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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순례: 신앙 성숙의 5단계
-각성(중생,회심)-정화(점진적 성화)-조명(성령체험,신비체험)
-영혼의 어두운 밤(광야체험)-합일(하나님과 하나되는 체험)-
글 : 구요한 목사. 서은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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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순서- 칭의와 성화의 비교 |
사람의 탄생은 신비롭고 경이롭다. 그러나 탄생만 하고 성장하지 않으면 그때부터 문제 덩어리다. 영적 탄생도 마찬가지다. 복음을 받아들여서 예수를 영접하고 구원을 받으면 전혀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그런데 탄생만 하고 성장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본인도 힘들고 주변 사람도 힘들다.
신자가 구원을 받고 성숙해가는 과정을 구원의 서정(구원의 순서. Ordo Salutis)이라고 한다. 이것은 시간 순서라기 보다는 첫 단계가 있어야 다음 단계가 있다는 논리적 순서에 의한 것이다. 그런데 각 교파 마다 구원의 서정이 다르다.
칭의와 성화의 비교
성화를 다루기 전에 먼저 '칭의'와 '성화'의 차이를 간단히 살펴보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다음은 웨인 그루뎀(Wayne Grudem)이 구분한 칭의와 성화의 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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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교파의 구원관, 성화관
일반적으로 장로교 계통에서는 중생, 칭의, 회심을 구분하여 사용하지만 다른 교파에서는 중생 즉 거듭남이란 단어를 즐겨 사용한다. 필자는 각 교파의 구원관, 성화관을 간단히 정리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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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글로리아타임스』의 “구원과 성화[1]”를 참조하라)
http://www.thegloriatimes.org/news/articleView.html?idxno=137
퓨전신학, 통섭신학의 구원관과 성화관
필자는 신앙 생활을 하면서 영성 신학의 구원과 성화관이 신자들의 신앙 성장과 영적 체험에 가장 부합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래서 필자는 각 <교파의 구원과 성화관> 및 <영성 신학의 구원 및 성화관>을 아우르는 <퓨전 구원관, 통섭신학의 구원관 및 성화관>에 대해 개괄적으로 말한 적이 있다. 그것은 곧 장로교, 감리교, 오순절 및 영성 신학 모두를 아우르는 구원관, 성화관을 말한다.
영성 신학의 구원관에서 각성(회심)-정화(점진적 성화)-합일(성숙과 변화)의 3 단계를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5단계가 성경과 경험에 훨씬 잘 부합한다. 즉 각성(중생, 회심, 칭의)-정화(점진적 성화)-조명(순간적 성화-성령체험)-영혼의 어두운 밤(광야훈련)-합일의 단계 또는 과정이다.
이것은 기계적인 과정이라기 보다는 일반적인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사람에 따라 순서가 다를 수도 있고 전 과정을 거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각 단계를 간단하게 살펴보자.
그리고 각자가 지금 자신은 어느 단계에 이르렀는지 점검해 보기 바란다.
1. 각성(Awakening)-중생, 회심의 단계
장로교에서는 중생과 회심(conversion)을 구분하지만 중생(regeneration)이란 단어를 사용하는 교파가 많다. 엄격하게 말하면 중생(거듭남)은 성령의 단독적 역사이고 그때를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요 1:13; 3:5; 8), 회심은 중생한 신자가 의식적으로 하나님 앞의 죄인임을 회개하고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하는 것을 말한다.
또한 중생되고 회심한 신자는 하나님 앞에서 법적이고 신분적으로 의로운 사람이 된다. 이것을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이신득의(以信得義. ‘믿음으로 의를 얻음’)이고 하나님의 입장에서 이신칭의(以信稱義.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 Justification by faith)(롬 1:16-17;23-24; 갈 2:16; 3:6)이다.
-각성(회심)의 특징
자아의 각성이 일어난다. 생리적 각성이 아니라 마음의 눈이 열린다. 바울의 눈에 붙은 비늘이 떨어지듯(행 9:18) 갑자기 자신의 일상적인 사고와 세계관에서 벗어나 새로운 신적 세계를 맛보는 단계이다. 회심은 말씀을 듣는 중에(행 2:37; 10:44이하), 찬양하는 중에, 기도하는 중에, 간증을 듣는 중에, 전도의 말씀을 듣는 중에, 성찬에 참여하는 중에 체험을 하게 된다.
회심을 통해 사람은 자아 안에 하나님의 영적 임재를, 신적 내재를 느낀다. 영적 임재는, 조나선 에드워즈가 말한 것처럼, ‘신적인 달콤한 감정, 그것을 웅켜지고 싶은 열망’ 등을 말한다.
가끔 자연 안에서 신적 내재를 느끼는 사람들(예술가, 시인)도 있지만 차이가 있다(롬 1:19 참조). 예술적인 것은 일반계시적 체험이지만 거듭남이 없다. 신적 각성 체험이 동반되지 않는 종교생활은 기껏해야 도덕주의, 주지주의, 심미적 정서의 감상주의를 넘어서지 못한다.
