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티 우먼(Pretty Woman)’이란 영화로 잘 알려진 여배우 줄리아 로버츠(Julia Roberts)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에린 브로코비치(Erin Brockovich)’의 에린 역으로 2001년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았는데, 그 줄거리는 이러하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의 소도시 힝클리(Hinkley)에 사는 에린은 세 아이를 둔 이혼녀로서 직장에서 해고당하고 파산선고까지 받았다. ‘목구멍이 포도청’인 상태이던 그녀는 우연히 교통사고로 알게 된 변호사 에드를 찾아가 막무가내로 일자리를 부탁하여 장부정리일을 맡게 된다. 그러던 1992년 어느 날 미심쩍은 의료기록들을 발견하는데, 인구 650여명의 소도시 힝클리에서 전력사업을 하는 대기업 퍼시픽 가스전기회사(Pacific Gas and Electric, 이하 ‘PG&E’)의 공장이 치명적 발암물질인 ‘크롬’ 성분이 함유된 오염물질을 대량 방출하여 수질을 오염시키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에린은 주민들을 적극 설득한 끝에 위임장을 받아내 PG&E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는데, 이것이 미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힝클리 주민 대 PG&E 사건’이었다. 4년 뒤 PG&E는 미국 법정 사상 최고의 징벌적 손해배상액인 3억 3,300만 달러를 지불하라는 판결을 선고받는다.
‘징벌적 손해배상(Punitive damages)’이란 우리나라에 도입되지 않은 제도로서 가해자의 악의적, 비도덕적인 불법행위를 응징하기 위해 실제 손해에 대한 보상적 배상(compensatory damages) 외에 추가적으로 징벌(punish)적 성격의 엄청난 손해배상액을 물리는 것을 말한다. 이 제도는 또 다른 법정영화 ‘레인메이커(Rainmaker)’ 등에서도 흥미로운 소재로 사용되기도 하고, 미국 내 대기업을 상대로 한 소송에서 배심원들에 의해 배상이 인정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런데 지난 2007년 2월20일 미 연방대법원이 ‘필립 모리스 대 마욜라 윌리암스 사건(Philip Morris USA v. Mayola Williams)’에서 징벌적 배상을 명하는 소송절차 및 그 금액과 관련하여 오레곤(Oregon)주 대법원 판결을 파기·환송한 사례가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이 사건의 상고인은 피고 필립 모리스사이고, 피상고인은 원고 마욜라 윌리엄스로서 망 제시 윌리암스(Jesse Williams)의 미망인이었다. 원고는 남편이 필립 모리스가 제조·판매하는 담배 ‘말보로(Marlboro)’를 1950년경부터 하루에 평균 두 갑 이상 피우다가 결국 1997년경 67세의 나이에 폐암으로 사망하자 오레곤주 지방법원에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지방법원의 배심원들은 “망인의 폐암으로 인한 사망은 흡연과 역학적 관련성 및 개별적 인과관계가 인정되고, 망인이 니코틴 의존성을 극복하고 담배를 끊으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게 만든 데에는 피고 회사가 수십 년간 담배가 유해하다는 정보를 알면서도 이를 정확히 전달하지 않은 과실과 유해성에 관한 정보를 은닉한 기망행위가 원인이 되었다(물론 망인 본인의 과실도 50%로 참작하였다)”고 판단하면서 실손해배상으로 821,000달러(재산적 손해 21,000달러와 정신적 손해 800,000달러의 합계)와 아울러 징벌적 배상으로 79,500,000 달러의 지급을 명했다. 그러나 1심 판사는 배심원들이 정한 징벌적 배상금액이 지나치게 과다하다고 판단하고 이를 32,000,000 달러로 감하였다.
이후 쌍방이 항소하였는데, 오레곤주 항소법원은 피고 회사의 항소를 기각하고 원고의 항소를 인용하면서, 1심 배심원들이 정한 징벌적 배상금액이 지나치게 과다하다 볼 수 없다는 이유로 원심을 파기하고 배심원들이 정한 배상금액인 79,500,000달러 금액의 회복을 명하였다. 이후 피고 회사는 오레곤주 대법원에 상고했지만 기각되자, 다시 미 연방대법원에 심리요청을 하였고, 연방대법원은 이를 받아들여 심리가 열리게 된 것이다.
피고 회사가 연방대법원에서 한 주장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1심 판사가 배심원들에게 징벌적 배상에 관하여 설명할 때 금액 산정시 당해 소송의 당사자가 아닌 다른 흡연 피해자들의 피해를 고려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설명하지 않음으로써 헌법상 적법절차 위배의 하자가 존재한다는 것, 둘째, 항소심의 징벌적 배상금액이 실손해 배상금액의 거의 100배에 이르는 점을 지적하며 지금까지 실손해액의 2~4배 정도의 징벌적 배상액 지급을 명하는 것이 역사적 관례였으므로 아무리 가해자에 대한 비난가능성이 크다 하더라도 한 자리 숫자가 아닌 두 자리 숫자에 해당되는 10배 이상의 배상을 명하는 것은 지나치게 과다한 금액이라는 것이었다.
