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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재집 제3권=문목(問目)-퇴계 선생께 올림〔上退溪先生〕
문: ‘삼촌 숙모(三寸叔母)의 남편에 대해 복(服)을 입지 않는다.’라는 것에 대해 묻습니다.
선생 답 편지에서 말한 동성(同姓)의 삼촌 숙모의 남편에 대해 본래 복을 입지 않는데, 이것만 그런 것이 아니네. 삼촌 질녀(三寸姪女)의 남편, 사촌 조모(四寸祖母)의 남편, 손녀(孫女)의 남편에 대해서도 모두 복을 입지 않는다네. 복을 입지 않는 이유는 미루어 가지 않기 때문이네. 예를 들어, 삼촌 질부(三寸姪婦)와 사촌 손부(四寸孫婦)에 대하여 복을 입는 것은 부인(婦人)은 부가(夫家)에 속하기 때문에 부당(夫黨)을 위하여 삼촌 백부(三寸伯父)에 대하여 대공복을 입고, 사촌 대부모(四寸大父母)에 대하여 시마복을 입기 때문에 자신이 또한 대공복과 시마복으로 보답하여 복을 입네. 숙모(叔母)의 남편과 질녀(姪女)의 남편 등의 경우는 저들이 나에게 처의 친척이라 하여 복을 입지 않기 때문에 나 또한 복을 입을 의리가 없는 것이네. 얼삼촌 숙모(孼三寸叔母)에 대한 복은 예서에 별다른 언급이 없네. 얼속(孽屬)의 복에 대해 등급을 낮추는 제도는 무슨 뜻인지 자세히 모르겠다. 대충 단복(短服)을 입고 날 수를 미루어 보충하는 것이 오히려 복을 입지 않는 것보다는 나을 듯하네.
문: 《대학》 6장 수절(首節)에서 이미 ‘신기독(愼其獨)’을 말하고, 아래 문단에서 또 다시 말했는데, 요즘 사람들은 위의 독(獨) 자는 ‘마음이 홀로 알고 있는 곳[心所獨]’이라 해석하고 아래 독(獨) 자는 ‘몸이 홀로 거처하는 곳[身所獨]’이라 해석합니다. 장근(張謹)이 “수절의 독(獨) 자의 풀이 아래 있는 진정우(陳定宇)의 설에 ‘이는 마음이 홀로 알고 있는 곳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라고 하고, 또 한거(閒居)의 풀이 아래에 ‘이는 몸이 홀로 거처하는 것이며 위 문단의 「자기가 홀로 알고 있는 바[己所獨知]」의 독(獨) 자와 다르다.’라고 하였다. 요즘 사람들은 대부분 이 말에 현혹되어 본래의 의미를 자세히 살피지 않고 억지로 이 설을 주장하면서 진정우의 두 설이 애초에 위와 아래의 독(獨) 자의 뜻을 변별한 것이 아니라 다만 한거(閒居)의 뜻과 독지(獨知)의 독(獨) 자가 구분이 있음을 변별한 것임을 모르고 있다. 이 설과 같이 보면 진정우의 본의가 아닐 뿐만 아니라 역시 장구(章句)의 뜻도 잃어버린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설이 믿을 만한지 모르겠습니다.
선생 답 성의장(誠意章)의 두 독(獨) 자를 요즘 사람들이 진정우의 설을 잘못 보고서 몸과 마음으로 나누어 보는 경우가 있네. 나도 전에는 그 설을 옳다고 따랐는데 근래에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네. 지금 말한 장근의 설이 옳네.
문: 사단(四端)을 정(情)이라 하기도 하고 칠정(七情)을 정(情)이라 하기도 합니다. 정(情)이란 것이 성(性)이 발(發)한 것이니 이미 칠정을 정이라 한다면 이른바 사단이란 것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사람의 정이 두 가지 갈래가 있는 것입니까?
선생 답 정이 발함은 기(氣)에 위주하기도 하고 이(理)에 위주하기도 한다네. 기가 발한 것은 칠정이 그것이고, 이가 발한 것은 사단이 그것이네. 어찌 두 갈래가 있어서 그런 것이겠는가.
