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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좌 / 15 박상설
틀을 깨자
1.삶의 대전환
나를 바로 보자
누구나 성공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누구는 성공을 하고 누구는 성공을 하지 못한다.
누구나 성공을 하겠다고 다짐을 하지만 성공을 위해 자신을
바꿀 생각은 하지 않는다.
누구나 부자가 되길 원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부자가 될 수 없는 습관을 갖고 산다.
그러나 그 습관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
변화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럴 사한 이유를 들어 변명한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변명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직장·학교선생님과 각종 책이나 언론에서도 변화하라고 달구친다. 여러 성공 사례를 들어가면서 왜 변하지 않는가? 성화를 댄다.
한편으로는 욕심을 버리고 현실에 만족하라고 한다. 결국 이렇게 하여 스스로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우리가 지금의 조건과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이야기 한다.
그냥 그렇게 살다가 갈 거라고···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본심은 아닐 것이다.
1.작은 차이가 큰 차이를 만든다.
2.모든 사람의 마음에 들려고 하면 정체성을 잃는다.
3.자신을 의심하고 새로운 호기심을 만들자.
4.서로 격려하고 동기부여를 하자.
5.자신을 객관화하자.
6.비즈니스에선 영원한 친구도 적도 없다.
7.악재는 가까운 주변사람들로 부터 온 다.
8.잘나갈 때 위기는 찾아 든다.
9.문화수준의 차이가 삶의 차이.
10.소박한 삶의 몸과 마음의 부자.
행동습관이 운명을 바꾼다
다음 두 권의 책은 한국인의 문화적 의식구조를 진단한 책이다.
이 책에서 ‘한국인의 미운 쪽 얼굴’ 즉, 우리가 고쳐야 할 부분을 추려서 싣는다.
책 이름: ·한국인, 가치관은 있는가(홍사중: 조선일보 논설 고문)
·한국인에게 문화는 있는가(최준식: 이화여대 한국학과 교수)
*집을 못 떠나는 한국인 *내 가족 만 중요시 *내 새끼 유일주의에 망가진 교육현장
*우리를 너무 좋아하는 우리 *남을 배려하지 않는 *혼자 있기가 두려운
*윗사람은 체면을 아래 사람은 눈치를 *아래위를 따져야 시원한
*남과 다른 것을 못 참는 *낮선 것을 두려워하는 *불확실성 회피심리
*열 잘 받고 화 잘 내는 *신명에 둘 째 가라면 서러운 *감 잡는데 귀신인
*검증 없는 비과학적 사고체계 *유연성이 부족한 *노는 데는 귀신인
*무질서 의식 *대강 대강 괜찮아 적당주의 *대중심리에 휘 말리는 몰지각
*실험 없는 삶 *우물 안 개구리 *허풍과 허장성세 *교양·매너·예의 부족
*너무나도 화끈한 종교 문화 *집안과 집 밖에서의 이분구조생활.
지금까지 ‘잘살아보자’고 앞만 보고 달려 왔지만 이제는 철저하게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우리 것은 무조건 좋은 것이여’하는 사고는 객관적이지 못한 아전인수 이다. 우리 자신과 우리 문화에 대한 진정한 비판과 사랑하는 의식 없이는 올바른 ‘세계화’(정치·경제를 포함한 문화의 Grand theory, 그리고 Entropy 증가 일로의 문명성찰)는 불가능 하다. 세계 속에서 공인되는 우리의 문명수준과 녹색생활의 행복 척도로 가늠하되 공동생활을 보다 품위 있게 누릴 수 있는 국민 개개인의 의식구조의 향상이 제일 시급한 과제이다. 밖에서 찾지 말고 답은 우리 안에 있다. 틀을 깨자!!
2.촌놈으로 산다
주말에, 야영하며 산에 가고 호미질하며
나는 정장차림을 싫어한다. 등산복캐주얼의 작업복을 늘 입는다. 칼날 같은 바지 주름, 반질반질한 구두코, 목을 조르는 넥타이 차림은 질색이다. 매일 머리카락을 면도날로 밀어낸다.
자연에 뒹구는 졸옹卒翁에게 무슨 꾸밈이 필요한가?