주심을 맡은 브레이어(Breyer) 대법관은 우선 첫째 상고이유에 대하여 ① 오레곤주 지방법원의 최종변론단계에서 원고의 소송대리인은 배심원들에게 “배심원 여러분, 오레곤주에 제시 윌리암스와 같은 담배로 인한 또 다른 피해자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담배는 전체 흡연자 중 10분의 1을 사망케 할 수 있는데 피고 회사의 시장점유율은 전체 담배시장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습니다”라고 언급하면서 징벌적 배상금액 산정시 다른 피해자들의 피해 및 피고 회사의 시장점유율 등이 배상금액 결정시 참작되어야 한다는 뉘앙스로 구두변론을 한 사실, ② 피고 회사의 소송대리인은 위와 같은 변론에 대하여 즉시 이의를 제기하면서 지방법원 판사에게 배심원들이 징벌적 배상금액 산정시 아직 소송을 제기하지 않은 자들의 피해까지 고려되서는 안 된다는 설명을 배심원들에게 해 줄 것을 요청한 사실, ③ 그러나 판사는 피고 회사의 요청을 기각하면서 배심원들에게 단지 징벌적 배상은 피고로 하여금 지금까지의 잘못된 행동을 징벌하고 향후 그와 같은 일이 재발되지 않게끔 방지하기 위해 명하여진다는 일반적 설명만 한 사실을 인정하면서 다음과 같이 판시했다.
즉, 위와 같은 지방법원 판사의 조처는 피고 회사로 하여금 법정에 출석하지 않은 다른 피해자들에 대한 방어권 행사의 기회를 박탈당하게 만든 만큼 헌법상 적법절차조항 위반이고, 특히 만약 그와 같은 점을 판사가 배심원들에게 설명하지 않았다면 배심원들로서는 소송당사자 아닌 다른 피해자들의 범위가 구체적으로 몇 명이고 그들의 피해액은 얼마인지 정확한 정보가 제공되지 않은 상태에서 징벌적 배상금액을 산정할 때 이를 반영할 우려가 있어 자의적인 배상이 될 수 있으므로, 이러한 절차상 하자는 피고 회사의 방어권 침해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리고 첫째 상고이유가 받아들여진 이상 둘째 상고이유에 대하여 나아가 판단할 필요 없이 오레곤주 대법원 판결을 파기하면서, 징벌적 배상금액을 다시 정하게 하도록 환송하는 판결을 했다.
미 연방대법원은 징벌적 배상이 지나치게 과다한 금액(excessive award)인지 여부에 대하여는 반드시 수치상으로 “실제 손해액의 몇 배”를 최고 한도로 설정하고 있지는 않고, 다만 피고의 비난가능성 정도, 원고의 실제 손해액과의 비율 등을 고려하여 재량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 연방대법원 판결은 판사가 배심원들에게 징벌적 배상금액의 산정기준 및 범위(특히, 금액산정시 다른 피해자들의 피해를 고려할 것인지 여부)에 대한 구체적 설명을 누락할 경우 헌법상 적법절차조항 위반을 이유로 파기될 수 있음을 판시한 첫 사례라서 더욱 의미가 있는데, 필자의 의견으로는 이러한 판시를 통해서 연방대법원은 미국 각 주의 법원에서 이루어지는 과다한 징벌적 배상명령을 견제하고자 함을 시사하고 있기도 하다.
한편, 우리나라의 경우를 살펴보자. 불법행위의 가해자가 내국인이고 피해자가 미국인인 사안에서 미국 법원이 징벌적 배상을 명하는 판결을 선고하여 확정되고, 이 확정판결에 기해 내국인의 국내 재산에 대한 강제집행을 하고자 국내 법원에 집행판결이 신청된 경우, 대법원의 입장은 명확하지 않으나 하급심 법원 중 “징벌적 배상제도는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의 전보만을 인정하는 우리 민사법 체계에서 인정되지 아니하는 형벌적 성질을 갖는 배상형태로서, 우리나라 공서양속(公序良俗)에 반할 수 있다”고 판시함으로써 원칙상 이 제도를 인정하지 않는다(서울지법 동부지원 1995. 2. 10. 선고 93가합19069 판결). 다만 위 판결은 “당해 외국판결의 집행을 용인하는 것이 우리나라 사회통념상 가혹한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는지 여부와 아울러 민사소송법상 외국판결에 대한 실질심사금지원칙에 따른 외국판결의 존중이라는 승인제도 본래의 취지를 살린다는 측면을 비교·형량해 볼 때, 이 사건에서 미국 미네소타주 법원의 판결에서 인정된 손해배상액의 1/2 한도로 승인을 제한함이 상당하다”고 판시하여 부분적으로 그 집행을 승인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도 한때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가 부도덕한 기업 행위 재발을 막기 위해 징벌적 손해배상제도의 정식 도입을 추진키로 한 바 있었으나, 사실상 ‘이중처벌’이라는 지적이 있어 기업에 과중한 부담을 주는 것은 아닌지 좀 더 검토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작년 9월경 이를 도입하지 않기로 밝힌 바 있다. 따라서 아직 시기상조일지 모르나 만약 우리나라에도 배심원 제도와 아울러 징벌적 배상제도가 도입될 경우, 그 배상금액을 정하는 절차 및 금액상 한계를 모색해 보는 데 있어 이번 연방대법원 판결이 참고적 선례가 되었으면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