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화성외국인보호소 산악회 원문보기 글쓴이: 붉은 까마귀
<欽定滿洲源流考>의 正體性
欽定滿洲源流考에는 만주인들의 뿌리로 숙신(조선)과 부여 백제 신라 발해등을 기록하면서 정작 滿洲에서 建國되었고 만주에서 멸망했다는 고구리는 보이지 않는다. 건륭제는 무슨이유로 자신의 조상 국가들의 通史인 欽定滿洲源流考를 쓰면서 고구리를 쏙 빼고 역사서를 쓴 것일까?
이것에 대한 해답은 기존 우리가 배워온 역사 상식을 깨트리지 않는다면 절대로 답을 찿을 수가 없다.
이제 肅愼(고조선), 扶餘, 浥樓, 三韓, 勿吉, 百濟, 新羅, 靺鞨, 渤海, 완안, 건주등을 청나라의 역사로 기록하면서 우리가 만주에 존재 했다는 高句麗를 기술하지 않은 이유를 설명하고자 한다.
이에 대한 설명을 하기전에 우리는 고대의 우리 영토가 어디까지 였는냐에만 눈이 멀어 정작 중요한 고대의 우리 민족의 구성이 어떻게 이루어 졌는가는 대부분 간과하고 소홀하게 취급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中國이라 하면 中華人民共和國의 약칭인 中國과 中原에서 일어난 나라들을 부르는 中國과 혼동하는 착시 때문에 中原에서 일어난 역사를 모두 中華人民共和國 역사로 인식하는 것이다. The Middle Kingdom이라는 의미의 중국이란 帝國으로서 위성국가를 다스리던 나라를 中國이라 하는 것이다. 에를 들어 고구리와 백제 신라 돌궐등을 무너 트리고 패권을 차지한 당나라를 중국이라 하는 것이지 지금의 中華人民共和國을 The Middle Kingdom라는 뜻으로 中國이라 하는 것은 전혀 맞지가 않은 것이다. 이것을 혼동하여 마치 中原에서 일어낫던 The Middle Kingdom을 지금의 中華人民共和國과 겹쳐서 사용하고 고대에 중원에서 일어낫던 나라들을 모두 中華人民共和國 역사로 보면 안되는 것이다.
또한 肅愼과 高句麗의 역사와 흉노와 선비 그리고 말갈의 역사가 어떤 경로로 이어져 왔는가에 대하여 정확하게 인식 할 필요가 있다.
역사를 기술함에 있어서 자기 民族 中心的이 되지 않을 수가 없는 歷史記錄의 속성상 중국인의 눈으로 본 우리의 역사가 왜곡되고 삐뚤어지지 않았다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않겠는가?
그런 면에서는 같은 민족이면서도 비교적 객관성을 띠고 있는 <魏書>와 <隋書> <北史>등과 몽골에 의해 편찬된 遙史나 金史 그리고 淸나라의 乾隆帝에 의해 씌여진 <欽定滿州原流考>에서의 우리 역사는 우리가 배웠던 역사 패러다임이 모두 허구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遼史>와 <滿洲源流考>에서 나타난 우리의 고대 역사는 桓檀古記의 기록과 큰 차이가 없음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그러나 우리 大韓民國 역사학계는 요, 금과 건륭제가 쓴 滿洲源流考는 믿지 않으려 하는데 이것 역시 중국이 이들 史書들을 바라 보는 패러다임과 大同小異 하기 때문인 것이며 우리 민족은 만주와 한반도에서 출발햇다는 굳은 믿음으로 부터 비롯된 것이다.
<遼史> <金史> <欽定滿洲源流考>가 지금의 중국이 말하는 오랑캐가 쓴 역사서이기에 자기 민족 중심적 일 수 밖에 없는 역사 기록물의 특성상 이들 史書들의 내용이 한족들의 마음에 들수가 없는 것인데 그 내용을 믿지 않으려는 中國人들과 대한민국의 주류 사학은 같은 마음이라는 것이다. 지금의 중국이야 文殊人인 乾隆帝가 쓴 역사서가 반가울리가 없겟지만 도데체 우리는 무슨 이유로 中華人民共和國의 시각대로 滿洲源流考를 바라 보는지 알 수가 없다.
더욱이 중국 漢族에 의해 씌여진 역사를 그대로 직역하여 기술되고, 고려의 사대주의자들과 자신들이 중국인이라고 착각한 조선의 사대부들에 의해 씌여진 우리 역사.
이렇게 자신들이 중국인이라는 착각속에서 역사를 바라보다 보니 정작 자신들의 뿌리 민족인 흉노와 선비 말갈을 오랑캐로 설정하고 역사를 구성하다 보니 우리 고대사는 그 뿌리 부터 뭔가 모를 오류로 점철되는 것이다.
고구려는 그 시작 부터가 흉노이며, 신라 또한 흉노로 부터 역사가 시작되었고, 백제는 북부여의 물길(말갈) 그 자체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들을 이방인이며 우리(?)의 피지배자들이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물길(말갈)과 선비의 거란등을 피지배 계층으로 설정하고 우리는 지배 계층이었다는 거짓 역사로 민족 분열을 스스로 자행하는 우리는, 우리 역사에서 지배 계층이 누구이며, 피지배 계층은 누구란 말인가?
