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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barnabak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관심
열왕기하 15:27-31
1.
지난 15일은 우리나라가 일제의 압제에서 해방된 지 68주년이 되는 광복절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대로 일본은 지금 주변국이 우려할 정도로 심각한 우경화의 행보를 보이고 있습니다.
일본의 패전일이기도 한 15일에는 일급전범들을 안치한 야스쿠니신사를 각료 3명을 포함한 국회의원 100여명이 참배하였습니다.
군대를 파병하고 전쟁에 참여할 수 있도록 헌법을 개정하려는 움직임도 있습니다.
나치식으로 헌법을 개정하면 되지 않겠느냐는 말을 해서 큰 파장을 일으키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우경화의 행보는 일본과 긴밀한 협력관계에 있는 미국에서조차 우려를 표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인 것이 분명합니다.
일본에서 군국주의 망령이 살아나면서 우리나라를 비롯한 주변국의 우려도 함께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때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하기가 쉽습니까?
먼저는, 당연히 우리도 힘을 길러야 한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힘이 없어서 당했다는 우리의 역사인식은 다시 당하지 않기 위해서 힘을 길러야 한다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일본 못지않은 경제 대국이 되어서 일본이 함부로 하지 못하도록 힘을 길러야 한다는 생각을 하기가 쉽습니다.
두 번째는, 주변국과 긴밀한 공조관계를 유지하여야 한다는 생각을 하기가 쉬울 것입니다.
미국이나 중국 등 주변국과의 공조관계를 통해 일본의 저의를 무력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생각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일리가 있고 국제 정치적인 논리로 볼 때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고 가능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이 여기에서 그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2.
오늘 본문은 북 왕국 이스라엘의 마지막 혼돈기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북 왕국 이스라엘은 여로보암을 시작으로 총 19명의 왕이 등장하는데 오늘 본문이 포함된 열왕기하 15장에는 14번째 왕인 스가랴를 시작으로 마지막왕인 호세아까지 6명의 왕이 소개됩니다.
그 중에 스가랴는 6달만 통치하고 살룸은 겨우 한 달만 왕위에 앉았습니다.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왕들에게 초점을 맞추어 분석하면 이들은 모두 친 앗수르 파와 반 앗수르 파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당시 최강대국이었던 앗수르에게 항복하고 조공을 바쳐서 좋은 관계를 가져야 한다는 친 앗수르 파는 므나헴과 브가히야 그리고 호세아였습니다.
반대로 앗수르와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 앗수르 파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베가 왕이었습니다.
베가는 반 앗수르 파에 속한 왕으로서 친 앗수르 파인 브가히야를 쿠테타로 몰아내서 왕이 되었지만 다시 사대주의자인 호세아에 의해 역 쿠테타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당시 앗수르는 중동 지역의 최강자였습니다.
그 나라와의 관계가 나라의 운명을 좌우할 정도로 막강한 힘을 발휘하였습니다.
결국 북 왕국은 민족주의자인 베가가 정권을 잡고 앗수르에 반기를 들었을 때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셋에 의해 나라를 빼앗기고 많은 사람들이 앗수르로 잡혀가게 됩니다.
이 일을 보다 못한 호세아가 쿠테타를 일으켜 베가를 죽이고 왕이 되어 친 앗수르 정책을 펴보지만 이미 때는 기울어지고 말았습니다.
북 왕국 이스라엘은 주전 722년에 수도인 사마리아가 점령당하고 추가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앗수르로 끌려가는 것을 끝으로 완전히 멸망을 당하고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나라가 힘이 없어서도 아니고 전쟁을 잘 준비하지 못해서도 아니고 민족주의자와 사대주의자가 당쟁을 일삼고 싸워서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한 마디로 하나님 앞에 범죄 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앗수르의 침략이나 디글랏 빌레셀의 참략은 하나님의 도구였을 뿐이지 직접적인 원인은 하나님 앞에서 범죄 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 성경의 진단입니다.
28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로 범죄 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에 대해서는 열왕기하 17장에서 더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7절-이 일은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애굽의 왕 바로의 손에서 벗어나게 하신 그 하나님 여호와께 죄를 범하고 또 다른 신들을 경외하며,
8절-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의 규례와 이스라엘 여러 왕이 세운 율례를 행하였음이라.”
정책을 잘못 썼기 때문이 아니라 여호와 보시기에 다른 신들을 경외하는 죄를 범하였기 때문입니다.
강한 군대를 소유하지 못하고 강한 나라가되지 못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이방사람의 규례와 왕의 율례를 행하였기 때문입니다.
3.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러한 성경의 관점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너무 현실에 동떨어진 이상주의적인 생각이라고 비판할지 모릅니다.
신앙이 밥 먹여주고 하나님이 이 나라를 살려주겠느냐고 비아냥거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이 사실을 믿고 애국을 해도 성경적인 방법으로 애국해야 합니다.
