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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 요 |
세계 조선산업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일대 호황기를 맞고 있었다. 이는 선진국간의 교역량이 크게 늘어나 중화학공업이 발전함에 따라 원자재와 석유 수요증가에 따른 해운업의 발전에 기인하였다. 특히 1967년의 수에즈운하 폐쇄로 세계 최대의 석유 공급지인 중동에서 구미제국으로 수송되던 원유가 아프리카 남단의 희망봉을 우회해야 함에 따라 세계 조선시장에는 20만DWT급의 초대형 유조선 수요가 급증하였으며, 조선업계는 이에 대응하여 영국의 Harland & Wolf, 네덜란드의 Verome, 덴마크의 Odense 조선소들이 1970년대를 대비하여 100만DWT급 이상의 초대형 도크 건설에 나섰으며 일본 역시 미쓰비시중공업이 고야끼 조선소에 100만DWT급 규모의 초대형 도크를 건설하는 등 경쟁적인 시설 확장이 이루어졌다. 한편 제1,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통해 정부가 추진한 수 차례의 조선공업 육성시책은 내수 중심의 소형 선박 건조 확대에 그쳤으며 시설 근대화 및 국제경쟁력을 갖춘 선박 개발 면에서는 답보 상태에 있었던 것이 한국의 조선산업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에 들어와서는 1980년대의 자주 경제를 완성하고 고도의 경제 구조를 이룩하려는 한국 경제의 성장에 있어서 조선산업의 역할과 기여는 1970년대를 통하여 괄목할만한 성장을 거듭하였다. 1960년대가 조선산업 발전을 위한 기반 조성기였다고 본다면 1970년대는 정부의 경제개발 계획에서 주요 육성산업으로 채택되어 국가의 재정적 지원 아래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었던 도약기로 볼 수 있다. 1973년 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 완공을 필두로 주요 대기업들이 대형 조선시설을 건설해 조선업에 참여함으로써 우리나라 조선은 후진성을 완전히 탈피하여 일약 국제적 규모로 성장, 현대적인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1975년 수리조선 전문인 현대미포조선이 설립되었고, 1978년 대한조선공사는 옥포에 초대형 제1도크를 완공하였으나 후에 대우그룹에 매각하게 되었으며, 삼성그룹은 1977년에 우진조선소를 인수, 1979년 1도크를 완공했다. 특히 현대중공업은 1973년 조선소 준공과 더불어 26만 톤급 초대형 유조선(VLCC)을 건조, 우리나라 조선업은 본격적으로 세계 조선시장에 진입하기 시작했다. 또한 1976년에는「해운조선종합육성방안」의 일환으로 우리 선박은 우리 조선소가 건조하고 우리 화물은 우리 선박으로 수송한다는 목표 아래 계획조선이 실시되어 조선산업 육성에 일익을 담당하게 되었으며, 1973년에는 선박연구소가 설립되었고 1977년에는 한국조선공업협회가 설립되었다. 이 같은 1970년대의 고속 성장은 대형 조선소의 대규모 설비 투자로 이어졌으며 1980년대 들어 불어닥친 세계 해운조선 장기 불황과 맞물리면서 극심한 어려움을 겪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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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업체 현황 |
1970년대는 제1,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기간에 다져진 기간산업을 기초로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기간부터 적극 추진된 중화학공업정책을 배경으로 우리나라의 조선공업은 일대 전환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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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초대형 조선소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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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까지 우리나라 조선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해 온 대한조선공사의 시설규모를 훨씬 능가하는 대규모 조선소 건설계획을 1970년 9월에 현대건설(주)이 추진하면서 현대의 울산조선소가 태동하게 되었다. 