신적 체험의 본질적 핵심은 도덕적인 변화보다 더 근원적인 존재의 변화, 즉 존재론적 충격이다. 자기보존과 확장본능에 중심을 두고 형성되었던 자기중심의 한정되고 작은 자아인격이 보다 넓고 큰 의식으로 확장하는 사건이다.
-거짓 회심과 진짜 회심
열매 맺는 회심이 진짜 회심이다. 우리는 때때로 외양만으로 회심한 자를 가끔 본다. 겉모양이 진짜 회심한 사람과 너무나 비슷하다. 그러나 회심 체험은 마음에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다. 지적인 동의에만 그치는 믿음은 진정한 믿음이라고 할 수 없다(약 2:19).
진정한 회개를 하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하고(마 3:8), 진정한 믿음이라면 선행이 뒤따라야 한다(약 2:26). 회심은 마음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것이 진정한 회심인지 아닌지를 하나님은 아시겠지만 다른 사람은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시간을 두고 열매 맺는지의 여부로 그 사람이 진정 회심하였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
-조용한 회심과 급진적 회심: 디모데형과 바울형
일반적으로 모태신앙이나 어릴 때부터 부모를 따라 신앙생활을 한 사람은 자신이 언제 회심 체험을 한 지 모르게 조용하게 회심을 해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강력한 성령 체험을 통해 급진적으로 회심 체험을 하기도 한다. 디모데는 전자의 경우이고(딤후 1:5), 바울은 후자의 경우라고 할 수 있다(행 9:3-5).
일반적으로, 영적 부흥 시기나 오늘날의 성령운동파의 집회에서는 바울처럼 ‘급진적 회심 체험’과 다음에 언급할 ‘순간적 성화 체험’이 다반사로 일어난다. 이때 바울처럼, 여러 가지 생소하고 이상한 영적 현상들-쓰러지고, 웃고, 딩굴고, 고함치고, 뛰는 등-을 체험한다. 그러나 이런 현상에 생경한 반성령파들은, 진정한 회심은 ‘조용하고 은밀하게’ 온다는 ‘조용한 회심’과 ‘점진적 성화’ 교리에 경도되어 성령운동파를 비난한다.
*양자됨(수양[收養]. Adoption)
어느 사형수가 법정에 섰다. 사형수의 죄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이제는 형에 대한 선고가 남았을 뿐이다. 그러나 재판장은 이 사형수가 너무나 불쌍하여 형을 선고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재판장은 이 사형수 대신에 자신의 아들을 형장으로 보내고 이 사형수를 무죄 방면하였다.
재판장은 이 사형수를 무죄 방면한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이 사형수를 자신의 아들로 입양했다. 이제 이 사형수는 무죄한 사람일 뿐만 아니라 재판장의 양자가 되어서 재판장이 누리는 모든 부귀영화를 누리며 재판장의 재산을 상속할 특권도 부여받았다.
이 사형수가 바로 죄인인 우리들이고 재판장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죄 때문에 우리들이 죽어 가는 것이 너무나 불쌍하여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우리 대신에 죄값을 치르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게 하셨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누구나 하나님 앞에서 죄가 없는 의로운 사람이 된다(이신칭의).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그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그의 자녀로 삼아 주신 것이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우리가 예수를 믿고 영혼의 구원을 받아서 천국에 가고, 이 세상에 살면서도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모든 축복을 누릴 수 있는 근거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양자가 누리는 축복
"자녀이면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 8:17).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복은 무엇인가?
첫째, 자녀가 된 신자는 기도를 통해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 구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린다. "너희가 네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요 14:14).
둘째, 하나님은 자녀들의 영육간의 필요를 공급해 주신다(마 6:25-34).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31, 33절).
셋째, 하나님은 모든 위험으로부터 자녀를 보호해 주신다(롬 8:35, 38-39).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시기 때문에 악한 마귀가 우리를 만지지도 못한다(요일 5:18).
넷째, 죄와 죄를 타고 역사하는 마귀를 제어하는 권세를 부여 받는다(롬 6:12-14; 마 10:1; 눅 10:19).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자녀된 신자가 누리는 제일 큰 복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이다. "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하심이라"(딛 3:7: 요 10:28 참조).
-하나님의 자녀가 당하는 고난
하나님은 자녀의 성숙을 위해 고난을 허용하신다. 고난을 때로는 채찍으로 때로는 연단의 도구로 사용하신다. "징계는 다 받는 것이어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9절).
자녀로서 고난을 받는 또 다른 이유는 이 세상은 아직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능력과 사탄의 권세가 공존하고, 우리 속에도 양자의 영이신 성령과 죄가 공존하기 때문이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 5:16).
2. 정화(정화. Purification)-점진적 성화의 단계
구원 받은 자가 구원 받은 신분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것, 죄로 인해 훼손된 하나님의 형상과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가는 것을 성화(聖化.sanctification) 라고 한다. 성화는 하나님의 사역이자 동시에 사람의 책임 있는 반응을 요구한다. 성화는 하나님이 이루는 것이지만 동시에 우리가 이루어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만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2-13).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 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골 1:29).
