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학회 발표 때문에 주말에 집을 떠나있었는데, 그 사이 또 다른 흥미진진한 논의의 장을 마련해 주셨네요. ^^ 감사드립니다. 결과적으로 제가 쓴 글에 다시금 꼬리말이 아닌 긴 글을 그것도 두 편이나 덧붙이는 것이 쑥스럽기도 합니다만, 제기해주신 문제를 통해 진행되는 논의의 방향이 저로서는 참으로 생산적이라고 생각되기에, 그에 대한 감사의 예를 갖춘다는 차원에서 다시 올립니다.
------------------------------------------------------------------------------------------
여러 가지 흥미로운 주제를 언급해주셨지만 제가 볼 때에는 크게 두 가지 문제가 제기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1. 첫 번째 문제는 “선함과 악함, 좋음과 나쁨, 나아가 옳바름과 그름의 구별에 어떤 식으로든 관계 맺지 않고 과연 '정치적인 것'이 기능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김남시님의 구절에 잘 압축되어 있습니다. 이는 최근의 정치철학 논쟁에서 매우 중요한 질문이지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김남시님과 저의 입장은 “나아가”라는 부사에서 결정적으로 갈리는 것으로 보입니다. 제 악트글에 대한 논평 이래 꾸준히 김남시님께서는 명확하게 “도덕적”인 선/악의 개념에 근거하지 않는, 예를 들어 칼 슈미트와 같은 무/탈가치적인 “파시스트”와 어울리는 ‘좌파’란 어불성설이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계십니다. 실지로 2000년대 초반 이후, 특히 프랑스 내에서 좌파의 대표적인 철학자로 여겨지는 발리바르가 슈미트의 홉스론 번역판에 서문을 쓴 것을 둘러싸고 프랑스 지식사회에서 한동안 논쟁이 일기도 했지요.
김남시님께서 쓰신 것처럼 이러한 입장은 “선함과 악함, 좋음과 나쁨”의 구분이란 “옳바름과 그름”이라는 견해를 유지합니다. 좌파란 도덕적으로 볼 때 선한 편에 서있(어야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미국의 헤게모니적 세계지배를 '나쁜 것, 좋지 않은 것' 이라고 보는 가치적 판단“이 없다면, 다시 말해 그들이 악이고 그에 대한 비판을 수행하는 우리가 선이라는 확신이 없다면 그에 대한 비판은 사상누각이라는 것이지요.
미리 말씀드리지만, 저는 이러한 입장을 (좌파)“도덕주의”로 환원시키면서-“미국인들을 모두 ‘악’으로 몰고 있지 않은가!?!”- 스탈린주의와 파시즘의 교환가능성을 옹호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보다 저의 질문은 “선함과 악함, 좋음과 나쁨”에서 “올바름과 그름”으로 ‘나아가’는 것, 그 둘 사이의 매끄러운 이행이 그렇게 자연스러운 것인가라고 묻는 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이러한 구분을 제가 선호하는 좀 더 고전적인 용어로 바꾼다면 선(the Good)과 정의(Justice)의 구분이 될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최근까지 이 둘은 거의 구분되지 않고 호환가능한 것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둘 사이의 명백한 개념적, 구조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스탈리니즘이 나찌즘과 등치되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독일의 ‘역사가 논쟁‘이나 영미권의 ’전체주의 논쟁‘, 그리고 프랑스의 신철학자들 역사가인 퓌레가 약 15년에 걸쳐 완성한 맑스주의와 프랑스혁명에 대한 해석의 전쟁이 그 매개역할을 했죠. 이 지독한 개념의 전투 속에서 사라진 개념을 저는 ’정의‘라고 봅니다. 단일한 것으로 파악되는 대문자 정의(Justice)를 “전체주의적”이라고 비판하면서 정의란 다수로 존재하고, “다수성 그 자체가 정의”라고 주장했던 료따르의 주장이 그 결정적인 지점이었죠 (료따르의 이 책은 원제(<Au Juste>)보다 번역된 영어제목(<Just Gaming>)이 더욱 탁월한 보기 드문 예입니다) 정의가 물러난 후,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이 ’선‘입니다. 이놈이 그놈이고 그놈이 이놈처럼 보이는 이 둘 사이의 미묘한 차이를 포착하고 개념화하는 것이 저는 절대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이 작업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 것이 인권 담론입니다.