처음의 계획은 10만GT급 도크 1기, 6만GT급 및 3.5만GT급의 선대 각1기를 건설하려 했으나 당시의 세계조선시황이 대형 유조선의 수요가 많았고 정부도 국제 규모의 조선소를 4대 핵심 공장의 하나로 지정하여 적극 육성하려는 의지가 있었기 때문에 조선소 건설계획을 완전히 변경하여 최대선 건조 능력 50만DWT급의 시설 능력을 갖추어 연간 26만DWT급의 VLCC 5척을 건조, 전량 수출토록 계획하고 1972년 3월 역사적인 초대형 조선소의 기공식을 가졌다. 그러나 건설공사가 진척되면서 다시 규모가 커져서 최대선 건조 능력이 70만DWT급으로 확장되고 35만평 부지에 383m × 80m × 12.7m의 도크 1기, 1,050m 의장안벽, 450톤 goliath crane 2기 등의 주요시설과 강재전처리시설, 광선추적식 절단기, N/C 절단기, 자동용접 및 컨베이어 시스템으로 된 판넬라인 조립장 등 현대적인 설비를 갖춘 대규모의 조선소로 1974년 6월 준공되었다. 또한 이상의 1차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중에 1973년 3월 정부의 「장기조선공업 진흥계획」에 따라 동 조선소의 시설 능력을 배가하여 100만DWT급 유조선을 건조할 수 있는 초대형 조선소로 확장하는 2단계 공사가 추진되어 503m × 80m × 12.7m 도크 1기, 642m × 92m × 13.4m 도크 1기와 450톤의 goliath crane 4기, 1,500M의 의장안벽 등의 시설을 확보함으로써 단일조선소로서는 세계 최대규모인 초대형조선소가 등장하게 되었다. 한편 동 조선소는 조선소 건설을 기공하기도 전에 그리스에서 수주한 26만DWT VLCC 2척을 조선소 건설공사와 병행하여 1973년 3월부터 건조하기 시작하여 1974년 11월에는 제 1호선인「아틀란틱 배론호」를 선주 측에 인도함으로써 국제적인 조선소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1973년 3월에 확정된 ?장기조선공업 진흥계획?에 나타난 바와 같이 정부에서는 1980년도를 조선공업의 수출 산업화 완성시기로 잡고 1976년까지 조선 능력을 260만GT로 대폭 확충하기 위하여 현대조선소 외에 세계 최상위 수준급의 초대형 조선소 2개와 150천GT급의 중형조선소를 건설하고 중형조선소를 중심으로 군소 조선소를 대폭 통합, 계열화하여 세계 수준의 중형 전문 조선소로 발전시키려는 정책을 수립하였다. 이에 따라 대한조선공사는 1973년 2월에 8천DWT급 도크를 6만DWT급으로 확장하였으며, 현대조선소도 연간능력을 2백만GT로 확충함으로써 최단 시일 내에 세계 유수의 대형조선소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또한 대한조선공사는 거제군 옥포에 연간능력 120만GT, 최대선 건조능력 100만DWT급의 옥포조선소를 1973년 10월에 기공하였으나 1978년 8월에 대우그룹이 인수하여 1981년 10월에 조선소를 준공하였으며, 고려원양(주)에서는 거제군 죽도에 연간능력 150천GT의 고려죽도조선소를 1974년 말에 기공하였으나, 1977년 4월에 삼성그룹이 인수하여 1979년 12월에 제1도크의 건설을 완공하였다. 이러한 신조선능력의 확장과 더불어 수리선 전담시설도 대폭 확장시켜 최대선 수리능력 700천DWT급의 현대미포조선소를 1976년 울산시 전하만에 완공시켰다. 한편 정부의 장기조선공업진흥계획과는 별도로 1972년 6월 마산수출자유지역에 연간 건조능력 15천GT급 규모로 강선과 알미늄선을 건조할 수 있는 코리아타코마조선소가 설립되었으며, 울산시 용잠동에는 연간 건조능력 100천GT급 규모로 화학물운반선 건조를 전문으로 하는 동해조선소(현 한진중공업 울산조선소)가 설립되어 1976년부터 강선을 건조하기 시작하였다.(표 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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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19> 대형조선소 건설 상황
회 사 |
건 설 상 황 |
현대중공업(주) |
- ’72. 3 : 건설 착공 - ’73.12 : 조선소 건설 완공 - ’74. 6 : 26만DWT급 VLCC 건조 - 사 업 : 신조선 건조외 PLANT, 해양구조물 부문 |
(주)현대미포조선 |
- ’75. 3 : 제1공장 착공 - ’75. 4 : 현대미포조선소 설립 - ’75. 7 : 조업 개시 - ’81. 7 : 제2공장 건설 착공 - ’82.11 : 제1공장 현대중공업(주)에 매각 - 시 설 : 세계 최대 수리전문 조선소로 6만DWT급 선박을 나란히 입거 할 수 있도록 도크 폭을 65M로 함 |
대우중공업(주) |
