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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융의 영혼의 지도 (I): 융의 분석 심리학은 페르소나와 그림자, 아니마 또는 아니무스 그리고 자기 및 개성화라고 언급되는 관념들을 통해 학문적으로 정립!
프로이트와 더불어 20세기의 분석 심리학 이론을 정립한 양대 산맥으로 우리는 스위스의 정신과 의사였던 칼 융(Carl Gustav Jung)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 책은 융의 전문가인 머리 스타인(Murray Stein)이 인간의 정신(Psyche) 또는 영혼(Soul)이라고 불리우는 영역을 탐험하는 책이다. 융의 분석 심리학은 페르소나(Persona)와 그림자, 아니마(Anima) 또는 아니무스(Animus) 그리고 자기(Self) 및 개성화(Individuation)라고 언급되는 관념들을 통해 학문적으로 정립되었다. 머리 스타인은 이러한 방대한 융의 분석 심리학 이론들을 비교적 쉽고 간단하게 정리해 놓음으로써, 융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저자는 예일대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시카고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아 칼 융 연구소에서 훈련을 받은 분석 심리학 전문가이다.
쇼펜하우어는 그의 대표적 저술인 <의지의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인간의 의지를 인간의 활동 및 사유의 근원적 동기부여 요인으로 제기했다. 반면에 프로이트는 이러한 것들을 ‘리비도(Libido)’라는 개념으로 정립하고, 인간 본성에는 감각적이고 쾌락을 추구하는 요소가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프로이트에게 정신이란 본질적으로 ‘성적 에너지’와 맥이 닿아있다. 프로이트는 이러한 리비도가 정신적 삶의 토대를 이루고, 정신활동의 주요 원천이라고 확신했다. 한편 긍정의 심리학으로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 아틀러(Alfred Adler)는 개인 심리학을 주창했는데, 그의 이론적 기초는 리비도 보다 자아(Ego)를 강조하는 관점에 있다. 아틀러는 인간 삶의 본질적 동기부여 요인을 프로이트처럼 리비도를 성적 에너지로만 생각하지 않고, 니체 철학의 근본 개념인 ‘권력의 의지’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 차이점이며 주목할 만한 특징이다. 그러나 융은 프로이트와 아틀러의 이론들이 양극단에 치우쳐 있다고 비판하면서, 인간 정신활동의 근원적 동기를 리비도, 즉 성(性)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인간의 보편적 욕구로부터 발현되는 것이라고 확대 해석한 것이다. 융은 그러한 인간 삶의 동기를 유발시키는 모든 욕망을 ‘정신 에너지’라는 이름을 붙여서 일반성을 부여하였다. 프로이트의 정신 에너지를 의미하는 ‘리비도’가 대부분 성과 관련된 추동에 근거해 있는 것이었다면, 융은 이를 넘어 ‘포괄적인 정신 에너지’로 해석하는 차이를 보인 것이 구분된다. 또한 프로이트나 아틀러의 심리학에 대비해 볼 때, 융의 가장 특징적인 것은 무의식 세계를 원형이론과 동시성이라는 개념을 통하여 종교적 심성과도 관련지어 규명하고자 했다.
인간의 성격은 단순하지 않고 복잡 미묘하다. 어떤 상태 하에서는 나뉘고 파편화되며, 정상적인 인간정신에 수많은 잠재적 인격들이 내재해 있다. 자아는 심각한 스트레스를 받으면 분열되고, 그것으로 인하여 원시적인 방어기제에 의존해 외부와 담을 쌓고 침입과 손상에서 정신을 보호하려는 경향성을 보인다고 한다. 현대 심리학 이론에 의하면, 그러한 정신 붕괴 현상을 트라우마(Trauma)라고도 한다. 또한 물리학에 있어서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 성립하는 것처럼, 정신세계에 있어서도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 이와 유사한 법칙이 존재한다. 의식이 이끌어가는 자아가 양(+)의 영역이라고 한다면, 자아가 받아들이지 않아 무의식으로 억압된 콤플렉스는 음(-)의 영역에 속한다. 융의 이론에 의하면, 페르소나와 그림자는 서로서로 보완적 구조를 이루며 성장하는 모든 인간의 정신세계에 존재하게 된다. 페르소나는 사회적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한 공적인 것에 반응하며, 그로 인하여 자아의식과 어느 정도 동일시될 수도 있다. 인간의 삶 과정을 통해 자아의식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부분들이 모여 페르소나를 형성하게 된다. 반면에 자아는 보통 인식하지는 못하지만, 자아에 의해서 거절된 것들이 억압되어 무의식적인 요소로 남아 그림자로 형성된다. 그러므로 페르소나와 그림자는 서로 정신세계의 대극을 이루게 된다. 이러한 대극의 에너지 흐름을 통합하면서 자기에 이르는 과정을 융은 ‘개성화(Individuation)’라고 불렀다. 일반적으로는 한국어로는 ‘자기실현’이라는 논제로 번역되어 잘 알려져 있다.