나는 86세의 산 꾼이다. 한 가지의 전문 분야로는 인생을 폭넓게 체험할 수 없기 때문에 공학을 전공하고도 인문․사회․과학 등의 나와 다른 남의 분야를 넘나들며 엿본다.
주말에는 두 배의 좋은 시간을 갖기 위해 주말레저농원 캠프를 내 나이 40세 때에 마련하여 46년간을 이어 오고 있다. 주중에는 일에 파묻혀 꼼짝도 못하다 주말에는 농원으로 도망쳐, 산에 오르고 밭을 일구며 자연바람을 쏘인다.
촌놈으로 사는 시간이 왜 이리도 좋은 것인가?
비닐캠프를 적시는 빗소리!! 오래된 사연들 한갓지게 떠돈다.
물소리, 새소리, 호미질이 즐거워 혼자인 나는 둘이 되고 싶어진다.
나는 텐트 속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 ‘죽음 전에 고통을 겪어 자유로운 넋을 얻기 위해’ 대지와 함께 먹고 잔다. 나태해지기 쉬운 편리한 집을 버리고 思惟와 고독을 즐기는 쪽으로 산다. 이런 생활이 그지없이 좋다. 살아있되 편안함을 찾는 노년의 삶은 사는 것이 아니라 권태로운 삶이라고 여긴다. 자연이 주는 맑은 공기와 대지의 생명력과 나와 뒤엉켜 캠프에서 한 몸이 된다.
행동하는 자유인
나는 어김없이 매주 한 번 이상 등산, 캠핑, 여행, 농사일을 한다.
다듬어진 등산길보다는 장애물 경주 같은 산행이 흥미진진하고, 편리한 집보다
는 야생의 캠핑이 찡하다. 삶은 자연을 아끼고 이용하는 과학의 기술이다.
숲이 부르는 소리··· 그냥 바람이 좋고 산마루가 그립다.
나무 가지사이로 비쳐드는 봄 햇살··· 실바람 한 자락··· 훌훌 멀리 떠돈다.
가파른 언덕을 마주하고 한판 승부한다. 유일한 무기는 죽고살기로 기어오르는 오기뿐이다. 나의 얼굴은 번데기요, 다리는 후들대지만 한발 한발 옮기는 발끝과 땅의 반력이 천연한 생명이다. 나이들 수록 더 열심히 일하고, 더 많이 움직이는 모든 시간은 약이 되고 내가된다. 죽는 날 까지 몸을 혹사하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유희로 세상의 숨은 뜻이 조금은 알 것 같다.
교양과 지식, 지성을 통합한 거시가치巨視價値grand theory 행동으로 삶을 경영한다. 격식에 억매이지 않는 그러나 추호도 흐트러짐 없이 세세한 눈으로 낮선 곳을 탐한다. 겉핥기 캠핑, 산행, 농사가 아닌 자연을 통해 삶의 방식을 낚아 올리는 시스템을 구축한다.
시스템은 삶을 자동화시킨다. 산을 통해 철없는 아이들처럼, 사소한 일에 연연하지 않는 의연毅然함으로 지식보다는 감성으로, 꾸밈보다는 내용으로 시스템에 길을 묻는다. 산과 자연은 인간이 정복할 수 없는 숭엄崇嚴한 경지이다. 인간은 자연의 한낱 낙엽에 불과하다는 것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삶’은 말로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직접 행동하는 것이다. 우리가 산을 찾고 밭을 가꾸는 이유는 원초적 자연인으로 돌아가려는 인류의 오랜 꿈이다.
3.자연은 치유이다
자연이 사람을 만든다
자연중심의 삶은 마음이 넉넉해지고 모든 근심걱정이 덜어져 개울물소리에 잠든다. 또한 벅찬 자유와 감성, 열정, 삶의 고마움으로 구름. 산마루, 노을, 숲에 허리 굽혀 절한다. 안개 속을 휘청거리고 호젓한 밤길을 떠돌며 별을 헤아리는 길 떠남이 사람을 만든다. 가정, 학교, 직장의 교육은 그때뿐이며 개인의 행동양식까지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지 못한다. 그 이유는 자연과 단절된 폐쇄적인 주입식 폐단 때문이다. 배우고자 하는 주인 의식이 자연스럽게 우러나와야 한다. 사람은 원초아적 본능 속에 억압을 싫어하고 자연의 품안에 안기려는 본성이 있다.