문: 이(理)는 본래 형체가 없으니 이 기(氣)가 없다면 어찌 홀로 발(發)하는 이치가 있겠습니까?
선생 답 천하에 이(理)가 없는 기(氣)는 없고 기(氣)가 없는 이(理)는 없네. 사단(四端)은 이가 발하여 기가 거기에 따르는 것[理發而氣隨之]이고, 칠정(七情)은 기가 발하여 이가 거기에 타는 것[氣發而理乘之]이네. 이(理)의 경우에 기가 따르는 것이 없다면 발현되어 나올 수 없게 되고, 기(氣)의 경우에 이가 타는 것이 없다면 이욕에 빠져서 금수가 될 것이니 이것은 바뀔 수 없는 정해진 이치이네. 혼륜(渾淪)하여 말한다면 미발(未發)의 중(中)으로 대본(大本)을 삼고 칠정으로 대용(大用)을 삼는데, 사단(四端)은 그 가운데 있으니 〈호학론(好學論)〉과 《중용》 수장(首章) 같은 경우가 그것이네. 《맹자》의 사단장(四端章)은 전적으로 이(理)만 가지고 말하였으나 기(氣) 또한 그 사이에 유행하지 않는 적이 없네.
문: 이미 칠정(七情)ㆍ사단(四端)이라 말하고 또 인심(人心)ㆍ도심(道心)이라 말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선생 답 인심은 칠정이 그것이요 도심은 사단이 그것이니 두 가지 도리가 있는 것이 아니네. 나머지는 〈기명언(奇明彦 기대승(奇大升))의 문목(問目)에 답함〉에 자세히 보이네.
문: 칠정(七情)과 사단(四端)이 적중하는 경우가 있고 적중하지 않는 경우가 있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선생 답 절도(節度)로써 하면 적중하고, 절도로써 하지 않으면 적중하지 않네.
문: 그렇다면 절도에 적중하기도 하고 절도에 적중하지 않기도 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선생 답 주자(朱子)의 〈장경부(張敬夫)에게 답한 편지〉를 본 적이 있는데, “나는 생각하건대, 사물에 감응하는 것은 마음[心]이고, 그에 따라 움직이게 하는 것은 정(情)입니다. 정은 성(性)에 근본하여 마음에 주재된다. 마음이 주재하니 그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절도에 적중하지 않음이 없다. 어찌 인욕(人欲)이 있겠는가. 마음이 주재하지 못하고 정이 스스로 움직이기 때문에 인욕으로 흘러서 항상 그 올바름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천리와 인욕의 판별과 중절과 부중절의 구분은 오직 마음이 주재하느냐 않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지 정이 병들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절도에 적중한다고 하지만 역시 정일 뿐이며 오직 그것을 적중하게 하는 것은 바로 마음이다. 지금 갑자기 어린 아이가 우물로 기어 들어가는 것을 보면 마음이 감응하게 되고, 반드시 놀라고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이 들게 되니 이것은 정이 움직인 것이다. 안으로 교제를 맺거나 명예를 구하거나 구해 주지 않았다는 오명이 싫어서라면 마음이 주재하지 못하여 그 바름을 잃은 것이다.”라고 하였네. 이 설명이 분명하고 적당하네. 배우는 이가 깊이 음미하고 자세히 살핀다면 오랜 뒤에 그 뜻을 알게 될 것이니 달리 화두를 세울 필요는 없네.