이미 구원 받은 사람은 죄책(원죄의 책임, 죄값)에서는 벗어나지만 여전히 우리 안에 있는 죄의 오염으로 인해 죄-자범죄-를 짓는다. 성화의 과정은 죄의 오염으로 인한 자범죄에서 점점 벗어나서 죄로 인해 훼손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는 과정이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2-24).
-신분적 회개와 성화의 회개(자녀의 회개)
예수를 믿기 전에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것은 신분적 회개이고, 예수를 믿은 후 하는 회개는 자녀로서 하는 회개, 성화의 회개이다.
“8.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8-9).
그런데 소위 말하는 구원파는 거듭날 때 한 번 회개하면 다음에는 회개 할 필요가 없다고 잘못 가르친다. 또한 정통 교인 중에도 ‘한 번 구원, 영원한 구원’을 오해하여 구원 받은 후 아무렇게 살아도 구원 받는다는 ‘실천적 구원파들’도 많다. 그러나 하나님은 구원 받은 후 거룩하게 살 사람을 선택하시고 예정하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제대로 구원 받은 사람은 회개하고 열매를 맺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골 3:12).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5절~7절에 열거된 덕목들)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벧후 1:10).
-정화(점진적 성화)의 특징
신적 실재의 거룩함과 아름다움과 참 됨과 극명하게 대조되는 자신의 유한성, 죄성, 불결성을 인식하고 이 거리감을 극복하고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지속적으로 경험하기 위해서 자아의 정화(淨化)에 힘쓰는 단계이다.
• 금욕, 회개, 헌신, 봉사, 전도, 예배, 기도 등에 몰두한다.
• 청빈, 순결 또는 정결, 복종, 헌신에 힘쓴다.
• 마음의 가난함을 느낀다.
• 순결과 영적 심령의 정결에 힘쓴다
• 순종, 자기 주장과 자아 왕국을 철폐하고 말씀의 순종에 힘쓴다.
• 하나님의 사랑과 외경(두려움) 체험이 정화의 동기가 된다.
성령의 소욕과 육체의 싸움을 통해, 땅의 것을 버리고 위의 것을 바라고, 옛사람(거짓 자아)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고(참 자아), 거짓 자아를 죽이고 참 자아가 살아나게 하고, 죄와 세상을 따르는 겉 사람을 깨고 하나님을 따르는 속사람을 강건하여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는 단계이다(엡 4:22-24; 갈 4:19).
정화를 통해 온갖 비본래적 인간상태의 욕망, 탐심, 악한 관습, 관념적 허상들, 물질적 정신적 실체에 안주하려는 충동과 유혹, 그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해야 하고, 그 모든 것들로 인한 영혼의 오염으로부터 정결해야 하고, 실재 그 자체의 크고 작은 움직임에 자연스럽게 조화되는 순종의 삶으로 바꿔져야 한다.
겉사람의 껍질이 완전히 깨어진 것이 아니고 영적 삶의 걸림돌이 많은 단계이다. 그러므로 성화의 과정은 고통과 희열을 동반한다. 자아의 부적합성을 인식하고 버려야 할 옛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고통스럽지만 보다 완전한 실재와의 합일, 일치 체험 곧 하나님의 뜻과 일하심과 의지에 일치되는 데서 오는 기쁨 또한 크다.
3. 조명(照明. illumination)-성령 체험과 신비 체험의 단계
여기서 말하는 조명은, 개신교에서 사용하는 ‘성령의 감동’과 ‘성령의 조명’에서 사용하는 조명과는 다른 개념이다. 여기서 말하는 조명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환상을 보고, 성령 체험과 같은 신비 체험을 하는 것을 말한다.
-점진적 성화와 순간적 성화 및 성령능력 체험
조용한 회심과 급진적 회심이 있듯, 성화 체험도 대부분의 경우 조용하고 점진적으로 이루어지지만 사도 바울이나 요한 웨슬레처럼 순간적으로 이루어지기도 한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급진적으로 회심했고(행 9:3-5), 아나니아의 기도를 통해 성령의 능력을 체험했고(행 9:18-20), 셋째 하늘에 들려올라가는 신비 체험도 했다(고후 12:1-4). 요한 웨슬레는 올더스가의 한 집회에서 가슴이 따뜻해지는 체험을 했다. 후일에 웨슬레는 이 체험을 완전 성화(Entire sanctification) 교리로 발전시켰는데 이후에 웨슬레는 애찬식에서 성령의 능력 체험도 했다.
요즈음에도 유튜브(Youtube)를 보면, 특히 이슬람교도나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이 꿈이나 환상 중에 나타나셔서 급진적 회심 체험을 한 사람들의 내용이 많이 올라와 있다. 조명을 통한 성령 체험은 각성이나 정화의 단계와 동시에 올 수도 있지만 대부분 이후에 오는 경우가 많다.
성령 체험은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여러 가지 은혜를 준다.
• 요한 웨슬레처럼 완전 성화 체험, 성결 체험을 한다.
• 찰스 피니나 D.L. 무디처럼 사역을 위한 능력 체험을 한다.
• 은사주의자처럼 방언, 신유, 축사, 예언과 같은 은사 체험을 한다.
• 강권적인 회개 체험을 한다.