삶의 품격은 여가시간이 주는 선물이며, 품위 있는 교양, 정체성, 세련된 문화생활, 건강도 같은 맥락에서 만들어진다. ‘인생보험’과 ‘노후보험’은 주말레저농원의 머슴살이로 살 일이다. 인간은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 자연속의 순수무구純粹無垢 한 섭리攝理에 맞추어 살 때 세상에서 더없는 평온平穩을 얻는다.
내게는 달리 길이 없다.
가정의 굴레를 활짝 헐고
자연에서 자유롭게 뛰노는 해맑은 순진한 바보로 살 일이다.
노년을 자유롭고 힘차게 살려는 공격적 욕심으로 나는 26년 전부터 홀로 산다.
이와 같이 사는 이유는 다음과 같은 철학을 근본으로 한다. 자연이 사는 방식을 마음속으로 새기고 다듬어서 내가 살아야하는 행동을 그런 쪽으로 모아간다.
저질문화를 멀리하고 상부구조문화와 자연과 연동하는 창조의 삶을 제일로 삼는다. 가족 간에도 서로 소유가 아닌 각자가 스스로 자립하여 반짝이는 초월적 존재로 소통하며, 서로 부담을 주 지 않고 존중하는 개별화의 삶으로 행복을 나눈다. 자연이 스스로 존재하는 생태계의 이치를 功力을 들여 배워내어 인생을 단순화시킨다. 사랑과 행복을 위하여 결혼해 가족을 이루지만, 삶의 근본적 존재이유를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면 결혼의 상투성에 평생 매여 고생한다.
자녀를 어렸을 때부터 ‘주말레저농원’의 들판이나 또는 인공시설이 없는 순수자연에서 자유롭게 야생마로 놀게 하는 戱曲 같은 자유의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 부모의 의무이며 자격이다. 이런 생활을 위해서는 부모가 앞서가는 先行 認知學習을 몸에 익혀 행위 하는 지성의 PD가되는 것이다.
문화 빈곤이 가난을 대물림
‘부르디외’가 주창한 자연취향의 ‘구분 짓기’ 문화자산이 상부구조의 품격 있는 삶을 만든다는 실증된 매뉴얼을 일상생활에 흐르게 하여야한다.
늦잠을 자는 사람,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가족이나 남에게 떠넘기는 사람, 집안일을 하지 않는 것을 당연시하는 남자들, 하루 종일 남편의 퇴근시간만을 기다리는 부인들, 맹목적 자식사랑에 빠져 자아정체성을 잃은 부모, 사회성이 결여된 방황하는 젊은이, 결혼을 앞두고 갈등에 빠져든 젊은이, 상실감에서 허우적대는 중년, 짜증만 부리는 철없는 자녀 등 일일이 열거할 수 없지만 그릇된 습관을 가진 사람들은 자연중심의 치유 ‘Hearing 프로그램’을 신주로 모셔야 할일이다.
게으름이 게으름을 낳고, 나쁜 습관이 못된 습관을 돌려막는 악순환의 고리는 무덤까지 같이 간다.
그럴 사한 인생성공 담, T.V에 나오는 기막히게 재미난 재치 넘치는 강의 모두 소용없다.
방법은 오직 한 가지 뿐!! ‘자연은 치유이다’ 오직 행동 뿐!!
4.소박한 삶의 풍요
정년은 없다. 오늘이 제일 젊은 날
공부 중의 공부는 나의 발견이다. 나는 노년을 살고 있다. 사람은 나이를 먹어 늙어가는 것뿐 아니라 대우받고, 동정 받고, 주저앉아 있는 가운데 더욱 늙어간다. 정년퇴직의 올가미를 벗어나 죽음에 이르기까지 현역으로 뛰어야 한다.
젊은이의 공부는 30, 40년 후의 바람직한 자기를 만들어가는 작업이다. 젊을 때부터 노후준비를 위해 자연중심의 취향문화에 중독되는 길 외는 방법 없다.
