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를 제도와 프로그램과 시설에만 두지 말고, 어디에나 두루 스미어 흐르게 하자, 복지를 제도와 프로그램과 시설 속에 집어넣기보다는 세상에 풀어내고 생활 속에 녹여내자, 어느 곳에나 두루 복지적 요소를 내장하여 보이지 않으면서도 자연스럽게 복지 효과를 내도록 하자는 것입니다.1)
지금까지의 사회복지는 주로 사회보장제도와 복지시설을 확충하여, 대상자들을 그 안으로 가급적 많이 끌어들여 수용, 보호, 치료, 교육, 구제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연주의 사회사업은 제도와 시설 속에 복지를 집어넣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세상에 복지를 풀어내고 생활 속에 복지를 내장하는 것입니다.
보통사람이 살아가는 곳에, 보통사람의 일상과 직업 속에, 보통사람들의 공동체 속에, 보통의 제품과 서비스 속에 복지기능을 내장하거나 부가하는 것2), 이것이 바로 어디에나 두루 있는 복지 - 유비퀴터스 복지의 요체입니다.
*우물과 시내
예전에는 우물과 시내에서 마음껏 물을 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저수지에 물을 모으고 수도를 통해 급수하니 수도꼭지에 돈을 갖다 바쳐야만 쓸 수 있습니다. 우물은 마르고 시내는 죽어갑니다. 저수지에는 물이 가득하나 세상에는 물이 없습니다.
사회복지 또한 그러합니다. 세상에 두루 있어야 할 복지를 복지시설 혹은 사회복지사의 전유물인양 독점하고 있습니다.
정부예산과 민간자원을 끌어 모아 복지 저수지, 곧 복지시설에 집어넣고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복지라는 이름의 수도꼭지를 통해서 서비스를 공급하니 그곳에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자존심을 갖다 바쳐야만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소위 사회복지 전문가들은 세상 우물과 시내를 살리는 데 관심이 없거나 적어도 그 일을 우선순위에 두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이제 다시 세상 우물에 물이 스미어들고 시내에 물이 흐르게 해야 합니다. 보통사람들의 일상과 직업 속에 복지가 스미어들게 해야 합니다. 보통사람들의 공동체 속에 복지가 흐르게 해야 합니다.
이제는 복지 저수지와 상수도, 급수대를 만드는 데 공들이지 말고, 사람사이에 복지가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가 되도록 주선하고 거들어주어야 합니다.
*꺼져 가는 심지, 상한 갈대
전통적 공동체에서 자연스럽게 감당해온 복지 기능이 사회보장 제도와 복지시설로 급속히 빨려 들어갑니다. 어쩔 수 없는 것일까요?
전통적 공동체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복잡한 문제와 욕구들이 생겨났고, 산업화 도시화 핵가족화로 사회체제와 생활방식이 바뀌었으니 정부와 사회복지사들이 개입할 필요가 있었을 테지요.
복잡해진 문제와 다양해진 욕구, 그리고 변화된 사회구조 앞에서 개인과 전통적 공동체의 능력은 어쩌면 꺼져 가는 심지와 상한 갈대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정부와 사회복지사들은 복지의 전면3)에 나서서 아예 대신해버리고 지역사회와 이웃을 후방으로 보내버렸습니다. 그래서 복지의 주체였던 사람들이 대상자나 보급부대로 전락해버렸습니다. 꺼져 가는 심지를 덮어버리고 상한 갈대를 꺾어버렸습니다. 그 자리에 사회정책으로 대신하고 소위 전문가의 서비스로 대체해버린 것입니다.
이는 사회복지를 나와 관계없는 것으로 여기거나 혹은 특별한 대상으로 생각하고 그 역할을 복지제도와 복지시설, 정부와 사회복지사에게 떠맡겨버리게 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받는 것에 익숙하고 도움 받는 것을 당연시하여 정부와 복지기관에 의존하려는 나약한 인간을 만드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제 생각은 다릅니다.
사회복지사는 약해지는 것을 막아주고 받쳐주고 회복시켜주는 존재이지, 약한 것을 허물어버리고 대체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사람들 속에 있는 선의와 좋은 능력 본성, 자연력을 잘 살려내고 북돋아주는 존재이지, 그것을 버려 두고 대신해주는 존재가 아닙니다.
