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입찰이 끝나고 창가에 앉아 앞묵호 산동네 눈이 내리는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아름답군요! 진정으로! 괜히 마음이 설랩니다. 어딘가로 기차를 타고 달려가고 싶습니다.
아침 잡어 입찰에서 도루묵 가격이 급등했습니다. 아마, 눈이 와서 배가 많이 안나간 탓도 있고, 내일 매월 첫째주 일요일은 쉬는 날이라 그런 모양입니다.
입찰에 잠깐 참가를 하고 눈 내리는 항구를 사진에 담기도 하고 생선장수 아줌마들의 환한 모습도 찍었습니다.
눈이 내리면 누구라도 설래나 봅니다. 아줌마들도 한층 상기된 얼굴로 나를 맞이 하는 겁니다.
우리의 삶은 이토록 지겹고 힘들고 살벌하지만, 어느 한 구석에 우리의 낭만이 살아있는 겁니다.
그것이 눈으로 대신하는가 봅니다. 인간은 이기적 동물이라지만, 한쪽 마음에는 의리와 정이 살아 있기 마련인 겁니다.
나도 살벌한 장삿꾼이지만, 늘 가슴에 설래임과 정을 담아둘려고 애를 씁니다.
그래서, 같은 장삿꾼들에게도 가능한 후하게 해주려고 하는 편입니다. 물론, 그들에게 후하게 해주면 아무래도 소비자 쪽에서 손해를 보는 수도 있는 법이죠.
그러나, 그 후한 마음 속에 내 상거래는 더욱 원활해지는 겁니다. 그것이 서로에게 믿음과 마음을 주게 되는 거죠
우리는, 이런 시장 속에서 삶을 살아가는 겁니다.
시장의 기능이란, 오로지 이익만을 쟁취하는 곳은 아닙니다.
시장이란, 삶을 살아가는 터전이어야 합니다. 이런 시장의 순기능을, 자본주의는 오로지 이익만을 추구하는 곳으로 만들어버렸죠.
그래서, 현대의 시장은 상품의 정보 또한 왜곡되기 마련인겁니다.
그래도, 이 어시장에도 눈은 내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잠시나마 살벌함을 잊어버리고 환하게 웃고 있습니다.
저도 역시 그들 속에서 그렇게 하고 있을 뿐입니다.
눈 내린 다음 날입니다.
하루 종일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가슴 밑바닥부터 진한 아픔이 몰려오는 겁니다.
아버지 때문이었습니다. 애증의 당신께서 자칫하면 생을 마감하신다는 겁니다. 아내로부터의 연락을 받고 그 순간부터 허공을 집고 다니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런데, 문득 한장의 사진이 떠올려지는 겁니다. 그 사진!
어머니에게는 비수가 되었던 그 사진!
나는 그 사진을 떠올리고 겨우 가슴 한쪽이 환해지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아버지를 편하게 보낼 수도 있다는 자신감이 들었습니다.
그 한장의 사진!
50년도 넘게 지났습니다.
그 사진 속에는, 키가 훤칠하게 크고 잘 생긴 30대 남자가 생머리를 길게 기른 미인과 함께 있었습니다. 남자의 팔은 그녀의 어께에 걸쳐져 있었고, 두 사람은 삼화사 대웅전 앞에서 활짝 웃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10월 유신 때 산림청에서 강제 퇴직 당하시고, 1년간 월대산 밑에서 닭을 키우다가 닭 콜레라로 망하고 나서, 교사가 되어 처음 부임한 곳이 근덕농고였습니다.
사진 속의 남녀는 아버지와 근덕농고 음악선생이었습니다.
아버지는 하숙을 했었고, 어머니와 우리 형제들은 한 달에 한번 삼척까지 기차를 타고 가서 버스를 타고 근덕에 가서 아버지를 보고 왔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 방을 청소했었고, 청소 도중 아버지가 읽으시던 책갈피에서 떨어진 사진이었습니다.
어머니는 그 사진을 본 순간, 펄썩 방바닥에 주저 앉았고, 그 충격에 뒤에 엎혀있던 막내 여동생이 질겁을 하고 울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어머니는 울고있던 막내를 한 동안 내버려두었습니다.
그 사이, 나는 떨어진 그 사진 속의 여자를 유심히 관찰하였고, 바로 그 여자가 아버지 학교에 놀러 가면 나를 데리고 과자를 사주었던, 생머리카락에서 향기로운 냄새를 풍겼던 바로 그 여자, 음악 선생이었던 겁니다.
