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전1;10) 너희를 권하노니 하는 말은 평범한 인간의 차원으로
고린도교회를 향해 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권면의 차원도 있고,
선포(레에마)하는 차원의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분쟁이란 ‘스키조’는
찢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이 찢어지는 거죠.
서로 다툰다는 뜻이 아니라 찢어짐은 나무 가지가 찢어지듯이 못쓰게 되는 겁니다.
생베조각을 낡은 부분에 붙이면 헤어지는데 이것이 바로 찢어짐입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에 예루살렘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지듯이 분쟁은
찢어진다는 뜻입니다. 결국 10절은 교회들이 그리스도를 찢지 말라는 권면입니다.
온전히 합하라는 말씀은 그리스도 안에 하나가 되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형성된 영적인 상태를 유지하라는 뜻입니다.
교회가 인위적으로 하나가 되려고 노력하는 건 바른 방법이 아닙니다.
하나된 걸 힘써 지키는 겁니다. 같은 마음과 같은 뜻 안에서 온전하라고 하십니다.
같은 이해와 지식과 말을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야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해집니다. 그래서 성경은 기록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말씀이 찢어지고 맙니다. 설교가 백가쟁명과 같은 시대에
오로지 한 가지의 말씀을 전하면 사람들이 이상히 여깁니다.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 너희에 대한 말이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고전1:11) 진리는 오직 하나인데 서로 진리라고 떠듭니다.
백 사람이 말하면 백 사람의 말이 다 다르니 이게 바로 성경을 찢고 그리스도를 찢습니다.
‘너희에게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그들에게 분쟁이 있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고전1:12절에는 특별한 단어는 없습니다.
“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
서로가 어떤 사람들에게 속해 있다고 말을 합니다. 지금도 성도들이 어느 교단,
어느 교회, 어떤 목사의 이름을 앞세우는 경향이 많습니다. 좀 유치한 느낌이 듭니다.
그래서 바울이 고전1:13절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
‘어찌 나뉘었느뇨’ 어떻게 갈라졌느냐는 이 말은 칼로 자르다 하는 뜻이 있습니다.
바로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느냐 하는 문제로 갈라져 있는 겁니다.
지금도 세례와 침례로 갈라져서 나는 세례, 나는 침례 하면서 칸막이를 합니다.
세례도 침례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아담 안에 사망의 종이었다가
그리스도로 안에서 생명을 얻는 소속이 바뀌지 않으면 그게 그건데 말입니다.
세례의식에 명운을 거는 사람은 어쩜 세례의 비밀을 모르기 때문일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세례를 많이 주지 않은 것을 감사한다고 역설적으로 말합니다.
“나는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너희 중 아무에게도 내가 세례를 베풀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노니”(고전1:14) 분쟁의 두목이 되지 않는 것을 감사한다는 의미입니다.
성만찬을 잘 못 행하면 죄가 되어 약해지고 병이 들고 심지어 죽기까지 합니다(고전11:30)
그런데 성만찬을 성경대로 시행하는 걸 저는 별로 보지 못했습니다. 그건 성찬의
메시지 문제입니다. 그처럼 세례의 설명이 제대로 되지 않아 죽었던 자가 다시 살아나는
부활과 영생을 제대로 체험하지 못해 고린도교회처럼 반거충이 그리스도인이 되고 맙니다.
베드로의 설교대로라면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기 위해 회개와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 세례로 주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을
따라가면 죄 사함과 더불어 성령을 받습니다(행2:38) 그로인해 다윗과 같이
보좌 우편에 앉으신 만왕의 왕이신 주의 이름을 부르므로 구원을 받습니다(행2:25-35)
기독교의 표지는 말씀과 성례전인데 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이가 많습니다.