문: 지난번에 장근(張謹)이 측은(惻隱)에 대한 가르침을 기록하기를 “측은은 기(氣)이고 측은하게 하는 것은 이(理)이다.” 하였으므로, 제가 이것을 변론하여 질정하기를, “사단은 이(理)의 발이고, 발하여 측은(惻隱)하고 수오(羞惡)하고 사양(辭讓)하고 시비(是非)하게 할 수 있는 것[所以能]은 곧 기(氣)이다. 왜냐하면 이(理)는 본래 형상이 없어 이 기(氣)가 없으면 이(理)가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仁)이 기(氣)를 타고 발하는 것을 ‘측은’이라 말하는데, 이제 그대가 ‘측은은 기(氣)이고 측은하게 하는 것은 이(理)’라고 기록한 것은 은연중에 기(氣)를 주장하는 뜻이 있으니, 내 생각엔 그 말이 도착(倒著)된 듯하다. 전에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았는데, ‘사단은 이(理)가 발하여 기(氣)가 따르고, 칠정은 기(氣)가 발하여 이(理)가 탄다는 것은 확고하여 바꿀 수 없다.’고 하셨다. 이제 와서 만약에 희로(喜怒)를 말하여 희로는 기(氣)이고 희로하게 하는 것은 이(理)라 한다면 그런대로 괜찮지만, 만약에 측은을 말하여 측은은 기(氣)이고 측은하게 하는 것은 이(理)라 한다면, 나는 훗날 보는 사람들이 사단이 본래 기(氣)에서 나와 이(理)로써 이루어진다고 의심할까 염려된다. 비유하여 말하면, 어떤 사람이 말을 타고 길을 가는 것을 보고서 사람이 간다 하겠는가? 말이 간다 하겠는가? 사람이 간다고 하면 옳지만 말이 간다고 하면 옳지 않다. 왜 그렇게 말하는가 하면, 사람이 말을 타고 갈 때 사람이 말의 주인이 되고 말은 사람에게 복종하는 것이니 가는 것은 말이지만 말을 가게 하는 것은 곧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말이 가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사람이 가는 것이다. 만약에 공의 말과 같다면, 사람이 말의 주인이 되지 않고 말이 실제로 주인이 되는 셈이다. 그대는 불을 보지 않았는가. 불은 본래 형상이 없는데 땔감을 빌려서 그 형체와 그림자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밝은 것은 불이지만 밝게 만드는 것은 땔감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모두 불이라고 하고 땔감이라 하는 것을 듣지 못한 것은 어째서인가? 빌린 것은 땔감이지만 능히 주장하는 것[所以能]은 불이기 때문이다. 이제 공이 이것을 옳다고 한다면 불의 밝음을 보고 반드시 땔감이라 하고야 말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측은은 이(理)의 발이고 이것을 발하게 하는 것은 기(氣)라고 하면 괜찮지만, 만약에 측은은 기(氣)이고 측은하게 하는 것은 이(理)라 하는 것은 아마 옳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그래서 망녕되게 이렇게 증명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선생 답 측은은 기(氣)이고 이 측은을 할 수 있게 하는 것[所以能]은 이(理)라는 설은 실로 북계(北溪)의 주장인데, 사문(師門 주자)에 질정하여 물리침을 당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 또한 일찍이 ‘측은이 기(氣)’라는 한마디가 지나치게 기(氣) 자를 주장하여 이(理)의 범주를 침범한 점이 없지 않다고 의문을 가졌었네. 이제 굉중이 이것을 그르게 여기는 것이 일리가 없지는 않지만 굉중의 말에도 착오가 있네. 대개 이(理)가 발하여 사단(四端)이 되는데, 의거하여 발하는 것은 기(氣)이고 그렇게 할 수 있게 하는 것[所以能]은 실로 이(理)가 하는 것이네. 지금 굉중은 ‘소이능(所以能)’이란 세 글자를 기(氣)에 귀착시켰으니, 그 잘못은 북계의 설보다 더 심하네. 이(理)가 기(氣)를 타고 행하는 것은, 주자도 사람이 말을 타고 출입하는 것으로 비유하였으니, 굉중의 인마설(人馬說)은 여기에 근본한 것으로 그 설에 문제가 없네. 또 불과 땔감으로 비유한 것도 인마설과 같은 것이니 불가할 것이 없네. 다만 또 ‘소이능’이란 세 글자를 땔감에다 귀착시킨 것이 옳지 않네. 무릇 논설(論說)이란 의리(義理)를 정미하게 해야 함을 가장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되니 털끝만 한 차이가 천 리로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네. 주자가 사람이 말을 탄 것에 비유한 설은 《성리대전(性理大全)》 〈태극도설(太極圖說)〉 제21장(章)의 소주(小註)에 보이네.