우리가 신앙적인 애국관을 저버리고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논리에 사로잡히면 이 땅은 절대 소망이 없습니다.
이 땅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지금보다 더 강력한 무기를 가져야 한다.
그것이 전쟁을 억제하는 강력한 수단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갖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최근에 차세대 전투기 기종을 선정하는 입찰을 다시 진행한다는 뉴스를 보았습니다만 우리나라는 매년 무기구입대금으로 엄청난 돈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칼을 가진 자는 칼로 망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강한 힘은 더 강한 힘을 요구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더 강한 힘과 무기로 경쟁하다보면 결국 양쪽이 다 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미국과 러시아는 핵무기 숫자를 감축하는 일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강한 무기로 무장하면서 북한을 향하여는 어떤 무기를 개발하지 말라. 그것 때문에 평화가 깨진다고 하면 그것은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더 강한 무기를 자꾸만 준비하는 한 이 땅의 평화는 더욱 더 요원해질 것입니다.
그렇다고 전혀 준비 없는 삶을 살라는 말은 아닙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성경의 관점에서 애국해야 하고 하나님의 관점에서 나라를 지키고 부강하게 하는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4.
성경은 하나님이 역사의 주관자가 되심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소년 다윗은 골리앗 장군과의 싸움에서 유명한 말을 하였습니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삼상17:47)
다윗은 여호와의 구원하심에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속했다는 믿음으로 나아가 아무도 상대할 수 없었던 골리앗을 물리치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시편기자는 “여호와께서 그의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의 왕권으로 만유를 다스리시도다.”(103:19)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유를 다스리시는 분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신명기 기자는 더 구체적으로 모든 복과 저주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28장)
어떻게 보면 인간의 역사는 사람의 손에, 그것도 능력 있는 사람의 손에 의해 움직여지는 것 같이 생각될 수 있습니다.
나아가 어떤 이데올로기에 의해 진행되는 것 같이 생각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역사는 하나님이 개입하시고 주도하시는 장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역사는 가시적인 사람들이 아니라 비가시적인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줄 믿습니다.
북 왕국 이스라엘의 멸망을 생각할 때 한 가지 궁금한 것은 남 왕국 유다는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점입니다.
북 왕국 이스라엘이 망할 정도가 되었다면 당연히 바로 밑에 있던 남 왕국 유다도 엄청난 위협에 시달렸을 것은 자명한 이치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남 왕국 유다는 북 왕국이 망하고 난 후 130여년을 더 존재하면서 당시 최강국이었던 앗수르에 의해 망하지 않았습니다.
앗수르와 좋은 관계를 가지고 공물을 바쳤기 때문이 아닙니다.
앗수르의 군대보다 더 강한 군대를 가졌거나 다른 나라가 도와주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활동으로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께 돌아와서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역사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국가의 역사뿐만이 아니라 우리 모든 성도들의 개인의 역사도 하나님이 주관하시고 계시는 줄 믿습니다.
인간의 생사화복이 바로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그 하나님을 잘 섬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시며 우리 성도들이 애국하는 진정한 방법이 되는 줄 믿습니다.
5.
이 사실을 믿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관심과 시선에 맞추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열왕기 기자는 베가의 죄를 지적하면서 한 마디로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로보암의 죄가 무엇입니까?
여로보암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서 그가 10지파를 규합하여 이스라엘의 왕이 된 후에 범한 죄가 열왕기상 12장에 나와 있습니다.
금송아지를 만들어 남북 경계지역인 벧엘과 단에 두고 레위 자손이 아닌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고 자의적으로 팔월 15일을 절기로 정하여 지키게 한 것이 여로보암의 죄였습니다.
성경 기자들은 북 왕국 이스라엘의 왕들을 평가하면서 항상 그 기준을 여로보암에게 두었습니다.
여로보암처럼 행하면 그는 악한 왕이었고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면 그는 선한 왕이었습니다.
그 기준에서 볼 때 오늘 본문의 베가는 하나님을 떠나 다른 신들을 섬겼던 악한 왕이었고 그 악으로 나라가 큰 어려움을 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스라엘이 망한 것은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정책의 잘못이거나 아니면 나라가 강해지 못해서거나 아니면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잘못 섬기고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대로 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나라가 강해지고 하나님의 복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관심과 초점에 맞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계화의 초점도 필요하고 미래에 대한 초점을 맞추는 것도 필요하고 현실의 정세에 맞추는 것도 필요합니다만 그러나 이 모든 것 위에 하나님의 관점에 초점을 맞추는 삶을 살아야 이 나라의 미래가 있는 줄 믿습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잘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잘못살고 있습니까?
우리나라는 하나님의 초점에서 볼 때 잘 살고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잘못살고 있는 것입니까?
우리는 부지런히 내 삶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돌아보아야 합니다.
여로보암 2세는 이스라엘 역대 왕 중에서 가장 정치를 잘하고 나라를 부강하고 풍요롭게 만들었던 유명한 왕이었습니다.
