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
누가복음 18 : 18 – 30
예수님께서 어린 아이와 같지 않는 자는 결단코 하나님의 나라에 들러갈 수 없다고 말씀하시고(15-17) 이어서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어렵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들어갈 수 없다’(17)는 말과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24)라는 말은 다릅니다. ‘어려운지’란 ‘들어갈 수 없다’가 아니라 들어가기가 어렵기는 하지만 들어갈 가능성이 있다는 말입니다.
‘관리’는 정부로부터 임명된 공직자이며 ‘큰 부자’(23)였습니다. 어려서부터 율법을 다 지켰다고 자랑할 만큼 세상적으로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예수님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까”(18)고 물었습니다. 이와 같은 질문을 강도 만난 자를 도와준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에서도 어떤 율법사(눅10:25)도 했습니다.
그 율법사는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 질문을 했지만, 본문에 관리는 영생을 얻는데 혹시나 자신이 모르고 빠뜨리고 있는 것은 없는지를 알고자 하는 열망에서 한 질문입니다.
‘영생’이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서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한 아담과 하와는 영생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2:16,17)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사탄의 꾀임에 속아서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는 열매를 따 먹었습니다. 그로 인해 모든 사람들은 죽게 되었고 영생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혀 주심으로 죽어도 다시 살아서 영생할 수 있는 길을 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니라”(요3:5)고 하신 말씀은 죄인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예수님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묻는 그에게는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고 물었고, 그는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눅10:26,27)
그러나 본문에 관리에게는 예수님께서 “네가 계명을 아나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고, 관리는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고 말했습니다.(20,21)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은 무엇입니까?
답은 강도 만난 자를 살려준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에서 알 수 있습니다.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를 도와주지 않고 지나갔지만, 사마리아 사람은 그를 살려주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율법사에게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고 물었고, 그가 ‘자비를 베푼 자’라고 했을 때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10:37)
예수님께서 관리인 부자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은 ‘이웃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은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은 것입니다. 관리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은 이웃을 사랑하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최후의 심판을 말씀하실 때 인자가 와서 마치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처럼 의인과 악인을 구분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심판주가 되신 주께서 악인들에게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 가라. ...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악인들은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니까”라고 말했습니다.(마25:42-45)
악인들이 말한 ‘공양을 하면 자기에게 더 많은 복이 온다’고 믿는 불교에서 공양하는 신앙이며, 모든 종교가 가르치는 신앙행위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양’은 ‘너희를 위해 한 것이지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교회 안에도 공양하는 사람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공양하는 것은 위험한 믿음입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도 부자가 하나님을 믿지 않아서 음부의 불꽃 가운데서 고통을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문 앞에 버려진 거지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부자인 관리에게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22)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부자는 그 말을 듣고 근심하였습니다.(23)
예수님께서 그를 보시고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24,25)고 말씀하셨습니다.
‘얼마나 어려운지’(24)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어렵지만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히브리서에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히13:2)는 말씀은, 롯이 저녁 때에 지나가는 나그네를 보고 그들을 영접하고 대접한 것입니다.
롯은 일찍 부모를 잃은 고아였습니다. 삼촌인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데려다 돌보아 주었습니다. 롯은 성장하여 양들이 많은 부자가 되어서 삼촌과 나누어질 때, 욕심을 내어 물이 넉넉하고 마치 여호와의 동산 같은 소돔과 고모라 지역을 차지했습니다.(창13:10)
그런데 롯이 소돔 성문에 앉아 있다가 저녁 때에 지나가는 나그네들을 보고 일어나 절하고 영접하여 그들의 발을 씻어주고 식탁을 베풀고 무교병을 구워 먹게 하고 편히 자도록 했습니다.
그때 소돔 사람들이 그 집을 에워싸고 나그네를 이끌어 내라고 했지만, 롯은 그들에게 ‘내 형제들아 이런 악을 행하지 말라’고 말하며 나그네 두 사람을 안전하게 지켜 주었습니다.(창19:7)
롯이 대접한 두 나그네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천사였습니다.(창19:1-3) 우리가 불쌍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보내신 천사를 사랑하는 것이 될 뿐 아니라, 천사를 보내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나그네를 대접한 것이 곧 하나님께서 보내신 천사를 대접하게 된 롯과 같이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라’(히13:1)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낸 두 천사는 그날 밤에 유황불이 떨어지는 소돔성에서 롯과 처와 두 딸의 손을 잡아 이끌어 내었습니다. 그러나 롯의 처는 뒤돌아봄으로 소금기둥이 되었지만 롯과 두 딸은 멸망하지 않고 구원받았습니다.
사람들은 롯을 악인들과 함께 멸망 받을 악한 자로 생각하지만, 베드로는 ‘의로운 롯’(벧후2:7)이라고 말했습니다.
롯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섬기는 하나님을 섬기기보다 재물을 더 사랑했습니다. 세상 향략을 원했으며, 멸망 받은 죄악의 도성 소돔과 고모라에서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구원 받은 것은 나그네를 대접했기 때문입니다.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어렵지만, 이웃을 사랑하고, 나그네를 대접하면 구원받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서 영생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동방의 의인 욥이 부자가 된 것을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주께서 그의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의 소유물이 땅에 넘치게 하셨음이니이다’(욥1:1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도 재물이 늘어나는 것을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으로 알고 감사합니다. 사람들은 재물을 아끼고 부자가 되고 싶어 하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부자가 되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재물이 많아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27)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할 수 없다’는 말은 아무리 재물이 많고, 열심히 계명을 다 지켜도 구원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구원 앞에 무능력한 존재라는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는 말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절대적인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를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도록 하셨습니다. 구원에 관한 문제는 오로지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가능합니다.
베드로가 “보옵소서.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28)라고 말했을 때, 예수님께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29,30)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인간적으로 오해할 수 있는 말씀처럼 들리겠지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데는 그 모든 것들이 조금도 도움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떠나는 날에 그 모든 것을 다 버리고 갑니다. 부자도 많은 재산을 다 버리고 갑니다. 부모와 형제와 자녀들까지도 다 버리고 갑니다.
이웃에게 베풀었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현세에서 여러 배를 받는다(30)고 말씀하셨습니다. 베풀면 더 많은 것을 받게 됩니다. 사도행전 기자는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말씀하심을 기억하라.(행20:36)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자가 음부의 불꽃 가운데서 고통을 당하면서 살았을 때 날마다 배부르게 먹고 마시며 거지 나사로에게 베풀지 않았던 것을 얼마나 후회하고 있을까를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베풀어야 할 때 베풀지 못해서 영생을 얻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아야 합니다. 재물을 너무 아끼고 사랑하다가 영생을 빼앗기는 불행한 자가 되지 않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마10:42)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는 자가 복이 있는 자입니다. 현세에서도 여러 배를 받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서 영원히 사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