• 또한, 자연의 경이 체험도 한다. 이전에는 평범하게 보였던 자연이 갑자기 새롭게 보이고 하나님의 피조물에 대한 감사와 찬양이 끊어지지 않는 자연의 경이 체험도 일어난다.
-조명의 단계의 특징
이런 체험을 성령 체험, 위기 체험, 또는 중생을 제1의 축복이라 부르고 이런 것을 제 2의 축복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런 체험은 제2의 축복에 그치지 않고 평생에 걸쳐 반복적으로 임하므로 제3, 제4, 제5 또는 제N의 축복이 되기도 한다.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났을 때, 신앙생활이 무미건조하고 타성적일 때, 금식, 기도원, 부흥회 등을 통해 신비 체험을 갖게 된다.
이런 체험들을 통해 영적인 모든 것이 더욱 분명해지고 뚜렷할 뿐만 아니라 지극히 순도 높은 친밀성을 느낀다. 하나님이 추상적 개념으로 멀리 계신 것이 아니라 구체적 현실로 자아의 존재 내면과 외면을 가득히 채우고 있음을 체험한다.
이 단계에서는 환상, 음성을 통한 초월적 인도를 체험한다. 이를 통해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헌신이 증가되고 자율과 타율의 극복, 자기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옮겨간다. 하나님의 실재에 대한 체험을 통해 황홀감을 특징적으로 체험하는 단계이다.
광명, 자유, 순수, 기쁨, 희열, 감사, 찬양, 등의 온갖 영적 은혜에 넘치고, 희열과 행복감이 자아를 햇빛처럼, 물결처럼, 따스한 공기처럼 둘러싸지만 아직 합일 체험의 단계는 아니다. 이런 체험들은 외적 능력과 황홀감을 주지만 내면의 변화에까지는 잘 침투하지 못한다.
이런 영적 체험을 한 사람들은 신앙의 여러 분야에서 승리를 맛본 사람들로서 영적 청년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요일 1:3-4). 그러나 아직도 육신적 자아가 강하고 자기 영광과 세상 영광에 연연하는 사람이 많다. 죄와 세상을 따르는 겉사람의 껍질이 강하여 아직도 자아와 세상 것에 대한 욕망과 집착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신앙이 기복도 심한 상태이다. 성령의 세미한 음성도 듣지만 육신의 우렁찬 음성에 더 이끌리는 단계이다. 이 때문에 이런 체험을 많이 한 사람 중에도 육신에 속한 사람이 많다.
이 단계에 있는 사람들은 아직도 doing[일, 사역]과 being[존재, 성품], having[소유]과 relating[관계]의 차이를 잘 모르고 전자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인다. 비록 후자가 중요하다는 인식이 있더라도 발등에 떨어진 긴급한 일들에 늘 우선 순위가 밀린다. 대부분의 신앙인들이 이 단계에 머문다고 한다.
미국의 유명한 은사사역 주창자가 ‘doing보다 being이 더 중요하다는 말이 성경 어디에 있느냐?’고 반문하는 글을 읽고 필자는 눈을 의심했다. 도대체 성경을 어떻게 읽기에 이런 소리를 하는가?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에 강조하신 것이 산상수훈의 8복이다. 8복은 바로 being의 축복이고 being의 바탕에서 행동을 하라고 말씀하시고, 복음서 전체가 자기를 죽이고 희생하고 헌신하는 제자도를 강조한다. 예수님은 기적을 행하고 귀신을 잘 쫓아도 불법을 행하고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자는 ‘모른다’고 하신다(마 7:21-23). 사랑장(고전 13장)은 아무리 은사가 뛰어나고 구제를 잘하고 심지어는 순교를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기록한다.
아무리 doing을 잘해도 being이 부족하여 자기 영광, 세상 영광을 위한 doing은 하나님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또한 사도행전은 doing이 중심이지만 서신서는 being이 중심이다. 그래서 doing에 열심이었던 사도 바울도 이렇게 고백하지 않는가?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물론 오랫동안 기독교 문화 가운데 살아 온 유럽인이나 미국인들은 오랫동안 우상숭배와 무속문화에 젖어 온 한국인에 비해, 정직·배려·겸손·절제·준법 정신 등이 뛰어나다고 할 수 있기 때문에 doing만을 강조해도 한국인처럼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한국인은 다르다.
한국 교회가 doing이 부족하여 사회의 지탄을 받는 것이 아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개신교 신자는 doing(성공, 성장, 구제, 봉사)은 잘 하지만 being(정직, 절제, 겸손, 배려, 준법 정신 등)이 부족하기 때문에 지탄을 받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은사주의자들은 능력, 성장 및 성공에, 전통주의자들은 탁상공론적인 바른 교리와 신학에만 치중하여 being의 개발에 등한시 한 결과 이런 지경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한국의 신자들은 특히 조명의 단계를 뛰어넘어 being의 함양에도 힘써야 한다. 이것은 금방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결국은 영적으로 선한 열매를 맺어서 개인이나 교계 전체로 볼 때 장기적으로는 훨씬 나은 영적 투자이다.