산행은 우리 생활을 간결한 삶의 방식으로 바꾸어준다. 실용성, 절약정신을 심어주며 검소한 인간으로 만든다. 그러나 1년에 한번밖에 쓰지 않는 물건을 쌓아둔다던가 외식이나 의복, 치장 등으로 낭비하는 일은 없게 된다. 그런 돈과 시간은 책과 산행, 여행에 유용하게 쓰여 진다. 일신상의 쾌락과 남 따라하는 유행과 허영심에 허비하던 가족구성원이 산행과 씨 뿌리고 가꾸는 노동을 통해 그 습관이 없어졌다. 재미있고 마음을 잡아주는 땀방울의 고마움을 두고 다른 오락거리에서 흥미를 느낄 수 없는 맑은 풍요로움이다.
중고 양복을 사 입고 결혼식 치러
나는 옷 구두 레저용품과 생활 용품을 중고품으로 구입해 쓴다.
60년 전 결혼 할 때도, 넝마중고시상에서 조금도 부끄럼 없이 당당하게 ‘권색 양복’(속칭, 세비로)을 사 입고 식을 치렀다. 남들은 새 시랑이어서 당연히 새 정장 옷을 입었으리라고 속았을 것이다. 이런 행동은 돈을 아끼는 마음 외에도 사치와 거품에 저항하는 유쾌하고도 마음이 가벼워지는 멋스런 반란이다. 이런 것이 인문학이 목표로 하는 기술이다.
남이 아닌 자신과의 경쟁에서 이기려면 절약으로 자신을 낮추는 겸손과 자연에 뒹구는 극기 훈련이 효자이다. 산행은 고생을 사서하는 움직이는 명상이며 무력했던 사람도, 망설이던 사람도, 용기가 부족한 사람도 감성이 넘쳐 활기차게 생활하게 된다. 공허감, 상실감을 들판에서 실험한다. 우리의 인생은 단 한 번뿐이다.
내일보다 오늘이 젊다. 지금이 바로 기회다. 산처럼, 강물처럼, 망망한 바다처럼 제 스스로 그러하듯 우리 일상도 자연에 거슬리는 짓을 자재하여 궁극적으로 자연에 기댄다.
5. 스스로 처벌받는 담금질
생존 놀이
나는 고된 산행과 캠핑을 통하여 자아에 대한 의식이 싹트면서 내가 나를 살게 하고 내가 나를 믿게 되었다.
사람은 ‘자기애自己愛’에 빠져 자기 자신에 집착한 나머지 자신의 자아에 대하여 길들이고 훈련시키려 하지 않는다. 즉 인간은 자기 자신을 스스로 처벌(채찍질, 노력, 인내 등)하지 않는다. 바로 여기에 함정이 도사리고 있고, 인간의 비애가 자라난다. 인생에 성공한 사람은 항상 스스로를 성찰하고, 처벌하여 죗값을 스스로 치러가며 치열하게 살아간다.
내가 나에게 가혹하리만큼 담금질을 하는 것이다. 그 담금질은 이제껏 살아온 집이나 직장 내에서는 살아온 습관화된 속성 때문에 거의 불가능하다. 따라서 지금까지의 속성 화된 틀을 벗어나 넓은 자연에 나가 자연과 맞서 ‘서바이벌 게임survival game’을 하는 것이다. 이 서바이벌 게임은 자연이 우리에게 처벌과 흥미(재미와 고생)를 동시에 갖게 하는 놀이이며 훈련이다. 인생을 긴 안목으로 설계하고 시야를 넓게 폈을 때 종착역은 결국 자연으로 돌아가리라! 삶의 고향은 내가 태어나 자란 강원도나 경상도가 아니고 '자연' 자체이며 또한 삶은 '여행'이다.
사람의 몸은 다리부터 약해진다고 한다. 중병에 걸리거나 극도로 노쇠하면 단 한 걸음도 스스로 걷지 못한다. 걸을 수 있다는 것은 위대한 것이다.
이 교훈을 항상 간직하고 걷지 못하면 기어서라도 산책한다. 노쇠와 투병이란 병이나 쇠잔衰殘과의 싸움이 아니라 자신과의 싸움이다. 육체적인 건강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마음의 평온에서 우러나오는 총체적인 삶의 건강을 추구한다. 근육질만 키우는 것이 건강인가?
자연과 가족과 함께하는 건강가족 가사일 같이하기에 앞장서야한다.