이때 이스라엘의 영토는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회복하였다”(25절) 또한 “다메섹을 회복하였다”는 기록에서 볼 수 있듯이 다른 왕들이 빼앗겼던 옛 이스라엘의 영토를 회복하여 다윗 시대와 버금가는 큰 영토를 갖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큰 업적을 쌓았으며 얼마나 나라가 부강하고 번성하였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성경의 기록은 그런 것에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단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에게 범죄 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모든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더라.”고 짤막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최고의 번영기로 만들었던 왕에 대한 기록이 불과 7절에 불과하였고 그것도 악한 왕으로 규정하고 있을 뿐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서의 삶이냐? 아니면 세상 앞에서의 삶이냐는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누구에게 인정을 받고 누구에게 잘 했다 칭찬을 받을 것인가에 대한 분명한 생각을 갖고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영토의 확장이나 나라의 부강이나 정치를 얼마나 잘 했느냐? 이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세상적인 성공이나 세상적인 인정에 크게 관심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그런 것들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에 앞서 얼마나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며 얼마나 하나님을 잘 섬기고 순종하였는가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아무리 다른 것을 잘했어도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절대 칭찬 받는 삶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의 평가에 너무 신경 쓰지 마시고 사람의 평가에 너무 관심 갖지 마시고 하나님이 과연 내 삶을 어떻게 평가하실까? 를 항상 생각하며 하나님의 관점에서 여러분의 삶을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6.
어떤 목사님이 잘 나오지 못하는 교우에게 전화를 걸어 예배에 꼭 나오도록 권면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목사님 저 요즘 너무 바빠요. 교회 나갈 시간 없어요.” 그렇게 말을 하더랍니다.
여러분 무엇 때문에 바쁘십니까?
그것이 그렇게 중요해서 하나님 앞에 예배할 시간마저 없습니까?
그것이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며 하나님께 칭찬받는 일입니까?
우리의 삶을 평가하실 분은 역사의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그 분의 평가에 의해 우리가 잘 살았는가 못 살았는가가 판단되고 어디에서 영원한 삶을 살 것인가가 결정되어 집니다.
그 하나님 앞에서 그 하나님의 관심과 시선에 맞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나라와 민족이 잘 살기 위해서도 우리는 그 하나님에게 초점을 맞추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지난 15일 우리교회에서는 국내 성지순례의 일환으로 전남 신안군 증도면을 다녀왔습니다.
그곳은 여전도사로서 신안군내 100여개의 교회를 개척하고 1950년 공산군에 의해 순교를 당한 문준경 전도사의 신앙적 삶이 어려 있는 곳입니다.
지금 증도는 우리나라에서 크리스찬 비율이 가장 높은 지역으로 주민의 90%가 기독교인이라고 합니다.
주일이면 증도에 있는 11개 교회가 가득차서 예배를 드린다고 합니다.
시제를 드리는 것도 유교식이 아니라 기독교식으로 예배를 드린다고 합니다.
그래서 시제예배라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면민의 날에는 목회자가 꼭 기도하고 행사를 시작한다고 합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예전에 듣기로는 이곳에는 술집이 없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아시아에서 제일 먼저 슬로시티로 지정된 곳답게 정말 자연환경도 좋고 신앙적인 기반위에 세워져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이곳 증도를 유승준 작가는 천국의 섬이라고 명명하기도 하였습니다.(홍성사: 천국의 섬 증도)
여러분 이런 변화와 이런 축복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교육으로 되겠습니까? 경제로 되겠습니까? 정치로 되겠습니까?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만을 섬기며 살았던 문준경 전도사 한 사람의 신앙과 헌신이 이런 엄청난 결실을 맺었습니다.
한 가정을 변화시키며 한 지역과 한 도시를 변화시키며 한 나라를 변화시키는 이것이 신앙의 힘이며 신앙의 능력이며 신앙의 축복입니다.
그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 하나님에게 초점을 맞추며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7.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관심과 시선에 맞추는 삶이 진정한 삶입니다.
하나님은 어떠한 환경과 처지에서도 하나님에게 관심을 갖고 초점을 맞추는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정치의 장에서도 경제의 장에서도 공부의 장에서도 하나님은 예배자로서의 삶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다른 어떤 것 때문에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하나님을 섬기지 못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삶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정치인에게도 정치적인 평가가 아니라 신학적인 기준으로 평가를 내리십니다.
하나님은 경제인에게도 경제적인 평가가 아니라 신앙적인 기준으로 평가를 내리십니다.
학생들에게도, 주부에게도 직장인에게도 하나님은 믿음의 평가를 내리셔서 그 평가에 따라 상급을 내리십니다.
세상의 일을 등한히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세상일도 열심히 해야 하고 그곳에서 하나님의뜻을 이루어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그 일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는 일을 등한히 하면 안 됩니다.
무엇이 우선이며 무엇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인지를 잘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관심과 하나님의 시선에 초점을 맞추는 삶을 살아가는 교우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