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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잇는 대화록(對話錄)〉
2025년 1월 20일
인간의 마음과 마음에 우정의 다리를 놓는 것은 흉금(胸襟)을 연 대화(對話)다. 이케다(池田) 선생님은 모든 차이를 넘어 세계의 지도자·식자와 인류의 미래에 대해 함께 이야기하며 평화의 조류를 넓혀 왔다. 신연재 「세계(世界)를 잇는(맺는) 대화록(對話錄)」은 선생님이 만남을 새긴 인물에 대해 적은 문장과 함께, 그 교류의 발자취를 소개해 간다. 제1회는 미국 전(前) 국무장관의 헨리.A.키신저 박사를 게재한다.
제1회
이케다 선생님이 엮은 미국 전 국무장관 헨리.A.키신저 박사
평화를 향한 ‘영원한 노력’을
여러 차례 이야기를 나눈 오랜 우인(友人)에서도, 잊기 어려운 것은 역시 첫 대면(對面)의 추억이다.
키신저(Henry Alfred Kissinger, 1923~2023) 박사를 워싱턴 국무부(Department of State)를 방문한 것은 1975년 1월이었다.
아침부터 눈발이 흩날리고 있었다. 국무부 부근의 나무들도 가지를 하얗게 치장하고 있다. 7층의 국무장관(國務長官) 집무실(執務室)로 안내받았다. 문을 열자 키신저 장관(長官)이 서서 기다리고 계셨다. 싱글벙글 내게 웃어 주시고, 어서 들어오시라며 창가의 소파로 인도해 주셨다. 장관은 옆 의자에 앉으셨다.
꽤 큰 방에 통역(通譯) 분과 나 이렇게 세 사람뿐이었다.
뵙기 몇 년 전부터 장관과는 몇 차례 서신(書信)을 주고받았다. 베트남전 화평(和平)에 대한 내 나름의 제안(提案)도 보냈다. 그러던 중, 장관으로부터 “미국을 방문할 때 들러주세요.”라는 연락을 받은 것이다.
물론 나는 정치인도 아니고 외교 전문가도 아니다. 절실(切實)하게 평화를 바라는 한 민간인으로서의 대화였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평화(平和)의 전문가(專門家)가 있는 것일까.
특히 핵시대에 평화는 인류 모두에게 자신의 일일 것이다.
냉전이 한창일 때, 제3차 세계대전의 가능성조차 기우(杞憂)라고 단언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 박사는 15세 때 독일에서 뉴욕으로, 온 가족이 찾아왔다. 1938년이다.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 정권하(政權下), 유대인 박해(迫害)는 날로 심해지고 있었다.
부모와 동생이 함께 있었다. 재산의 국외반출(國外搬出)은 금지되어, 옷만 입은 채로였다. 후에 박사는 내게 말씀하셨다.
“젊은 나이에 제가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어린 시절, 저희 가족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고국 독일을 떠나야 했기 때문에 인생에서 재산(財産)이나 사회적(社會的) 지위(地位)는 덧없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자신이 진심으로 믿는 것을, 매년 반드시 실행(實行)해야 한다.’라는 신념(信念)을 갖게 되었습니다. 만약 결과(結果)가 나쁘더라도 적어도 ‘자신으로서 해야 할 일은 다 했다.’라는 실감(實感)이 남습니다.”
교사였던 부군(父君)은 미국에서는 교직에 종사하지 않고 공장의 장부(帳簿) 담당자가 됐다. 박봉(薄俸)이었다. 더욱이 대공황(大恐慌) 시대다. 가계(家計)는 어려워 키신저 소년은 낮에는 면도용 브러시 회사에서 일하며 야학을 다녔다.
독일에 남은 친족 중 13명이 강제수용소(强制收容所)에서 숨졌다고 한다. 소년 시절의 원체험(原體驗: 사람의 생활 방식이나 사고방식에 큰 영향을 주는 어릴 때의 체험)은 박사에게 인간이 가진 사악(邪惡)과 야만(野蠻)을 뼈와 살에 사무치게 가르쳐주었음에 틀림없다.
박사는 ‘냉철(冷徹)한 현실주의자(現實主義者)’로 알려져 이상주의자(理想主義者)의 대극(對極)처럼 그려지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일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이상(理想) 없는 현실주의(現實主義)란 근시안(近視眼)의 현상(現狀) 추수(追隨: 추종, 뒤를 쫓음)나 다름없다. 그 결과 현실을 선도(先導)하기보다 현실에 끌려가는 결과가 될 수 있다. 반대로 현실(現實)의 냉혹(冷酷)함에 눈을 감는(묵인하는) 이상주의(理想主義)는 이상(理想)이라기보다 공상(空想)일 것이다. 이른바 원시안(遠視眼) 병(病)이다. 근시안도 원시안도 아니고 정시안(正視眼)이지 않으면 안 된다. 필요한 것은 ‘새로운 현실(現實)’을 만들어내는 것이고 ‘세상은 바꿀 수 있다’는 희망(希望)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실현한 박사가 말했다.