사치와 게으름, 고정관념과 형식에 얽매였던 사람이 서바이벌게임을 통해 소박한 자연인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캠핑은 삶의 축소판으로 온 식구가 같이 삶을 해결하며 행동하는 소꿉놀이 게임이다. 람보를 방불케 하는 탐험, 공격 적 게릴라 산행으로 길 없는 길을 가는 것이다. 그 길은 막힐 때도 있지만 가다 보면 결국 그 길은 자신이 만들어 가는 길이다. 사람은 취미를 먹고산다. 그 취미에 몰입하는 즐거움 속에 건강의 보배는 묻혀 있다.
자유의 기본은 홀로서기
생활을 각자 스스로 챙긴다. 가족의 존재 이유는 맹목적 사랑이 아니라 합리적이며 초월적인 사랑으로 즐거운 나의 집을 만들 일이다.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냉정한 사랑이 진짜의 사랑이다. 사람은 서로가 지니고 있는 다른 풍경에 끌려 사랑하게 된다. 다른 풍경이기에 멋진 것이다.
나의 조상은 내가족보다도 사회가 먼저라는 공공성公共性 사고로, 내 가족에게만 매몰되어 좁고 옹졸한 삶에 구속되지 아니하는 서로 가족의 짐을 내려놓고, 넓은 세상을 향해 거침없이 나아간다. 이렇게 되려면 온 식구가 독립적 생산자로 자립하는 시스템훈련을 쌓아야한다.
나는 26년 전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누워서 죽을 것인가, 걸어서 살 것인가를 곰곰이 생각했다. 눕지 않고 캠핑과 산행을 계속한 끝에 지금 기적같이 살고 있다. 말하자면 스페어 인생이니 그저 고맙기만 하고, 그래 자유인이 된 까닭이기도하다. 나는 틈만 나면 텐트를 싸 짊어지고 아무데나 발길 닿는 대로 달리고, 걷다가 야영을 한다.
2년간 해외 오토캠핑여행을 할 때 엉뚱하게도 1인용 텐트를 휴대하고 미국 - 캐나다 - 알라스카, 네팔 - 인도, 유럽 여러 나라, 그리고 일본- 중국 등을 캠핑으로 열 배를 더 즐겼다. 물론 죽도록 고생했고 초라한 음식에 몰골은 말이 아니었지만. 모름지기 이게 바로 발로 뛰는 행위문화이다. 그때 사귄 지구촌의 수십 명의 사람들과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편지교류를 하고 있다. 이게 다 캠핑 덕택이었다. 이 모든 것은 자유에의 갈망, 그리고 방랑벽을 채워주는 멋지고, 통쾌하고, 유쾌한 삶의 신선한 충격이 아닐까?
유연한 사고
험준한 대자연 속에서의 ‘담백한 삶simple life’은 인위적인 매체 없이 나를 순수한 자연에 투영, 객관화시켜 내가 나를 발견하게 되는 고귀한 시간인 동시에 내가 나를 비울 수 있는 무아의 경지이기도 하다.
왜 이런 일이 가능할까? 그것은 산 속에서 만나는 숲, 계곡의 물소리, 이름 모를 산야초, 이끼 낀 바위, 맑은 새소리, 낙엽 떨어지는 소리, 문명과 동떨어진 눈 덮인 산야, 나의 발자국소리, 이 모든 것이 나를 소스라치게 하는 놀라운 힘을 지닌다. 일상생활을 통해 소중히 여겨왔던 나의 사사로운 일들이 이런 것들에 비하면 하잘것없는 것들이라 여겨지는 여백의 시간. 아! 이것이 바로 우리들을 둘러싸고 있는 하고 많은 허구와 무가치를 깨우치게 하는 힘을 지닌다. 인간은 누구나 어머니로부터 태어났지만 이제 우리는 새롭게 산에서 태어나는 찰나이다.
때때로 죽음을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그 위에 당신의 삶을 설계하십시오.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십시오.
죽음의 기로에 서 있음을 안다면
한층 인생의 무게가 더해질 것입니다.
어떤 바보라도 사과 속 씨는 헤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씨 속의 사과는 자연만 압니다.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과 자연에 맡겨져 있고,
그래서 사람은 자연에 순응하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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