우리 찌질한 반도의 역사가 아닌 우리 민족의 대륙 역사인 청나라 6대 황제인 乾隆帝에 의해 씌여진 <欽定滿洲源流考>는 단군 조선과 북부여 그리고 발해와 금 청의 역사가 왜 우리 역사인지를 분명하게 명시하고 있는데 지금 부터 그 내용을 들여다 보자.
乾隆帝는 청나라가 그의 할아버지 康熙帝때 부터 주변의 골치거리들을 해결하고 太平聖代를 누리면서 나라가 안정되자 그는 그의 뿌리 찿기 사업인 그들의 역사를 찿아 나선다.
즉위 당시의 건륭제와 그의 친필 그리하여 乾隆帝는 건륭42년(서기 1777년) 명을 내려 만주의 연혁, 근원 및 지명 등에 대하여 상세히 조사하여 책으로 만들도록 하였다.
乾隆帝의 명을 받은 대학사 아계(阿桂)와 군기대신 우민중(于敏中) 등 43명의 학자들이 이 책의 편찬에 참가하였다.
약 1년간의 작업을 거쳐 건륭 43년(서기 1778년) 《欽定滿洲源流考》라는 제목으로 총 20권의 책이 완성되었다.
이 책의 제목에는 "황제가 직접 썼다"는 뜻을 가진 欽定이란 글자가 들어가 있는데, 그 이유는 책의 제작을 처음 지시한 것도 황제였고 학자들이 초고를 하나씩 완성할 때마다 항상 황제에게 미리 올려 읽어보고 수정하게 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부족(部族) : 권1부터 권7까지로, 숙신, 부여, 읍루, 삼한, 물길, 백제, 신라, 말갈, 발해, 완안, 건주 등 여러 부와 이웃에 있던 색륜, 비야객 등의 흥망성쇠에 대하여 기록하였다.
강역(疆域) : 권8부터 권13까지로, 숙신 부터 원에 이르기까지 여러 부족의 도시와 촌락에 대하여 역사서에 기록된 사료를 바탕으로 고증하였다. 즉, <흠정만주원류고>는 청나라 통사인 것이다.
건륭제는 어떤 민족관과 어떤 역사 패러다임을 가진 군주였는지 알아 보자. 다이칭구룬/淸의 지배를 받던 漢族들은 끝임 없이 청으로 부터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민족 의식을 고취 시키는등 明나라 부흥 운동을 위해 반청 운동을 전개 했다. 그러자 다이칭 구룬/청의 6대 황제인 乾隆帝는 “그렇다. 우리는 소위 너희가 말하는 東夷 사람이다.
그런데 너희들이 숭상해 마지 않는 순임금과 주무왕도 모두 夷族이다.
이것은 나의 말이 아니고 너희가 존경하는 孟子가 직접 ‘순임금은 東夷사람이요, 周武王도 西夷사람이다”라고 했다.
이어 건륭황제는 “즉 東夷,·西夷는 단지 東西 지역을 가르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너희 明나라 출신들은 周나라의 後裔를 자처하니 西夷 사람이고, 우리 청나라 사람들은 東夷 사람이다.
동이사람 舜임금의 후예인 우리가 西夷의 후예인 너희를 지배하는 것이 무슨 대수일 것인가”라고 말했다. 건륭황제 유지의 근거로는 맹자가 <이루장구 하>에서 말하기를 (舜生於諸風 移於負荷 卒於鳴條 諸風負荷鳴條 東夷之地 舜東夷之人也)” “순임금은 제풍에서 태어나고 부하로 이사하시고 명조에서 죽으셨는데, 제풍·부하·명조가 동이족의 땅이니 그는 동이사람이다."라고 했으며, 또한 맹자가 (文王生於岐周 卒於畢郢 西夷之也)” “주나라 문왕은 기주에서 태어나 필영에서 죽었는데, 그는 서이사람이었다." 라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건륭제의 명쾌한 이 말은 文殊族과 漢族의 분명한 민족적 구분을 설정하는 것이고 東夷와 西夷란 同族을 東西로 구분하여 부르는 같은 민족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周武王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漢族을 자신들이 지배하는 것이 부당한 이유가 무엇인가?라는 반문이다.