인간은 아기로 태어났을 때에는 자아(Ego)가 없는 상태로 무의식과 같은 미지의 세계에 놓여지게 된다. 시간이 지나 성장해가면서 자아가 발달하고, 자아는 서서히 자기에게서 분리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성인이 되면서 사회적 활동을 통해 페르소나와 그림자 영역이 만들어지고, 그로 인한 대극의 갈등이 형성된다. 인간 삶의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얻게 되는 대극의 정신적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자아와 자기를 다시 통합시켜야 한다. 이러한 순환적 과정을 융이 말하는 개성화라는 개념으로 볼 수 있다. 인간의 성격 발달과정에서 자아와 자기의 분리 및 연합은 평생 동안 계속 반복되어 일어난다. 이러한 순환적 개성화를 통하여 이상적으로 말하자면 자기가 실현되어가는 것이다. 자기를 실현시키는 개성화의 논제는 융의 후기 심리학에서 아주 중요한 요소이다. 개성화는 삶의 전반부에서 일어나는 자아와 페르소나 발달을 넘어서는 것으로써, 무의식으로 남아 있어 투사된 형태로만 표출되는 그림자와, 아니마 또는 아니무스를 받아들여 이미지화를 통해 의식화하면서 통합해가는 과정이다. 그래서 인생의 후반기에 주로 전개되는 개성화는 그 사람 성격 전체의 통일성을 지향하게 된다고 한다. 개성화는 사람의 심리학적 개인, 말하자면 개개의 나뉘지 않는 의식의 통일성, 다른 것과 확연히 구별되는 전체가 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즉 개성화는 자아의식의 통합 과정으로 의식과 무의식 전체 정신계의 영역에 이르는 것으로써, 이것을 융은 전일성(全一性)이라고 불렀다.
융의 후기 분석 심리학 이론에서 원형적 형태의 집단무의식에 대한 관점을 제기하여 또 다른 한편으로 프로이트와의 차별성을 이루었다. 인간의 정신은 아기로 태어나면서 단순히 무(無)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인간은 세대가 지나감에 따라 긴 시간의 진화과정을 통해 물려받은 무의식을 갖고 태어나는데, 이러한 것을 집단 무의식, 즉 ‘원형적 정신’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집단 무의식은 삶을 살아가면서 후천적으로 야기되는 억압, 즉 콤플렉스와 상관없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원형적 집단 무의식은 모든 사람이 부여받은 본능과 대극을 이루는 하나의 층으로 해석된다. 이러한 원형적 집단 무의식은 이미지, 환상 등과 관련지어 나타나게 된다. 분석 심리학 관점에서 보면, 무의식은 개인의 생애 동안 쌓이게 된다는 점에서는 개인적이지만, 또한 집단과 공유되기 때문에 집단적이기도 하다. 따라서 무의식은 개인을 넘어서는 문화적 형태와 태도를 통하여 구조화되며, 그러한 형태와 태도는 개인의 의식적 행동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다시 말하지 면, 집단적 무의식과 관련된 문화의 연쇄 관계에서 형성된 독특한 콤플렉스를 만들어 내게 된다는 것이 융의 주장이다.