“어떤 위대(偉大)한 사업(事業)도 처음에는 모두 ‘꿈’에 불과했습니다. 그렇기에 필요한 것은 용기(勇氣)입니다. 전인미답(前人未踏)의 길을 홀로 나아가기(정복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진정으로 새로운 것은 무슨 일이든 사람들의 불평(不評)을 사는(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용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렇게 말한 적도 있다.
“저는 제 자신이 종교심(宗敎心: 신이나 부처 혹은 초월자에 대한 귀의로부터 생기는 경건한 마음)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인간이 이해(理解)할 수 없는 여러 가지 힘(力)의 존재(存在)를 믿고 있으며, 본질적(本質的)으로 불가지(不可知: 알 수 없는) 부분(部分)이 있다는 것도 믿고 있습니다. 따라서(그러므로) 인간은 항상 경외(敬畏)하는 마음과 겸허(謙虛)함을 가질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존경(尊敬)하는 마음이 없으면 국가권력(國家權力)의 집행(執行)에도 제동(制動)이 걸리지 않습니다. 산업사회(産業社會)의 결합력(結合力)도 잃어버려 인간의 개성(個性)이 진정으로 인식(認識)되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많은 세평(世評)에는 나타나지 않는 ‘인간 키신저’의 깊이를 나타내는 발언(發言)으로 내 마음에 남아 있다.
◆ ◆ ◆
어쨌든, 어떠한 미래도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할 것인가’다.
박사와는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의 『영원(永遠)한 평화(平和)를 위하여』도 이야기했지만 칸트의 말처럼 영원한 평화를 위해서는 그 종극(終極)의 목표를 향해 ‘한없이 전진(前進)을 계속하는 것’ 외에는 없다.
‘영원한 평화’를 위해서는 ‘영원히 노력’하는 것에 외에 길은 없는 것이다.
‘이것으로 됐다(족하다).’라고 일단 방심(放心)한 순간, 위기는 찾아올 것이다.
그렇기에 청년들이 ‘한없는 전진(前進)’을 계승(繼承)하는 외에 없다.
박사도 이렇게 말했다.
“청년(靑年)은 자신보다 큰 것에 도전(挑戰)해야 합니다. 우리 세계를 ‘과격(過激)하고 잔혹(殘酷)한 사람들’의 손에 넘기지 않도록, 그들이 하고 싶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황(狀況)을 만들지 않도록 청년은 헌신적(獻身的)으로 노력(努力)해야만 합니다!”
〈『나의 세계 교우록(私の世界交友錄) Ⅱ』 요미우리신문사(読売新聞社) [『이케다 다이사쿠 전집(池田大作全集) 제122권 수록]에서〉
헨리.알프레드.키신저(Henry Alfred Kissinger)
1923년 독일 출생. 나치에 의한 유대인 박해를 피해, 1938년에 도미(渡美). 전후(戰後), 하버드대학교에서 외교를 배우고, 이 대학교에서 교수를 역임(歷任). 1969년, 미국의 국가안전보장 담당 보좌관에 취임(就任). 1973년부터 국무장관(國務長官)을 겸무(兼務)했다. 중국과의 화해(和解), 미소의 긴장완화(緊張緩和), 베트남과 중동의 평화에 대한 공헌(貢獻) 등에 성과(成果)를 올려 냉전시대(冷戰時代)의 외교사(外交史)에 한 시대를 구축한다. 1973년 노벨평화상 수상(受賞). 2023년 사망.
[교류의 발자취]
반세기 전인 1975년 1월 13일, 키신저 박사와 이케다 선생님은 미국에서 처음으로 대담했다. 박사는 물었다.
“솔직히 묻겠습니다만, 당신들은 세계의 어느 세력(勢力)을 지지(支持)하려는 생각이십니까?”
전해인 1974년, 선생님은 소련, 중국을 잇달아 방문. 코시긴(Aleksei Nikolaevich Kosygin, 1904~1980)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와 이야기했다. 선생님이 어떤 신념(信念)·사상(思想)으로 움직이는지를 견극(見極: 확인, 판정, 확실히 밝히다)하려는 박사의 짧지만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선생님은 즉석에서 대답했다.