필자는 乾隆帝야 말로 중국의 역사 공정을 정면으로 반박할 수 있는 근거를 모두 제공하는 우리 역사속의 唯一無二한 훌륭한 군주 였다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欽定滿洲源流考>의 決定的 失手는 만주의 범위를 잘못 설정한 것이다. 文殊와 滿洲 고대에 쓰여진 사서들은 난해 하다. 이런 관계로 한문학 하시는 한학자들, 한의원들과 같이 漢文에 박식한 분들이 역사 기록들을 번역을 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역사를 잘 모르는 이들은 역사적 사실은 도외시 한채 문장을 직역하여 해석하고 번역함으로서 많은 오류를 범하는 역사서가 창조 되었던 것이다. 같은 글자라도 그 글자가 쓰여지는 시기에 따라서 전혀 다른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 漢字다. 또 전혀 다른 글자라도 같은 지역명, 같은 종족을 뜻하는 것이 중국 사서들이다. 예를 들자면, 肅愼, 夫餘, 勿吉, 靺鞨, 邑樓 女眞이라는 용어는 모두 만주(文殊)족을 시대에 따라 달리 불러 온 것이 그 단적인 예다. 우리가 지금의 만주 지역을 滿洲라고는 하지만 만주족을 滿洲族으로 表記(표기)하면 안된다. "文殊"가 맞는 것이며 문수를 그대로 읽으면 문수겠지만 文殊라는 한자를 만주 사람 사람들은 "만쥬"로 읽기 때문에 우리 역시 만주로 읽어도 문제가 없지만 우리가 민쥬인들을 지칭하면서 "滿洲人"이라고 표기 하는 것은 정말 잘못된 일이다. 카라키탄을 奚丹 또는 契丹이라고 표기 하지만 중국식 표기인 遼라 하는 것과 아이신구룬이라는 여진인 사람들이 스스로 부르던 이름 대신 金나라라 부르는 것은 이들의 민족 정체성을 중국화 시켜 버리는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 이들을 중국 역사로 밀어 넣는 결과를 초래 하는 것이다. 더불어 지금의 만주 벌판을 "滿洲"라고 표기 하는 것은 상관 없겠지만 그 땅에 살던 종족을 "滿洲人"이라고 표기해서는 안될 일이다. 한중일 삼국의 역사를 비교해 보면 중화인민공화국의 역사 연구는 거의 백지에 가깝다는 것을 알앗다. 그도 그럴것이 한국과 일본이 알아서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역사를 스스로 축소 시켜 주는데 궂이 자신들이 알아서 역사의 본 모습을 가릴 필요가 있겠는가? 中原에서 일어난 역사는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이 가장 잘 알것 같지만 정작 중화인민공화국 역사가들에 의한 중원 역사 연구는 백지에 가갑다. 아마도 이것은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漢族의 시각으로는 中原에서 명멸해간 고대 국가들이 자신들의 나라 역사일수는 있겠지만 漢族의 역사일수는 없기 때문일 것이다. 오히려 한국이나 일본 역사 학자들에 의해 역사 연구는 활발하게 진행 되지만 그 프레임은 반도 사관이다.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본다. 역사의 눈 높이가 한반도인 우리는 역사의 지평을 한반도에서 벗어 날 수가 없다. 특히 우리 고대사는 한반도와는 거의 관계가 없다. 그러함에도 우리는 고대사를 모두 한반도로 축약 시켜 바라 본다. 그러니 이상할 수 밖에..., 20여년을 역사에 매달려 오면서 지금 까지 풀지 못한 초기 고구리의 본류가 甘肅省이엇으며 평양성의 위치를 100% 설명하는데 부족함이 있어 왔다. 분명히 고구리 초기 역사는 지금의 둔황을 중심으로 하는 감숙성으로 보이는데 명확한 기록이 보이지 않았다. 소위 심증은 있는데 물증이 없었다. 그런데 <신당서>에 나타나는 滿洲(만주)라는 이름으로 모든 수수께끼가 풀렸다.
滿洲란 어디를 말하는 것이며 그 이름의 유래는 무엇인가? 만주란 여진의 후예인 만주인들이 청나라를 건국하고 스스로 자신들을 文殊(문수)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을 淸나라로 부터 독립한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에 의해 만주라는 이름으로 개명을 하게 되는이름인 것이다. 文殊는 지금의 랴오허 동서쪽 즉 발해 지역만을 지칭 햇었으나
현재의 滿州 지금은 북쪽 흑룡강을 비롯한 북만주 모두를 지칭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즉 滿洲라는 이름으로의 역사는 불과 100년도 안된다. 우리 재야 사학은 바로 100년도 안된 滿洲라는 이름과 遼史에 등장하는 遼河하는 이름에 의하여 우리 고대사에 등장하는 모든 역사가 지금의 랴오허 유역으로 비정하여 역사를 구성하고 있다. 그러나 만주의 본래 이름은 滿殊(만수), 曼殊(만수), 文殊(문수)이다. 청나라를 건국한 만주인들은 자신들의 역사상 처음으로 자신이 만든 이릉릉 사용하게 되는데 그 이름이 滿殊(만수), 曼殊(만수), 文殊(문수)인 것이다. 이것을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이 滿洲로 바꾸면서 역사 전체가 뒤틀려 버리는 계기가 된다. 즉 이름 하나를 고치면서 동북아 고대사가 통채로 바뀌는 결과를 초래 하는 것이다. 바로 이 부분이 乾隆帝가 놓친 것이다. 그런데 역사에 등장하는滿州라는 이름은 전혀 엉뚱한데서 나타난다. <新唐書>가 밝히는 古代 滿洲의 範圍 文殊人을 滿洲人으로 부르는 것은 肅愼으로 내려 오는 文殊의 역사를 모르고 하는 말이다. 滿洲라는 말은 불과 1백년 정도 밖에 안되는 역사만을 가지고 있다. 즉, 肅愼->勿吉->靺鞨->女眞->文殊이지 滿洲가 아닌 것이다. 숙신 물길 말갈 여진이라는 용어는 여진인들 스스로 사용한 말이 아니라 역사를 기록한 다른 종족에 의해 불리워진 이름이다. 이랫던 이름이 그들 스스로 부르는 이름이 文殊인 것이다. 그런데 이 文殊가 다시 漢族들에 의해 滿洲라 불리는 것이다. 文殊人들이 살고 있던 地域이 滿洲라는 것이다.
