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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24. 묵상글 ( 성 안드레아 둥락 사제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 하늘 정신.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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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24. 성 안드레아 둥락 사제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하늘 정신
오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이 황폐해질 때가 올 텐데
그날은 징벌의 날이면서 속량의 날이라고 하십니다.
그러시면서 어제 인내로써 생명을 얻으라 하신 주님께서
오늘은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으라고 하십니다.
“그곳이 황폐해질 때가 가까이 왔음을 알아라.
그때가 바로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이 이루어지는 징벌의 날이기 때문이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이 세상이 황폐해지는 것이, 징벌이 되는 사람도 있고,
오히려 속량이 되는 사람도 있다는 말씀이 되겠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에게 황폐해지는 것이 징벌이 되고
어떤 사람에게 황폐해지는 것이 속량이 되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떵떵거리던 사람,
이 세상을 자기의 영원한 거처로 삼던 사람,
하느님이 이승과 저승의 영원한 주인이심을 믿지 않는 사람,
이런 사람에게는 이 세상 멸망이 하느님의 징벌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에게는 이 세상 멸망이
하느님의 징벌로 생각되지 않고 그저 세상이 황폐해졌다고 생각될 겁니다.
실은 그래서 이 사람들이 징벌을 받는 것인데,
그렇지 않은 사람 곧 이 세상이 황폐하게 된 것이 자기들의 잘못 때문이고
하느님의 징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제라도 정신을 차릴 것이고,
하느님을 향하여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 것이라고 오늘 복음은 말합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이 속량을 받습니다.
속량은 거저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속죄가 먼저 있어야 합니다.
죽음으로써 속죄한다고 우리는 흔히 말하는데
죽음으로 속죄하려는 우리를 주님께서는 오히려 살려주십니다.
이것이 속량입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징벌이나 하러 오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 처음 육화하신 분이
징벌이나 하러 다시 오실 리가 없습니다.
육화를 완성하려고 재림하실 것이고,
그것이 속량입니다.
이런 주님께 우리는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기만 하면 됩니다.
뱀처럼 교만하게 머리를 쳐들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허리가 꺾여 땅만 쳐다보던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 하늘을 보라는 말입니다.
계속되는 사업 실패로 기가 꺾일 대로 꺾인 사람이 신앙인으로 거듭나는 것처럼
이 세상이 망할 때 이제 더 이상 세상은 향하지 않고
오히려 하늘을 향해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드는 겁니다.
예루살렘은 탈출하고 산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그때에 유다에 있는 이들은 산으로 달아나고,
예루살렘에 있는 이들은 거기에서 빠져나가라.”
예루살렘은 성전의 돌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황폐해진 세상이고,
산은 늘 하느님께서 계신 곳입니다.
세상이 망했다고 허리가 꺾여 옴짝달싹 못하고 꿩처럼 머리 처박고 있지 말고,
얼른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고 하느님 계신 산으로 달려가는 것입니다.
세상이 망해도 정신 차려야 합니다.
아니 그럴수록 정신 차려야 합니다.
하늘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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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24. 성 안드레아 둥락 사제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 21,28)
우리는 지금 <전례시기>의 막바지에 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그날에 벌어질 무시무시한 표징들을 듣습니다. 곧 ‘예루살렘 멸망에 대한 예고’, 곧 종말과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 곧 재림에 대한 표징들입니다. 이는 종말 곧 구원은 올 것이라는 사실과 하느님께서 그 역사를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동시에 그때에 그 어떤 시련을 당하더라도 절망하지 말라는 희망의 메시지로, 그리스도께서 오실 길을 준비하도록 우리를 이끌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 21,28)
이는 종말, 그날이 우주의 파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생활이 새롭게 창조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곧 그날의 대재앙은 단순히 미래를 앗아가는 두려움이 아니라, 우리를 “속량”하신다는 것을 통해 위로와 용기를 줍니다. 그래서 떼이야르 드 샤르뎅은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의 종말은 집단적 죽음이나 멸망, 결별이 아니라, 하나의 변형이 될 것입니다. 곧 인간의 종말은 분열과 죽음이 아니라, 새로운 변화와 새로운 탄생이 될 것입니다. 곧 대재앙이 아니라, 정신적 역전이 될 것입니다. 정신은 역전하고 다른 영역으로 들어갈 것이며, 세계는 순간적으로 변모할 것입니다. 그것은 하느님 안에서의 희열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종말론적인 표현들을 미래의 세상 종말에 대한 지식을 전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오히려 현재의 삶에 대한 태도를 말하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종말론적인 표징들은 우주론적인 표현이라기보다 신학적인 표현으로 알아들어야 할 일입니다.
