경우의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들을 가끔 봅니다. 가슴을 졸이면서도 영화니까 멋진 결말을 기대하며 봅니다. 그것이 사실로 우리에게 닥치면 어떤 반응을 할지 모릅니다. 다만 우리는 영원하신 하나님을 믿고 영생을 믿기에 일반 세상 사람들과는 다르리라 기대합니다. 어떠한 위험 속에서도 함께 하시는 우리 하나님을 믿기에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위험을 무릅쓰고 예루살렘에 들어옵니다. 그를 쫓아다니며 핍박하던 유대인들이 바울이 성전에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사람들을 선동하여 성전 밖으로 잡아냅니다. 죽이려고 아우성이지요. 성중에 소동이 났으니 로마 군대가 달려옵니다. 사실 아무 죄도 없는데 사람들이 바울을 몰아 죄인으로 만든 것입니다. 바울이 천부장에게 청하여 백성에게 말할 기회를 달라고 합니다. 그 후 사태는 더 험악해지고 바울은 영락없는 죄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위험을 눈치 채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로마 시민권을 이용하여 로마 황제에게 상소를 합니다. 그 후 바울은 왕과 총독, 많은 귀족들 앞에서 자기를 변명할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풀려날 기회가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총독이 황제 앞으로 죄수를 보내며 죄목을 명시하기 위해 바울의 말을 들어보고자 한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에게 있어서는 그들에게 전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놀라운 기회였지요. 그 사람들이 언제 복음을 들을 기회가 있겠습니까. 나중에 그들이 하나님 앞에 설 때에 변명의 여지가 없게 될 것입니다. 이 땅에서 부와 권세를 누리고 하나님 앞에 가서도 그대로 그 부와 권세를 누리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지요. 행여 저에게는 복음을 들을 기회도 안주셨으면서 왜 그러십니까? 하는 구차한 변명을 하지 못하도록 사전에 차단하시려는 의도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그들에게도 기회를 주신 것은 놀라운 은혜였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과연 그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았을까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지요.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구원의 기회를 주시고자 하십니다. 다만 받는 자가 받는 것입니다. 입에다 넣어주어도 씹느냐 안 씹느냐, 삼키느냐 안 삼키느냐 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우리가 이 자리에 다 같이 앉아 있어도 은혜 받고 안 받고 하는 문제와도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던 사람들 즉 성도들을 핍박하던 때의 바울, 그는 대단한 열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대제사장들 서기관들 장로들 쟁쟁한 사람들을 대신해서 자기가 나서서 각지로 다니며 그리스도인들을 잡아다 처벌을 당하도록 했습니다. 스데반 집사가 사람들로부터 돌을 맞아 순교하는 자리에는 나서서 가표 투표까지 했고 사람들의 겉옷까지 맡아주었습니다. 힘을 내서 돌을 던져라 그런 뜻이었지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전쟁이 종교전쟁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가장 잔인하고 용서가 없는 싸움, 그것은 영적 전쟁입니다. 관용은 추호도 없습니다. 죽느냐 사느냐 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바울, 그 때는 사울이었지요. 사울은 그런 열심을 가지고 그리스도인들을 잡으러 다녔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사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것입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너무나 찬란한 빛 때문에 그 분을 뵙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 빛 때문에 그는 평생 안질을 겪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분명한 예수 그리스도의 목소리, 그것도 히브리어로 말씀하신 그 분의 음성을 그는 들었습니다. 그리고 사울의 인생은 180도 바뀌어 바울의 인생이 되었습니다. 우리들에게도 이러한 체험이 있기를 빕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 그 사건이 없이는 신앙생활이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모두 한 사람 한 사람 이 만남의 사건이 반드시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러면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생각하는 가치가 달라집니다. 삶에 대한 자세가 달라집니다. 아프고 괴로운 현실을 산다 할지라도 실망하거나 낙심하지 않습니다.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히 13 : 14) 그래서 우리는 여기에다 목숨 걸지 않습니다. 이미 만난 분은 매일의 만남을 이루시고 아직 만나지 못한 분은 사모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성경을 읽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지만 특히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오십니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시 34 :18) 우리 자신의 부족함, 연약함, 어리석음, 죄 많음 등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면 하나님은 기꺼이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우리를 도우시며 구원하십니다.
바울은 자기 백성 유대인으로 말미암아 죄수가 되어 로마로 호송 당하게 되었습니다. 백부장 율리오라는 사람이 호송 책임자였습니다.(행 27 : 1) 로마에서 재판을 받으려고 기인 여행길에 오른 것입니다. 즐거운 관광길이 아닙니다. 죄수로 가는 것입니다. 지중해를 횡단해야 할 무렵은 태풍이 올 때였습니다. 바울이 전도여행을 다녔기 때문에 사정을 알고 충고해주었습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바울의 말보다는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신뢰했습니다. 처음에는 순풍이 불었습니다. 봐라 우리말이 맞지, 하는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봅시다. 행 27 : 14 “얼마 못되어 섬 가운데로서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대작하니” 드디어 엄청난 시련에 부딪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배에 실었던 모든 짐을 다 바다에 버렸습니다. 먼저 목숨을 건지는 것이 중요하지요. 그리고 다음에는 배의 기구들을 내버렸습니다. 20절 “여러 날 동안 해와 별이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이 없어졌더라” 말 그대로 절망 상태에 놓였다 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끝장이다 생각하고 죽는 시간만 기다리는 것이지요.