고구리의 시작점은 戎狄이며 흉노의 중심인 오도로스 平原과 甘肅省의 둔황이 분명하다. 오도로스의 평원과 둔황 그리고 토곡혼의 흉노족은 三皇五帝 시대에서 부터 中原과 陝西省 山西省 河北과 河南으로 이어지는 벨트를 따라 끊임 없이 이동을 시도했음을 볼 수 있다. 이들 흉노는 동호와 선비등의 이름으로 불리우지만 胡虜, 索虜, 戎虜라는 "虜"라는 이름으로 불리운다. 고구리는 20여가지 이상의 이름으로 불리 운다. 그 이름들 가운데 遼東國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우기도 하며 平壤城의 또 다른 이름이 遼東城이다. 즉 고구리와 요동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요동은 그 시기에 따라 조금씩 그 범위가 달라지기는 하지만 지금의 하북성과 산서성의 대부분이 요동이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하지만 요동은 범위가 넓을 때는 지금의 하남성과 산동성 그리고 江蘇省 까지도 요동으로 부리웟던 적이 있다. 우리 고조선을 이루고 잇던 漢四郡이라는 地名 역시 모두 옛 요동에 존재하는 것이다. 요동의 위치는 http://blog.daum.net/omye-mail/748를 참조 그렇다면 일제와 우리 국사는 어떤 이유로 古朝鮮과 고구리의 위치가 지금의 滿洲에 있엇다는 역사를 고집 하는가? 滿洲라는 이름은 불과 1백년 정도의 역사만을 가지고 있다. 청나라가 자신들을 文殊라는 이름으로 스스로 부르는 것은 청나라가 건국된 이후이다. 문수를 중국인들이 읽으면 만주다. 이것을 자신들에게 맞게 滿洲라 고친 것이다. "老哈河"유역인 하늘색 지역을 말하는 것이 였다. 노하하 유역을 "兀良哈"(올량하)라고 했다. 그런데 <明史>에서 놀라운 이야기를 전한다.
춘추때에는 산융,진나라 때에는 요서 북쪽(진때의 요서는 산서성 일대를 말함), 당나라 때에는 토욕혼, 송나라 때에는 거란, 원조때에는 대저로 북쪽이라는 것이다. 산융의 이동 경로 즉 올량하의 본래 모습은 吐谷渾(토곡혼)으로 부터 시작해서 燕나라의 영토를 포함하는 곳을 말하는 것인데 이것이 지금의 만주의 이름으로 축소 되면서 지금의 만주가 올량하의 모든 것인양 해석 되면서 우리 국사가 비정하는 옹색한 고구리가 탄생 되었던 것이다. 또 하나는 요동의 위치가 지금의 요동 반도로 이동하는 것 역시 만주가 지금의 올량하 만으로 해석한 결과로의 遼東이 탄생 되는 것이다. 만약 乾隆帝가 이와 같은 滿洲의 범위를 알았고 三韓이라는 범위가 戎狄과 鮮卑 그리고 肅愼이라는 것을 정확하게 알았더라면 고구리를 滿洲源流考에서 제외 하는 愚를 범하지는 않앗을 것이다. 이제 肅愼을 알아 보자 肅愼을 중국인들의 발음으로는 "조선"임을 알아야 한다. 肅愼 滿洲源流考에 첫번째로 등장하는 "肅愼의 문헌상의 기록"을 살펴보자.
肅愼(숙신)을 중국 사람이 읽으면 "chosun"으로 발음한다.
즉 숙신이란 조선을 漢字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중국식 표기로 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청나라 고증학자 호위(胡渭)는 우공추지(禹貢錐指)에서 “산동반도는 요(堯) 임금 때부터 조선의 땅”이라고 썼다. <사기>에 “요(堯)임금은 의중을 시켜 우이(<5D4E>夷:또는 욱이[郁夷])의 땅, 즉 해 뜨는 곳(양곡·暘谷)에서 일출을 경건히 맞게 하였다(卷1 五帝本紀 堯)”고 하는데 주석에 “우이(<5D4E>夷)의 땅은 청주(靑州)”라고 했다.
청주는 현재의 산동반도다.
이 기록은 서경(書經) 요전(堯典)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 우이는 누구인가. 우공추지에 “동이 9족은 우이이고, 우이는 조선의 땅 (四庫全書 經部 禹貢錐指 4卷)”이라고 했다.
여기서 東夷 九族은 환단고기에서도 설명되고 있는 내용으로 단군조선은 9개의 부족 또는 종족으로 구성되어있었다고 하는 것을 뒷바침해주는 내용이다.