사실, 그분은 먼 미래에 오시는 분이 아니라, 이미 오셨고, 세상은 이미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완성의 때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지금 그분을 맞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이를 헨리 나웬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주님은 오십니다. 내일이 아니라 오늘, 내년이 아니라 올해,
우리의 비참함이 다 지나가고 난 뒤에가 아니라 그 비참함 한가운데로,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서 있는 이곳으로 주님은 오십니다.”
그리스도의 오심은 우리의 삶 안에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을 통하여 들어옵니다. 곧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질 때, 그 십자가에서 하느님의 영광과 완성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의 아들”이 큰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때”에 결정적으로는 드러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 21,28)
주님!
새롭게 하소서.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게 하소서.
변형되게 하소서. 당신의 속량을 입게 하소서.
제 삶이 역전되고 당신 승리의 기쁨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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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24. 성 안드레아 둥락 사제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유혹은 달콤합니다. 현혹되지 마십시오
지금 이 순간, 나는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어떻게 했는가? 좋은 것이든 그렇지 않은 것이든 때가 되면 지나갑니다. 인생의 여정에 아쉬움이 있든 그렇지 않든 어느 날 마지막에 직면하게 되고 하느님의 심판 앞에 서게 됩니다. 그날에 분명한 것은 하늘을 바라보고 살아온 사람과 세상에 매여 산 사람이 구별된다는 것입니다. 준비한 사람은 알곡으로 하늘 곳간에 그렇지 않은 사람은 쭉정이로 불에 태워지는 결과를 맞이하게 됩니다.
예루살렘에 재앙이 닥칠 때 “유다에 있는 이들은 산으로 달아나고, 예루살렘에 있는 이들은 거기에서 빠져 나가라. 시골에 있는 이들은 에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마라”(루카21,21).고 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도시는 화려함과 편리함 속에 누릴 수 있는 온갖 것들이 넘쳐나는 곳입니다. 사람의 욕심과 계획이 지배하는 곳이요, 그곳에 맛들이면 빠져나기가 어려운 곳입니다. 결국, 도시는 하느님의 다스림보다는 인간적인 생각이 가득한 곳입니다. 그러니 주님께서는 그곳으로부터 빠져나가라고 호소하십니다. 그러나 발을 빼기가 왜 그리 어려운지요. 내일 망할 것을 알면서도 예나 지금이나 온갖 죄악이 거기서 사람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유혹은 항상 달콤합니다.
그에 비해 산과 시골은 순수함과 깨끗함이 거기에 있습니다. 오염 되지 않은 맑고 소박한 정겨움이 있습니다. 인위적인 조작이 아니라 자연의 순리와 법칙이 살아있습니다. 흐르는 시냇물에 목을 적시고 발을 담글 수 있어 좋고, 메뚜기가 뛰어놀고 다람쥐가 활개를 치며, 까치밥을 남겨 놓은 감나무가 있습니다. 꽁꽁 얼어붙은 빙판 길에 모래를 뿌리시는 할아버지가 계십니다. 그러니 그곳을 두고 성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일입니다. 순리가 살아있는 곳에 생명도 있습니다.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마구 파헤치면 결국은 죽고 맙니다. 혼자만 죽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를 죽게 만듭니다. 환경파괴로 말미암아 자연의 고마움도 사라지고 재앙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21,28).하시니 이제 우리의 마음을 정리해야 하겠습니다. 화려하고 편리한 인간적인 생각에 머물러 재앙을 자초하거나 세상 것, 이상하고 신비한 일에 현혹되지 말고 자연의 순리를 따르는 지혜, 곧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머리를 들어야 하겠습니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흔들리지 말고 바로 그때가 구원의 때임을 잊지 말고 그 안에서 주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종말 예언은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두려움과 공포이지만 믿는 사람에게는 환희와 희망입니다. 마지막 매달릴 곳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내 한평생을 예수님 안에, 내 온전하게 그 말씀 안에 내 결코 뒤를 바라봄 없이 그분만을 따릅니다. 모두가 나를 외면하여도 모두가 나를 외면하여도 내 결코 뒤를 바라봄 없이 그분만을 따릅니다. 이 땅 위에서 산다하여도 이 땅 위에서 산다하여도 십자가만을 바라보면서 그분만을 따릅니다”(가톨릭성가445)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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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24. 성 안드레아 둥락 사제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기타를 처음 배울 때 부르던 노래 중에는 양희은 씨의 ‘아름다운 것들’이 있습니다. 멜로디가 감미롭고, 가사도 아름다웠습니다. 오늘은 노래의 가사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꽃잎 끝에 달려있는 작은 이슬방울들 빗줄기 이들을 찾아와서 음 어디로 데려갈까. 엄마 잃고 다리도 없는 가엾은 작은 새는 바람이 거세게 불어오면 음 어디로 가야할까. 모두가 사라진 숲에는 나무들만 남아있네 때가 되면 이들도 사라져 음 고요만이 남겠네. 바람아 너는 알고 있나, 비야 네가 알고 있나. 무엇이 이 숲 속에서 음 이들을 데려갈까.” 꽃잎 끝의 이슬방울, 엄마 잃고 다리도 없는 가엾은 새, 텅 빈 숲에 남은 나무들은 어쩌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꽃잎의 이슬방울은 아침에 해가 떠오르면 곧 말라 없어지게 됩니다. 엄마도 없고, 다리도 없는 작은 새는 꽃잎 끝의 이슬방울과 같은 처지가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들과 헤어진 사람들, 믿었던 친구에게 배신을 당한 사람들, 갑자기 찾아온 병 때문에 놀란 사람들, 이번 이태원 참사에서 세상을 떠난 사람들, 사랑하는 이들을 떠나보내야만 했던 사람들은 어쩌면 텅 빈 숲속의 외로운 나무와 같은 심정일 것입니다.