우리는 인생을 살아오면서 삶에 필요한 여러 가지 지혜와 지식을 터득합니다. 그 모든 것이 합하여 경험으로 자리 잡습니다. 우리 속담에 구관이 명관이다 하는 말은 경험을 많이 쌓은 사람이 낫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즘은 좀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새로운 지식, 새로운 정보, 새로운 기술을 많이 습득한 사람이 명관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도 사람에게는 한계가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전혀 예기치 못한 일들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옛날에 비해서 더 많은 과학적 정보와 지식 그리고 기술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하나하나 다 대처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도 예측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측한대로 다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어디서 어떤 돌발사고가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겸손히 미래를 맞이해야 합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것이지 인간의 손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누구를 보며 역사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커다란 풍랑 속에서 276명의 목숨이 풍전등화가 되었습니다. 고스란히 수장될 판국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사도 바울이 끼여 있는 것입니다. 그 바울은 하나님이 아직 사용하실 그릇입니다. 하나님은 아직 바울을 하늘나라로 부르실 때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가이사 앞에 서야 한다.(24) 무슨 말씀입니까? 이 풍랑 가운데서 죽지 아니하리라는 보증입니다. 살아야 로마 황제 앞에 서지요. 하나님께로 보증을 받았으니 두려울 것이 있습니까?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바울이 절망 속에서 죽음의 순간만 기다리고 있는 병사들과 사공들에게 나서서 말합니다. 22절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여러분 뭘 믿고 이런 말이 나옵니까?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23 - 24절 “나의 속한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25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 예,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게 하십니까? 예,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와 같이 사는 성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삶의 좌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 인생의 푯대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여 사람들이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그 때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요 6 : 68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하나님의 말씀은 영생의 말씀입니다. 구원과 생명의 말씀입니다. 은혜와 진리, 능력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잊어버릴까 이렇게 기록까지 해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어디서 하나님 말씀을 들으려 하십니까? 여기 있습니다.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서 그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할꼬 할 것이 아니요 이것이 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할꼬 할 것도 아니라 오직 그 말씀이 네게 심히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신 30 : 11 - 14) 아멘!
생각해봅시다. 누가 지도자입니까? 백부장입니까? 선장입니까? 선주입니까? 아닙니다. 그들 모두가 절망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누구도 이 절망 가운데서 헤쳐 나올 수도 없었고 빠져 나올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바울이 그들 앞에 나왔습니다. 그리고 담대히 말합니다. “이제는 안심하라” 주객이 전도되지 않았습니까?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무엇을 믿고 이런 말을 함부로 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신앙입니다.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25절) 할! 우리 인간에게 가장 큰 힘의 원동력이 무엇입니까? 지식이요?(아는 것이 힘입니다) 경험이요?(구관이 명관입니다) 체력이요?(체력이 국력입니다) 사랑이요?(사랑은 국경도 넘습니다) 물론 다 필요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믿음이 힘의 원동력입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 17 : 20)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신앙은 그 말씀에 대한 절대 확신을 가져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에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추호도 의심 없이 믿는 것입니다. 바로 그 믿음을 가지고 있는 자가 지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폭풍 가운데 살 소망까지 잃어버린 군사들 사공들, 그들 가운데 믿음의 사람 바울이 나서서 그들에게 살 소망을 줍니다. 그는 죄수의 몸이었지만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세상이 두 쪽이 난다해도 오직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며 그 말씀을 따라가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가운데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다 합니다. 안심하십시오. 우리는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떠한 환경과 아무리 어려운 처지에 놓인다 하더라도 염려하지 않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벧전 5 : 7) 아멘! 그리스도인에게 절망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좌절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끝은 없습니다. 다만 새로운 시작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다시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잡혀가서 죽음을 당할지 모르는 가운데 살아야 했던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소망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계 22 : 20) 하신 주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이 고통의 때가 지속되는 것이 아니다, 이 고난의 때가 내내 계속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주님이 곧 오신다. 그 약속의 말씀이 모든 고난과 역경을 이기게 해주었습니다. 당시 요한계시록은 괴문서였습니다. 지하문서였습니다. 사람들은 이상하게들 생각했지요. 도대체 그리스도인들이라는 사람들은 뭘 믿고 저렇게 참고 지내는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요.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이 풍랑 가운데 바울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듯이 말입니다.