나아가 사기에서 “양곡은 바로 해 뜨는 곳(日所出處名曰陽明之谷)”이라고 한다.
양곡을 매개로 산둥반도=양곡=조선의 관계가 성립하는 것이다.
즉 산동반도를 기준으로 볼 때 서쪽에 살던 한족들의 눈에는 산동반도는 동쪽이었으며 산동반도는 해가 뜨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일단 이 기록이 고조선과 관련된 가장 오래된 시기, BC 2400년경의 기록이다.
숙신은 물길(勿吉)·말갈(靺鞨) 등으로 불리다 후일 여진족,·만주족이 되었으며 단군 조선과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다. 고대 동북아시아 민족은 匈奴와 漢族으로 구분 할 수 있다. 東胡는 동쪽 흉노를 뜻하는 말이며 東胡의 3대 부족은 夫餘와 鮮卑 그리고 靺鞨이다. 단군 조선이란 흉노라는 이름이 나타나기 전의 북방 민족 모두를 지칭하는 말인 것이다.
결국 숙신은 단군조선을 중국 한족에 의해 숙신이라는 또 다른 이름 으로 불려 졌음을 알 수 있는 것이며 숙신의 적통 민족은 말갈이며 말갈의 대조영에 의해 발해로 이어 지며 여진으로 불리우다 청나라 때에 이르러 문수보살의 사상에 입각하여 文殊人으로 불리는 것이다. 고구리가 흉노라는 증거
이제 고구려가 왜 흉노 국가인지 알아 보자. 첫째 : <新唐書 新羅傳>에 등장하는 戎의 정체 其先附庸於<百濟>, 後因<百濟>征<高麗>, <高麗>人不堪戎役, 相率歸之, 遂致强盛, 因襲<百濟>附庸於<迦羅國>. 먼저 "백제"에 의지하다가 후에 "백제"가 "고려"를 정벌하자 "고려"인들이 그 싸움에서 이기지 못하고, 戎로가 돌아갔는데, 후에 강성해저서 백제를 습격하자 "가라국"에 의지하였다. 백제가 고려를 공격한 것을 "정벌"이라 표현 한다. 정벌이란 단순한 공격이 아니라 월등한 국력을 앞세워 공격하는 나라를 완전히 점령하기 위한 전쟁을 의미 하는 것이다. 이때의 백제왕은 近肖古王이다. 왜냐하면 백제가 고구리를 정벌하던 때는 近肖古王때 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것은 그 싸움에서 고구리가 백제를 이기지 못하고 돌아간 곳이 "戎(융)"이라는 것이다. "戎"이란 우리가 소위 말하는 중국을 오랑캐로 지칭하며 뙤놈이라 표현하는 "되"를 말하는 것으로서 이 말은 漢族들이 가장 무서워 햇던 융족을 말하며 융족은 지금의 둔황을 중심으로 하는 흉노의 본고장에서 활동하는 전통적 흉노 부족을 말하는 것이다. 감숙성의 위치 융족이 감숙성 돈황을 근거로 하는 부족 또는 종족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며 한중일 역사학계의 공통적 정설이다. 그러나 북방 종족의 나라인 당나라는 戎狄이라 하지 않고 戎이라는 단어만 사용하는 것을 볼 수 잇다. 당나라가 어떤 史觀으로 역사를 기술하엿는지 엿 볼수 잇는 대목이다. 그런데 고구리가 백제의 공격을 받고 "戎으로 돌아갔다"라는 표현을 한다. 고구리는 영락제 이전에는 북방의 그져 그렇고 그런, 여기 저기 옮겨 다니면서 다른 나라의 공격을 받으면 숙신의 경계에 까지 도주 햇다가 돌아 오던 나라 엿다. 이때도 고구리는 백제의 공격을 받고 고국원왕이 전사하면서 고구리의 고향 땅인 감숙성꺼지 돌아 가야만 하는 역사를 이어가던 나라였다. 고향땅인 감숙성에서 힘을 길러 다시 고구리는 원래의 위치로 돌아 왔다고 한다. 고구리가 백제의 공격으로 부터 감숙성으로 돌아간 후 강성해져서 돌아 온다는 시기는 영락제 때인 것 같다. 영락제가 어디서 부터 출발햇는지 알수 있는 대목이며 고구리의 본 고향이 어디인지 알 수 잇는 대목이며 고구리의 서쪽 경게인 토욕혼은 둔황으로 부터 수백리에 불과한 거리에 존재 한다. 그런데 우리 국사를 비롯한 모든 번역문들은 "戎"이라는 명백한 기록을 "서쪽"으로 번역을 한다. 둘 째 : <후한서>의 약수의 위치로 보는 고구리 <夫餘國>, 在<玄 >北千里. '부여국'은 '현도' 북쪽 천 리에 있다. 南與<高句驪>, 東與< 婁>, 西與<鮮卑>接, 남쪽은 '고구려' 동쪽은 '읍루' 서쪽은 '선비'와 접해 있다. 北有<弱水>. 地方二千里, 本<濊>地也. 북쪽에는 '약수'가 있는데, 지방이 이천 리로서 본래 '예'땅이다. 약수의 위치 소위 말하는 현도라는 것은 주장하는 사람마다 다르다. 위 지도의 약수의 위치는 중국에서 작상한 지도다. 중국에서 작성햇다 하여 모두 다 역사의 진실은 아니지만 약수에 관한 우리 측 자료는 찿아 보기 어렵다. 그러나 중국 백과 사전을 찿아 보면 "약수는 古代 감숙성 북쪽에 흐르는 河"라고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즉 몽골 지역에서 지금의 청해성 방향으로 흐르는 하천으로서 사막과 초원을 흐르는데 그 깊이가 아주 얕아서 弱水라는 이름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셋 째 : 고구리 동천왕은 單于 <삼국지>에는 “정시(240~248) 때 魏나라가 고구려를 침공하자 고구려왕 궁(동천왕)은 매구루(買溝婁)로 달아났고, 관구검은 현도태수 왕기를 파견해 추격하게 했는데 옥저를 1000여 리 지나 숙신씨의 남쪽 경계에까지 이르렀다(<6BCC>丘儉傳)” 고 나온다.
