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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어머니 이업순님은 1905.6.10.고창군 부안면 사창 외갓집에서
아주 귀염받고 태어 나셨답니다
외할머니께서는 아주 부잣집 무남독녀 였는데 결혼한지 16년이나
되어서야 32살에 우리어머니를 낳으셨답니다
그때 어머니네 외갓집은 100 가구가 넘는사창은 물론 그근처 에서는
가장 큰부잣집 이었다고 했습니다
본채를 둘러싼 좌우측과 앞쪽은 일꾼들의 (머슴) 집이었다고 했습니다
일꾼들은 4집이나 되었다고 했습니다
외할머니는 그근처에서는 제일로 부자인 의령남씨집 무남독녀 외동딸
이었기에 날마다 좋은 옷을입고 살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논일은 물론 밭일한번도 해보지 안았다고 했습니다
열여섯 동짓달 눈이 많이오는날 동갑인 외할아버지와 결혼을 하셨답니다
사창에서 멀지안은곳인 알미장터 옆동내에서 아주 가난하게 살았던
외할아버지네 집에서는 아들을 부잣집으로 장가보낸덕에 공짜로
논밭도 여러두락을 벌었기에 그근처 에서는 모두들 부러워 했다고 합니다
선자도 (토지세) 안내니 해마다 논도사고 밭도 삿드랍니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순종황제와 동갑인 1874년생 이었다고 합니다
우리 어머니가 1905년 생이니 외할머니와는 31살 차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어머니 말씀은 열여섯에 결혼을 하였기에 남들같으면 자식새끼를
대여섯은 낳았을 것인데 왜그랬는가 모른다고 했습니다
아마도 외할아버지가 못먹고 가난하게 끄니를 굶고 살으셔서 야와서
(여위어서) 그런성 싶다고 하셨습니다
그후 우리어머니와 두살 터울인 이모 이민순님을 낳으셨답니다
그리고는 외할머니는 애기를 더낳을수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외할아버지께서는 작은딸이 7곱이레가 다가기전에 금산군수로
발령이나서 금산으로 가버렸기 때문이었 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어렸을때 일꾼네집이나 동내 누구네 집에서 아들을
낳은것을보면 그것이 제일로 부러웠다고 하셨습니다
지프라기를 왼손으로꼰 두툼한쌈줄 가운데에 빨간고추 3개가
끼어있는걸 보면
(신생아가 태어났으니 방역상 출입을금지 해달라는 표식)
가슴이 울렁거리고 말도못하게 부럽기만 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집문앞을 하루에도 몇번씩 가보곤 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어머니도 얼른 고추달린 남동생을 낳아주었으면
하고 어린 중정에도 (마음에도) 간절히 간곡히 빌었드랍니다
그러나 그것은 소녀 우리 어머니 이업순님의 한가닥 희망이고
영원한 소망일 뿐이었습니다
외할아버지는 34세에 금산군수로 금산에가서 자기는 공부하느라고
장가를 미쳐 못갔다고 거짓말을 하고는 금산에서 큰부잣집딸인
임씨네 집으로 새장가를 갔다고 했습니다
그때는 전화나 핸드폰도없고 군수나리가 총각이라면 믿을수밖에 없었던
시절이기에 그거짓말이 통할수 있었을것 같았습니다
새각시는 사창 외할머니보다 키도 훨씬크고 날씬하고 아주 예뻣다고 했습니다
우리어머니 말씀은
순종황제와 동갑인 전주이씨는 초시만 합격하면 군수로 내보내 주었다고 합니다
외할아버지 이희학씨는 전주에가서 시험을봐서 초시를 합격하고 과거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그법이 새로 생겨나서 과거를 안보고도 바로 군수로
발령이 났다고 했습니다
금산 외할머니는 아들3 딸5등 8남매를 낳았다고 합니다
우리어머니 말씀은 앞뒤가 잘안맞고 신빙성이 많이 떨어지는 말이지만
우리 외할아버지는 금산군수 17년 완주군수 3년을 하시고나서 늙으셔서는
정읍 소성면 춘수리로 이사 오셔서 소성면장을 5-6년 하셨다고 했습니다
10여년전 초등학교 동창이고 동갑인 외사촌 동생인 상영이의
안내로 처음으로 외할아버지 산소에 성묘를 갔었습니다
금산 외할머니와 합장을 해놓은 잘가꾸어진 큼지막한 묘에는
큰묘비에 큰글씨로 금산군수 이희학 이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 상영아 저금산군수는 가짜다이 가오가있지 어떻게 군수를하고
면장을 한다냐 내가 85년도에 김해교도소에 출장같다 오면서
금산군청에가서 확인했느데 역대 군수명단에 조선사람과
일본사람 이름이 다있어도 이희학 할아버지는 몇번을
훝어보아도 없드라 아마 군청에서 계장이나 과장을 한것같아 "
했더니
" 나도 그려 군수하다가 면장을 한다는것이 형말데로 좀그려이 "
했습니다
우리 어머니가 살아계실때도 이문제로 나와 어머니는 근10번정도
충돌한일이 있었습니다
제생각에는 어머니 말씀에 모순점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금산군수를 한자리에서 어떻게 17년이나 할수있었을까?