융의 원형(Archetypes) 이론은 미스터리하고 심령학(心靈學)적인 요소가 가미된 것으로 난해하다. 책의 마지막 부문에서 저자는 융의 원형이론(原形理論)과 동시성(同時性)을 신학적인 해석뿐 만이 아니라, 시공간의 범주를 초월하는 우주물리학으로까지 확대시켜 나가고 있다. 어떤 관점에서 보면, 융의 후기 분석심리학들은 단순 정신 의학적 사안들이 아니라, 심리학 분야를 초월하여 형이상학적 철학 사상과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융의 동시성(同時性)이라는 것은 우주론적인 관점으로, 좁은 의미에서는 꿈, 텔레파시와 같은 정신적인 논제와 실제 발생되는 비정신적인 사건 사이의 의미 있는 일치와 같은 것을 말한다. 또 다른 한편으로 융의 광의적인 해석에 따르자면, 인간의 정신과 특별한 연관이 없어도 세계에는 비인과적 질서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융은 이러한 동시성 또는 비인과적 질서를 우주적 법칙을 지배하는 근본적 원리로 생각했던 것 같다. 융의 후기 분석 심리학은 정신과 그 경계의 탐험을 넘어서 통상적인 우주론자, 철학자, 신학자가 치지 한 영역까지 들어가고자 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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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융의 영혼의 지도 (II): 융의 후기 분석심리학을 특징짓는 핵심적 개념들!
일반적으로 심리학에서 언급되고 있는 자아, 의식 그리고 무의식과 같은 것들이 생물학적으로 냉철하게 생각해 본다면, 그저 인간 두뇌 활동의 물리적 현상 범위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프로이트나 칼 융은 그러한 것들을 구분 짓고, 논리를 개발하고, 분석 심리학이라는 것으로 체계화시켜 놓았다. 특히 융의 후기 분석 심리학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원형이론, 집단무의식 및 동시성에 관한 것들은 심령학적인 요소들이 많이 가미되어 있다. 따라서 나에게 있어서는 그렇게 과학적으로 설득력이 강한 이론으로 다가오지 않는 것 또한 사실이다. 융의 후기 심리학 이론을 읽어갈수록, 어느 한 집단의 사람들이 문화적으로 본질적인 특성을 갖게 되는 것들에 있어서, 원형이론보다는 생명의 진화적 신비를 밝힌 리차드 도킨스의 ‘이기적인 유전자’가 훨씬 더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어떤 민족의 집단 정체성은 심리학적인 원형이론적 요소보다, 환경에 따라 진화해가는 유전정보들의 전달 과정에 의존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사람들은 보통 타인들의 기대치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직장과 같은 사회적 환경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특별한 태도를 취하게 한다. ‘페르소나’는 원래 로마 연극에서 배우의 가면을 나타내는 말이었는데, 융이 차용하여 ‘사회적 인격’을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한 것이다. 페르소나는 특별한 목적을 위해 채택된 심리적 구성물로써 실제적 인격이라고 하기보다는, 자아와 외부세계 사이에 있는 정신적 외피라고 볼 수 있다. 페르소나는 교육, 문화 그리고 물리적 사회적 환경에 적응한 결과로 형성된 것으로, 사회적 대상들과 상호작용에서 오는 산물인 동시에 타인들에게 개인이 투사한 결과물이기도 하다. 자아의식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동일시하고 흡수하는 것은 페르소나가 된다. 따라서 페르소나는 개인의 정신적 사회적 정체성을 형성한다. 심리학 측면에서 볼 때 페르소나는 개인의 의식적 생각과 감정을 타자에게 감추거나 드러내는 일을 하는 기능 콤플렉스이다. 페르소나는 우발적으로 일어나는 사회적 상호작용이 쉬워지도록 하고, 어색함이나 사회적 곤란을 일으키지도 모를 거친 부분을 유연하게 해준다. 자아는 페르소나를 동일시하는 경향이 높은데, 그렇게 되면 순수하게 나 됨은 눈에 띄지 않게 되어 의식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자긍심과 소속감은 물론 자신의 모든 정체성과 현실감은 페르소나에 의존하게 된다. 융은 페르소나 현상을 다음과 같은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꿈에서 어떤 주교가 떼어내기 힘든 가면을 애써 찢어내려고 하는데, 결국은 가면과 함께 낯가죽이 벗겨져버린다. 주교의 역할이 삶에서 그의 개인적 열망을 보장해 주므로 그의 자아는 주교 페르소나와 완전히 융합되어 있음을 상징한다.