- ’73. 8 : 대한조선공사가 착공 - ’73.10 : 1차 유류파동으로 공사 지연 - ’78. 8 : 제1도크 완성 - ’78.12 : 대우그룹 인수 - ’81. 1 : 부대설비 완공 |
삼성중공업(주) |
- ’74. 3 : 고려조선(주) 설립 - ’74.12 : 조선소 건설 기공 - ’77. 3 : 우진조선(주) 인수 - ’77. 4 : 삼성그룹 인수 - ’79. 9 : 공장가동 개시 - ’79.12 : 제1도크 완공 - ’83. 3 : 제2도크 완공 | |
이와 같이 1970년대에 들어 신규 대형?중형?조선소들의 건설과 아울러 기존 조선소의 시설 확장으로 우리나라의 연간 건조능력은 1972년 190천GT에서 1976년에는 2,600천GT로 대폭 증가되었으며 옥포조선소와 죽도조선소가 완공되면서 세계 2위 조선국으로 진입할 수 있게 되었다. 조선산업 관련 공장 수는 60년대까지는 수적으로 증가하였으나, 70년대 중반에는 조선업체의 정비 개편으로 감소 경향을 보였다. 조선 능력은 현대조선소의 준공 및 확장으로 1974년에 100만GT를 돌파한 후 70년대 말에는 280만GT 수준에 이르렀으며, 건조량에서는 1974년에 VLCC 건조로 56만GT를 기록한 후 계속 60만~70만GT를 유지함으로써 세계 상위권 조선국으로 발돋움했다.(표 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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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2> 70년대 업체현황
연 도 |
공 장 수 |
시설능력 (천GT) |
건조량 (천GT) |
가동율(%) |
최대건조선 (천GT) |
1970 1971 1972 1973 1974 1975 1976 1977 1978 1979 |
152 140 141 143 142 139 118 130 142 153 |
187 190 190 250 1,100 2,390 2,600 2,670 2,770 2,800 |
39 43 50 163 562 612 624 643 769 525 |
20.9 22.8 26.6 65.4 51.1 26.6 26.3 24.1 27.8 18.8 |
12 12 14 126 126 126 126 126 126 12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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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조선 실적 |
우리나라의 신조선 건조 실적은 1960년대 이후 꾸준한 증가를 보여왔으나, 특히 정부가 조선공업을 중화학공업 핵심 산업의 하나로 선정하여 중점적인 지원을 시작한 제3차 경제개발계획기간 중에 급격히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세계적으로 권위가 있는 로이드 선급협회에서 발표하는 세계 신조선 통계를 보더라도 우리나라의 건조 실적이 1973년부터 게재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우리나라 조선공업이 본격적으로 세계시장에 진출하며, 급속히 발전하기 시작한 때가 이 시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조선공업협회가 집계한 우리나라의 신조선 건조 실적은 1973년에 34척에 12천GT, 8백만 달러에 불과했으나, 5년이 지난 1978년에는 208척에, 769천GT, 648백만 달러로 수십 배나 증가하였다. 한편 국내선 대비 수출선의 건조 비중이 매우 높게 나타나고 있어 대부분의 산업이 내수를 바탕으로 성장한 후 수출에 진출한 여타 산업과는 달리 성장 초기부터 수출을 위주로 발전하여 왔다.(표 3 참조) 한편 회사별로는 1974년에 첫 번째 선박을 인도한 현대중공업은 1974년의 건조실적 137,692GT에서 1979년에는 383,762GT로 2.8배 성장하였으며, 현대중공업과 대한조선공사의 건조 실적이 우리나라 전체 건조 실적의 90% 이상을 점유하고 있었다.(표 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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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3> 우리나라의 신조선 건조량 추이
구분 |
국 내 선 |
수 출 선 |
합 계 |
척 |
GT |
천$ |
척 |
GT |
천$ |
척 |
GT |
천$ |
1973 1974 1975 1976 1977 1978 1979 1980 |
29 42 34 44 84 140 97 77 |
10,373 18,519 14,064 302,114 89,478 151,409 221,086 190,482 |