문: 소이능(所以能) 세 글자에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선생 답 능한 것[能]은 기(氣)이고, 그렇게 하는 것[所以]은 이(理)이네. 이능(以能) 자를 기에 귀착시키는 것은 옳지만 소이(所以) 자를 기에 귀착시키는 것은 매우 옳지 않네.
문: ‘하나라도 있는데 살피지 못하면[一有之而不能察]’에서의 하나란 곧 네 가지 중의 하나이고, 유(有)는 곧 사물이 닥쳐서 기뻐하거나 성낼 수 있는 그것입니다. 대개 기뻐하거나 성낼 수 있는 사물이 하나 있을 때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인욕(人慾)이 움직이고 정(情)이 우세하게 되고 그런 뒤에 마음의 작용이 비로소 얽매이게 되어 올바름을 얻지 못하게 됩니다. 유지(有之) 두 글자는 유소(有所)의 뜻을 풀이한 것이 아닙니다. 상사(上舍 진사) 조목(趙穆)이 “일유(一有)는 다만 그것이 있다[徒有之]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는데, 그의 뜻은 유지(有之)는 곧 유소(有所)의 뜻을 풀이한 것으로, 배우는 이가 만약 이 네 가지가 사람에게 없을 수 없는 것이라 하여 한결같이 두고 자세히 살피지 않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유지(有之)의 뜻은 유소(有所)의 앞에 있고 유소(有所)의 병통은 유지(有之)의 뒤에 있기 때문에 유지(有之)란 글자는 병통이 없고 유소(有所)란 글자에 비로소 병통이 있는 것입니다. 이 장은 《혹문》에서 이 한 말을 해석하기를 “오직 사물이 닥쳐올 때 살피지 못하는 바가 있어서 그것에 대응함에 잃음이 없을 수 없다.” 하였습니다. 이로써 본다면 잘 살피지 않은 뒤에야 바야흐로 잃는 바가 있고 심중에서 동함이 있어서 이 마음의 작용이 그 바름을 얻지 못함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살필 수 없게 되기 전에는 이 네 가지의 병통이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김인산(金仁山)이 또한 “전문(傳文)으로 본다면 첫 번째도 유소(有所)이고 두 번째도 유소(有所)이면 이 마음의 주된 바가 여기에 있으니 그 잃음은 당연한 것이다. 분(忿)은 분치(忿懥)라 하고 구(懼)는 공구(恐懼)라 하니 곧 중첩된 말이니 이 정(情)의 우세함이 여기에 이르러 막힘이 깊은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이 글에서 보면 사유(四有)로 마음의 잃는 바를 삼고, 중첩된 말로 정이 우세한 바로 삼았으니, 인욕이 움직이고 정이 우세한 때가 곧 이 네 가지 병통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이것을 잘못이라 여겨서 한갓 그것이 있다는 설을 간직하려 한다면 제가 이해할 수 없는 바입니다.
선생 답 정심장(正心章)의 ‘하나라도 있는데 살피지 못하면’에 대한 뜻은 본 것이 자세하고 설명도 분명하네. 나의 생각도 바로 이와 같네. 다만 사경(士敬 조목(趙穆)의 자)의 설은 오직 사경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역시 대부분 그 설을 사용하네. 혹시 내가 잘못 안 곳이 있을 수 있으니 다시 자세히 살펴야 하네.
문: ‘구차하게 비웃음을 피한다.[苟避譏笑]’란 무슨 뜻입니까?