" 군수를 하다가 체면이있제 어떻게 면장을 한단가 아마 군청에서
과장이나 한것같어 내가 금산군청에 가봤는데 어머니네 친정아버지
이희학씨는 역대군수 명단에없어 내가몇번을 훝어봤는데 없드라니까 "
" 이런 썩은놈좀봐 또 그것같고 또 속뒤집네이 사창사람 춘수리사람
부안촌 사람들도 다아는디 왜 늬놈만 그려어 "
하셨습니다
" 그러면 내가 금산에가서 군수명단을 복사해갖고 올께이 "
" 야이놈의 새끼야 사창살때도 일꾼들이 심바람가면 (심부름 ) 사탕이랑
사탕가리랑 (설탕) 먼멋을 (여러가지) 한보따리씩 갖고왔어야 이놈아 "
우리 어머니는 87.8.29. (음7.6) 돌아가셨기에 저와의 충돌은 무승부
였습니다
춘수리와 우리동내 부안촌은 약250m 정도 거리이기에 서로가 궂은일이든
좋은일이든 훤하게 잘알고 살았답니다
궂은일은 금산외할머니가 면장님인 외할아버지에게 무슨 트집을 잡아서
싸웠다는 일이고
좋은일은 금산 외할머니가 또애기를 낳았다는 일이었답니다
우리 어머니는 시집가기전 어릴때부터 금산 외할머니가 동생을 낳았을때는
사창 외할머니가 서로상극 이면서도 꼭정읍에가서 꼭 제일로 비싸고
좋은미역을 사갖고 오셨다고 했습니다
우리어머니는 언제나 미역을갖고 뛰다싶이 춘수리에 갖고갔다고 했습니다
춘수리에가면 졸망 졸망한 것들이 한핏줄 이라고 안겨붇기에 볼태기도 비비며
그것들의 머리도 빗겨주고 업어도 주면서 한나절씩 놀다가 왔다고 했습니다
제일 맞이인 만주 이모는 (사춘기때 총각 일꾼과 금반지와 돈을훔쳐서
만주로 도망갔기에 만주 이모라고함)
우리 어머니를 잘따르고 죽고못살게 (아주좋아함) 좋아 했답니다
배는 달라도 언니라고 우리 어머니를 따라올려고 울고 불고해서 데리고와서
우리집에서 우리 어머니와 꼭껴안고 하룻밤을 자고나면 언제나 아침에는
밥도먹기전에 꼭일꾼이 데리러와서 업고갔다고 했습니다
일꾼등에 업혀가면서도 언제나 대문앞 서리감나무 아래까지 고개를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면서 쳐다보면서 가는것을보면 안쓰럽고 짠했다고 했습니다
본처와 후처인 두외할머니 끼리는 친척집 잔치에서 만나도 서로 상주하면서
(적대시) 말은물론 쳐다도 안보고 지냈지만 우리 어머니와 춘수리 어린것들은
아주 정답게 잘지냈다고 합니다
그후에는 우리 큰누나와 동갑이고 한반인 금산외할머니의 6째인 철영이 이모는
공부도 잘하고 싸움도 잘했던 우리큰 누나한테 수시로 머리끄댕이가 잡히고
디지게 두들겨 맞았다고 했습니다
그이유는 언제나 우리집 흉을보고 우리논에 해꼬지를 (나뿐짓) 해서였답니다
오죽했으면 우리 어머니는 큰누나에게
" 금산 외할머니가 너 앵기기만하면 (걸리기만하면) 가만 안둔다고
헌다고헝게 인자 철영이를 뚜들지 (때리지) 말거라이 "
하니까
" 그년이 초순이네 식구들은 다잡어먹어 버리고 싶다고 안허는가
그리고 우리 못자리에다 새금파리나 (사기그릇 깨진것) 돌맹이나
막대기를 꼭 집어던진게 그년을 뚜둘제 (구타) 가만있는데 뚜둔단가? "
" 그리도 이몬게 자꼬 뚜둘면 못써이 "
" 그깐년이 먼이모여 작은각시 딸이제 공부도 하나도 못하는년 "
춘수리에는 큰누나랑 한반인 친척도있고 철영이 이모까지 3명이 있어서
그이튿날이면 해꼬지한것 흉본것을 금방알았다고 했습니다
소성국민학교 16회중 여학생은 6명인데 우리 큰누나가 가장 예쁘고
공부도 제일 잘했다고 했습니다 (졸업은 철영이모까지 4명이 했다고함)
솜씨좋은 새내 이모와 줄포 외숙모덕에 옷도 제일로 고급으로 잘입고