선과 정의와 인권. 이 삼자의 관계는 어떻게 변형 되었을까요? 시간 관계상 짧게 말씀드리자면, 인권담론의 옹호자들은 대개 정의를 얘기하지 않습니다. 고통을 줄이고 더 많이 다친 희생자를 돕는 데에 ’정의’라는 거창한 개념은 필요치 않죠. (자신들이 쏘아 보낸 미사일에 떨어져 나간) 이라크 아이를 치료하는 미군 의무병의 사진이 웅변하는 기호는 ‘정의’가 아니라 ‘선’일뿐입니다. (백의의 천사란 “정의의 용사”가 아니라 정치적 적대관계에 무심한 “선한” 존재로 표상됩니다) 이라크 민중을 위해 수행된 것으로 어느 샌가 바꿔치기 된 이라크전쟁이 ‘선한 전쟁‘으로 프레이밍된 것은 이러한 맥락입니다. 그것은 전통적인 도덕적 가치의 이분법과 상충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선‘을 통해 ’정의‘라는 문제가 전치(displace)됨으로써, 후자에 필연적으로 내포되는 이해관계의 ’정치적‘ 상충과 긴장들은 교묘하게 제거됩니다. 나아가 이러한 작업 자체가 갖는 정치적 효과 역시 소거되지요. 그것은 “인도적” 개입일 뿐, 정치적 선택이 아닙니다. 언제 끝날지 알 수없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일방적인) 관계 역시 전자가 끊임없이 ’홀로코스트’를 호출하고, 그를 통해 자신들의 역사적 고통을 “도덕적”으로 절대화하는 한- 히틀러는 “EVIL”입니다- 당분간 영속할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문제는 악트 글의 각주와 제가 앞에서 인용했던 The Nation지의 기고문에서 명백히 언급되는 것처럼, 하버마스가 “독일” 철학자로서 그가 끊임없이 확인하는 이스라엘에 대한 도덕적 죄의식을 강화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요소입니다. 하버마스가 독일의 제1차 걸프전 참전을 지지했던 가장 큰 근거중 하나가 이스라엘에 생화학무기를 사용할 수도 있다는 사담 후세인의 경고성 멘트라는 것은 그 자신도 인정하는 얘기입니다. “독일”(만의) 좌파(라고 하기 힘들어진 인물)인 하버마스의 “친미” 주의가 “이스라엘”이라는 매개항과 갖는 내재적 관계는 자신의 인도주의 옹호가 도덕보다는 법적인 근거에 의존하는 것이라는 하버마스의 주장을 옹색한 것으로 만들 뿐입니다.
