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급증한 중국 관광객이 한국 화장품 매장에 몰리면서 서울의 상권지도가 바뀌고 있다. 옷가게와 미용실이 즐비했던 이대앞 거리를 화장품 매장이 점령해가고 있다. 사진은 이화여대 정문에서 신촌 방향으로 가는 거리. 에뛰드하우스, 라네즈, 더샘, 이니스프리, 네이처리퍼블릭이 한눈에 들어온다.
지난 8월 초 서울 중구 남대문로 81에 있는 롯데백화점 본점 9층 면세점. 중국 관광객으로 9층 전체가 와글와글했다. 어림잡아 고객의 80% 정도는 중국인이었다. 한 한국인 고객은 “여기가 중국이야, 한국이야?”라며 신기한 듯 두리번거렸다. 그중 중국인 관광객이 가장 많이 몰린 곳은 한국 화장품 매장. 마주 보고 입점해 있는 설화수·라네즈 매장 주변은 지나가기조차 힘들 정도였다. 롯데백화점 본점 측은 급증한 중국 관광객을 위해 9층에만 두 곳에 중국어 통역사를 배치했고 각 매장의 상품 안내 문구는 중국어 위주로 바꾸었다. 일본어로 된 안내문 글씨는 깨알같이 작고 영문 설명은 아예 없다.
작년 말부터 소공동 롯데백화점 본점에서 근무 중인 중국어 통역사 김해연(30)씨는 “5분 간격으로 중국 관광객이 다가와 질문을 한다. 한국 화장품 매장을 찾는 질문이 가장 많다. 설화수, 라네즈, 미샤, 더페이스샵, 후를 많이 찾는다”고 말했다. 롯데백화점 잠실점은 지난해 하반기에 10층에만 있던 면세점 매장을 9·10층으로 늘리고 9층 전체를 화장품 매장 전용 면세점으로 만들었다.
한국을 찾는 중국 관광객이 폭증하고 있다. 한국문화관광연구원 발표 자료에 따르면 올 6월 한 달간 39만9031명의 중국인이 한국을 다녀갔다. 40만명이면 시흥시·구미시 등 웬만한 중소도시의 인구 규모다. 6월 한국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은 총 105만9082명. 한국을 다녀간 외국인 두 명 중 한 명이 중국인이었다는 얘기다. 중국 관광객의 급증은 올 들어 두드러진다. 6월 한국에 다녀간 중국인은 작년 같은 기간에 비해 무려 70%가 늘었다. 일본 관광객은 33.5%가 줄었고 미국인 방문객은 6.3%, 대만 6.4%, 홍콩 19.4%가 늘어난 것과 비교하면 차이가 확연하다. “명동과 광화문 편의점 알바는 중국어가 필수”라는 말이 공공연하다.
씀씀이 큰 왕서방들은 서울의 상권지도를 바꾸고 있다. 중국인의 한국 여행 선택 시 고려사항 1위는 ‘쇼핑’이다. 한국문화관광연구원이 조사한 ‘중국인 방한여행 실태조사 보고서’에 의하면 한국 여행 선택 시 고려사항은 ‘쇼핑’이라는 응답이 50.4%로 가장 많고 그 다음이 ‘자연풍경’(33.1%), ‘세련된 문화’(23.0%), ‘중국과의 거리’(18.0%) 순인 것으로 나타났다.
‘큰손’ 중국인 덕에 면세점이 톡톡히 효과를 보고 있다. 올 상반기 유통업계 전반을 강타한 불황에도 면세점들은 사상 최고의 매출을 경신했다. 롯데면세점은 지난 8월 5일 잠정 집계한 상반기 매출액은 1조6000억원으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지난해 같은 기간 매출인 1조5000억원보다 6.67% 증가했다. 신라면세점과 신세계면세점 역시 선방했다. 지난해 매출보다 각각 3.46%, 8.7% 늘었다. 면세점 성장의 주역은 중국 관광객이다. 롯데면세점의 중국인 매출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80% 늘었다. 엔저(低) 영향과 한·일 관계의 악화로 일본 관광객이 급감했지만 중국 관광객이 빈자리를 채워 매출이 확 늘었다는 분석이다. 롯데백화점 이석원 책임은 “중국인은 큰손이다. 1인당 매출액이 중국인이 100만원이라면 일본인은 50만원이다”라고 말했다. 내국인, 중국인, 일본인 순이었던 국적별 매출액 순위는 중국인, 내국인, 일본인 순으로 역전됐다.
롯데JTB 여행사에서 중화권을 담당하는 송문양 이사는 주간조선에 “중국인은 한국 화장품을 박스째로 사 가는 경우가 많다. 혼자 쓰면 평생 써도 다 못 쓰는 양이다. 자기가 쓰기 위해서 사 가는 경우도 많지만 선물용 수요가 훨씬 더 많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 화장품이 워낙 좋다고 소문이 난 데다가 여행이 개방된 지 얼마 되지 않아 해외여행 다녀오면 지인들에게 선물을 돌리는 문화가 한창이다. 화장품은 부피가 작고 상대적으로 가격도 저렴해 선물용으로 1순위다”라고 한국 화장품 선호 이유를 설명했다.
면세점은 물론 서울 신촌의 이화여대 앞과 명동 등 쇼핑의 메카들도 화장품 매장 위주의 상권으로 변신을 하고 있다. ‘이대앞’ 하면 뭐가 떠오르는지? 미용실과 옷가게? 5~6년 전만 해도 이 대답이 통했으나 지금은 아니다. 커피점 스타벅스 1호점이 1999년에 들어서는 등 ‘테스트 마켓 1순위’인 이대앞에서 가장 많은 것은 화장품 매장이다. 작년까지만 해도 옷가게가 화장품 매장보다 많았으나 올 6월 들어 뒤집혔다. 이대앞에는 LG생활건강의 이니스프리, 아모레퍼시픽의 아리따움, 토리모리, 미샤 등 30개의 국내외 화장품 소매점이 밀집해 있다. 토니모리는 지척의 거리에 두 군데나 입점해 있다. 이화여대 정문 바로 앞에는 ‘더바디샵’이 들어섰고, 그 옆에는 ‘아리따움’과 ‘올리브영’이 조르르 들어섰다.
이대앞에서 10년 이상 여성의류 매장 ‘내추럴런드리’를 운영하는 매니저는 이것저것 묻는 기자에게 “가게 하시게요? 옷가게는 하지 마세요. 살아남기 힘들어요”라고 말했다. 옷가게 역시 외국 관광객 일색이다. 20여분 동안 이 매장을 찾은 고객의 80% 정도는 외국인이었다. 중국인이 가장 많고 일본인과 흑인이 찾아왔다. 옷가게 점원 이모씨는 “이대앞이 중국 관광객들의 필수 코스가 되면서 화장품 매장이 급속히 늘었다”며 “우리 매장 역시 작년부터 외국인 매출이 내국인 매출을 눌렀다”고 답했다. 그는 “이대앞에서 점원을 하려면 중국어, 일본어는 기본”이라며 “이대앞과 명동의 점원은 최소 3개 국어가 기본인 프로들”이라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