다녔다고 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큰누나 에게입힐 옷감인 비단같은것을 줄포 외숙모가
종이에 적어서주면 그이튿날바로 사왔다고 했습니다
큰누나는 자기새끼 사랑이 끔찍했던 우리 아버지덕에 다른사람들은
구경도 못하는 쌀15되값인 털목도리를 두개씩을 갖고다녔다고 했습니다
한개는 목에 두르고 한개는 발시렵다고 발밑에 두툼하게 깔았드랍니다
그래서 다른사람들은 털목도리를 만져도보고 둘러도 보면서 모두들
부러워 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런걸보면 우리 아버지는 그어려운 시절에도 참대단한 열정파 이기도
했던것 같습니다
부지런 하시고 영리하셔서 살림도 우리집보다 나으셨던 오동촌 작은아버지는
몇번이나
" 초순이란년을 멀라고 돈퍼드려서 핵교에 보내는가 몰라이 우리예순이는
나허고 하루에 가마니는 한죽씩 (열장) 짜는데이 "
하시면서 우리 아버지를 나무라면
" 내걱정말고 동상 걱정이나 허소이 "
하면서 일축을 (무시) 하였드랍니다
집에와서 우리 아버지가 어머니한테 그말을하면
" 아이고등신 풍장하네이 명심보감인가 대학소학에 새끼나면 공부시키지
말라고 써있든 갑네이 "
하였드랍니다
그러던중 큰누나가 국민학교에 다닌것이 참으로 잘했다고 증명된것은
큰집 해완이형님이 강제로 남양군도에 징용가서 근1년만에 집으로
편지가 왔을때 였답니다
할아버지한테 매를맞으면서 수십년간 공부를 하셨다는 큰아버지께서는
한문만 아셨지 한글을 몰랐기에 편지를 못읽었 드랍니다
큰아버지보다 공부를 훨씬 조금밖에 못하신 우리아버지는 한글을
잘알기에 춘향전이나 장화홍련전을 잘도읽으시는데 왜인지 모르겠습니다
답답하니 큰어머니께서 편지를 가지고 우리집으로 오셨드랍니다
한글을 잘아시는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가 더듬더듬 초벌을 읽어드리니
큰어머니 께서는 눈물을 흘리시면서 몇번이고 계속읽어 달라고
하시드랍니다
그러던중 우리 큰누나가 어디서 놀다가 집에오니 어머니가 더듬거리면서
읽으시던 편지를 받아갖고
" 고국에계신 부모님전상서 부모님 만수무강 하온지요 소자해완은 몸성히 "
등등을 서너번을 읽어 드리고나니 큰어머니가 큰집으로 가자고 하드랍니다
할머니 큰아버지 형수님 세째누나 (우리 누나보다 한살 더먹은 언니)
어린 해권이형 해일이형을 앉혀놓고 두장짜리 편지를 또두번을
읽어주었 답니다
큰아버지는 담배만 잡수시며 아무말도 안하시는데 할머니께서는
" 아이고 내강아지가 팬지를 다읽을 줄알고 다키웟네이 "
하시면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드랍니다
그소식이 오동촌 작은집에도 전해졌기에 해완이형님 편지가온 뒤로는
작은아버지가 우리 아버지를 안볶아 먹었답니다 (어머니 말씀)
금산 외할머니는 춘수리에서 250리가넘는 금산 친정집에 한번씩 갈려면
춘수리에서 정읍을 거쳐서 전주근처에서 하룻밤자고 또어디 어디서자고
간다고 했습니다
친정 마을까지 어쩔때는 두밤도자고 세밤도 자면서 갔다고 했습니다
가다가 비라도 만날때는 3-4일 걸리는때도 있었드랍니다
그때는 대중교통인 버스가 없었기에 큰돈을 들여서 가마나 인력거를
탄다면 모를까 걸을수밖에 없었답니다
춘수리에서 30리길인 부안 줄포까지가서 사갖고온 여러가지 건어물과 젓갈등
이곳의 특산품등을 금산 산골짜기까지 짊어지고 가야하기에 항상 일꾼두명이
함께갔었고 쌀 반찬 조고만 무쇠 솥단지 저녁에잘때 덮을것까지 지게에