김남시님께서는 후기 데리다와 하버마스의 입장이 거의 비슷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만, 이 둘에 대한 이해라는 차원에서 역시 김남시님과 저는 갈라서는 것으로 보입니다. 보라도리(^^)가 서문을 썼던, <테러 시대의 철학>에 관한 둘의 입장 차이에서도 드러나는 것이지만, 데리다가 “정의”의 개념과 “도덕”적인 것을 구분하려 애쓰는 반면, 하버마스는 좀 전에도 말씀드렸듯 “법”을 전경화하는 척하면서 그것의 도덕적 성격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물론 데리다가 이스라엘과 미국의 정책에 비판적인 것은 그가 유대계이기 때문이고, 하버마스가 그렇지 못한 것은 그가 (하필이면) 독일인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스라엘을 비판하는 독일인“이라는 이미지가 즉각적으로 불러일으키는 홀로코스트와의 연관관계를 생각할 때 아무래도 하버마스가 불리하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저는 어쩌면 바로 그러한 근거에서 하버마스가 도덕적으로는 선하다고 여겨질지 모르나 정의롭지 못하다고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러가지 제한상 여기서 저의 “정의론”을 자세하게 논의할 수는 없지만, 이는 가장 근본적인 의미에서 정의되는 것으로서의 정의란 도덕적 선이 일종의 기득권이 되었거나 그러한 기능을 수행하게 될 때 그것을 과감하게 위태롭게 할 수 있는 것, 바따이유를 살짝 비틀면 죽음에 이르는 위기를 겪어낼 때에만 드물게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미국에서 통용되는 의미에서 하버마스가 “정치적으로 옳(politically correct)”다는 말과 같으며, 그것은 그가 예를 들어 랑시에르와 같은 철학자가 정의하는 의미에서의 “정치(la politique)”보다는 “치안(la police)”의 유지를 목표로 삼는다는 얘기와 같습니다. 하버마스는 근본적으로 (미국의) 민주주의를 옹호하는, 자신과 같은 “부르주아 자유주의자“일 뿐이라는 로티의 견해에 하버마스가 발끈하지 않았던 것은 친미주의라는 단순한 차원이 아니라, 이러한 맥락에서 정확하게 이해되어야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911이후의 세계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뇌관 중 하나가 다름 아닌 이스라엘이라는 사실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으려 한다면 말입니다.
미국에 대해 데리다와 하버마스가 취하는 정치적 입장의 차이는 김남시님께서 말씀하셨듯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그리” 크지 않은 거리와 차이의 정치적 함의를 섬세하게 구분하는 것은 “선”과 “정의” 사이에 놓인 실같은 차이에서 무저갱의 크레바스를 발견해내는 작업과 연결되어 있는 것일지 모릅니다.
2. 첫 번째 문제에 대한 이야기가 생각보다 길어지긴 했지만, 두 번째로 언급해주신 유럽지식인들의 “친미주의” 역시 저는 이러한 자장 안에서, 다시 말해 제가 “좌파의 내파“라고 이름붙인 맥락에서 이해하는 편입니다. 토크빌을 언급하셨지만, 레이몽 아롱이나 루이 뒤몽, 그리고 끌로드 르포르와 같은 철학자들에 의해 간간이 그 명맥을 이어오던 그에 대한 관심이 70년대 신철학자들의 매개를 거쳐 80년대의 프랑스 (내부의 관점에서 평가되는) 철학의 대표 기수랄 수 있는 르노와 페리, 그리고 앞에서도 언급했던 퓌레와 같은 역사가를 통해 그가 화려하게 부활한 시기를 ”토크빌 시점“이라고까지 부르니까요.