바람아, 비야 알고 있니, 무엇이 이 숲 속에서 음 이들을 데려갈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진리가 여러분을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나는 세상의 빛입니다. 나를 따르는 사람들은 어둠 속을 걷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나를 믿는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는 겸손으로,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사랑으로, 돌아온 아들을 따뜻하게 감싸주는 아버지의 자비로 그 꿈이 현실이 되게 하셨습니다. 오늘 성서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은 행복하다.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은 행복하게 될 것이고,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라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죽는 것처럼 보이지만 부활이라는 이름으로 영원한 삶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도종환 시인의 ‘흔들리며 피는 꽃’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우리는 이성, 감성, 오성을 지닌 하느님을 닮은 거룩한 존재입니다. 생각을 바꾸면 불안과 긴장을 평화와 일치로 바꿀 수 있습니다. 그 길은 비록 멀고, 앞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막막하지만 힘과 힘의 충돌만으로는 평화와 일치를 만들 수 없을 것입니다. 주님의 도우심과 우리 모두의 지혜를 모아서 하느님의 뜻을 세상에 드러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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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24. 성 안드레아 둥락 사제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심리학자 베르가드는 남성 7,000명을 대상으로 연구한 끝에 좋은 남편의 공통점을 다음과 같이 찾았습니다.
첫째, 침착하다. 다툴 때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갈등을 대강 끝내지 않는다.
둘째, 성실하다. 자기 관리를 잘하고 약속을 꼭 지킨다.
셋째, 안정적인 삶을 중요시한다.
어떻습니까? 이 글을 보신 남편은 자기 자신이 ‘좋은 남편’인 것 같습니까? 많은 사람이 좋은 남편의 기준으로 이 세 가지를 말하고 있는데, 자기는 다르다면서 거부하겠습니까? 혹시 ‘이 정도면 충분히 좋은 남편’이라면서 자기에게는 관대하고, 다른 이에게는 엄격한 모습을 취하고 있었던 것이 아닙니까?
위의 세 가지 좋은 남편의 공통점은 결국 아무렇게나 살지 않겠다는 다짐이 아닐까 싶습니다. 즉, 더 좋은 방향으로 변화되는 자신의 진정한 성장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이 나의 불행이 아닌, 나의 행복을 가져다주는 길이 됩니다.
생각해 보면, 주님께서도 계속 우리에게 좋은 사람,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사람이 되라고 명령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나’말고 ‘남’을 위한 것이었을까요? 물론 그 순간에는 손해 보는 느낌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더 큰 선물을 받게 됩니다. 바로 하느님 나라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엄청난 선물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연중 시기의 마지막 주간을 지내면서, 복음 말씀은 계속해서 세상의 종말에 대한 말씀이 등장합니다. 특히 이스라엘 환난에 대해 계시해주십니다. 하느님 분노의 날은 곧 닥쳐올 것이고, 그날에 예루살렘은 짓밟힐 것이며, 사람들은 칼날에 쓰러지거나 포로가 되어 다른 나라에 잡혀갈 것이라고 하시지요. 그러나 이렇게 끔찍한 종말의 메시지가 여기서 멈추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로 희망을 동시에 이야기해주십니다.