이 문구대로라면 이때의 고구려는 우리가 익히 배워 온 만주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숙신의 남서쪽에 있었고 그 당시 고구려는 단군 조선의 테두리에 속해 있지 않앗으며, 옥저를 지나 1000여리를 더가면 숙신의 남쪽 즉, 고조선의 남쪽에 다다른다는 것이다.
즉 고구려의 위치는 고조선의 남쪽 국경에서 옥저를 지나 1천여라를 더 가야 한다는 것은 고구려는 감숙성에서 발원하였다는 "高句麗 甘肅省 發源"이 맞는 것이며 이러한 이유로 근본이 숙신과 다른 고구려를 청나라 건륭제는 그들의 뿌리로 만주원류고에서 고구려를 기술하지 않은 이유인 것 같다.
흑수 물길의 후예인 건륭제가 고구려를 그들의 정통 국가 계보에 올리지 않은 것은 이러한 역사적 배경이 뒷받침 하는 것이다.
만주 고구려만을 배워 온 기존의 역사 지식으로는 언듯 이해 하지 못할 수 있지만 고구려의 태왕들의 무덤은 만주나 한반도 어디에도 존재 하지 않으며 고구려의 벽화나 기타 유물들은 거의 감숙성의 둔황에서 발견되는 것은 고구려의 중심은 만주가 아니라 감숙성과 섬서성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고구리의 서쪽 경계 엿다는 "營州"를 통해서 滿洲와 고구리의 위치를 알아 보자. 營州의 위치 乃移師征兀良哈洪武二十二年, 元族屬故遼王阿裏失禮等內附, 因置三衛以授之, 위 기록을 살펴 보면 명나라 주원장 즉, 홍무 22년에 군사를 풀어 울량합을 정벌햇는데 타안(朵顏) · 태녕(泰寧) · 복여(福余)등의 이름들을 합하여 "울량합"이라고 부르며 이곳에 최초에 살던 족속은 옛 요나라 왕 아율보기가 다스리다 잃은 역참 즉 역마을이며 울랼합은 옛 영주의 북쪽 경계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들 타안(朵顏) · 태녕(泰寧) · 복여(福余)의 이름은 滿洲지역에 나타나는 地名들이지만 그 곳은 원래 현재의 청해성(靑海省)의 토곡혼(吐谷渾)의 지명이라는 것이며 토곡혼은 전형적이 흉노의 근거지이며 초기 고구리가 있던 甘肅省이다. 참고로 올량합이라 거란의 초대 황제인 아율보기가 다스리다가 잃어 버린 역참마을이라는 것이다.