김남시님께서 잘 지적해 주셨듯 자신의 작업이 미국에 대한 찬양가로 들리는 것을 토크빌이 염려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그가 ”비판적“인 지식인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조국인 프랑스가 미국과 같은- 그가 선취한 니체의 표현을 살짝 바꾸면- 양떼처럼 몰려다니는 군중의 나라가 되는 것을 그가 두려워했기 때문이었죠. 물론 80년대에 귀환한 토크빌이 전해준 미국의 이미지는 부정적인 것이 거세된 긍정적인 것에 국한됩니다. 전체주의적인 것, 초월적인 것, 단일한 모든 것에 반대되는 것, 즉 민주주의적인 것, 내재적인 것, 다수적인 것의 구체적 현현으로 이해되지요. 70년대 말 80년대 초, 크리스테바와 그의 남편인 솔레르스가 앞다투어 미국을- 말 그대로- ”찬양“하고, 푸꼬가- 일말의 아이러니 없이- 프랑스 요리보다 ”코카콜라와 좋은 클럽 샌드위치만큼 좋은 게 없“다고, ”물론 아이스크림도 함께 말입니다“라고 인터뷰에서 말했던 것보다는 철학적이지만, 언급하신 들뢰즈의 ”친미주의” 역시 크게 보면 이러한 맥락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는 게 저의 견해입니다. 그것을 베르그송적인 의미에서 “잠재적(virtuel)"인 것, 혹은 베버적인 의미에서 "이념형(Ideal Typus)"으로 제한함으로서 단순한 환원적, 정치적 독해와 거리를 둘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여전히 로티가 ”미국의 계관시인“으로 읽어내는 휘트먼이 썼던- 데리다의 표현을 다시 비틀면- ”미래의 미국(les Etats-Unis à venir)“에 대한 찬가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3. 한 발 더 나아가서 얘기하자면, 요즘 들어 저는 지금 이 시대에 미국에 대해 사유한다는 것은 어쩌면 에드먼드 버크와 토크빌과 칸트와 헤겔과 워즈워스가 프랑스대혁명에 대해 사유했던 것과 같은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와 근접하는 주제의 글을 읽거나 쓸 때 항상 이를 의식하지요. 올해 중 언젠가 이를 다듬어 세상에 내놓게 되면, 그 때 역시 김남시님과 함께 좋은 논의를 함께 할 수 있게 되기를 고대해 봅니다. 더불어 다시 한 번, 소중한 시간을 할애해 마련해 주신 풍성한 논의의 장에 감사하다는 말씀 전합니다.
ahjabie
첫댓글 정치철학에 관심이 전혀 없었는데..예술이 사회를 반영하므로 삶이나 그저 오롯이 떼어내어 담고 싶었던 이 부족한 지망생도 이 고통스런 생을 깊이 사유하기 위해 선, 정의 그런 것에 이끌려 정독했습니다.. 읽고보니 윗글도 읽고.. 저도 무지를 깨우치고 생각도 좀 열어 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부드럽고 깊은 저 사유를대하니. 두 분의 말씀이 감상자도... 곱고다, 고 느꼈습니다. 배우겠습니다.......^^
오르트님의 오롯하고 '달콤한' 활약이 눈(과 혀?!)에 띄는 요즘입니다. ^^ 부드러운 자극이 되었다니 저 역시 감사할 따름이네요. 좋은 작품 향해 전진하시길 기원합니다.
아쟈비님, 잠시 저희의 대화에 대한 메타적 진술을 허용한다면, 정말 저는 이 대화가 '즐겁'습니다. 그건 그를통해, 아쟈비님도 그러길 바라면서, 제 기존의 사유들이 새로운 사유와 문제들에로 나아갈 수 있는 멋진 디딤돌들을 얻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대화의 생산적 가능성에 대한 하버마스^^의 신뢰를, 몇 차례의 실망과 환멸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공유하는 편입니다. 아쟈비님이 제기하신 핵심 문제인 '선과 정의 사이의 틈'을 저는 "가치들의 분화와 주관화"라는 맥락에서 다루어 보고 싶습니다. 님께서 언급하신 현대적 논쟁이 일어나기 훨씬 이전에 Justitia가 Veritas를 대신해 더 주요한 가치로 등장하게 된 역사