짊어지고 다녔다고 합니다
요즈음 내가 70리터 배낭에 텐트와 침낭 코펠 버너 쌀 반찬 커피 께스등을
넣어갖고 지리산이나 덕유산 설악산에 다니는것과 비슷했을것 같습니다
그렇게 춘수리에서 잘살던중 금산 외할머니가 친정에 달포 (45일) 정도
나들이간 사이에 외할아버지께서는 금산 외할머니가 시집올 때부터
데리고온 20살된 몸종을 (하녀) 외할아버지가 건드려서
(우리 어머니말은 상관해서) 임신을시켜 버렸드랍니다
그래서 우리 어머니네는 형제는 총11남매 입니다
11남매의 족보는
1.본처 사창 외할머니 : 2녀
2.후처 금산 외할머니 : 3남5녀
3. 3처 군산 외할머니 : 1남
1905년생 우리 어머니 이업순님 부터
1940년생 이종기 외삼촌까지 입니다
(2020년 현재는 영자이모84세 종기삼촌81세 두분만 생존중 입니다)
우리 어머니가 결혼한 다음해인 1921년봄에
금산 외할머니가 친정에 갔다오니 몸종인 군산 외할머니가
(출산후 우리집에서 3년간 살았던 군산외할머니는 우리외할머니가
오래전부터 군산에서 다니면서 우리집에서 항상밥도먹고 외할머니
방에서 함께잠도자고 다니던 바늘 여러물감 등을파는 방물장사를
통해서 군산으로 시집을 보냈기에 군산 외할머니임)
수시로 대밭이나 또망에가서 (변소) 헛구역질을 하면서 토를 하고오니
금산 외할머니는 집히는데가 있어서 헛청 광으로 끌고가서 손발을
새끼줄로 단단히 묶어놓고 큰소리로 악을쓰면서
" 너이년 입덧남것을 바른데로 말하거라 이잡어 먹을년 "
하면서 인정 사정없이 매타작을해서 언제적 언제부터 어떻게 저떻게의
사실 관계를 전부자백을 받았드랍니다
그소식을 그날오후에 절친한 춘수리 임씨네 숙모님한테듣고 외할머니께
(임씨 숙모는 임씨인 금산외할머니 사촌동생의 부인인데 예의 범절을
꼭가리시던 우리어머니는 자기보다 두살덜먹은 그분을외숙모님이라고
깍듯이 예우해주면서 가깝게 지냈음)
그이야기를 해드렸더니
" 큰일났다 그것을 금산것이 놔두것냐 그것은인자 요절나것다 요절나것어
하여간 지집좋아허는 (여자) 늬애비가 큰문제다 문제여 "
하시면서 그것을 (몸종) 걱정을 하시드랍니다
춘수리 것들이 어떻게 되어가는가 궁금했던 외할머니께서는 우리 어머니에게
자꾸 춘수리 소식을 들어보고 오라고 하시드랍니다
우리 어머니가 춘수리에 가봤으나 밥도굶기고 헛청 광에다가 가두어 놓은것
밖에는 알수가 없었답니다
그난리가 난후3일째 되는날 외할아버지께서 우리집에 오셨드랍니다
한해전 음력 3.16. 큰딸인 우리어머니 결혼하는날 외할아버지께서 혹시라도
결혼식에 갈까봐서 금산외할머니와 여러번 싸움을을 했드라는데
금산 외할머니는 우리 어머니 결혼식 며칠전부터 외할아버지의 옷이란옷은
전부빨래통 물속에 담가버렸다는 소리가 들리드랍니다
솜이든 명주옷이나 두루마기등은 친척인 대서물 아짐네집에 숨겨 놨다고하는
소문도 들었드랍니다
그래서 큰딸 시집가는것도 참석못했던 외할아버지가
자기 집에서 뒤어지게 쥐어뜯기고 얼굴까지 할큄을 당한체 기가팩죽고
후줄한 옷을입은체 오래간만에 우리집에 오셨드랍니다
(우리 어머니말은 멧3년만에)
외할머니께서는 그런 사건이 난것을 잘알지만 일절모른체 했답니다
그리고는 사위 먹인다고 줄포 단골집 에서사온 알이든 큰굴비도굽고
외할아버지께서 전에 좋아하시던 여러가지 반찬을 걸게잘 장만해서 밥을
차려주니까 몇끼를 못먹었는지 가반을 (더먹는것) 했다고 했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군수도하고 현직 면장인 친정아버지가 몇끼니나 굶었는지