營州의 위치를 추적해 보자. 唐의 邊塞 詩人이라 호칭하던 高適의 詩 한 편을 보면
營 州 少 年 愛 原 野 皮 裘 蒙 茸 獵 城 下 虜 酒 千 鍾 不 醉 人 胡 兒 十 歲 能 騎 馬 영주의 소년들은 벌판을 좋아하여, 얼기 설기 꿰맨 생 가죽 옷을 입 고, 성 아래 풀 숲에서 사냥을 하네. 오랑캐는 술 천 잔에도 취하지 않고, 오랑캐 아이 열 살이면 말 타는 것이 능숙 하네. 이 詩를 보면 또 다른 영주가 존재하는지는 모르지만 營州는 전형적인 유목민 또는 수렵민의 땅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여기서 오환과 선비의 위치 그리고 영주의 동쪽이 遼河라고 하지만 그 위치에 대해서는 역사가들 마다 의견들이 부분하다. 그러나 營州(영주)의 북쪽 경계에 위치하는 곳은 湟水이라 했는데 황수란 황하의 상류를 지칭하는 말이며 黃河의 上流가 湟水라는 것은 누구도 부정을 할 수가 없는 강 이름이다. 황수의 위치/湟水는 황하의 상류를 말하는 것으로 청해성에서 발원하여 황하로 흘러드는 강으로서 황하 상류의 옛 명칭이다. 필자는 황하의 이름이 그 지역과 위치에 따라서 여러 이름으로 나뉘어 불렷다는 것을 수 없이 주장해 왔다. 河와 遼河 그리고 湟水가 어디 까지 였느냐를 정확하게 지목할 수는 없지만 4600km가 넘는 황하는 下流를 "河"라 했고 中流 지역을 "遼河"라 했으며 上流 지역을 "湟水"라 했던 것이다. 또한 "河"가 황하의 下流를 표현하는 고유한 글자라면 "湟" 역시 토욕혼 또는 청해에서 발원하여 황하로 흘러 드는 하천의 고유한 이름인 것이다. 고구리와 당나라가 존재 하던 시기에는 영주가 있던 이 지역을 吐谷渾이라 햇으며 이 지역이 吐谷渾 또는 靑海라는 사실 역시 누구도 부인을 할수가 없는 지명이다. <新唐書> 권043의 기록을 보자
營州西北百里曰松陘嶺, 其西奚, 其東契丹.. 營州에서 서북쪽 100리에는 松陘嶺이 있고, 그 서쪽에는 奚가 위치하며, 그 동쪽에는 契丹이 있다. 영주(營州)에서 동쪽으로 180리를 가면 연군성(燕郡城)에 다다른다. 안동도후부(安東都護府)에 이르기 까지 500리이며
동남쪽으로 平壤城에 이르기까지 800리 이며 옛 安平縣이다. 그런데 안동도호부에 이르기 까지는 搖水를 건너 500리란다. 결국 영주에서 평양성의 거리는 서울에서 부산 가는 거리의 절반 정도이며 실제 이 당시의 거리로는 그것도 안된다는 말이다. 이것으로도 평양성의 위치가 지금의 랴오허 어디 쯤이라는 말은 성립 될수 없는 것이다. <舊唐書>에 등장하는 안동 도호부(평양성)에 대한 기록을 보자. 安東이란 말 그대로 唐나라 수도 였던 長安의 동쪽이라는 말이다. 安東都䕶府 總章元年九月, 司空李勣平高麗. 高麗本五部, 一百七十六城, 戸六十九萬七千. 其年十二月, 分高麗地為九都督府, 四十二州, 一百縣, 置安東都護府 於平壤城 以統之. 用其酋渠為都督 刺史 縣令, 令將軍薛仁貴以兵二萬鎮安東府. 上元三年二月, 移安東府於遼東郡故城置. 儀鳯二年, 又移置於新城. 聖歴元年六月, 改為安東都督府. 神龍元年, 復為安東都護府. 開元二年, 移安東都護於平州置. 天寶二年, 移於遼西故郡城置. 至徳後廢, 初置領羈縻州十四, 戸一千五百八十二, 去京師四千六百二十五里, 至東都三千八百二十里. 新城州都督府 遼城州都督府 哥勿州都督府 建安州都督府 南蘇州 木底州 蓋牟州 代那州 倉巖州 磨米州 積利州 黎山州 延津州 安市州 凡此十四州, 並無城池. 是高麗降戸散此諸軍鎮, 以其酋渠為都督 刺史羈縻之. 天寶, 領戸五千七百一十八, 口一萬八千一百五十六. 안동도호부(安東都䕶府). 총장(總章) 원년 9월에 사공(司空)인 리적(李勣)이 고려를 평정하였다. 고려는 본디 5부 176성 69,7000호였다. 그 해 12월에 고려 땅을 나눠, 9 도독부(都督府) 42 주(州) 100현(縣)으로 하고 안동도호부(安東都䕶府)를 평양성(平壤城)에 두어 그것을 다스리게 하였다. 그들의 추거(酋渠)로 도독(都督)과 자사(刺史)와 현령(縣令)으로 하고 령장군(令將軍)인 설인귀(薛仁貴)가 병사 2,0000으로 안동도호부에 진치게 하였다. 상원(上元) 3년 2월에 안동도호부를 료동군(遼東郡) 옛 성으로 옮겨 다스렸다. 의봉(儀鳯) 2년에 또 신성(新城)으로 옮겨 다스렸다. 성력(聖歴) 원년 6월에 안동도독부(安東都督府)로 바꾸었다. 신룡(神龍) 원년에 다시 되돌려 안동도호부(安東都䕶府)로 하였다. 개원(開元) 2년에 안동도호부를 평주(平州)에 옮겨 다스리게 하였다. 천보(天寶) 2년에 료서(遼西)의 옛 군에 있던 성으로 옮겨 다스리게 하였다. 지덕(至徳) 후에 폐하였다가 처음으로 기미주(羈縻州) 14개를 두어 다스렸는데 가구수는 1582이며 경사(京師)에서 4625리를 가며 동도(東都)까지는 3820리이다. 