이렇게 어려울 때, 주님께서는 또다시 ‘사람의 아들’ 모습으로 와서 선택된 자들을 보호해 주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따라서 걱정할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 사랑에 의해 우리는 구원될 수 있습니다. 단, 주님을 거부하고 악을 사랑하는 삶을 통해서는 절대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좋은 사람’,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사람’이 될 때만 끔찍한 종말의 세계에서도 주님을 통해 구원될 수 있습니다.
좋은 사람, 특히 주님께서 간절하게 원하시는 사랑을 적극적으로 이 세상 안에서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결코 남 좋은 일만 시키는 손해 보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큰 선물이 주님의 사랑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것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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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는 궁하면 아무거나 쪼아 먹게 되며, 짐승은 궁하면 사람을 헤치게 되며, 사람은 궁하면 거짓말을 하게 된다(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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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24. 성 안드레아 둥락 사제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끝은 새로운 시작, 절망은 없다”
-희망하라, 찬미하라, 인내하라-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서 생명을 얻으라.”(루카21,18-19)
어제 복음 마지막 말씀이 새롭게 떠오릅니다. 막연히 꾹 참고 견디는 것이 아니라, 선善안에서, 기도안에서, 섬김안에서 항구히 인내하라는 것입니다. 요즘 11월 아침 산책때 마다 즐겨 부르는 기도이자 노래입니다.
“성인들이 기뻐하는 그 나라가 얼마나 영광스러운가, 흰옷을 입고 어린양을 따라가는도다.”
“아침바다 갈매기는 금빛을 싣고, 고기잡이 배들은 노래를 싣고
희망에 찬 아침바다 노저어가요, 희망에 찬 아침바다 노저어가요.”
연중 마지막 34주간이 참 고맙고 좋습니다. 수도원 연피정 주간으로 그대로 오아시스 주간입니다. 피정 강의는 ‘천국의 사다리’ 동방영성고전을 바탕한 내용들입니다. 저의 독서 스타일은 식사와 같습니다. 좋은 책만 보면 행복해 집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듯이, 게걸린듯이 책을 읽습니다. 피정기간 독파를 목표로 하고 맹렬히 읽는 책은 ‘천국의 사다리’, ‘울림’, ‘백석白石 평전’ 세권입니다.
끝은 새로운 시작입니다. 절망은 없습니다. 오늘 강론 제목이기도 합니다. 이제 연중 34주간이 끝나면 다음주 부터는 기다림의 기쁨이 넘치는 대림의 시작입니다. 배밭농사 역시 끝이자 새로 구덩이가 파지고 거름을 넣게 되니 또 새로운 시작입니다. 새삼 새로운 의욕이 샘솟는 듯 합니다.
오늘은 베트남 순교 성인들 축일입니다. 어쩌면 우리나라와 흡사한 점이 그렇게 많은 베트남인지요! 민족적 자존심이, 자부감이 참 대단한 나라입니다. 여러 제국을 물리친 흔치 않은 나라입니다. 중국을, 프랑스를, 그리고 미국을 물리쳤습니다. 미국을 물리친 나라는 베트남이 유일합니다. 18-19세기 우리 보단 적지만 무려 1만여명의 순교자를 배출한 나라입니다. 공산주의 국가이지만 가톨릭은 여전히 건재합니다.
우리는 오늘 18-19세기 양세기에 걸쳐 순교한 117명 베트남 성인들 기념미사를 봉헌합니다. 이들 순교성인들중 안드레아 둥락 사제를 포함한 96명은 베트남인들이고 나머지 21명은 유럽 출신들입니다. 알려지지 않은 하느님만이 아실 무명의 순교자들은 얼마나 많겠는지요! 극단의 온갖 잔혹한 고문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견디어 냈고, 영웅적으로 믿음을 증거했습니다.
당시 베트남 현실은 민중들눈에는 재앙과 불행의 시기로 흡사 종말같은 암흑같은 예측 불허의 분위기였습니다. 바로 이런 칠흑같은 어둠을 그리스도의 복음이 빛이 환히 밝힌 것입니다. 끝은 새로운 시작임을 알리는 전조입니다. 이런 분위기는 당시의 우리 조선과도 흡사했습니다. 18-19세기 박해시대 2만여명의 순교자를 낸 조선땅 역시 칠흑같은 암흑에 종말의 지옥같은 분위기였습니다.