배고파서 동냥아치같이 (거지) 허겁지겁 밥을 잡수시는게 너무나 짠하고
부애가나서 (화가나서) 밥도 안차려준 금산 외할머니를 앵기기만하면
(만나면) 가만안둘려고 작정했다고 했습니다
오직이 배가고팟으면 우리집에 왔을까를 생각하니 안쓰러워서 혼났다고
했습니다
인정많고 마음씨좋은 우리 어머니와 군산외할머니는 3살차이 였지만
어릴때부터 친구처럼 아주 다정히 잘지냈다고 합니다
우리 어머니는 군산 외할머니가 애기를 갖었다고하니 그져 반갑고
좋기만 했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후에는 참으로 좋은 인연으로 연결 되었답니다
(그동생 종옥이 외삼촌이 외할머니의 제사를 모셔주어서 입니다)
" 아버지 저것을 (군산 외할머니) 춘수리에 놔두면 날마다 뚜들겨 맞아서
골병들것인게 우리집으로 데려다가 내가 잘맥여서 출산 잘허게 헐께라우 "
하였드랍니다
외할아버지 께서는 염치없어 하면서도 낮굿을보니 (얼굴을) 좋아서 고개를
끄덕끄덕 하시드라고하였습니다
외할머니께서도
" 그려 늬가가서 델고와라 거그 놔두면 어시새끼 (어미와새끼) 두것다
상할것인게 "
하셨답니다
사창에살던 의령남씨인 외할머니네집은 아주 큰부자 였다고 합니다
가실이면 (가을) 소작농들이 곡식을 짊어지고 오는사람 소달구지로 싣고오는
사람들로 가을이면 동짓달까지 언제나 사람들이 넘쳐났다고 했습니다
그사람들에게 점심과 저녁을 먹인다고 일꾼네 여자들은 아주 큰솥에 밥을하고
고기도 사다넣고 국을 끓이고 했드랍니다
일꾼들이 네집이나 되기에 우리어머니와 이모님은 어릴때에는 일꾼여자들이
서로업어 줄려고 난리였다고 합니다
주인집 손녀딸을 업고나가면 일을안해도 되기에 어머니와 이모님은
아주 대단한 인기 였드랍니다
어머니와 이모님은 땅을 밟아보고 뛰어다녀보고 싶어서 등에 업힌체로
내려달라고 사정 사정을 해야만 내려주었다고 했습니다
동내앞 큰느티나무 사이를 뛰면서 도는것이 참으로 좋았다고 했습니다
그 큰느티무 3그루는 60여년전 내가 중학교 다닐때도 400년 되었다고
했는데 지금도 400년 되었다고 하고있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어렸을때는 사시장철 (4계절) 남들은 구경도 못하는
쌀밥에 큰조기와 쇠고깃국과 밥위에찐 계란찜 같은걸로 일꾼여자나
어머니네 외할머니가 떠먹여주는 밥을 먹었다고 했습니다
그덕에 우리어머니와 이모님은 어릴때부터 장단지가 (종아리) 일꾼여자들과
비슷하게 굵었다고 했습니다
그때 좋은옷을입고 밖에나가면 사람들이 다쳐다보고 한번씩 보듬어
보기도하며 에뻐해 주었다고 했습니다
그때 가장 좋았던곳은 동내앞의 큰느티나무가 있는곳 이었답니다
이모랑 동내의 조금 큰것들이랑 그느티나무 사이로 뛰어다니면서
놀았던게 제일로 즐겁고 좋았다고 했습니다
2003년봄에 96세의 이모님을 내차에 모시고 어머니와 이모님네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 산소에 성묘를 갔었습니다
이모님은 이모님네 외할머니 묘소에 과자를 안주로 소주를반컵
올려드리고 절을하시고는
" 왜 우리외할머니 외할아버지는 넘은다낳는 아들을 못낳으셨는가
모르것다이 "
하시면서 회한에 젖으셨습니다
산넘어 용산마을 언덕에 계시는 외할아버지 산소에 가시다가
사창 동내앞에서 400년된 느티나무들을 만져보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이나무가 나어릴때나 지금이나 똑같다고 하시면서 어릴때의 생각을