, 문화적 배경이 존재하였고, 나아가 그 Justitia 조차도 다만 '공평한 분배'의 문제로 형식화되는 과정 - 저는 이것이 도상학적으로는 '눈을 가린 Justitia"의 등장과 관련 있다고 생각합니다. - 을 살펴보려던 저의 오랜 문제 의식이 님과의 대화를 통해 재생되었기 때문입니다. '선과 정의, 자비'를 그 속에 함께 함축하고 있던 '진리' 대신 '정의'라는 가치가 주요하게 대두하게 된 데 - 저는 이것이 유럽의 바로크 시대를 전후로 이루어졌다고 보는데 - 엔 다른 한편 '진리의 주관화'의 문제가 작용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문제를 Max Scheler가 1900년대 초에 니체의 도덕의 계보학과 관련해 쓴 Ressentiment에 대한 논문을 관련시켜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거기에서 그는 '인권'의 문제를 - 막스 쉘러의 표현대로 하자면 '보편적 인간애' - 니체가 말했던 '노예적 도덕'의 등장과 관련시키면서 그것이 어떻게 그가 비판적으로 고찰하고 있는 '가치의 주관화'의 귀결이기도 한 가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는 우리의 문제를 사유하는데 중요한 출발점이 됩니다. 오늘날 정치를 둘러싼 문제가 이라크 전쟁을 주도하는 부시 행정부에 의해서도, 또 그를 비판하는 좌파들에 의해서도 함께 내세워지고 있는 '정의'의 '공허화와 형식화'에서 생겨나고 있다면, 그리고 우리의 과제가 '탈정치적인', 그래서 이데올로기적인 선 혹은 '인도주의 Humanism'와 '정의'의 문제를 구분하는데
있다면, 이러한 논의는 반드시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님께서 날카롭게 지적해 주셨듯 이는 오늘날 '미국'에 대해 사유하는 문제와 떼어놓을 수 없겠지요. 며칠전 부시가 의회의 고문금지 법안에 대해 '국가와 국민의 안보'를 내세우며 거부권을 행사했던 데에서도 아감벤, 데리다 등이 제기하는 오늘날 정치의 문제는 고스란히 발현되고 있으니까요. 다른 한편 저는 우리가 주의깊게 사유해야 할 그 대상 중에 프랑스, 특히 '사르코지' 현 대통령을, 오늘날 어떻게 정치가 미디어화되고 있는가라는 문제와 관련해 최소한 2차 문헌 정도의 위치로라도 추가시키고 싶습니다. 이미 사르코지에 대한 책을 써 출간한 알랭 바디우나 Michel Onfray 같은 철학자들의
논의가 그 출발점이 될 수 있겠지요. 이 모든 "거창한" 아이템들은 물론 시간을 두고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저는 그때 아쟈비님의 지금과 같은 생산적 '개입'이 계속 이루어 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짧게나마, 더딘 화답가라도 적어야 한다는 며칠간의 생각을 드디어 실행에 옮깁니다. 1.1 Justitia와 Veritas의 경쟁구도와 이에 대한 도상학적 차원의 논의에 대한 말씀이 흥미롭습니다. 파노프스키가 이에 대해 쓴 글이 있던가요 ? (개인적으로 미술에 대한 논의는 유학 후, 그러니까 예전처럼 이름 모를 작가들의 들죽날쭉한 작품들을 거의 매주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지 못하게 되면서부터 애도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는 슬픈 사실을, 다시금 확인합니다. 홍대클럽씬과 독립영화계의 생성/부흥시기보다도, 적어도 제 개인에게 너무나 생생했던 그 허름한 몇몇 갤러리들,
초기의 사루비아나 대안공간 풀, 혹은 포럼A의 초기 세미나들이 제공해주던 미술계의 날 선, 그 날 것의 느낌은 그러나, 여전히 제 가슴을 뛰게 합니다...) 1.2. 지적해주신 것처럼 선과 정의와 진리에 대한 논의는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지요. 김남시님께서는 ‘가치의 주관화’를 언급하셨지만- 이 부분은 사실 글에서 조금 시사를 할까 하다가 이 글에서는 아예 접기로 마음을 먹었던 것인데 여기서 짧게 적자면- 그러한 논의는 굵직한 전쟁 혹은 혁명과 같은 격변의 시기와 병렬해 이루어져 왔다는 것이 제 기본 시각입니다. 인권과 전쟁권, 주권의 개념이 얽히고 설키는 과정에서 선과 정의의 개념은 자리를 바꾸고 그동안 먹었던, 혹은
