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지위와 명성에 도취되어
아무데서나 뽐내는 것이
객기이다.
맹사성(孟思誠)은
조선 세종 때의 어진 재상이었는데
고향인 온양(현재의 아산시) 에 계시는 부모님을 뵈러 다닐 때는
허름한 옷에 소를 타고 혼자 다녔다.
그날도 역시
온양엘 다녀오다 비를 만나 여관에서 피해
가기로 하였다.
여관에는 마침
어떤 영남의 부호가 많은 종을 거느리고 거드름을
피우며 들어 있었다.
그 사람이
초라한 촌 노인같은 맹사성을
보고 물었다.
" 영감은 어디 사시는 누구시오?"
" 나는 온양 사는 맹영감이오?"
" 심심하니 우리 장난이나 합시다"
" 좋지요"
그래서
공(公)자와 당(堂)자를 넣어 문답을
나누다가 헤어졌다.
알고보니 그 영남 부호는
벼슬을 얻기 위해 서울로 가는
길이였다.
맹사성이
조정에 들어와 일을 보는데 그 부호를 녹사란 벼슬에
천거하는 서류가 들어왔다.
마음씨 좋은 맹사성은
그의 버릇 없음을 탓하지 않고 그대로 서명을 했는데,
이튿날 들어온 그 사람은 맹사성을 보자 까무라
칠 뻔했다.
"어떤 공?"
맹사성의 장난기 섞인 물음에
그는 물러나 엎드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 죽어 마땅하당" ^^*
옛말에 뽐내고 거만 스러운 것은
모두 객기이니 그 객기를 항복시켜 끌어 내린 후에야 정기가 펴지며,
정욕은 모두 망령된 마음에 속하니 감소시켜 망령된 생각이 사라진 후에야
참된 마음이 나타난다고 했다.
어떤 자리에든
윗자리에 앉은 사람은 내가 어떤사람이고 어떤 성품인가를
스스로 자랑삼기 전에 남이 보는 내가 어떤 사람일까를 먼저 생각하고
살아야 옳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맹사성 영정
맹사성 [孟思誠, 1360~1438] 은
고려 말 조선 초의 재상으로 여러 벼슬을 거쳐 세종 때 이조판서로
예문관 대제학을 겸하였고 우의정에 올랐다.
《태종실록》을
감수,좌의정이 되고 《팔도지리지》를 찬진한 조선 전기의
문화 창달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본관 신창(新昌). 자 자명(自明).
호 고불(古佛) ·동포(東浦). 시호 문정(文貞).
온양(溫陽) 출생했다.
1386년(우왕 12)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춘추관 검열(檢閱)을 거쳐 전의승(典儀丞)·기거사인(起居舍人)·
우헌납(右獻納) 등을 역임하였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수원판관(水原判官)·내사사인(內史舍人)·예조정랑(禮曹正郞)·시어사(侍御史)·
간의(諫議)를 지내고, 1400년(정종 2)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가 되었다.
1406년 이조참의·예문관제학을 거쳐
이듬해 진전사(進箋使) 시종관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와
한성부윤이 되었다.
1408년 대사헌에 오르자
왕의 허락도 없이 부마 조대림(趙大臨)을 국문하여 태종의 노여움을 사
한주(韓州)로 유배되었으나, 영상 성석린(成石璘)의 변호로 풀려나 다시 기용되어
예조참판을 거쳐 1416년 판서(判書)로 승진, 호조(戶曹)·공조(工曹)를 거쳐
1419년(세종 1) 이조판서로 예문관 대제학을 겸하였다.
1425년 좌군도총제부판사(左軍都摠制府判事)로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문신으로는 최초로
삼군도진무(三軍都鎭撫)가 되고, 1427년
우의정에 올랐다.
1429년 궤장(几杖)을 하사받고,
이듬해 《태종실록(太宗實錄)》을 감수, 1431년 좌의정이 되고
다시 춘추관영사(春秋館領事)를 겸임, 《팔도지리지(八道地理志)》를 찬진(撰進)하고
1435년 노령으로 사임하였다
. 황희(黃喜)와 함께
조선 전기의 문화 창달에 크게 기여했고, 성품이 청백검소하여 남루한 행색으로
수령(守令)의 야유를 받았는데, 도망하던 수령이 관인(官印)을 못에 빠뜨려 후에
그 못을 인침연(印沈淵)이라 불렀다는
일화도 있다.
시문(詩文)에 능하고 음률(音律)에도 밝아
향악(鄕樂)을 정리하고 악기도 만들었다.
또 청백리로 기록되고,
효성이 지극하여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작품에
《강호사시가(江湖四時歌)》가 있다.
맹사성 고택
[출처] 역사속에 인물 - 맹사성
[출처] 역사속에 인물 - 맹사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