하시는지 그추억속 회상의 느티나무를 양손으로 만져보고 또만지면서
천천히 한바퀴를 돌아보시고나서 나를 쳐다보시면서
" 내가 4살때 소성면 두암으로 이사갈때도 이만했는데 왜 이나무는
하나도 안크고 이데론가 모르것다이 "
하셨습니다
사창에서 알미장터로 나와서 오산 저수지를 휘돌아서 선운사 가는길 쪽에서
용산마을로 좌회전을 하여서 저수지위 언덕에 계시는 외증조 할아버지
묘소아래 저수지뚝에 차를세웠습니다
거리는 200m 정도이지만 퍽가파른 곳이라 나혼자 과자와 술을갖고 성묘를
드리고 오겠다고하니 96세의 이모님께서는
" 내가 여그까지 왔는디 우리 외할아버지한티 절을하고 가야안쓰것냐 "
하시면서 지팡이를짚고 나도힘들게 다니는 산길을 오르셨습니다
내손을잡고 한참동안 힘들게 올라서 묘소에 도착하셔서 소주와 과자를놓고
공손히 절을두번 하셨습니다
묘소에 우거진 억새풀 아카시아나무 도토리나무를 보시고는 무척이나
마음아파 하셨습니다
내려올때는 절반은 조심해서 이모님을업고 내려왔습니다
우리 어머니가 87.8 29.돌아가시기 3주전쯤에
" 늬성들은 말안들응게 막둥이늬가 늬생전에는 우리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산소에 꼭 밥냄새 술냄새를 맞혀 드려라이 "
하셨습니다
저는 어머니의 그유언을 거의 잘실행 하였습니다
제가 봄가을로 사창에 다니면서 그분들께 성묘다닌다는 이야기를들은
나보다 3살더먹은 이종형 이상선형님이 2015년봄에 그분들을 사창에서
새내로 이장해 오면은 어떠냐고 하셨습니다
저는 그러면 아주 좋겠다고 동의를 했습니다
그래서 상선형님이 100만원정도 들여서 두분의 유골을 용산저수지 위에서
이장업자의 도움으로 께스로 화장한후 새내이모네 선산에 수목장으로
잘모시고 묘비도 세워주셨습니다
그인정많은 상선형님은 2017년 하늘나라로 여행을 가셨습니다
상선형님은 월남참전용사라 6.25 참전용사인 우리 장인어른과 장모님과함께
이천호국원 24구역에 잠들고 계시기에 저는 1년에 3-4번씩 상선형님께 참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월남전때 당시 정훈장교 대위였던 상선형님은 월남에서 같은 맹호부대
26연대였고 저는 보병중위로 기갑연대 12중대 소대장 이었습니다
우리는 성능좋은 미제 무전기의 비어있는 주파수로 요사이 핸드폰으로 전화하듯
상선형이있는 푸캇과 내가있는 빈케에서 수시로 교신하면서 부모님과 형제들의
건강이야기랑 부안촌과 새내이야기랑 꼭 무사히 건강하게 잘있다가 살아서
돌아가자는 이야기를 나누곤 했었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16세에 결혼하였으나 8년만인 24세에야 큰누나를 낳았습니다
어머니 말씀은 우리 아버지는 어릴때부터 너무나 굶고 살아서 야위고 말라서
남자구실을 제데로 못했던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신혼초에 아버지다리를 댓님으로 (바지를묶는끈) 재보았는데 (확인) 양다리
두개가 어머니다리 한개보다 가늘었다고 하셨습니다
다른사람들 같으면 22세 새신랑이면 어른폼도 낫을것인데 키도작고 삐쩍마르고
훌쭉해서 너무나 볼품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외할머니 께서는 큰바람이불면 날라갈것같은 사위를위해 수시로 정읍장에
가셔서 쇠고기와 미역을 사오셨다고 했습니다
줄포로 조기를 사러갈때는 줄포에서 가까운 부안군 보안면 남포리에사는 유일한