5,619 9,720 8,817 53,039 73,993 104,399 190,216 190,877 |
5 21 13 53 108 68 56 27 |
1,635 201,832 416,003 551,294 553,660 617,525 304,107 464,449 |
2,003 73,552 137,346 298,086 472,396 543,976 372,396 353,436 |
34 63 47 97 192 208 153 104 |
12,008 220,354 430,067 853,408 643,138 768,934 525,193 654,931 |
7,622 83,272 146,163 351,125 546,389 648,375 562,612 544,313 | 자료 : 한국조선공업협회 |
<표4>회사별 신조선 건조실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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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위 :GT |
회사별 |
1973 |
1974 |
1975 |
1976 |
1977 |
1978 |
1979 |
1980 |
현 대 조 공 삼 성 타코마 동 해 대 동 대 선 신 아 부 산 인 천 기 타 |
- 2,980 - - - 2,195 5,628 - 485 - - |
137,692 16,040 - - - 7,390 9,854 1,750 1,950 - 675 |
346,485 61,518 - 1,140 - 11,460 727 2,666 5,881 - 190 |
768,935 53,544 - - 625 19,760 6,070 2,730 447 142 1,155 |
505,568 76,322 - 600 2,529 15,353 16,880 1,670 1,600 908 1,708 |
614,790 116,694 - 1,370 1,599 10,137 8,353 6,841 2,887 2,028 4,235 |
383,762 103,060 - 1,666 3,929 8,292 9,071 5,060 5,731 2,267 2,360 |
518,565 60,448 13,858 252 13,629 23,099 9,365 7,640 4,540 3,135 400 |
합 계 |
12,005 |
220,351 |
430,067 |
853,408 |
643,138 |
768,934 |
525,193 |
654,931 | 자료 : 한국조선공업협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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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조선정책 |
70년대 전반에는 현대의 초대형 조선소 건설, 후반에는 지금의 삼성중공업과 대우중공업의 조선소 건설로 국제 경쟁 체제를 구축하는 한편 시설 확대에 대한 정부의 지원과 계획조선제도 및 연불수출제도의 실시 등 정부의 각종 지원책이 조선산업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즉, 우리나라 조선공업은 이러한 정부 지원에 힘입어. 세계적인 조선 불황으로 시설의 감축 및 도산하는 업체가 증가해온 것과는 대조적으로 발전을 거듭하였으며 60년대만 해도 전근대적인 조선 불모지 상태였던 우리나라 조선산업은 불과 10여 년 사이에 눈부신 발전을 이룩하여 1979년에 수주량기준으로 세계 2위 조선국으로 발돋움하였으며 공업한국의 상징으로 부상됨으로써 조선입국이라는 정책 의지가 짧은 기간 내에 구현되었다. |
(가) 조선공업진흥계획
정부는 선박의 국내 자급률 향상과 국산화율 제고 및 선박 수출을 촉진하기 위하여 1970년 2월에 「조선공업진흥계획」을 수립하였으며 동 주요 시책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제품 수급에 있어서는 1970년에 56,200GT의 선박을 건조하여 이중 2만GT은 수출하고 36,200GT는 국내 공급한다. 자급률은 전년의 18.5%에서 23%이상으로 제고시키며 선박용기관 중 소형엔진과 船外幾는 국내 생산으로 완전 충당하고 중형엔진은 수요의 28%이상을 자급토록 한다. ② 대한조선공사의 최대선 건조 능력을 10만GT급 규모로 확대하는 한편 중소조선업체의 시설을 경제단위화함으로써 국제 경쟁력을 배양한다. ③ 대한조선학회로 하여금 10개종의 표준선 설계도를 제정 보급토록 함으로써 건조기간의 단축과 선가 절하를 꾀하며 관련 공업을 육성시킴으로써 국산화율을 제고시킨다는 것이었다. 정부는 이를 위한 자금 지원으로 재정자금 11.9억 원과 기계공업육성자금에서 8.8억원을 합쳐 총 20.7억 원의 자금을 지원하고 별도로 산업금융채권 판매대전을 재원으로 3천만 원을 설비 근대화에 투입하였다.