4. 영혼의 어두운 밤(Dark Night of Soul)-영적 광야에 버려지는 단계
한국은 잠시도 바람 잘 날이 없는 나라다.
북핵과 북한 인권문제, 동성결혼과 차별금지법 문제, 이슬람과 할랄식품 허용 문제, 소득 양극화로 인한 사회 갈등, 청년 실업, 청년들의 결혼 포기와 출산 포기, 망국적 사교육비 문제, 신물이 난 정치인의 정쟁, 또한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로 인한 경제 충격 등. 요즈음에는 사회 정의에 눈을 뜬 기독교인들도 사회와 국가 문제에 목소리를 크게 내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때로는 가족, 교회, 사회나 국가 보다 나 하나를 직접 다루시고 나부터 변하기를 원하실 때가 있다. 하나님은 애굽의 바로 치하의 강제 노역으로 울부짖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모세를 탄생하게 하시고, 모세가 40년 동안이나 애굽의 왕궁에서 세상 학문과 무술을 익히게 하셨다(행 7:22). 그리고 나서 모세를 바로 들어쓰신 것이 아니라 40년 동안 광야에서 연단을 받게 하신 후 들어쓰셨다(행 7:30).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로 하신다.
하나님은 바깥 일이 급할수록 그 일을 해결할 사람을 오랫동안 준비시키신다. 그런데 준비 과정이 사람의 생각과는 다르다. 우리는 필요한 지식과 학문과 은사를 갖추면 하나님의 일을 하기에 충분한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실컷 채우게 하신 후에 다시 비우게 하신다.
많이 채운 후에 바로 들어쓰시면 사람 영광, 자기 영광, 세상 영광에 빠지기 쉽기 때문에 하나님은 많이 채우게 하신 후 갑자기 영적 광야에 쳐넣어서 채운 것을 비우는 영혼의 정화 작업을 하시는 것이다. “지식은 채우는 것이지만 지혜는 비우는 것이다”는 동양 철인의 말도 있다. 이것이 곧 영적 광야 훈련, 영혼의 어두운 밤의 단계이다.
군대에서 힘든 유격 훈련을 받을 때는 훈련 전에 기합을 많이 줘서 몸이 녹초가 되게 만들어야 안전 사고가 덜 일어난다고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 힘과 능력을 믿다가 많은 사고가 일어난다고 한다.
하나님도 그렇게 하신다.
예수님은 천방지축으로 날뛰던 수제자인 베드로가 예수님을 3번이나 부인하게 하여 코가 납작하게 된 후에야 크게 들어쓰셨다. “그(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곧 닭이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마 26:74-75).
예수님은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인 사울(바울)이 예수님을 한껏 대적하게 하신 후에 회심시켜서 코가 납작하게 하신 후 들어쓰셨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바울)가 괴수니라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딤전 1:15-16).
중세 독일의 영성가인 헨리 수소는 자신에게 앙심을 품은 한 여자가 ‘내가 (불륜 관계를 통해) 수소의 자녀를 낳았다’는 헛소문을 퍼뜨린 바람에 십여 년 동안 온갖 수모와 굴욕과 핍박을 당했다고 한다. 요즈음 같으면 DNA검사를 통해 금방 사실 여부를 가렸겠지만 그 당시에는 고스란히 누명을 쓰는 수 밖에 없었다. 나중에야 이 여인이 실토하여 누명에서 벗어났지만 수소는 십여 년 동안 지옥 같은 삶을 살았던 것이다.
만일 한국의 많은 영적 지도자들이 이 단계를 거쳤다면 탐욕과 거짓에서 정화되어 사람 영광, 자기 영광, 세상 영광으로 인한 추락에서 벗어나지 않았을까 하고 필자는 생각해 본다. 영혼의 정화 과정 없이 자기가 가진 지식과 능력으로 세상적으로 성공하고 출세하다 보니 안에서 꿈틀거리는 죄악의 존재나 파괴력을 인식조차 못한 단계에서, 사람과 세상의 유혹을 받자 날개 없는 추락을 한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해 본다.
이 단계는 하나님과의 합일의 과정, 일치의 경험, 순수하고 직접적 교제의 경험을 추구해 가는 과정에서, 철저한 영혼의 정화가 일어나서 자아의 부정과 영적 죽음을 체험하는 단계이다.
욥이 갑자기 재산과 자녀를 모두 잃은 후 망연자실했지만 더 힘든 것은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지지 않는 것이었다.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욥 23:8). 영성가들은 이런 하나님을 ‘숨으시는 하나님’(God who is hidden)이라고 부른다.
광야에서 13년 동안 사울 왕의 추격을 받은 다윗은 이렇게 울부짖었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시 13:1).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이렇게 통곡하셨다.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마 27:46).
믿었던 연인이 어느 날 갑자기 통고 없이 떠나서 기약 없이 숨어버리는 것과 같은 체험이다. 걷고 싶지 않은 길, 그러나 성장을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다. 화초나 채소는 온실에서 자라지만 거목(巨木)은 광야에서 자란다. 이런 ‘배신의 장벽’을 넘지 못해 신앙에서 멀어지는 경우가 90%나 된다고 한다.