친척 남동생네 집에가서 하룻밤이나 이틀밤을자고 오셨다고 했습니다
몇년전부터 김장젓갈을 사오던 단골인집에서 제일로크고 알이든 무거운
조기를 네줄씩 (한줄에 10마리씩) 사갖고 머리에이고 오셨답니다
그리고 아침부터 끼니때마다 쇠고깃국과 조기를 한마리씩을 먹였드랍니다
맛있는 쇠고기국 생태국 생조깃국 등으로 근일년을 그렇게 잘고안하니
(잘먹이니) 볼에 살도붇고 사람같아 지드라고 했습니다
외할머니께서는 훈장님네 둘째아들이라 선영도 안모시고 좋을것 같다고
우리 아버지를 대릴 사위로 얻었답니다
아버지는 자기집은 식구가 애기둘까지 11명이나 되어서 점심은 아예없고
아침과 저녁으로만 죽을 그것도 반그릇씩만 먹고살았다고 했습니다
점심밥은 할아버지와 큰아버지만 먹었다고 합니다
봄부터 초여름 까지는 들에서는 먹을것이 아무것도 없었기에
논이나 밭에서 일을하다가 너무나 배가고파서 집에와서 숭융이라도
얻어먹을 까하고 집에오면 할아버지가 어떻게 아시고는 일을하라니까
집에왔다고 모가지를 비틀어 버린다고 화를내셨다고 했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하루나 이틀에 한번씩 논밭을 둘러보시고는 조금마음에
안들었을때는 퍼자빠져 놀았다고 악을쓰시면서 욕을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가난하게 굶다싶이 살다가 장가를 와보니
자기집에서는 설날말고는 구경도못한 하얀쌀밥과 쇠고깃국에 끼니때마다
큰굴비를 한마리씩 구워서주니 이것이 꿈이다냐 생시다냐 하였드랍니다
그당시 외할머니는 논11마지기 밭4 마지기가 있었기에 우리일도 해야하는데
아침마다 큰집에서 고모들이나 막내 작은아버지가 심부름을 오는데
" 오라버니 오늘은 소람물 논으로가서 지심메라고 (풀을 제거하는것) 허네이 "
그이튿날은 막내 작은아버지가
" 성 아버지도 간다고 오늘은 뒷넘어 논으로 얼렁 (빨리) 오라고 허드만 "
하고나서는 고모들이나 작은아버지나 부억으로 들어온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외할머니밥과 어머니밥을 다먹어버리고 간다고 했습니다
우리집에 심부름을 서로올려고 고모들과 막내 작은아버지는 아침부터
싸우듯이 경쟁을 했다고 합니다
고모들이 오는날은 작은아버지가 늦잠자느라고 못와서 였다고 했습니다
우리집으로 심부름을오면 쌀이절반 섞인밥을 배부르게 얻어먹을수가
있었으니까 서로올려고 했드랍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허구헌날 그러니 밥도 두그릇을 더해야 하기에
우리 어머니는 무척이나 성가싫어서 혼났다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데릴사위로 장가를 왔어도 한동내에서 살았기에 큰집일을
도맞아서 했드랍니다
그래서 외할머니께서는 놉을얻어서 (싹군) 우리일을 하는날도
여러번 있었다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중간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새벽에는 아주일찍
일어나서 우리집일을 많이 해놓고
낮에는 큰집일을 죽어라고 (열심히) 하였다고 합니다
집에와서는 저녁밥을 먹은후에도 캄캄해서 안보일때까지 우리집일을
열심히 하기에 외할머니가 아버지를 무척이나 안쓰러워 하면서
아주 좋아했다고 합니다
소람물 부안촌앞 뒷넘어등 큰집논에가서 죽어라하고 열심히일을