융은 페르소나가 만들어지는 원천으로 사회가 요구하는 조건과 개인의 사회적 열망을 들고 있다. 환경의 기대와 요구라는 원천은 사회가 요구하는 인물이 되고, 자신이 속한 집단의 사회적 관습에 적절하게 행동하도록 종용 된다. 또 다른 원천은 개인의 성공과 직결된 사회적 야망들을 포함한다. 자아가 현존하는 환경과 관계를 맺고 적응하려는 것은 생존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이러한 노력은 페르소나가 정착하는 기회를 제공해 준다. 페르소나의 발달에는 두 가지 난제가 잠재되어 있다. 하나는 페르소나와의 지나친 동일시로, 세상살이에 만족하고 적응하는 것이 지나쳐 이렇게 구성된 이미지가 자신의 성격의 전부인 양 믿게 되는 것이다. 다른 문제는 외부 대상 세계에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내면세계에만 지나치게 관여하여 타인과의 관계를 제대로 형성하지 못하는 것이다.
페르소나는 사람을 수치심에서 보호해 주며, 수치스러움을 회피하려는 것은 페르소나를 발달시키고 지속하게 하는 가장 강한 동기가 된다. 수치심 문화는 죄의식 문화보다 페르소나를 강조하므로 체면을 잃으면 죽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경향을 보이게 된다. 수치심은 죄의식보다 더 원시적이며, 잠재적으로 더 파괴적인 감정의 일종이다. 페르소나는 다른 얼굴을 만나려고 우리가 쓰는 일종의 가면과 도 같다. 그래야 우리는 그들처럼 보이게 되고, 또 그들에게 우호적 호감을 얻게 된다. 우리는 지나치게 이질적으로 보이는 것을 원치 않는다. 왜냐하면 페르소나가 끝나고 그림자가 시작되는 상이한 점들이 우리를 수치스럽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각성되어 가면서 페르소나의 집단적 가치에 갈등하게 되고, 개인의 타고난 본능적 욕망인 그림자의 양태에 갈등이 일어나며, 또한 원형과 무의식의 콤플렉스에서 파생된 것들에 갈등을 하게 된다.
페르소나와 서로 보완적 구조를 이루고 있는 것이 그림자이며, 모든 인간의 정신에 존재한다. 그림자는 우리가 빛을 향해 걸을 때 뒤를 따르는 자신의 이미지와 같다. 통합되었다면 자아에 속할 수 있었던 인지적 또는 감정적 특성이 부조화에 의해 억압된 성격의 일부가 그림자가 된다. 그림자는 비도덕적이거나 적어도 평판이 나쁜 특질을 갖는데, 보통 사회적 습관이나 도덕적 관례와는 반대되는 어둠과 차가움의 영역을 갖는다. 그림자 인식에 대한 자아의 자기방어 체계는 매우 효과적이어서 일상적 삶에서 그림자는 잘 인지되지 않는다. 다만, 내적 성찰을 통해 어느 정도 그림자의 존재를 의식할 수 있다. 자아가 그림자를 직접적으로 경험하는 것은 아니다. 그림자는 무의식적으로 타자에게 투사되거나 아니면, 꿈속에서 극단적 상황에 몰렸을 때 우발적으로 나타나 기도한다. 사람들은 타인들에게 그런 특성을 숨기는 한편 사려 깊고, 신중하고, 공감적이며, 성찰하고, 상량하게 보이게 하는 페르소나의 외관 뒤로 숨는 경향이 있다.
괴테의 파우스트에 나오는 메피스토펠레스(Mephistopheles)는 그림자에 해당하는 고전적인 예시와 같다. 파우스트는 모든 것을 통달하고 경험한 상태에서 삶의 의지 없이 권태를 느끼는 지식인이었다. 메피스토펠레스는 파우스트를 꾀어 세상으로 뛰어들어 그의 다른 면인 관능을 경험하게 한다. 메피스토펠레스는 파우스트에게 열등 기능들인 감각과 감정을, 그리고 이제껏 영위하지 못한 성적인 삶이 주는 전율과 흥분을 알려준다. 이것은 교수와 지식인으로서 파우스트의 페르소나가 허용할 수 없었던 단면이었다. 파우스트는 메피스토펠레스의 지도 아래, 융이 말하는 전향, 즉 반대 성격 유형으로의 역전을 경험한다. 그림자와 조우한 파우스트는 새로운 에너지를 찾게 되자 권태는 사라지고, 그는 마침내 더 완벽한 삶을 경험으로 이끄는 모험을 감행한다. 이것은 진정 악마와의 거래로서 파우스트의 딜레마였고 인간존재의 핵심적 문제였다. 파우스트는 결국 신의 은총으로 영혼을 구제받게 된다. 만일 인간의 삶에서 그림자를 완전히 외면하게 되다면, 삶은 순조로울지 몰라도 메마르고 불완전한 것이 될 것이다. 그림자를 경험할 여지를 남겨둘 때 부도덕의 오점을 남길지는 모르나, 더 큰 전일성을 얻을 수도 있다. 인간의 삶의 과정에 있어서 그림자를 통합하는 문제는 가장 까다롭고 심리학적인 문제다.
