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북
강기원
내 몸속에 거북 한 마리 들어와 산다
언제부터였을까 나 대신
주억거리고 도리질하고 비굴하게 움츠러들기도 한다
학이라면 모를까 거북이는 되고 싶지 않았는데
녀석이 머리에 달려 있으니
걸음도 갈짓자, 등도 시멘트 들이부은 듯 딱딱하게 굳어간다
횡단보도 건너갈 일이 사막처럼 아득해지고
낯가림이 심해지고
낳아 놓은 자식들 제 알아서
살 놈 살고 잘못돼도 내 탓 아니려니 싶어진다
이미 지난 일 후회하면 뭐하나 뒤돌아보는 일도 없다
그 뿐인가
짧은 목 길게 빼어 바라보는 곳은
비린 바람 불어오는 바다 뿐
태내에서부터 출렁이던 양수의 바다 뿐
나 죽거든 문무왕처럼 나라지킴이는 못되어도
낙산 바다에 뿌려 달라 유서도 쓸까한다
이 난감한 녀석을 어찌 내보내야할지 궁리하는 대신
나는 점점 거북이 되어간다
침침한 눈 끔뻑이며, 홀로 거니는 고독한 거북
내 등판이 돌덩이인줄 알고 누군가 주저앉아도
무심결에 밟아도
끄덕끄덕과 도리도리 사이에서
굼뜬, 굼뜬, 거북한 거북이
---애지 2023년 가을호에서
강기원 시인은 “학이라면 모를까 거북이는 되고 싶지 않았는데” 언제부터인가 “내 몸속에 거북 한 마리 들어와 산다”라고 말한다. 학은 새 중의 새이며, 고귀하고 위대한 선비의 상징인 반면, 거북이는 느림보 중의 느림보이며, 음흉하고 게으른 어중이 떠중이들의 상징이라고 할 수가 있다. 따라서 거북이는 십장생이고, ‘느림의 미학’을 통해서 빠름보다 더 빠른 삶을 실천하고 있다는 사실은 너무나도 완벽하게 무시당하고 있다고 할 수가 있다. 느림보의 대명사인 거북이와 음흉하고 게으른 거북이를 택할 것인가, 아니면 오래오래 장수하고 ‘느림의 미학의 대가’인 거북이를 택할 것인가는 그 주체차의 선입견과 판단에 달려 있다고 할 수가 있다.
아무튼 강기원 시인의 거북이는 주억거리고 도리질하고 비굴하게 움츠러들기도 한다. ‘주억거리다’는 천천히 고개를 위 아래로 끄덕거리는 것을 말하고, ‘도리질하다’는 싫다거나 아니다라고 부정하는 것을 말하고, ‘비굴하다’는 명예와 명성 따위는 아랑곳 하지 않고 눈앞의 이익 앞에 무릎을 꿇는다는 것을 말한다. “걸음도 갈짓자”이고, “등도 시멘트 들이부은 듯 딱딱하게 굳어”가고, “횡단보도 건너갈 일이 사막처럼 아득해”진다. “낯가림이 심해” 여러 사람 앞에 나서지도 못하고, 한 번 알을 낳아 놓으면 그 자식들이 천적의 먹이가 되든, 살아남든지 간에, 그것은 관심조차도 없다. 살 놈은 살 것이고, 죽을 놈은 죽을 것이기 때문에, 이미 지나간 일은 후회하거나 되돌아볼 필요조차도 없다. 오직 거북이가 “짧은 목 길게 빼어 바라보는 곳은/ 비린 바람 불어오는 바다 뿐”인데, 왜냐하면 “태내에서부터 출렁이던 양수의 바다”만이 그가 그의 여생을 살아갈 곳이기 때문이다.
유년시절의 꿈은 그의 일생내내 계속되고, 유년 시절의 꿈은 더없이 고귀하고 위대한 학의 날개를 타고 날아다닌다. 이곳과 저곳의 경계도 없고, 그 어느 누구의 방해도 없이 모든 잡새들 위해 군림을 하며 영원불멸의 월계관을 쓰게 된다. 꿈은 학이 되고, 학은 영원불멸의 월계관이 된다. 강기원 시인은 이처럼 고귀하고 위대한 꿈을 꾸며, “문무왕처럼” 조국의 수호신이 되고 싶었지만, 그러나 그 꿈을 이룰 수가 없었다. 따라서 새들 중의 새인 학이 되는 대신, “낙산 바다에 뿌려 달라는 유서”라도 쓰고 싶었지만, 어느덧 느림보 중의 느림보인 거북이가 내 몸속에 들어와 살고 있었던 것이다. “이 난감한 녀석을 어찌 내보내야할지 궁리하는 대신/ 나는 점점 거북이 되어간다/ 침침한 눈 끔뻑이며, 홀로 거니는 고독한 거북”이라는 시구가 그것이고, “내 등판이 돌덩이인 줄 알고 누군가 주저앉아도/ 무심결에 밟아도/끄덕끄덕과 도리도리 사이에서/ 굼뜬, 굼뜬, 거북한 거북이”이라는 시구가 그것이다.
따지고 보면 모든 인간들은 그들의 말투와 생김새와 행동양식과 예의범절까지도 서로가 서로를 너무나도 똑같이 닮아 있다. 시대와 인종이 다르고, 문화와 풍습이 달라도 우리 인간들의 먹고 사는 것과 꿈꾸는 것이 ‘인간이라는 종’의 범주에 구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독재자를 욕하면서도 독재자를 똑같이 닮아가고, 아버지를 미워하면서도 아버지를 똑같이 닮아가고, 그토록 적대자와 싸우면서도 그 적대자와 똑같이 닮아간다. 쌍둥이가 쌍둥이의 얼굴을 싫어하듯이, 우리 인간들은 동일한 꿈과 동일한 지위를 놓고 싸우는 무서운 짝패에 지나지 않는다. 새가 좌우의 날개로 날듯이, 손바닥에 마주쳐야 소리가 나듯이, 원수와 친구는 동일한 인물의 두 얼굴에 지나지 않는다.
강기원 시인은 학의 팔자가 아닌 거북이의 팔자를 타고 났다고 할 수가 있다. 그러니까 음흉하고, 게으르고, 우유부단하며, ‘느림보의 대명사’인 거북이만을 생각하고, 십장생의 영물이자 ‘느림의 미학의 대가’인 거북이와 토끼보다 더 빠른 ‘느림의 미학’을 통해서 무한한 인내와 긍지의 화신인 거북이에게 그토록 짜증과 비아냥과 자기 비하의 말을 되풀이 퍼붓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거북이는 사랑과 믿음의 동물이며, {삼국유사}의 [구지가]의 주인공이자 그 옛날부터 기린과 봉황과 용과 더불어 가장 성스러운 4대 영물로 불려왔던 것이다.
“굼뜬, 굼뜬, 거북한 거북이”가 그토록 거룩하고 성스러운 강기원 시인의 자화상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