2차 세계대전 후 독일 포로수용소에서 풀려나와 목사가 된 맥도날드 목사님의 간증이 있습니다. 그 포로수용소 안에 전기 기술자가 하나 있었습니다. 목사님과 한 내무반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여러 날에 걸쳐 이것저것 주워 모아다가 라디오를 조립하였습니다. 어느 날 그가 자고 있는 맥도날드를 깨웠습니다. 그리고는 기쁨에 가득찬 얼굴로 속삭였습니다. “그들이 왔다.” 얼굴에 화색이 돌았습니다. 그 소문은 삽시간에 온 내무반을 돌아 전 수용소로 전해졌습니다. 기상하기가 무섭게 모든 포로들이 뛰어나와 소리쳤습니다. “그들이 왔다!” 그러더니 덩실덩실 춤을 추며 야단법석이었습니다. 독일군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이놈들이 집단 히스테리에 걸렸나? 웬 사건이지요? 그들은 라디오를 몰래 들으며 행여 연합군 측으로부터 무슨 소식이 없나 매일 그것을 기다리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날 영국 BBC 방송을 통하여 소식이 들려 왔습니다. 연합군이 프랑스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성공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신이 나서 외친 것입니다.
보십시오. 아직 포로입니다.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독일 감시병들은 아직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습니다. 철조망이 쳐있고 쇠창살이 그대로 있고 수용소에 바뀐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외형적으로 바뀐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말입니다. 뭐가 바뀌었습니까? 내면세계가 바뀐 것입니다.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슬픔에서 기쁨으로, 괴로움에서 즐거움으로, 절망에서 소망으로, 무의미에서 의미로 바뀌었습니다. 왜요? 소식을 들었거든요. 이제 곧 올 것이다 하는 희망이 생겼거든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2000년 전에 사단 마귀가 지배하는 세상에 상륙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승리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다시 오마. 우리 주님 지금 오고 계십니다. 어떠한 일이 일어난다 해도 동요하지 맙시다.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계 22 : 7, 12, 20) 반드시 오십니다. 말씀 붙잡고 절대적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지금 당장 바뀐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바뀌는 그 날이 오고 있습니다.
생각해봅시다. 성경을 누가 받아쓰기 시작했습니까? 성경을 펴면 첫 번째가 무엇입니까? ‘창세기’입니다. 누가 썼습니까? 모세입니다. 모세는 예수님 오시기 몇 년 전 사람입니까? 약 1,500년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을 기록하기 시작하여 몇 년 만에 예수님이 오신 겁니까? 1,500년입니다. 우리는 지금 신약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이 기록된 지 얼마나 됩니까? 약 2,000년입니다. 다시 오실 때가 되었겠다, 아직 멀었겠다? 마음대로 생각하십시오. 구약성경이 기록되고 1,500년 만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이 기록된 지 벌써 2천년입니다. 오실 때가 됐겠다, 안 됐겠다? 글쎄 아직 멀었을까요? 아무튼 좋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 백성에게 이렇게 질타하십니다. 눅 12 : 56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변할 줄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변치 못하느냐” 무슨 말씀입니까? 때를 분변하라 그 말씀입니다. 지금이 어느 때인 줄 아느냐? 그 말입니다. 오실 때가 됐겠다, 안 됐겠다?
문제는 그겁니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 것에 관심이 없다는 말이지요. 관심이 없다기보다는 오히려 오지 않기를 바라면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오시더라도 천천히, 아주 천천히 오십시오. 그게 아니고 제가 죽은 뒤에나 오십시오, 그렇게 바라면서 살고 있는 거 아닙니까? 왜 그러지요? 그 좋다는 천국보다는 그래도 여기가 훨씬 좋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게 맞기는 맞는 생각입니다. 잘 생각해봅시다. 세계는 둘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 우리 기도하잖아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어디 계시다고요? 하늘. 저 보이는 하늘입니까? 그게 아니고 어디를 뜻한다고요? 보이는 이곳 육의 세계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두 세계를 모두 창조하셨습니다. 골 1 : 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영의 세계가 있다는 말이지요. 하나님은 영이시니(요 4 : 24) 그 보이지 않는 영계에 계십니다.
우리 육체를 가지고 영계에 갈 수 있습니까, 갈 수 없습니까? 갈 수 없습니다. 그러면 반대로 영은 우리 육체의 세계로 올 수 있습니까, 올 수 없습니까? 올 수 있습니다. 육계는 영계로 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영계는 육계로 올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처음에는 우리처럼 육체를 입고 오셨습니다. 요 1 :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그런데 다시 오신답니다. 또 육체로 오실까요? 그렇다면 성모 마리아가 또 한 번 생겨야 하겠네? 그렇지 않겠지요? 영으로 오십니다. 혼자 오실까요, 누구와 함께 오실까요? 마 24 : 31 “저(예수)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천사가 함께 옵니다. 살전 4 : 14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찐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이 누구일까요? 그들도 데리고 오신답니다.
정말 그런가, 아닌가 보겠습니다. 마지막 때 이루어지는 이야기가 어디 있겠습니까? 계 21 : 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곧 하나님 계신 영계입니다. 영계가 육계로 내려온답니다. 그렇게 하여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때는 갈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온다는데 우리는 가시렵니까? 사망과 고통이 없는 나라가 옵니다. 소망을 가집시다. 가지 말고 맞이합시다.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행 27 : 25)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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