필자도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처음에는 너무나 당황했다.
한 달, 두 달, 일 년, 이 년이 아니라 때로는 십 년, 이십 년 동안 지속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너무나 힘들어서 이런 현상에 대한 이해를 구하기 위해 서적을 찾아보았지만 개신교에서는 자료가 거의 없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접한 십자가의 요한의 ‘영혼의 어두운 밤’에 관한 저서를 읽고 이런 과정은 신앙의 수많은 선배들이 걸어갔고 또한 걸어가는 영성의 과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때 모았던 글들 중 일부이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에게 인내와 침묵과 눈물만을 요구하실 때가 있다” (C. S. 로빈슨).
“주님의 시간에, 그의 뜻 이뤄지리 기다려, 하루하루 살 동안 주님 인도하시리, 주 뜻 이룰 때까지 기다려.”
“영혼의 어두운 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무한한 축복이다. ‘하나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십니까?’ 대답도 없는 오랜 세월의 절규와 무기력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 보다 가까이 접근해가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은혜가 없다면 스스로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처절한 자기 부정을 통해 새로운 자기를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께 버림 받은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한 가지 권하고 싶은 말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고 기다리라 는 것이다. 말없이 그리고 조용히 기다려라. 정신을 차리고 민감하게 깨어 기다려라.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내) 믿음보다 앞선다는 사실을 배워라. 신뢰란 당신이 영적인 기아를 중립에 두는 방법이다.
신뢰는 곧 하나님의 인격을 믿는 것으로서 ‘나는 하나님이 무엇을 하고 계신지 또 어디에 계신지 알지 못하지만 나에게 유익을 주시기 위해 어딘가에 계신다는 것만은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기다리는 방법이기도 하다”
(리처드 포스터).
“나의 가는 길은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 23:10).
∙“한 어두운 밤, 사랑의 강한 그리움에 불타,
―아, 그토록 행복한 순간이여!―
나는 떠났네 아무도 보지 못하게,
드디어 내 집은 아주 고요해졌네”(십자가의 요한).
“산은 어느 때보다도 더 어둡고 가파르다. 영을 정화하는 (깨끗하게 하는) 밤이 오면 영혼은 헐떡거리며 신음한다. 위로는 온데 간데 없고 이해는 어두워지고 의지는 메마르고 기억은 비워진다. 묵상하고 독서하려고 하나 헛수고이다. 영적 지도자에게 위안을 구하려 하나 헛수고이다. 친구, 책, 헌신으로부터 버리진 느낌이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했던 수단들이 이제는 무용지물이 된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지고 고독의 방에 버려진 느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혼의 몸부림 위에 간간이 부어지는 은총이 아름다워 영혼을 붙들기에 충분하다. 이때 영혼은 사랑에의 의지가 번쩍이는 섬광 속에서 하나님을 분명히 인식한다. 영혼은 담대하게 연인(하나님)을 찾아서 계속 나서게 된다” (십자가의 요한).
“기도자는 영혼의 어두운 밤, 사막 같은 황량함과 공허를 맛본다. 이는 ‘신비한 고통’이다. 외부로부터는 각양의 적대자들이 공격하며 내부로부터는 의심과 시험이 파도처럼 계속 일어난다. 하나님은 감각되어지지 않고 신앙은 지체되는 것 같고 위로는 느껴지지 않는다. 이는 찬란한 새벽을 맞이하기 위한 연단이다. 자아의 제로화를 위한 마지막 정화의 단계이다. 오직 하나님만을 바란다” (에벌린 언더힐).
“이러한 영혼의 어두운 밤에 처해 있는 사람은 교만과 주제넘음과 공허감과 거짓된 기쁨으로부터 자신이 얼마나 보호되어 있었는가를 발견하게 된다. 어두움 속을 거닒으로써 영혼은 덕을 쌓아 급속히 성장하게 된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약 1:2-4, 12).
“재미있는 사실은 고통이나 환난이 해를 끼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혼란스럽게 되는 것이 큰 문제가 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에 대한 분노, 좌절 심지어는 참람한 말까지 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렇게 사랑하고 섬겨온 하나님이, 내가 가장 필요한 그 시점에서, 어느 날 갑자기 침묵을 지키고 응답을 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신앙이 좋은 사람에게도 이런 때가 임하는가? 그렇다. 비록 우리는 그런 사실을 잘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지만 대답은 ‘그렇다’이다.
그러면 모든 것이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못하는 이때에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비록 당신의 명성이 저해되고, 당신은 침울해져 있고, 무슨 행동을 취할지 모르더라도, 만일 당신이 하나님의 음성에 예민하게 귀를 기울인다면 하나님은 ‘나를 믿으라’고 하실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하나님, 저는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습니다. 지금 당장 응답이 필요합니다’라고 할 것이지만 하나님은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찌어다’(시 46:10)이라고 하실 것이다.