융은 분석 심리학적 관점에서 남성과 여성은 근본적으로 구분하고 있다. 그 차이는 사회적이거나 문화적인 것이 아니라 원형적인 것이다. 여성은 자아와 페르소나에 관계 지향적이고 수용적이며, 성격의 다른 면에서는 엄하고 예리하다. 반면에 남성은 외부에 거칠고 공격적이나, 내면에서는 부드럽고 관계 지향적이다. 융의 아니마/아니무스 이론은 부분적으로 프로이트의 논제였던 ‘리비도’의 핵심 원천인 성(性)의 문제를 융의 방식으로 변형한 형태이다. 이것은 육체적 성(Sexuality)을 초월해 존재하는 정신의 성의 개념으로 보아야 한다. 아니마(Anima)는 남성 속에 내재된 여성적 이미지이고, 아니무스(Animus)는 여성 속에 내재하고 있는 남성적 이미지로써, 자기와 자아를 연결시켜주는 원형의 속성이다. 융에 의하면 아니마/아니무스는 그림자보다도 더 심층적 무의식으로써, 페르소나를 보완하여 주고, 자아를 자기로 통합해가는 전일성을 이루기 위한 이미지와 경험에 연결고리 역할을 한다고 한다. 정신구조로써 아니마/아니무스는 인간의 심층적 본성으로 들어가 적응하게 하는 수단의 역할을 하게 된다. 페르소나가 사회적 세계에 직면해 외부에 적응하는데 필수적 도움을 주듯이, 아니마/아니무스는 정신의 내면세계로 나아가 자아가 직면하는 직관적 사고와 감정 및 이미지의 요건과 적응하도록 한다.
아니마/아니무스는 페르소나와 서로 보완적인 것으로 정신의 가장 깊은 층에 위치한 자기 이미지와 경험에 연결되게 하는 역할을 한다. 아니마/아니무스는 그림자보다 더 깊은 무의식을 표상하는 주관적 인격들로써 그림자와 마찬가지로 페르소나가 반영하는 자기 표상과 자기 정체성을 일치시키지 않는 정신 내부의 한 성격이다. 하지만 그림자가 하는 방식으로 자아에 속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다른 개념이다. 아니마/아니무스는 인간의 심리적 삶에 관한한 지속적으로 활동하며, 이러한 활동이 없으면 우울증 상태에 빠지게 된다. 사람이 사랑에 빠지고 결혼을 하는 것도 전형적으로 아니마/아니무스를 통해 이루어지는 막대한 투사에 기인한다. 확고한 신념으로 모든 것을 감수할 수 있는 한, 그 인간은 투사를 통해 세계의 구체적 대상으로 나가게 된다. 투사된 정신의 내용들은 추상적으로 상징과 이데올로기 형태로 나타난다. 아니마/아니무스는 집단 무의식 가운데, 그리고 원형과 이미지의 구조 가운데 깊이 닻을 내리고 있다. 이러한 개념은 중국의 음양이론(陰陽理論)의 속성들에 잘 들어 맞는다고 볼 수 있다. 만일 한 사람의 페르소나가 양(陽)의 영역에 해당한다면, 아니마/아니무스의 구조는 음(陰)이 될 것이다.
자기(Self)의 개념적 이론화 과정에 있어서 융만큼 멀리 나아간 사람은 거의 없다. 역설적이게도 융에 있어서 자기의 개념은 자기 자신이 아니다. 융이 제시하는 자기는 주관성 이상의 것이며, 그 본질은 주관적 영역을 넘어서 존재하는 광의의 개념이다. 융의 분석심리학에 있어서 자기라는 개념은 융의 전체 학설 중에서 가장 근본적인 특성을 드러내는 것으로, 정신의 초월적인 중심이며 전일성을 대표하고 있다. 자기는 융 심리학 논제의 핵심이며 모든 면에서 심층 심리학과 정신 분석학의 다른 연구자들과 융의 사상을 잘 구분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