(나) 장기조선공업 진흥계획
조선공업은 노동집약적 산업이며, 전후방 관련 산업에 미치는 영향이 큰 종합조립산업으로 우리나라 경제발전을 위하여 가장 적합한 산업 중의 하나로 평가되었다. 당시에 서구 제국의 조선공업은 노임의 급등, 시설의 노후 등으로 사양화의 길로 접어들기 시작하였으며, 일본 역시 노임 등의 문제로 압박을 받기 시작하였다. 반면에 우리나라는 풍부한 저임의 노동력과 조선공업에 양호한 입지조건 등 기본적인 요건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정부는 1973년 3월에 조선공업 육성에 관한 거대한 내용을 담은 ?장기 조선공업진흥계획?을 수립하였다. 조선공업의 육성계획의 목표는 1980년까지 국내수요 선복을 자급하고 320만GT(10억 달러)의 선박을 수출하는 것이었다. 이 목표 달성을 위해 1980년과 1985년의 건조 능력을 각각 545만GT, 920만GT이 되도록 하며, 수출선의 점유비는 1980년에 9.4%, 1985년에 17.2%로 제고되며 또한 1980년에 70만GT, 1985년에 120만GT로 추정되는 국내 수요 선복도 충족시키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를 위해 기존 조선소의 시설을 확장하고 1973년부터 1980년까지 연간 생산 능력 15,000GT, 최대선 건조 능력 6천DWT인 원양어선 조선소 2개소, 연간 능력 25만GT, 최대선 건조 능력 10만DWT인 중형조선소 2개소, 연간 능력 75만~100만DWT의 능력을 보유하는 대형조선소 5개소 등 합계 9개 조선소를 건설하고, 1981년부터 1985년 간 중형조선소 2개, 대형조선소 3개를 추가로 건설하고, 이외에도 수요에 따라서는 원양어선 조선소도 건설토록 되어 있었다. 또한 일정한 지역에 조선소를 집단화하면 정부지원시설, 훈련기관, 문화시설의 공동 이용에 따른 투자 절감과 효율의 극대화 등을 이룰 수 있어 대형조선소의 건설단지로서는 입지조건이 양호한 거제도를 중심으로 충무지구를 조선공업 지구로 정하고 이 지역에 1985년까지 초대형 조선소(연간능력 150만GT) 3개, 대형조선소(연간능력 100만GT) 3개, 중형조선소(연간능력 25만GT) 2개를 건조할 것을 계획하였다. 동 계획에 따라 정부는 1973년 5월에 거제, 충무조선공업단지를 설정?공고하였고, 동년 7월에는 동지구의 기준 지가를 공고함으로써 본격적인 실천으로 이행되었다. 그러나 이처럼 웅대하게 설계된 장기 조선공업진흥계획은 그 초기 단계인 1973년 말의 유류파동 이후 불어닥친 세계적인 조선 불황으로 인해 그 일부는 보류되면서 계획이 수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① 연불수출제도 실시 1973년의 유류파동 이후 조선 불황이 심각해지자 일납불 수출 형태를 취하여 왔던 선박 수출은 세계적으로 연불 수출 형태로 바뀌게 되었으며, 연불 수출 조건도 착수금 비율, 융자기간, 금리조건 등에서 점차 선주에게 유리해졌다. 이러한 연불 수출은 국제 경쟁력을 강화하고 적정 조업량을 확보한다는 차원에서 큰 의미가 있었다. 1976년에는 이전의 한국외환은행 대행체제에서 수출입은행이 설립되면서 본격적인 연불 수출 시대가 시작되었다. 1977년에는 이전의 6년 간 지원총액인 1,258억 원에 가까운 1,152억 원을 지원했으며, 이후에도 연불 수출 자금 수요는 더욱 증가했다. 수출지원금융은 선박 수출에 집중되다시피 하여 전체 대출의 80%~90%를 차지하고 있었다. 1976년 3월29일 연불 수출 금융지원기준을 발표, 중화학공업 연불 수출에 대한 선별 지원을 강화했다. 지원 기준은 융자대상 품목을 선박, 철도차량, 플랜트, 산업기계로 축소하고 연불 조건은 선수금 20%이상(선박은 30%이상)으로 했다. 또 대출 금리는 연 7% 이상으로 하고 융자비율은 연불 수출 선적 전후 융자소요액의 80%로 정했다.(표 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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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5>80년대 연불 수출자금 대출집행실적