설명을 요구하지 말라. 당신의 능력으로 이해하려고 하지 말라. 믿음을 늦추지 말라. 의지를 발동하여 다만 하나님만을 신뢰하라. 당신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차선책은 절망하는 것이다. ‘신뢰할 것인가 절망할 것인가.’ 그것은 당신의 선택이다’”
(제임스 답슨)."낮이 되면 밤이 되기를 원했고, 밤이 되면 낮이 되기를 원했다"(조지 폭스)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영혼의 어두운 밤에 처해지면, 다음의 증상이 일어난다.
• 신앙 생활에 대한 열정이 식어진다.
• 말씀을 읽어도 감동이 없다.
• 기도의 응답이 없다.
• 하나님의 부재 의식이 뚜렷하다.
• 사소한 잘못으로 인해 구설수에 휩싸인다
• 내 안의 죄악과 추한 꼴이 가감 없이, 쉴새 없이 드러난다.
•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한다.
• 과연 내가 진정한 믿음을 가졌는가를 의심한다.
• 영혼은 괴로워서 헐떡거린다
• 좋으신 하나님이 아니라 잔인하신 하나님이다.
• 외부로부터는 공격이 심해지고, 내부로부터는 의심과 시험이 파도처럼 밀려 온다.
• 하나님은 감각되어 지지 않고(숨어계시는 하나님), 신앙은 정체되어 있는 것 같고, 위로는 느껴지지 않는다.
• 마귀의 공격이 심해진다.
• 영적인 것은 물론 세상적인 것으로부터도 위로가 없다.
• 냉랭, 조용, 무관심 등의 상태에 빠진다.
• 여러 가지 괴로움의 연속이다.
• 뜨겁다고 하면 하나님이 더 뜨겁게 하시는 영적 용광로이다.
• 배신의 장벽이다.
이전의 영성가들은 이런 상태를 이렇게 불렀다.
• 영혼의 어두운 밤(Dark Night of Soul).
• 미지의 구름(The Cloud of Unknown).
• 영적 성숙을 위한 광야 훈련, 사막 훈련, 극기훈련, 생존훈련
• 신앙의 블랙 홀, 즉 믿음이 작동되지 않는 시기이다 (구요한).
이때 유의할 점은 무엇인가?
• 반드시 큰 죄 때문에 생기는 현상은 아니다.
• 신앙 성장을 위한 마지막 시험의 관문이다.
• 나이와 상관 없이 임한다. 요셉과 다윗은 십대 후반에, 모세는 40대에, 욥은 60대 정도에, 아브라함과 야곱에게는 70대 후반에 임했다.
• 영적으로 좋은 체험과 세상적 영광을 어느 정도 누린 후에 닥치는 시험이므로 쉽게 포기할 수도 없다. 그러나 믿음이 약할 때 임하면 믿음에서 떠나는 사람도 많다.
• 이전의 수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걸어갔고 지금도 걸어가는 길이다. 그러므로 홀로가 아니다, 그러나 힘들고 괴로운 것은 사실이다.
이럴 때 어떤 자세를 취할 것인가?
• 너무 괴로워 말고 하나님을 신뢰하라. "너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됨을 알지어다"(시 46:10).
• 하나님을 잠잠히 기다리라.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지 말지어다" (시 37:7).
• 계속 구하고 찾고 두드려라(마 7:7-11).
•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라(시 42:5).
•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약 1:2-4, 12).
• 피할 길이 무엇인가를 찾으라(고전 10:13).
• 하나님은 어느 정도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도 인정하신다. 시편의 탄식시(“언제까지니이까?”)가 좋은 예이다.
• 단순함과 평강에 거하라(Abide in simplicity and peace). 일을 벌리지 말고 삶을 단순화시켜라.
• 신뢰할 것인가 절망할 것인가(Trust or Despair)
• 계속하여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분별해야 한다(롬 12:2).
•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자의 큰 상급을 사모하라(빌 1:29; 마 5:12).
통과하고 났을 때의 영적 유익은 많다.
• 육신적인 욕망이 정화된다(요일 2:16; 롬 1:21-23).
• 세상적인 명예나 자랑에서 멀어진다(전 2:3-11).
• 세상적으로 크고, 화려하고 좋은 것에 대한 미련이 없어진다.
• "내가 . . .한다"는 교만이 없어 진다 (사 12:12-14; 딤전 3:6-7; 벧전 4:11; 시 119:67, 71).
• 믿음이 정금 같이 단련된다(벧전 1:7; 4:12-13).
• 하나님의 성품으로 연단된다(롬 5:3-4)
• 흠 없는 사람으로 세워진다(약 1:4).
• 신앙의 진실성이 검증된다(창 22:1-2).
•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에 동참한다(벧전 2:21; 빌 1:29).
•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게 된다(시 43:2, 5).
• 하나님의 뜻에 더 잘 순종하게 된다(히 5:8).
• 새롭거나 큰 사명을 받게 된다(모세, 야곱, 요셉, 다윗 등).
• 새롭고 더 큰 축복이 임한다(욥 42:10).
5. 합일(合一. The Unitive Life)—하나님과 온전히 하나가 되는 단계
영혼의 밤을 통과하여 정화된 영혼이, 범신론에서 말하는 존재론적 합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궁극적 실재이신 하나님과 온전한 연합을 체험하는 상태이다.