참고 있었던 것들을 토해내지요. 김남시님께서도 그러시리라 믿지만 저는 어느 것이 더 먼저냐라는 비생산적인 방향의 논의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습니다. 그보다 제가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일반적으로 역사적 배경(historical background) 혹은 맥락(context)으로 환원, 혹은 ‘일축’되면서 속류 (경제/역사/정치) 환원론을 강화하는 ‘매혹적인’ 요소들과 칸트가 ‘가능성의 조건(Bedingungen der M?glichkeit)’이라고 부른 것을 어떻게 구분하느냐, 아니 전자로부터 추출해 다시 역사 안으로 가지고 들어오느냐, 그를 통해 궁극적으로 ‘역사’라고 불리우는 것에 대한 이해와 그에 대한 우리의 관계 맺음 방식 자체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라는 것입니다. (‘운동-이미지’의 위기란 결국 2차대전이라는 역사적 외상의 (논리적) 결과일 뿐이라는 들뢰즈의 영화론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나 폼페이의 발굴이 빙켈만과 부르크하르트 뿐 아니라 괴테까지 이태리 여행을 보내고 초기낭만주의자들을 매혹시켰던 유럽의 고고학적 고전주의를 ‘만들어냈다’는 ‘상식’들이 대표적인 예지요) 1.3. 막스 셸러는 말씀하신 ressentiment, 무엇보다 수치(shame)라는 토픽과 관련해서 관심을 가져 왔습니다만 깊이 있게 읽을 시간을 갖지는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김남시님께서 그의 이름을 언급하신 것을 보고 저는 무릎을 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 물론, 실지로 무릎을 치지는
않았습니다...) 그것은 제가 가지고 있는 한 원로 미국 문학 평론가의, 그리 잘 알려지지 않은 저서의 제사로 쓰인 한 구절이, 제 논문의 논의에 아주 핵심적인 것이었던 지라 거의 외우고 있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번역됩니다. "진정한 비극은 정의라는 관념이 그보다 높은 가치들의 파괴로 이어지는 것으로 보일 때 발생한다." 물론 이것은 막스 셸러가 쓴 것인데, 이를 몇 십 년 후 어느 글에서 다시 인용한 사람이 바로-예, 그렇습니다- 로티입니다... 다시 강조하자면 여기에서도 저의 관심은 그걸 최초로 언급했던 사람이 누군가라는 것보다는 그러한 지적이 반복되는 과정과 그 차이들입니다.
어떤 의미에선 유행 속에서 영원을 보고, 영원 속에서 찰나를 보았던 보들레르적인 관심이라고 할 수도 있을테구요. 2. 바디우가 사르코지론을 책으로 냈다는 것은 김남시님 덕분에 알게 되었습니다. (한동안 최근 한국사와 유럽낭만주의론에 파뭍혀 지냈던 지라 ‘세상일’을 좀 등한시했죠. ^^) 2월에 독일어로도 출간된 것을 보고서는 역시 유럽이군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구요. 하지만 문제의 몇몇 인터뷰와 기사를 읽어보니 말 그대로 도발적인, ‘급진’좌파의 허황됨이 느껴지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사르코지보고 ‘페뗑’이라니요 ?! ^^) 하지만 이와 별개로 제가 사르코지에게 흥미를 가지고 있는 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를 갖습니다. 68의 유산에 대한 그의 공개적인, 무엇보다 ‘도덕적인’ 비판과 그것이 프랑스에서 만들어낸 논쟁이 그 하나이고, 그가 장관으로 임명한 베르나르 쿠슈네라는 인물이 다른 하나입니다. (조만간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풀어낼 공간이 있을 것입니다) 3. 저의 게으름으로 인해 아직 기대만큼 생산적인 매듭을 만들어내지는 못했지만, 저 역시 김남시님 덕분에 다시 끄집어내 ‘발랄하게’ 줄치며 다시 읽고 정리한 책들이 제 책상에 여전히 쌓여있습니다. ^^ 환절기 감기 조심하시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