연 도 |
수출자금 (A) |
선 박 (B) |
플랜트 |
선박, 플랜트(C) |
기 타 |
점유비(%) |
B/Ax100 |
C/Ax00 |
1980 1981 1982 1983 1984 1985 1986 1987 1988 1989 |
296,280 504,413 634,486 667,903 831,293 840,124 612,850 484,349 533,282 409,631 |
251,691 445,589 492,652 473,114 741,735 675,138 362,054 362,790 438,312 400,407 |
37,996 44,965 135,340 185,599 89,138 161,340 247,541 107,975 94,002 7,24 |
289,687 500,554 627,992 658,713 830,873 836,478 609,595 470,765 532,314 407,649 |
6,593 3,859 6,494 9,190 420 3,646 3,255 13,584 968 1,982 |
84.9 88.3 77.6 70.8 89.2 80.4 59.1 74.9 82.2 97.7 |
97.8 99.2 99.0 98.6 99.9 99.6 99.5 97.2 99.8 99.5 |
자료 : 한국수출입 은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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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계획조선의 추진 계획조선이라 함은 정부의 재정 및 금융지원에 의해 선박을 건조하는 것으로 그 실수요자를 정부에서 선정하여 국내 조선소에서 건조하는 것을 말하며, 1974년 4월의 「외항해운육성방안」과 1976년 3월의 「해운?조선 종합육성방안」에 의해 1975년부터 시작되었으며 1978년 12월에는 「해운진흥법」의 개정으로 법적인 근거를 마련하여 제도화 시켰다. 1974년에 계획된 100억 달러 수출, 수송체제 확립을 위한 「외항해운 종합육성방안」은 1976년~1981년까지 6년 간 외항선 350만GT을 증강할 것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이중에 22.5만GT는 계획조선으로 국내에서 건조하고 125.2만GT는 수입(국적취득조건부나용선 포함)토록 되어있었다. 이러한 계획조선사업은 1976년 3월에 「해운. 조선 종합육성방안」에 의해 보다 현실적이고 구체화되었으며 선복증강계획도 다소 조정되었다. 당시의 여건이 해운업에 있어서는 선복량의 절대부족으로 18%(운임기준)의 낮은 적취율과 수지 악화를 초래하였으며 3차 5개년 계획 기간 중 외항선의 국내 건조는 2%인 반면 수입은 98%로 대부분 중고선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다. 조선업계는 대폭적으로 시설 확장을 하였으나 조선 불황으로 수주량이 급감하여 조선의 육성을 위해서라도 대책이 필요한 시기였다.(표 6 참조) 해운?조선 종합육성정책의 기본 방향은 첫째, 우리 화물은 우리 손으로 둘째, 우리 선박은 우리 조선소가 건조 셋째, 해운업/조선업/화주의 연계육성 넷째, 후방 관련공업의 개발 촉진 다섯째, 해운?조선의 국제경쟁력 강화 등 5가지로 외항선은 수요의 75%, 내항선은 전량 계획조선으로 확보함으로써 조선 불황 시에도 최소 건조량을 유지하도록 목표를 세웠으나 1976년 9월에 계획조선 세부시행계획에 의하여 이들 목표가 조정되었다. 이 계획은 지원 자금의 확보 문제로 당초 해운?조선 종합육성방안의 계획치보다 축소 조정되었다. 계획조선은 표준선형의 개발에 의한 국산대체, 국내 조선소의 생산성 향상 및 설계능력 제고, 각 조선소의 안정적인 가동률 유지를 위한 업무량 확보, 국적선 적취율 제고에 의한 해운의 국제수지 개선 및 운송권 확보라는 여러 목적을 지니고 있었으며, 정책 지원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선박건조에 소요되는 자금의 대부분을 국민투자기금 또는 계획조선자금 등의 내자와 외화대부, 전대차관, 상업차관 등의 외자로 조달했다. 