조선 500년 역사를 기록한 20여권의 실록을 읽은 후의 느낌은 한권이면 족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잔인한 보복으로 점철된 악순환의 반복의 역사였기에 한권만 읽어도 된다는 것입니다. 홍명희의 10권의 임꺽정 역사소설을 읽으면서도 역시 한권이면 족하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악순환의 반복이요, 인권이 무참히 유린된 역사였습니다. 완전히 칠흑같은 어둠속에 반복된 악순환의 역사요, 바로 여기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빛이 어둠을 밝힌 것입니다. 인권 증진과 신장에 그리스도교의 역할을 결정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그리스도교가 전래되기 전 사람 목숨은 파리 목숨과 같았습니다.
그리스도는 세상의 빛, 인류의 빛입니다. 어둠중에 방황하던 베트남과 조선땅의 사람들이 마침내 빛인 그리스도를 만난것입니다. 이어 들불같이 번진 순교자들의 대열입니다. 이미 빛을 보았기에, 하늘을 보았기에, 미친 듯이 열광한 민중들이요, 그 누구도 빛의 대열, 빛의 순교자들을 막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제가 조선실록을, 임꺽정 소설을 읽으면서 캄캄하고 답답했던 것은 빛의 부재였습니다. 그리스도의 빛만이 무지의 어둠을 밝힐 수 있습니다.
끝은 새로운 시작입니다. 절망해선 결코 안됩니다. 절망이 대죄입니다. 끝까지 인내로이 견뎌낼 때 생명을 얻습니다. 문이 닫혀 있으면 그 옆에는 희망의 문이 열려있습니다. 절망의 벽은 희망의 문으로 변하니 이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오늘 말씀도 이를 증거합니다. 복음은 예수살렘의 종말과 더불어 세상의 종말인 듯 했지만 새로운 구원의 도래의 시작입니다. 종말의 심판과 더불어 구원의 도래를 복음은 장엄하게 묘사합니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자 희망입니다. 파스카의 그리스도 예수님께 궁극의 희망을, 믿음을, 사랑을 둘 때, 항구한 인내도 가능합니다. 저절로 ‘희망하라, 인내하라’는 권고를 하게 됩니다. 오늘 묵시록에서 바빌론의 패망은 장차 있을 로마제국의 멸망을 상징합니다.
“무너졌다, 무너졌다, 대 바빌론이!”
사실 로마제국의 멸망을 목격하면서 눈감을 때,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세상의 종말인 듯 생각했다 합니다. 그러나 로마의 멸망과 더불어 게르만족의 개종으로 새로운 그리스도화된 유럽이 시작됩니다. 새삼 끝은 새로운 시작이요 모두가 하느님의 구원섭리 안에서 이뤄지는 일임을 깨닫습니다. 바빌론으로 상징되는 로마의 멸망은 바로 하느님의 승리를 나타내며 이어 천상에서 들려오는 승리의 찬미가입니다.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권능은 우리 하느님의 것, 과연 그분의 심판을 참되고 의로우시다.”
에 이어지는 오늘 독서에는 생략됐지만 승리의 찬미가(묵시19,1-7)를 우리 가톨릭 교회는 매주 주일 제2저녁 기도때 마다 바칩니다. 새삼 천상전례의 반영이 교회가 바치는 지상전례임을 깨닫습니다. 천상의 행복을 앞당겨 살게하는 지상전례의 은총입니다. 그러니 이런 천상에 궁극의 희망을 둘 때 저절로 하느님의 승리를 앞당겨 찬미하게 되고 저절로 인내할 힘도 생깁니다.
“어린양의 혼이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은 행복하여라.”(묵시19,9ㄴ)
제1독서 묵시록의 후반부 말씀인 화답송 후렴이 참 은혜롭습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잔치를 통해 어린양의 천상 혼인잔치를 앞당겨 체험하는 우리들은 참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끝은 새로운 시작입니다. 절망은 없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에게 희망의 힘, 찬미의 힘, 인내의 힘을 북돋아 주시어 힘차게 새로운 시작을 하게 하십니다.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다.”(루카21,2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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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24. 성 안드레아 둥락 사제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람의 아들처럼>
사람이
사람에게
칼날일 때에
사람의 아들처럼
사람이기에
사람에게
울타리이기를
사람이
사람에게
억압일 때에
사람의 아들처럼
사람이기에
사람에게
해방이기를
사람이
사람에게
두려움일 때에
사람의 아들처럼
사람이기에
사람에게
평화이기를
사람이
사람에게
아픔일 때에
사람의 아들처럼
사람이기에
사람에게
위로이기를
사람이
사람에게
어둠일 때에
사람의 아들처럼
사람이기에
사람에게
빛이기를
사람이
사람에게
절망일 때에
사람의 아들처럼
사람이기에
사람에게
희망이기를
사람이
사람에게
죽임일 때에
사람의 아들처럼
사람이기에
사람에게
살림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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