이 단계에서는 상황에 상관 없이 영적 평강과 영적 기쁨을 누린다. 사도 바울이 감옥에서도 평상심과 기쁨을 누린 단계라고 할 수 있다. 평화로운 기쁨과 강화된 믿음, 고양되고 순화된 능력이 조화를 이룬 상태이다. 신앙 생활의 여러 면에서 ‘육신에 속한 사람’에서 ‘신령한 사람’으로 성숙한 단계이다.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doing[일, 사역]이나 having[소유, 성공]보다 내면적인 being[인격, 성품]과 relating[관계]을 더 귀하게 여기고 이의 달성을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입하는 단계이다. being이나 relating을 통해 누리는 축복이 doing이나 having이 주는 축복 보다 더 귀하다는 것을 실제로 경험했기 때문이다.
자아 중심의 의식과 의지에서 해방된 심령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의 온전 일체감 속에서 보다 능동적, 적극적 참여의 삶을 이룰 수 있다. 내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일하시는 단계이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그리스도가 사는 삶이다(갈 2:20). 자기 영광과 세상 영광, 욕망과 집착을 모두 내려놓았을 때 이런 단계에 도달할 수 있다. 온전히 성령의 은혜와 사랑 안에 행하며 사는 단계이다.
그렇다고 온전히 이룬 것은 아니다. 지상에서 보면 하늘이 낮은 것처럼 보이지만 산 정상에 오르면 하늘이 더 높듯이, 사람은 비록 최고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해도 완전하신 하나님의 기준에서 보면 여전히 미흡하기 짝이 없다.
이 단계에 이르면 자기의 잘난 것보다 못나고 약한 것을 자랑하고(고후 12:9-10), 자신이 의로운 사람이 아니라 죄인 중의 괴수라는 사실을 절감하게 된다(딤전 1:15). 사람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것이 더 큰 즐거움이 된다(눅 22:25-26). 죄 의식이 깊을수록 은혜도 깊어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편으로는 겸손해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푯대를 향해 계속 달려가야 한다(빌 3:12-14).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 3:7-9).
“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후 12:9-10).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2-14).
일부에서는 신자들이 회심할 때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과(롬 6:5) 이것을 혼동하지만, 그것은 신분적 연합이고 이것은 신분적 연합을 경험적이고 실제적으로 누리는 단계를 말한다. 영성가들은 이 단계에서 누리는 영적 축복에 주목한다.
*영적 결혼
주님과 영적으로 하나가 되어 친밀한 교제를 누리는 영적 결혼(spiritual marriage)의 상태이다(요 14:20; 요일 3:24). 임재기도, 명상기도, 관상기도를 통해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나눌 수 있다. 이전의 단계에서도 누릴 수 있지만 더욱 순수하고 기쁨에 찬 교제를 더욱 자주 누리는 단계이다.
*신화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신화(神化)(Deification)의 상태이다(벧후 1:4-11). 사람이 신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을 말한다. 온전한 자기부정(Self-abnegation)의 상태이다(고전 15:10; 고후 12:19). 이전의 단계에 비해 성령의 열매를 더욱 풍성하게 맺는 단계이다(갈 5:22-23). 영적 결혼을 통한 기쁨과 황홀감을 체험하기에 회개를 통해 자신이 죽는 신화의 힘든 과정을 기꺼이 감내한다.
*사람과도 하나됨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고 하나님의 모습을 닮아가면서, 사람과도 깊이 교제하고 하나 되는 단계이다.
“21.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22).
요즈음 하나님은 부부, 부모와 자녀 및 중요한 관계가 하나 되는 것을 엄청나게 강조하시는 것을 경험한다. 한쪽은 은사적이고 다른 쪽은 비은사적인 목회자 부부가 찾아왔다. 서로가 자신의 주장대로 교회를 이끌어가려고 해서 둘 사이가 좋지 않았다. 기도했더니 하나님은 ‘은사적이냐, 비은사적이냐 보다 둘이 하나 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하셨다.
견해 차이의 극복은 가장 중요한 부부, 부모 자녀 관계로부터 시작하여, 교회, 사회 및 나라로 확산되어 가야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고집, 집착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고 순종하는 일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도 각자가 합일의 단계에 도달하는 것이 필요하다. 합일의 단계 정도가 되어야 하나님이 나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고, 하나님이 나를 통해 일하시도록 내 것을 내려놓을 수 있는 영적 근력이 생기는 단계이기 때문이다.
나가는 말
이상, 영성 신학의 5단계 구원관을 개신교의 관점에서 정리해 보았다. 일반적으로 각성(중생, 회심)의 단계로부터 시작하여 나머지 단계가 순서대로 진행되는 경우가 많지만 반드시 시간 순서로 되는 것도 아니고 한 번 경험했다고 반복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예를 들어 정화(점진적 성화)는 죽을 때까지 해야 하고 조명(성령 체험, 신비 체험)도 죽을 때까지 반복적으로 경험하고, 영혼의 어두운 밤도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씩 반복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과정을 한 번 통과하고 나서 누리는 영적 경험은 이전과는 다른 것을 발견하게 된다.
영적 성숙이 주는 축복이다. 할렐루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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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