따라서 자기 자금부담율은 컨테이너선이 8%, 기타선이 10%에 지나지 않았으며, 금리도 11%로서 일반대출보다 저리였다. 둘째, 강판 가격의 인하, 물품세, 직물류세, 석유류세 등 내국세의 면제 등을 실시하여 선가의 8% 인하 효과를 거두었다. 셋째, 주요 정책 물자의 수송권을 확보하고 적정 운임율을 보장했다. 제1차 계획조선에 의해 건조된 선박 중 벌크캐리어 선주에게 5년 간 수입비료원료 수송권을 부여했고 운임율도 시장 운임율에 비해 높은 가격으로 계약토록 지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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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6>. 한국 조선/해운 종합진흥계획의 大綱(1976년 32차 경제장관회의) |
A. 자금조달 원칙
자기자금부담비율 |
10%(FULL CONTAINER선 8%) |
차 입 자 금 |
구 분 |
내 자 |
외 자 |
재 원 |
국민투자기금, 산은 기계공업육성자금 |
외자대부, 轉貸借款 |
융자 금액 |
자기자금과 외자를 제외한 금액 |
외자재구입자금 전액 |
융자 비율 |
선종별 국산화율에 따라 상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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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선박수급계획
구 분 |
1976 |
1977 |
1978 |
1979 |
1980 |
1981 |
합 계 |
수요 |
1. 내 수 2. 수 출 (금액:백만$) |
532 600 320 |
540 440 350 |
534 560 450 |
748 750 600 |
820 880 700 |
925 1,140 910 |
3,567 3,770 3,010 |
합 계 |
1,132 |
980 |
1,094 |
1,498 |
1,700 |
2,065 |
7,337 |
공급 |
1. 국내건조 계획조선 기타내수선 수출선 2. 수 입 |
684 74 10 600 448 |
642 192 10 440 338 |
785 217 8 560 309 |
1,010 246 14 750 488 |
1,126 222 24 880 574 |
1,389 223 26 1,140 676 |
4,952 1,100 82 3,770 2,385 | |
C. 1차~6차 계획조선의 연도별 발주 및 소요자금계획
구 분 |
1975 |
1976 |
1977 |
1978 |
1979 |
1980 |
1981 |
합 계 |
발 주 량 |
외항선(천GT) 내항선(천GT) 어 선(천GT) |
74 - - |
175 10 7 |
200 10 7 |
225 10 11 |
200 10 12 |
200 10 13 |
- - - |
1,074 50 50 |
합 계 |
74 |
192 |
217 |
246 |
222 |
223 |
- |
1,174 |
자
금 |
내자(백만원) 외 자(천$) |
6,867 - |
24,359 64,365 |
67,521 105,250 |
74,254 68,100 |
73,800 48,000 |
75,600 41,600 |
29,600 - |
352,001 327,315 |
합 계 |
6,867 |
56,195 |
120,146 |
108,304 |
97,800 |
96,400 |
29,600 |
515,312 | 주 : 1. 1975년은 실적치임. 2. GT당 선가( 외항선 800$, F/C 1,200$, 내항선1,000$, 어선 2,000$) |
D. 선복증강계획
구 분 |
1976 |
1977 |
1978 |
1979 |
1980 |
1981 |
’77~’81 |
외 항 선 |
|
500 |
500 |
500 |
700 |
750 |
850 |
3,300 |