늙고 힘없고 병든 아버지를 떠올리면서 보내는 일은 자식으로서 너무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가장 화려했던 지점을 떠올리는 순간, 당신을 보내는 순간이 힘들지 않는 겁니다.
바로, 그 사진이 나에게 그런 거 같습니다. 어머니에게는 비수 같이 가슴을 찔렀던 그 사진에 대해서, 나는 그런 엉뚱한 생각을 하고 마는 겁니다.
아마, 그래도 어머니는 이해하실 줄 믿고 있습니다.
나는, 어느 봄날 아름다운 여자와 함께 했던 아버지의 행복한 소풍을, 당신이 떠나는 선물로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 사진은 나에게도 소풍인 겁니다. 아버지를 기억하는.
그리고 애써 아버지와의 애증을 덮어버릴 수 있는.
사람은, 부모의 몸을 빌어 태어나서 온갖 일을 겪으면서 살아가다 죽음을 맞이합니다.
슬픔과 괴로움 즐거움 기쁨 노여움 ............
그러나, 그런 것들은 한낱 스쳐가는 바람에 지나지 않습니다.
돌이켜보면, 지나온 삶이란, 마치 아버지의 한장의 사진처럼 찰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소풍이라 부르는 겁니다.
그리고, 다시 죽음과 함께 깊은 심연의 우주 속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다행히 아버지는 겨우 회복을 하시고 위험한 고비를 넘겼습니다.
아버지의 소풍은 아직 끝나지 않은 모양입니다.
그리고 봄입니다.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보러 가는 날, 경포호수 가로수 벚꽃망울에서 서서히 꽃이 피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남쪽에서는 희귀한 봄 태풍이 올라 온다고 했습니다.
하늘은 묵직하게 검은 색깔이었고 가끔씩 빗방울이 떨어지곤 했습니다.
이미, 아버지는 하얗게 식어있었습니다.
가족들은 낙옆처럼 각자 널부러져 오열하고 있었습니다. 그 속에서 며칠간 괴로워하던 아버지의 얼굴은 오히려 평온했습니다.
차라리 그 모습이 좋았습니다. 아버지의 침대 귀퉁이를 잡고 이별 인사를 드렸습니다.
이제, 겨우 아버지와 화해를 한걸까요?
전, 그렇게 믿고 싶었습니다.
전날 괴로워하던 아버지의 차가운 손을 꼭 잡고 침대 옆에서 눈을 감고 가만히 서있었습니다.
그것으로 모든 것이 지나가버렸습니다. 모든 것이 녹아버렸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미운 감정도 전부 사라져버렸습니다.
다만, 아버지의 괴로운 모습이 안타까울 뿐이었습니다. 차라리, 어서 보내고 싶을 정도 였습니다.
아버지는 그렇게 저와 화해를 하고 가셨습니다. 병원 로비에서 아버지의 임종을 기다리는 동안, 아버지가 나를 만나고 편안해졌다는 아내의 이야기를 듣고, 나 역시 아버지를 보내는 마음에서 미안함이 덜해졌습니다.
아버지의 뼛가루를 무릎에 안고 오는 내내, 방금 화장한 온기가 따스했습니다.
영정의 사진은 젊은 시절 그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문득 또 다시, 아버지의 젊은 시절 근덕농고 음악 선생의 어깨를 감싸고 삼화사에서 찍었던 그 사진이 생각나는 겁니다.
그 사진은 흑백사진이었지만 옷차림으로 보아 봄날이었던 거 같습니다. 그 시절은 아버지의 봄날이었을 겁니다.
가족을 두고 시골 학교에 갓 부임한 키 크고 혈기왕성한 미남 선생은 아마 거칠것 없었을 겁니다.
거기에 빠지지 않을 여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 아버지였던 겁니다. 나는, 백봉령으로 가는 내내 그 생각만 하기로 했습니다.
아버지의 마지막 괴로웠던 모습을 지워버리고 아버지의 봄날만 생각하면서 마음은 더욱 편해졌습니다. 깜빡 잠이 들었나 봅니다.
백봉령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 옥계 시내에는 개나리와 벚꽃이 활짝 피기 시작했고, 산 중턱에는 진달래의 분홍빛이 물들기 시작했습니다.
백봉령 정상에서 잔설이 남아있는 땅을 파고 아버지를 묻었습니다. 멀리 동해바다가 보였습니다. 그렇게 아버지와 헤어졌습니다.
내려오는 길, 아버지와 상관없이 봄날은 무심하게 가고 있었습니다. 벚꽃은 더욱 활짝 피었습니다.
봄날은 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도 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