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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요논평 ** 선(善)과 정의(正義) 사이의 틈
ahjabie 추천 0 조회 280 08.03.12 15:31 댓글 15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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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8.03.13 18:10

    첫댓글 정치철학에 관심이 전혀 없었는데..예술이 사회를 반영하므로 삶이나 그저 오롯이 떼어내어 담고 싶었던 이 부족한 지망생도 이 고통스런 생을 깊이 사유하기 위해 선, 정의 그런 것에 이끌려 정독했습니다.. 읽고보니 윗글도 읽고.. 저도 무지를 깨우치고 생각도 좀 열어 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부드럽고 깊은 저 사유를대하니. 두 분의 말씀이 감상자도... 곱고다, 고 느꼈습니다. 배우겠습니다.......^^

  • 작성자 08.03.21 15:57

    오르트님의 오롯하고 '달콤한' 활약이 눈(과 혀?!)에 띄는 요즘입니다. ^^ 부드러운 자극이 되었다니 저 역시 감사할 따름이네요. 좋은 작품 향해 전진하시길 기원합니다.

  • 08.03.13 17:22

    아쟈비님, 잠시 저희의 대화에 대한 메타적 진술을 허용한다면, 정말 저는 이 대화가 '즐겁'습니다. 그건 그를통해, 아쟈비님도 그러길 바라면서, 제 기존의 사유들이 새로운 사유와 문제들에로 나아갈 수 있는 멋진 디딤돌들을 얻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대화의 생산적 가능성에 대한 하버마스^^의 신뢰를, 몇 차례의 실망과 환멸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공유하는 편입니다. 아쟈비님이 제기하신 핵심 문제인 '선과 정의 사이의 틈'을 저는 "가치들의 분화와 주관화"라는 맥락에서 다루어 보고 싶습니다. 님께서 언급하신 현대적 논쟁이 일어나기 훨씬 이전에 Justitia가 Veritas를 대신해 더 주요한 가치로 등장하게 된 역사

  • 08.03.13 17:31

    , 문화적 배경이 존재하였고, 나아가 그 Justitia 조차도 다만 '공평한 분배'의 문제로 형식화되는 과정 - 저는 이것이 도상학적으로는 '눈을 가린 Justitia"의 등장과 관련 있다고 생각합니다. - 을 살펴보려던 저의 오랜 문제 의식이 님과의 대화를 통해 재생되었기 때문입니다. '선과 정의, 자비'를 그 속에 함께 함축하고 있던 '진리' 대신 '정의'라는 가치가 주요하게 대두하게 된 데 - 저는 이것이 유럽의 바로크 시대를 전후로 이루어졌다고 보는데 - 엔 다른 한편 '진리의 주관화'의 문제가 작용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문제를 Max Scheler가 1900년대 초에 니체의 도덕의 계보학과 관련해 쓴 Ressentiment에 대한 논문을 관련시켜

  • 08.03.13 17:44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거기에서 그는 '인권'의 문제를 - 막스 쉘러의 표현대로 하자면 '보편적 인간애' - 니체가 말했던 '노예적 도덕'의 등장과 관련시키면서 그것이 어떻게 그가 비판적으로 고찰하고 있는 '가치의 주관화'의 귀결이기도 한 가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는 우리의 문제를 사유하는데 중요한 출발점이 됩니다. 오늘날 정치를 둘러싼 문제가 이라크 전쟁을 주도하는 부시 행정부에 의해서도, 또 그를 비판하는 좌파들에 의해서도 함께 내세워지고 있는 '정의'의 '공허화와 형식화'에서 생겨나고 있다면, 그리고 우리의 과제가 '탈정치적인', 그래서 이데올로기적인 선 혹은 '인도주의 Humanism'와 '정의'의 문제를 구분하는데

  • 08.03.13 17:50

    있다면, 이러한 논의는 반드시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 08.03.13 17:55

    님께서 날카롭게 지적해 주셨듯 이는 오늘날 '미국'에 대해 사유하는 문제와 떼어놓을 수 없겠지요. 며칠전 부시가 의회의 고문금지 법안에 대해 '국가와 국민의 안보'를 내세우며 거부권을 행사했던 데에서도 아감벤, 데리다 등이 제기하는 오늘날 정치의 문제는 고스란히 발현되고 있으니까요. 다른 한편 저는 우리가 주의깊게 사유해야 할 그 대상 중에 프랑스, 특히 '사르코지' 현 대통령을, 오늘날 어떻게 정치가 미디어화되고 있는가라는 문제와 관련해 최소한 2차 문헌 정도의 위치로라도 추가시키고 싶습니다. 이미 사르코지에 대한 책을 써 출간한 알랭 바디우나 Michel Onfray 같은 철학자들의

  • 08.03.13 17:58

    논의가 그 출발점이 될 수 있겠지요. 이 모든 "거창한" 아이템들은 물론 시간을 두고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저는 그때 아쟈비님의 지금과 같은 생산적 '개입'이 계속 이루어 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 작성자 08.03.21 15:05

    짧게나마, 더딘 화답가라도 적어야 한다는 며칠간의 생각을 드디어 실행에 옮깁니다. 1.1 Justitia와 Veritas의 경쟁구도와 이에 대한 도상학적 차원의 논의에 대한 말씀이 흥미롭습니다. 파노프스키가 이에 대해 쓴 글이 있던가요 ? (개인적으로 미술에 대한 논의는 유학 후, 그러니까 예전처럼 이름 모를 작가들의 들죽날쭉한 작품들을 거의 매주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지 못하게 되면서부터 애도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는 슬픈 사실을, 다시금 확인합니다. 홍대클럽씬과 독립영화계의 생성/부흥시기보다도, 적어도 제 개인에게 너무나 생생했던 그 허름한 몇몇 갤러리들,