당은 고구리를 멸망 시키고 고구리 영토를 9개의 도독으로 나눈다 그러나 新城州都督府, 遼城州都督府, 哥勿州都督府, 建安州都督府 이외의 도독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아마도 나머지 도독이 누락된 것은 나머지 5개의 도독은 오도로스 평원 서쪽에 존재 햇던 것으로 추정되며 42개의 州 역시 남소주(南蘇州) 목저주(木底州) 개모주(蓋牟州) 대나주(代那州) 창암주(倉巖州) 마미주(磨米州) 적리주(積利州) 려산주(黎山州) 연진주(延津州) 안시주(安市州) 대강 이는 14개 주 뿐이고, 아울러 城池가 없다. 이것은 고구리의 영토가 당으로서는 모두 흡수 할 수 없을 만큼 넓었음을 의미 하는 것이다. 이때 고구려의 항복한 사람들은 흩어져 이런 여러 軍鎮로 갔고 그들의 酋渠로 都督과 刺史로 삼아 그들을 다스리게 하였다. 天寶 년간에 다스리는 가구수는 5,718이고 인구수는 18,156명이다. 라고 기록 되어 있다. 안동 도호부는 고구리와 백제의 유민들의 반란으로 계속 남쪽으로 이동 했음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런데 그 말도 많고 탈도 많은 遼河가 營州로 부터 동쪽으로 300리 정도에 있다는 것이며 그 요하로 부터 500여리를 더 가면 평양성이 있다는 것이다. 현재의 기준 대로 300리라면 서울에서 천안 정도이며 800여리 라면 서울에서 대구 정도의 거리이다. 이 당시의 거리 개념이 지금의 거리 척도의 60%라고 하는 것을 믿는다면 서울에서 평택 정도의 거리이며 지금의 랴오허가 평양성이라면 이 <신당서>의 기록은 모두 허구다. 아래 지도를 보자 그런데 이곳이 옛 지명으로는 滿洲라 햇던 것이다.
<新唐書>의 기록 역시 영주(營州)의 북쪽에는 황수(湟水)가 있다고 했다.
그 황수(湟水)는 현 청해성(靑海省)의 동북부에 흐르는 유역 지대를 가리키는 곳인데.. 토곡혼(吐谷渾)이라고 불렀던 옛 만주(滿州) 남쪽 경계에는 영주(營州)가 위치하고 있다.
장령부(長嶺府)는 부여(夫餘)의 옛 지역이라고 했고, 본시 부여부(夫餘府)이기도 하는데, 그 부여(夫餘)는 변음하면서 토곡혼(吐谷渾)의 복여(福余)로 바뀌게 되는 지명이다..
※ 吐谷渾은 현 靑海省 東部에서 현 甘肅省 西南部와 현 寧夏省 中部까지 이르는 지역으로 이후로는 명나라(明)의 올량합(兀良哈) 지역에 속하여 이 모든 지역을 통합하여 滿洲라 했던 것이다. 지금의 滿洲는 청나라 때에 文殊로 불리던 것을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이 슬쩍 滿州로 바꿔 버린 것이다. 滿洲와 文(滿)殊는 전혀 틀린 말이다. 다만 "文殊(문수)를 만주인들이 읽으면 "만쥬"로 발음 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지금의 하북 하남의 북부, 섬서성, 산서성, 감숙성과 토욕혼으로 이어지는 고구리의 영토가 반도사관에 의해서는 지금의 압록강 변으로, 재야 사학에 의해서는 지금의 랴오허로 비정 되는 것이다. 이름 하나 옮겼을 뿐인데 우리 고대사가 통채로 지금의 만주로 이동해 버린 것이다.
結論 결국 乾隆帝는 고구리가 흉노의 국가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말이며 滿洲의 범위를 지금의 滿洲로 이해 했기 때문이며 삼한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지 못햇기 때문에 편협한 민조관을 갖게 된 것이며 이와 같은 種族 區分법에 의해 <欽定滿洲源流考>에 고구리가 누락된 것이다. |
첫댓글 이 글은 정통 사학계서 인정한 글은 아니지만, 심독해볼만한 가치를 지닌 글이다.
우리와 같은 동이족인 청나라 건륭제가 만든 역사서를 인용한 논문으로, 한문이 많아 어렵고 복잡하지만
적어도 반드시 일독해볼 가치는 있다.
滿洲源流考
1. 개요[편집]
만주족의 원류를 고찰한 책. 혹은 원조 동북공정 만주족의 청 제국 황제 건륭제의 명으로 편찬되었다. 만주원류고 혹은 흠정만주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 만주사이 다 서키옌히 킴친 비트허)라고 한다. 흠정(欽定)은 황제의 판단, 또는 판단한 것을 가리키는데 흔히 책의 명칭에 붙이곤 했다. 즉 '흠정'이란 단어가 제목에 들어간 책은 황제가 내용에 직접 관여하여 편찬한 것이다.
2. 상세[편집]
만주의 여러 부족 및 풍속·지리에 대해 다루고 있다. 이 책에선 만주의 원류로 읍루, 물길, 완안 같은 숙신계 종족들은 물론 친척뻘인 옥저, 부여, 발해도 다루고 있고, 심지어 백제, 신라를 포함한 삼한까지 만주의 원류 중 하나로 고찰하고 있다. 대강 구성에 대해 설명하자면 여지껏 작성된 사료들을 모조리 모아놓고, 청 제국의 사고전서 학자들이 이를 통해 자신들의 견해를 밝히는 형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