바울은 성도들을 자기편을 만들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이는 아무도 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말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고전1:15)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종의 자세입니다. 바울은 오직 주의 이름을 높이고
그의 영광을 위해 일한 주의 신실한 종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는 왜 자신의 이름으로 세례 증서를 주지요? 물론 어린 신자들에게
세례교인이라는 짐을 지우는 것이 긍정의 효과는 있겠지만 그로 인해 세례의 엄청난
비밀이 싸구려가 되어 나도 너도 세례 교인이라는 명분만 흩뿌려 놓는 것이 아닐까요?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어 옛 사람은 장사가 되고 그리스도의 다시 사심으로 말미암아
그 부활에 연합이 되어 새 생명 가운데 행하게 하는 세례는 그리스도인들의 중요한
신앙이 기본이며 진리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천국을 침노하는 플렛폼입니다.
세례와 성찬의 의미를 습득하지 못하고는 나는 날마다 죽노라 하며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라 그 은혜의 보좌에 나아가 경배와 찬양을 드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은 많이 전했으나 세례는 손가락으로 셀 만큼밖에 안 됩니다.
“내가 또한 스데바나 집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그 외에는 다른 누구에게 세례를
베풀었는지 알지 못하노라”(고전1:16) 실제적인 세례는 복음을 전하는 가운데 포함이
되어야 합니다. 의식은 큰 문제가 아닙니다. 다만 물로 세례를 받는 것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살아 한 떡과 한 몸과 한 영이 된 상태에서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선언하는 의미입니다. 바로 법적인 결혼과 결혼식과 같은 이치입니다.
결혼식을 안 해도 혼인신고를 하면 법적으로 결혼이 됩니다. 그러나 결혼식을 하므로
많은 사람들에게 부부가 되었음을 선언하는 의미가 있는 겁니다. 세례의식도 같습니다.
그러므로 세례보다는 복음이 중요합니다. 곧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전1:17) 십자가의 도를 세례라는 의식으로 대체하면 안 됩니다.
물론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에 연합이 되어 죄와 사망에 대해 죽고
다시 산 자로서 이 믿음을 시인하고 고백하는 것이 세례지만 그만 의식을
중요시 하다 거기에 빠져 그리스도의 십자가 도의 의미를 퇴색시켜서는 안 됩니다.
이건 주의 종들이 매우 주의해야 할 일입니다. 그렇다면 세례를 제대로 베푸십니까?
요한의 세례는 죄를 깨닫게 하여 예수 그리스도께로 이끌어오므로
예수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일입니다. 그리고 성만찬도 그 예수 그리스도를
그 안에서 나타내는 일입니다. 아니면 어찌 그 몸을 기념할 수가 있겠습니까?
결혼 한 적이 없는 사람은 결혼기념일이 없듯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된 적이 없으면
그 몸을 먹고 그 피를 마시는 기념을 하는 건 거짓이며 주의 몸을 범하는 죄가 됩니다.
주와 함께 죽고 주와 함께 다시 살아서 주를 먹는 성례전은 바로 복음을 전하는
중에 이루어집니다. 세례(침례)는 물에 잠기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잠기는 것입니다.
물에만 잠기면 죄 사함을 받았다고 고백하지만 그리스도 안에 잠기지 못하면
성령세례가 안 되어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지 않아 한 성령을 마시지 못합니다(고전12:13)
세례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다시 사는 신앙고백의 의식입니다. 물에 잠기는 것은 죽을
것은 죽고 살아날 것은 다시 사는 것이며 성령에 잠기는 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겁니다.
복음을 전하는 그 자체가 바로 영적으로 이미 세례를 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세례가 되던 침례가 되던 의식의 세례가 따르게 되는 겁니다.
바울은 ‘말의 지혜로 하지 않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함이라’합니다.
십자가의 죽음 그리고 그 죽음은 바로 부활과 연결이 됩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되어 집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세례의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합니다. 말씀을 따라 주와 함께
죽었다가 주와 함께 다시 산 자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향해 살아 있음을
고백하고 주를 앙망하며 주의 이름을 부르므로 구원을 받는 사람이 진정한 세례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그 말씀을 따라 가면 세례 곧 죽었다가 다시 산 자가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