“우리는 동서(東西) 양(兩) 진영(陣營) 중 어느 한 쪽의 편을 드는 것이 아닙니다. 중국의 아군(我軍)이 되는(중국에 편을 드는) 것도, 소련의 아군이 되는 것도, 미국의 아군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평화세력(平和勢力)입니다. 인류(人類)의 아군이 되겠습니다.”
박사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회견을 마칠 때 박사는 말했다.
“또 우인으로서 만나고 싶습니다. 앞으로도 연계(連繫)를 취합시다.”
두 번째 대화는 4년 뒤인 1979년 4월 16일. 제1차 종문사건(宗門事件)의 폭풍이 휘몰아치던 한복판이었다. 선생님은 도쿄(東京) 시부야구(渋谷区)의 국제우호회관(당시)에 박사를 맞이했다.
청소년들에게 전해 남길 것이나 세계정세(世界情勢) 등 테마는 다양했다. 선생님이 평화(平和)에는 뒷받침이 되는 철학(哲學)·사상(思想)·종교(宗敎)가 필요 불가결(必要不可欠)하다고 말하자 박사는 전적(全的)으로 동의(同意)했다.
그 후에도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눴다. 1986년 9월에는 3일과 4일 이틀간 총 6시간에 걸쳐 대담. 여기에 왕복서한도 곁들여 1987년 9월, 대담집 『‘평화’와 ‘인생’과 ‘철학’을 말한다』로 간행(刊行)됐다.
이 1987년 9월, 선생님과 박사는 소카대학교(創價大學校)에서 실시된 도쿄 아다치(足立)의 청년평화문화제를 관상(觀賞). 선생님은 연기에 맞춰 함께 춤을 추듯 온몸으로 리듬을 새겼다. 청년을 사랑하는 선생님의 모습을 박사는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았다.
피날레 후, 선생님은 호소했다. “소카대학교에 ‘저우벚꽃(周櫻)’과 나란히 ‘키신저벚꽃’을 심고 싶은데, 어떨까요?” 찬동(贊同)의 박수가 회장을 감쌌다.
마지막이 된 8번째 대화는 1996년 6월 17일. 그해 2월 쿠바가 미국 민간기(民間機)를 격추(擊追)하면서 양국관계(兩國關係)는 악화(惡化)되고 있었다. 선생님은 쿠바에서 카스트로(Fidel Alejandro Castro Ruz, 1926~2016) 국가평의회(國家評議會) 의장(議長)과 만날 예정이었다. 박사는 뉴욕에 체류 중인 선생님을 찾아왔다.
박사는 관계의 개선(改善)을 바라며 선생님의 쿠바 방문에 강한 기대(期待)를 보냈다. 헤어질 때, 선생님은 말했다. “소카대학에 심은 벚꽃도 컸습니다.” 박사의 표정이 온화해졌다. 이후 쿠바를 방문한 선생님은 카스트로 의장과의 회견장에서 박사의 진정(眞情)을 전했다.
2002년 7월 25일, 뉴욕에서 미국 야구전당(野球殿堂, 야구 명예의 전당)이 주최하는 이벤트가 열렸다. 거기에, 미국 각계의 리더가 모였다. 박사의 모습도 있었다.
교환(交歡: 서로 사귀며 즐거움을 나눔)의 자리(場)에 전당에 들어간 선수를 대표해, SGI 멤버인 올랜도 세페다(Orlando Manuel Cepeda Pennes, 1937~2024) 씨가 있었다. 세페다 씨는 말했다.
“SGI 그리고 이케다 SGI 회장과의 만남이 제 인생을 근본적으로 전환(轉換)해, 인생에 가장 소중한 것인 ‘희망’을 준 것입니다!”
그 말에 박사는 “이케다 회장은 저도 매우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불교철학자(佛敎哲學者)이자 저의 가장 소중한 친우(親友) 중 한 사람입니다.”라고 기뻐하며 눈을 반짝였다. 이어 동석(同席)한 정재계(政財界), 교육계(敎育界), 법조계(法曹界)의 저명인을 앞에 힘주어 말했다.
“이케다 씨는 훌륭한 인물(人物)이자 세계 제1급의 평화운동가(平和運動家)이며 민중(民衆)의 지도자(指導者)입니다!”
[기사 원문] https://www.seikyoonline.com/article/EC0F631D78605D0844CDFBCCB420DAD0
첫댓글 감사합니다 🌈
세계 제1급의 평화운동가 이며 민중의 지도자
불행한 모든 이 의
아버지 입니다.
목숨 을 이어줍니다~~
감사합니다 매일매일 의노고에 진심으로 깊이깊이 감사드립니다 노고많으셨습니다 ☘️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