하고나서도 항상밥은 우리집에와서 먹었다고 했습니다
큰집에서는 식량도 없지만 밥을해줄 생각은 아예하지도 안았답니다
우리 어머니 말씀은 큰아버지는 애당초 일을 안시키고 공부만 했기에
일을할줄 모르지만 어머니와 동갑인 17살먹은 오동촌 작은 아버지나
다섯살 덜먹은 월홍리 작은아버지도 충분히 일을할수 있는데도 공부한는
핑계로 팽팽 자빠져놀고 자기 아버지가 안보이는곳 그늘밑에서 낮잠이나
퍼잤다고 했습니다
항상 못나빠진 너그 아버지만 종부려 먹듯이 오늘은 이리가서 논메거라
내일은 저리가서 밭메거라 했다고 하였습니다
가을쯤에 이제 종노릇좀 그만하라고 아버지한테 이야기 했더니
자기 아버지가 집으로 들어오라고 할까봐서 그런다고 하면서
아버지의 비위를 잘맞춰 주어야 한다고 하더랍니다
" 들어가서살 방도없고 먹을것도 없는데 멀라고 들어오라고 하것는가 "
했더니
" 허기는 그러네이 "
하면서 난감해하며 빙긋이 웃드랍니다
가울이라 우리집도 나락벼눌정리 들깨타작 콩타작 팥이랑 녹두등
할일이 너무 많아서 3-4일간 큰집일을 못갔더니
어느날은 아침일찍 오동촌 작은아버지가 화를내며 쫓아와서는
여섯살이나 더먹은 우리 아버지에게 눈을 부라리면서
"뒷넘어논 나락을 안묶어놔서 싹이 나는데 먼지랄허고 안와 응 "
하니 우리 아버지는
"여그일을 놔두었더니 태산아니냐 놉을살려니 (싹꾼) 바쁜 가실철이라
(가을) 놉도없응게 가닥을쪼꼼 추려놓고 낼이나 갈것인게 우선 너그덜이
다리가 3개되게 세워서묶어 보거라이 "
하니까
" 그만두고 얼렁가게 에이 씨벌 오살난다고 일놔두고 지랄 허고있어 "
하드 랍니다
아버지는 하도 어이가 없어서 한참을 멍하니 자기동생을 쳐다만보고
서있드랍니다
너무나 괫심해서 어머니가 나서서 작은아버지를 닥달할려고 (싸울려고)
하는참인데 작은방문이 열리더니
외할머니가 큰소리로 악을쓰면서
" 냇기이 싸가지 없는놈 새끼야 아침 해장부터 어디와서 지랄허냐
나하고 너그집에가자 가서 똑똑한 너그 아버지하고 따져보자
이썩을놈의 자식아 저것이 공부를 잘헌다고해서 양반으로 알았는디
보초때기가 (싸가지 예의) 하나도없는 쌍놈의자식 이네이
춘수리 우리조카 고등과 다니는 이종규를봐라 이놈아 너랑 늬성수랑
다동갑인디 석달먼저난 누님네 매양이라고 늬성한티 큰절로 세배하고
무릅꿇고앉어 이자식아 "
하면서 나무라니 작은아버지는 넋이나가서 멍하니 서있기만 드랍니다
우리 아버지와는 6살 차이가 나지만 공부도 못하고 아버지한테 수시로
매나쳐맞던 작은형을 항상 우습게알던 작은아버지 였다고 합니다
우리 어머니는 외할머니덕에 손도안대고 코를푼것 같아서 속이아주
시원했다고 했습니다
큰소리가 한번도 안나던 우리집에서 악을쓰고 싸우는 소리가나니
옆집살면서 우리아버지를 많이 보살펴 주시고 도와주시던
대나실 양반이 외할머니를 참으라고 달래시면서 싸움을 말리시며
작은 아버지한테
" 안사돈 양반도 계시는데 장가간 성한테 그러면되냐 이놈자식아
어서 사돈한테 잘못했다고 빌거라 이놈아 "
하니 작은아버지는 눈을 흘기면서 아무말도 안하고 도망가 버렸다고
했습니다
화가나면 무서운 외할머니께서는 큰집에 쫓아가서 따질련다고
하면서 버선도신고 나서기에 우리 어머니는 손이발되게 빌면서
못가시게 말렸다고 했습니다
그일후 보름도 넘게지나서 꽁방밭으로 미영대를 (목화) 뽑으러가다
동내 고삿에서 (동내길) 작은아버지를 만났는데 오기를 부리느라고
방장산만 바라보면서 못본체 하더라고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