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학봉이 진주성에서 순직하자 임금이 국풍수를 시켜 묘소를 잡게 안동으로 내려보냈는데, 의성김씨들이 원체 양반행세를 하면서 풍수 대접을 소흘히 하였다합니다.
점지를 하고 천광을 파는데 사진에 보이는 둥근 돌이 나왔는데 그대로 두고 하관을 하는게 맞는데 파내게 하였다 합니다.(깰려고 정을 찍은 형태가 뚜렷하게 남아 있음)
안동에서 도산서원 방향으로 고개를 4km정도 철로를 나오면 첫동네임
<참고>
鶴峰(학봉) 金誠一(김성일)선생
안동이 배출한 名賢(명현) 鶴峯(학봉)선생에 대하여 선생의 문집이나 [鶴峯선생 연구]에 관한 문헌을 통하여서 알아본다.
선생의 諱(휘)는 誠一(성일), 字(자)는 士純(사순), 號(호)는 鶴峯(학봉)이며 諡號(시호)는 文忠公(문충공)이고, 本貫(본관)은 義城(의성)이시다. 中宗(중종)33연 서기1538년 12월 6일 亥時(해시)에 安東郡(안동군) 臨河面(임하면) 川前(내앞)에서 출생하셨다.
선생의 칠대조는 工曹典書(공조전서)를 지냈으며 고조부 休溪公(휴계공)께서는 成三問(성삼문) 河緯地(하위지)등과 同榜(동방)으로 大小科(대소과)에 올라 集賢殿(집현전)에서 문명이 높았다. 증조부 님께서는 成均進士(성균진사)로 臨河縣(임하현)에 살던 吳氏(오씨)에 장가들어 비로소 이 내앞(川前)에 살게 되었다고 한다. 선생의 윗대는 靑溪公(청계공)으로 中宗(중종) 20년 生員試(생원시)에 올라 太學(태학)에 들어가서 河西(하서) 金麟厚(김인후)선생과 같은 방에서 깊이 親交(친교)하였으니 당대의 두 名士(명사)가 文名(문명)으로 稱道(칭도)하였다.
靑溪公(청계공)은 다섯 아들을 낳았고, 모두가 大小科(대소과)에 올랐는데 선생은 넷째 아들이다. 어머니는 驪興閔氏(여흥민씨)로 左議政(좌의정)을 지낸 閔漁隱(민어은)의 五世孫女(오세손녀)이시다.
선생께서는 그 시기의 탁월한 학자이시며, 지극한 愛民(애민) 愛國者(애국자)이셨고 임진왜란 당시 국토의 대부분이 왜적의 말발굽에 짓밟힐 때 御馬(어마)가 북방 변경으로 피난해 國命(국명)조차 받을 수 없는 상태에서도 嶺南右道(영남우도)의 백성을 격려하시어 동란초기의 빛나는 전승을 가져오게 하신 분이다.
선생께서는 6세 때 孝經(효경)을 배웠다고 하며 9세 때 어머님을 여의고 10세 때에 아버지 靑溪公(청계공)께서 學堂(학당)에 보냈다. 선생은 유년시절에 지혜가 출중하고 뛰어난 두뇌는 많은 일화를 남겼는데 지금도 안동지방에 널리 알려져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16세 때 文科(문과)에 올라 洪原縣監(홍원현감)이 되었고 18세에 安東權氏(안동권씨) 部將(부장) 德鳳公(덕봉공)의 외동딸에게 장가드신 뒤 順興(순흥) 紹修書院(소수서원)에 유학하여 글을 읽었으며, 그 후 더욱 학문에 뜻을 두고 陶山(도산)으로가 退溪(퇴계)선생 문하에서 글을 배우니 함께 배우는 선비가운데 鶴峯(학봉)을 앞서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 退溪(퇴계)先生께서는 鶴峯(학봉)을 칭찬하여 말씀하시기를 [金士純(김사순)은 행실이 높고 학문이 정밀하니 나는 아직 그에 비길만한 사람을 보지 못했다.]라고 극찬을 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