복지 제도와 서비스가 증가하는 만큼 사람들의 본성과 자연력은 점점 더 무뎌지고 잊혀지고 퇴화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제도와 프로그램과 전문가라는 이름으로 개인과 공동체의 역할을 대신함으로써 자연적 복지기능의 소멸을 재촉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사회복지사는 꺼져 가는 심지를 돋우고 상한 갈대를 일으켜 세워야 합니다. 본성과 자연력을 회복·유지·강화하여 생동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을 다시 복지의 전방에 내세워 그들의 공동체, 그들의 직업, 그들의 일상에서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것을 하도록 뒤에서 공작하고 주선하고 지원해야 합니다.4)
정반합正-反-合의 역사, 주체 회복
①보통사람들의 자연스러운 생활에 속하던 것들이
②전문가들의 특별한 활동으로 전유되었다가
③보통사람들의 생활 속으로 다시 돌아와서 전문가와 보통사람이 함께 행하거나 함께 누리기도 하며 보통사람들의 평범한 생활의 일부가 되고 있습니다. 전문가들도 자신들이 가져갔던 것을 보통사람들에게 돌려주어 모든 사람의 것이 되도록 생활 속에 풀어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예술이 그러합니다. 먼 옛날 음악이나 미술은 보통사람들의 생활이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특별한 재능을 지닌 일부 전문가들의 직업으로 분화하더니 사람들은 가수의 노래를 듣는 청중이 되었고, 화가의 그림을 감상하는 관객이 되었습니다.
최근에는 사람들이 다시 음악과 미술을 자신들의 평범한 일상으로 가져왔고, 전문가들도 이제는 생활음악, 생활미술로 풀어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라디오에서도 청취자들이 직접 참여하여 노래하는 프로그램이 많아졌고 TV도 그렇습니다.
스포츠도 마찬가지입니다. 스포츠는 보통사람들의 자연스러운 생활에 속하는 것이었습니다. 직접 참여하고 함께 즐기는 신체활동이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스포츠를 선수들에게 맡기고 사람들은 구경꾼이 되었습니다. 엘리트 체육이 스포츠의 주류를 차지해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스포츠를 보통사람들의 것으로 돌려주려는 생활체육 운동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비단 예술과 스포츠 분야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문학(선비의 시·문 → 시인·작가 → 나도 시인·작가), 요리(누구나 요리 → 요리사 →집에서 해보자), 언론(입 소문→언론인→인터넷), 발명(나도 발명가), 종교(평신도→성직자→평신도), 교육, 의료(민간→의사→생활의학·민간요법·자연치유)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이러한 현상을 볼 수 있습니다.
전문가들이 가져갔던 것을 보통사람들에게 다시 돌려주거나 보통사람들을 주체로 참여시켜서 함께 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저는 사회복지도 이렇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복지는 본래 사람들 개개인의 자율에 속한 것이었고 가족, 친지, 지역사회 등 공동체의 연대와 상호부조에 속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돌려줄 것은 돌려주어야 합니다.
지금 하고 있는 복지사업의 어떤 것은 일반 제도와 시장과 지역사회에 돌려주어야 합니다. 그들의 복지적 기능, 복지적 삶을 회복해 주어야 합니다. 사람들을 다시 복지의 전방에 내세워 주체적 프로슈머가 되도록 공작·지원해야 합니다.
이제는 저수지나 수도꼭지 노릇하지 말고, 세상 속에 복지의 시내가 흐르게 하는 공작원 역할을 해야 합니다. 지역 사회 모든 삶의 영역에 복지적 기능·가치를 부가하거나 내장하고, 그것이 생동하도록 공작, 주선, 지원해야 합니다.
복지시설에 복지를 모으려 하지 말고 세상에 흐르게 하자. 복지를 제도와 시설 속에 집어넣기보다는, 세상 속에 풀어내고 생활 속에 녹여내자. 사람들과 자원을 끌어들여서 우리의 사업을 하려들지 말고, 그들의 직업과 일상과 공동체 속에 풀어내어 그들의 삶이 되도록 주선하고 거들어주자. 이것이 바로 어디에나 두루 있는 복지 - 유비퀴터스 복지의 요체입니다.
1) 그는 화학을 모릅니다.
당신은 모르지만, 수많은 화학이 당신 곁에 있습니다.
LG화학은 보이지 않아도 좋습니다.
당신의 삶, 보이지 않는 곳에 LG화학이 있습니다.
여의나루역 버스 정류장에서 본 LG화학의 기업 광고입니다.
2) 내장한 것은 embedded welfare, 부가한 것은 adaptive solution
3) front end welfare center
4) back end enabler
첫댓글 이상적인 이론인데 실천이 참으로 중요한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