선생 답 인지상정은 평소 신망을 받는 자가 앞서 훌륭한 행실이 있다가 뒤에 잘못을 저지르면 반드시 비웃는다네. 주 선생(朱先生)은 초년(初年)에 세상의 배우는 이들이 존덕성(尊德性) 한쪽으로 치우치고 도문학(道問學) 공부를 알지 못하여 결국 이단(異端)에 빠지는 것을 아프게 여겼기 때문에 먼저 도문학(道問學)으로 사람을 가르쳐 섬세하게 궁리하고 차이점을 검토하여 존덕성(尊德性) 공부를 하도록 하니, 천하의 사람들이 모두 복종하였네. 나중에는 그것이 지루하고 번잡하여 도리어 그 본령을 버리고 지엽으로 흐르게 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선생이 도리어 존덕성을 위주로 하고 도문학으로 보충하려 하면서 “세상 사람들이 반드시 이것 때문에 나를 비웃겠지만 비난을 피하기 위해 사람을 그르치는 것은 나의 뜻이 아니다.”라고 하였네. 이것은 주 선생이 도가 이루어지고 덕이 이루어졌지만 오히려 스스로 겸손하고 억제한 것이네. 그러나 지금 사람들은 항상 자기가 옳다고 하여 마음속으로는 그릇되는 것을 알지만 스스로 그릇되게 여기지 않으니, 모두 비웃음을 피하기 위해 그런 것이네.
문: 주자는 “이(利)를 바라는 마음은 외물과 내가 상대해서 생기는 것으로, 인욕(人慾)의 사사로움이다.”라고 하였고, 보경원(輔慶源)은 “이를 바라는 마음은 사람이 본래 없지만 다만 자기와 외물이 있음으로 해서 피차가 상대해서 생겨난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아름다운 여색은 그 형체를 보고 여색을 좋아하는 마음이 생겨나니 이 역시 본래 생겨날 이치가 없는데 그것 때문에 발현되는 것입니까?
선생 답 서로 상대함으로 말미암아 일마다 모두 자기에게 좋게 하려만 하고 다시 어떠한 것인지 생각할 겨를이 없는 것이니, 이것이 곧 이(利)를 바라는 마음이네. 좋은 색을 좋아하는 마음은 하고 싶은 마음[欲心]이라고 해야지 이익을 바라는 마음[利心]이라고 할 수 없네.
문: ‘천지의 성[天地之性]’의 성(性) 자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황면재(黃勉齋)가 성(性)을 논한 설을 보면 “이것은 천지가 만물에 부여한 본연(本然)의 것으로서 기질(氣質) 속에 붙어 있다. 그러므로 그 말에 ‘잘 돌이키면 천지의 성이 거기에 있다.’라고 한 것이다. 대개 천지의 성이 기질 속에서 떠난 적이 없음을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 성(性) 자는 천지의 본체(本體)의 측면에서 말한 것입니까? 인물의 품부(稟賦) 받은 측면에서 말한 것입니까?
선생 답 이것으로 장자(張子)의 “잘 돌이키면 천지의 성(性)이 있다.”라는 것을 논한다면 옳지만, “천지의 성(性) 중에 사람이 귀(貴)하다.”라는 것을 논한다면 옳지 않네.
문: 장남헌(張南軒)이 말하기를 “혈기(血氣)의 노(怒)는 있어서는 안 되고 의리(義理)의 노(怒)는 있어야 한다.”라고 하였는데, 똑같은 노여움인데 혈기와 의리의 분별이 있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정(情)이라는 것은 기(氣)가 발하여 이(理)가 탄 것이라는 설은 이미 말씀을 들었지만 다만 혈기와 의리로 분별되는 이유는 자세히 모르겠습니다. 혹은 “노(怒)가 발하되 이(理)에 합당하면 이것은 의리의 노여움이고, 노(怒)가 발하되 이(理)에 합당하지 않으면 이것은 혈기의 노여움이다.”라고 하고, 혹은 “노기(怒氣)가 발하여 이(理)가 탄 것이 발하여 이(理)에 합당하고 이(理)가 주재가 되어 기(氣)가 그 명령을 들으면 이것은 의리의 노여움이고, 노여움이 발한 것이 이에 합당하지 않아 오로지 기(氣)만 행하고 이(理)가 마침내 감추어진다면 이것은 혈기의 노여움이다.”라고 합니다. 이른바 ‘의리’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곧 기(氣)에 타고 있는 이(理)이며, 이른바 ‘혈기’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바로 발하는 기(氣)인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노여움을 당했을 때 기(氣)와 이(理)가 서로 승부(勝負)를 벌여 기(氣)가 거칠어[麤] 우세하면 이(理)가 지고, 이(理)가 달(達)하여 우세하면 기(氣)가 따르게 됩니다. 이러한 말은 어떻습니까?