계 획 조 선 수 입 용 선 |
74 176 250 |
175 100 25 |
200 100 200 |
225 150 325 |
200 200 35 |
200 200 450 |
1,000 750 1,550 |
내 항 선 |
계 획 조 선 |
*5 |
10 |
10 |
10 |
10 |
10 |
*50 |
어 선 |
|
27 |
30 |
24 |
38 |
60 |
65 |
217 |
계 획 조 선 기 타 수 입 |
- 5 22 |
7 10 13 |
7 8 9 |
11 14 13 |
12 24 24 |
13 26 26 |
50 82 85 |
합 계 |
532 |
540 |
534 |
748 |
820 |
925 |
3,567 | |
계획조선사업은 1976년 1차 연도에는 외항선 8척을 건조했으며, 2차 연도부터는 외항선과 함께 내항선, 어선 등도 계획조선에 포함하였다. 이후에도 동사업은 꾸준히 지속됨에 따라 우리나라 해운?조선산업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표 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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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7> 70년대 계획조선 발주량 추이
구 분 |
외 항 선 |
내 항 선 |
어 선 |
합 계 |
척 |
천GT |
척 |
천GT |
척 |
천GT |
척 |
천GT |
1차(’76) 2차(’77) 3차(’78) 4차(’79) |
8 17 18 17 |
68 177 246 205 |
- 14 18 44 |
- 8 7 21 |
- 155 78 101 |
- 14 7.6 12.7 |
8 186 114 162 |
68 199 260.6 238.7 | 자료 : 해운항만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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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관련 기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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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선박연구소 설립
중화학공업 육성과 수출 진흥을 위해 정부출연연구소로 설립한 선박연구소는 조선 및 해사 관련 산업과 그 관련 분야의 과학기술 및 경제에 관한 조사, 연구, 개발업무를 종합적으로 수행하여 선진 기술을 도입, 소화하고 자주적인 기술 개발을 수행하여 그 기술을 업계에 보급함으로써 조선공업과 관련 산업 및 방위산업 발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동 연구소는 1973년 10월 한국 과학기술연구소의 부설 연구 기관으로 발족, 1976년 11월에 특정연구기관육성법에 따라 재단법인 한국선박연구소로 되었다.
(나) 한국조선공업협회 설립
두 차례의 유류파동으로 인한 선복수급 불균형과 과잉 조선설비능력 문제가 대두되고 있었던 당시의 심각한 조선환경하에서 정부 당국의 주도로 1977년 7월 19일 사단법인 한국조선공업협회를 설립하였으며 정부의 조선 시책 수립을 위한 자료의 수집, 제공은 물론 전 세계 조선정보를 소상히 파악하여 업계에 알리고 업계와 정부간 원활한 의사소통을 기하여 조선공업의 국제경쟁력을 높이는 역할을 수행하는데 그 설립목적을 두었다. 창설 시 회원사는 현대중공업(주), (주)대한조선공사, 삼성조선(주), (주)현대미포, 코리아 타코마조선공업(주), 동해조선(주), 대동조선(주), 대선조선(주), 부산조선공업(주), 신아조선공업(주)의 10개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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