  • 작성자 08.03.21 15:06

    초기의 사루비아나 대안공간 풀, 혹은 포럼A의 초기 세미나들이 제공해주던 미술계의 날 선, 그 날 것의 느낌은 그러나, 여전히 제 가슴을 뛰게 합니다...) 1.2. 지적해주신 것처럼 선과 정의와 진리에 대한 논의는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지요. 김남시님께서는 ‘가치의 주관화’를 언급하셨지만- 이 부분은 사실 글에서 조금 시사를 할까 하다가 이 글에서는 아예 접기로 마음을 먹었던 것인데 여기서 짧게 적자면- 그러한 논의는 굵직한 전쟁 혹은 혁명과 같은 격변의 시기와 병렬해 이루어져 왔다는 것이 제 기본 시각입니다. 인권과 전쟁권, 주권의 개념이 얽히고 설키는 과정에서 선과 정의의 개념은 자리를 바꾸고 그동안 먹었던, 혹은

  • 작성자 08.03.21 15:07

    참고 있었던 것들을 토해내지요. 김남시님께서도 그러시리라 믿지만 저는 어느 것이 더 먼저냐라는 비생산적인 방향의 논의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습니다. 그보다 제가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일반적으로 역사적 배경(historical background) 혹은 맥락(context)으로 환원, 혹은 ‘일축’되면서 속류 (경제/역사/정치) 환원론을 강화하는 ‘매혹적인’ 요소들과 칸트가 ‘가능성의 조건(Bedingungen der M?glichkeit)’이라고 부른 것을 어떻게 구분하느냐, 아니 전자로부터 추출해 다시 역사 안으로 가지고 들어오느냐, 그를 통해 궁극적으로 ‘역사’라고 불리우는 것에 대한 이해와 그에 대한 우리의 관계 맺음 방식 자체를

  • 작성자 08.03.21 15:07

    어떻게 바꿀 것인가라는 것입니다. (‘운동-이미지’의 위기란 결국 2차대전이라는 역사적 외상의 (논리적) 결과일 뿐이라는 들뢰즈의 영화론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나 폼페이의 발굴이 빙켈만과 부르크하르트 뿐 아니라 괴테까지 이태리 여행을 보내고 초기낭만주의자들을 매혹시켰던 유럽의 고고학적 고전주의를 ‘만들어냈다’는 ‘상식’들이 대표적인 예지요) 1.3. 막스 셸러는 말씀하신 ressentiment, 무엇보다 수치(shame)라는 토픽과 관련해서 관심을 가져 왔습니다만 깊이 있게 읽을 시간을 갖지는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김남시님께서 그의 이름을 언급하신 것을 보고 저는 무릎을 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 물론, 실지로 무릎을 치지는

  • 작성자 08.03.21 15:11

    않았습니다...) 그것은 제가 가지고 있는 한 원로 미국 문학 평론가의, 그리 잘 알려지지 않은 저서의 제사로 쓰인 한 구절이, 제 논문의 논의에 아주 핵심적인 것이었던 지라 거의 외우고 있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번역됩니다. "진정한 비극은 정의라는 관념이 그보다 높은 가치들의 파괴로 이어지는 것으로 보일 때 발생한다." 물론 이것은 막스 셸러가 쓴 것인데, 이를 몇 십 년 후 어느 글에서 다시 인용한 사람이 바로-예, 그렇습니다- 로티입니다... 다시 강조하자면 여기에서도 저의 관심은 그걸 최초로 언급했던 사람이 누군가라는 것보다는 그러한 지적이 반복되는 과정과 그 차이들입니다.

  • 작성자 08.03.21 15:08

    어떤 의미에선 유행 속에서 영원을 보고, 영원 속에서 찰나를 보았던 보들레르적인 관심이라고 할 수도 있을테구요. 2. 바디우가 사르코지론을 책으로 냈다는 것은 김남시님 덕분에 알게 되었습니다. (한동안 최근 한국사와 유럽낭만주의론에 파뭍혀 지냈던 지라 ‘세상일’을 좀 등한시했죠. ^^) 2월에 독일어로도 출간된 것을 보고서는 역시 유럽이군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구요. 하지만 문제의 몇몇 인터뷰와 기사를 읽어보니 말 그대로 도발적인, ‘급진’좌파의 허황됨이 느껴지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사르코지보고 ‘페뗑’이라니요 ?! ^^) 하지만 이와 별개로 제가 사르코지에게 흥미를 가지고 있는 것은 크게 두 가지

  • 작성자 08.03.21 15:09

    이유를 갖습니다. 68의 유산에 대한 그의 공개적인, 무엇보다 ‘도덕적인’ 비판과 그것이 프랑스에서 만들어낸 논쟁이 그 하나이고, 그가 장관으로 임명한 베르나르 쿠슈네라는 인물이 다른 하나입니다. (조만간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풀어낼 공간이 있을 것입니다) 3. 저의 게으름으로 인해 아직 기대만큼 생산적인 매듭을 만들어내지는 못했지만, 저 역시 김남시님 덕분에 다시 끄집어내 ‘발랄하게’ 줄치며 다시 읽고 정리한 책들이 제 책상에 여전히 쌓여있습니다. ^^ 환절기 감기 조심하시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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