선생 답 이 말이 매우 타당하네.
[주-D001] 얼삼촌 숙모(孼三寸叔母) :
서삼촌 숙모(庶三寸叔母)로, 서조모(庶祖母)의 아들과 그의 아내를 말한다.
[주-D002] 장근(張謹) :
1544~1619. 본관은 단양, 자는 이신(而信), 호는 잠재(潛齋)이다. 1276년(충렬왕2)에 예천 군수를 했던 한문(漢文 일명 전(悛))의 후손이며, 명량의 아들이고, 퇴계 이황의 제자이다.
[주-D003] 진정우(陳定宇) :
원(元)나라 진력(陳櫟)으로, 정우는 그의 호이다. 흔히 신안 진씨(新安陳氏)라고 부른다.
[주-D004] 호학론(好學論) :
정이(程頤)가 18세 때 태학에서 공부할 때에 호안정(胡安定)이 《논어》 중의 ‘안자(顔子)가 유독 좋아한 것은 무슨 학문이었느냐?’라는 제목으로 과제를 내어 이에 대한 논을 작성해 제출한 것인데, 성리학의 근간을 세운 논설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심경부주》 〈안연문인장(顔淵問仁章)〉에 실려 있다. 그중에 “외물이 형체에 저촉되면 마음이 움직이고, 마음이 움직이면 칠정이 거기에서 나오니, 희로애락애오욕이다.”라고 하여, 칠정(七情)에 사단(四端)이 포함되는 것처럼 말한 부분이 나온다.
[주-D005] 장경부(張敬夫) :
송(宋)대의 장식(張栻)으로. 경부는 그의 자이다. 남헌 선생(南軒先生)이라고 칭하였다.
[주-D006] 북계(北溪) :
주희(朱熹)의 문인 진순(陳淳)의 호이다. 자는 안경(安卿)이다.
[주-D007] 하나라도 …… 못하면 :
《대학장구》 전7장의 “마음에 성내는 바가 있으면 바름을 얻지 못하고, 두려워하는 바가 있으면 바름을 얻지 못하며, 좋아하는 바가 있으면 바름을 얻지 못하고, 근심하는 바가 있으면 바름을 얻지 못한다.[心有所忿懥, 則不得其正, 有所恐懼, 則不得其正, 有所好樂, 則不得其正, 有所憂患, 則不得其正.]”라고 한 글의 주석에, “이 네 가지는 모두 마음의 용이니 사람에게 없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라도 있는데 살피지 못한다면 욕이 움직이고 정이 우세하여 그 용이 행하는 바가 바름을 잃지 않을 수 없다.[蓋是四者, 皆心之用, 而人所不能無者. 然一有之而不能察, 則欲動情勝, 而其用之所行, 或不能不失其正矣.]”라고 한 부분이다.
[주-D008] 김인산(金仁山) :
송나라 말기, 원나라 초기의 학자인 김이상(金履祥, 1232~1303)으로, 인산은 그의 호이다. 주희(朱熹)와 면재(勉齋) 황간(黃榦)의 학통(學統)을 이어받아, 절학(浙學)을 중흥하였다. 문집에 《인산집(仁山集)》, 주요 저서에 《통감전편(通鑑前編)》, 《대학장구소의(大學章句疏義)》 등이 있다.
[주-D009] 보경원(輔慶源) :
주자(朱子)의 문인인 보광(輔廣)으로, 경원은 그의 본관(本貫)이다. 자는 한경(漢卿), 호는 잠암(潛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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