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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남정맥 제4구간(솔티고개-계리재)
1. 산 행 일 : 2011년 05월 14일(토) - 05월 15일(일), 1박 2일
2. 산 행 지 : 태봉산(190.2m) - 경남 진주, 와룡산(臥龍山, 798m) - 경남 사천
3. 날 씨 : 맑음(초여름의 무더운 날씨)
4. 참 가 자 : 박봉하, 박상호, 안상경, 윤희원, 이용준, 장현옥
5. 준 비 물 :
[1] 전 체- 차량, 안전장구, 구급약, 사진기, 지도
[2] 개 인- 비상식, 등산화, 배낭, 윈드쟈켓 및 우의, 예비옷(보온)과 양말, 모자, 장갑, 후레쉬, 식수, 세면도구, 신분증, 다용도칼, 휴지, 비닐봉투, 간식 등 개인용품
6. 회 비 :
7. 산행정보 및 일정
[1] 총 산행 거리 : 총 산행 약 19.7km, 8시간 정도 소요
[2] 산행개요 :
이번 마루금 진행코스 북쪽의 골짝물들이 고여드는 진양호와 남쪽물들이 유입되는 남해안의 사천만이 어렴풋하게 보이기 시작하며 서쪽으론 사천의 산야들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장관을 바라볼 수 있고, 동쪽으론 남강으로 흘러드는 호천강 물길을 굽어보며 진행하면서 경남의 해안지방과 내륙지방을 구분지으며 동진해 나아가기 시작하는데, 백두산에서부터 수 만 갈래 이어져 온 이 땅의 산줄기가 유일하게 끊어진, 낙남정맥길의 최대 훼손 현장인 가화강을 목격할 수 있다.
가화강으로 낙남정맥을 동강낸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70여년 전의 일제 강점기에 당시 남강댐 축조 계획을 수립한 이후 댐의 남는 물을 사천만으로 보내기 위한 여수로를 만들면서 정맥 산줄기를 통째로 절단해버린 것이다.
분명 터널형태로 여수로를 만들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극단적인 방식으로 생태계를 단절시키는 우를 범하고 만 것이다. 강을 사이에 두고 식생은 물론이고 야생동물의 이동이 70여 년 동안 단절돼 있다.-경남일보-
<출처> 한배산악회 산악대장 제공 자료
[3] 구간별 거리
솔티고개(2번국도)--1.2km--태봉산(190.2m)--2.3km--유수교--6.0km--실봉산(185m)--3.6km--진주분기점--2.2km---93.8m봉--2.3km--고미동고개--2.1km--계리재
[4] 산행 코스 및 시간
(1) 산행지 이동
① 교통편 : 시외버스
② 이동경로 :
수원버스터미널(06:40) ∼ 경부, 대전통영고속도로 ∼ 진주(10:30/10:40) ∼ 솔티고개(11:00)
(2) 산행코스 및 예정시간
솔티고개(11:10) → 태봉산(11:45) → 2번국도(12:15) → 유수교(12:45/12:55) → 1049번도로(14:20) → 실봉산(15:05/15:15) → 진주분기점(16:05) → 모산재(16:50) → 93.8m봉(17:30/17:40) → 죽봉재(18:00) → 고미동고개(18:35) → 계리재(19:20)
(3) 산행 후
계리재(19:30) ∼ 사천시(삼천포, 20:00 ∼, 식사 및 숙박)
[5] 편의사항 :
〇 오복식당(해물정식, 055-833-5023),
〇 안개실비(055-834-8614)
〇 남양토담오리(055-835-9292, 9288),
〇 삼천포수협활어회센터식당(055-833-4355)
〇 사천읍개인택시(055-852-5177),
〇 진주중앙콜밴(055-748-8855)
〇 수원-진주(06:30 버스, 1인 17,400원),
〇 진주-솔티고개(택시, 4인 25,000원)
〇 계리재-사천시(삼천포, 택시, 4인 25,000원)
〇 사천시-진주시(시외버스 10분 간격, 50분소요, 1인 3,600원),
〇 진주-수원(우 14:10, 17:10, 일 15:40, 1인 25,500원)
8. 산 행 기
산에대하여
신 경 림
산이라 해서 다 크고 높은 것은 아니다.
다 험하고 가파른 것은 아니다.
어떤 산은 크고 높은 산 아래
시시덕거리고 웃으며 나즈막히 엎드려 있고
또 어떤 산은 험하고 가파른 산자락에서
슬그머니 빠져 동네까지 내려와
부러운 듯 사람 사는 꼴을 구경하고 섰다.
그러고는 높은 산을 오르는 사람들에게
순하디 순한 길이 되어 주기도 하고
남의 눈을 꺼리는 젊은 쌍에게 짐즛
따뜻한 숨을 자리가 돼주기도 한다.
그래서 낮은 산은 내 이웃이던
간난이네 안방 왕골자리처럼 때에 절고
그 누더기 이불처럼 지린내가 배지만
눈개비나무 찰피나무며 모싯대 개숙에 덮혀
곤줄박이 개개비 휘파람새 노랫소리를듣는
기쁨은 낮은 산만이 안다.
사람들이 서로 미워서 잡아 죽일 듯
이빨을 갈고 손톱을 세우다가도
칡넝쿨처럼 감기고 어울어지는
사람 사는 재미는 낮은 산만이 안다.
사람이 다 크고 잘난 것이 아니듯
다 외치며 우뚝 서 있는 거시 아니듯
산이라 해서 모두 크고 높은 것은 아니다.
모두 흰 구름을 겨드랑이에 끼고
어깨로 바람 맞받아치며 사는 것이 아니다.
[1] 산행전
(1) 산행 준비물에 대한 부담
어떻게 된 일인지 낙남정맥은 첫 구간부터 중간 탈출(고운동재)을 하고 2(길마재~백토재), 3구간(백토재~솔티고개)은 학교행사(검정고시)로 참여하지를 못했다.
5월 정맥 산행(5월 14일)은 첫날 솔티고개~계리재구간 19.7km를 약 8시간 30분 정도 산행을 하고 다음날은 정맥 산행을 잠시 접고 사천시에서 가장 이름난 『와룡산(798.6m)』을 5시간 30분 정도 산행하는 것으로 계획이 잡혔다.
오랜만에 참여하는 정맥 산행이라 은근히 기대도 되었고 원거리, 장시간 산행이지만 『태봉산』을 제외하면 거의 산책 수준의 산 높이라 이번 산행만큼은 끝까지 완주를 해보겠다고 다짐을 해본다.
지난 산행 때까지는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출발을 했는데 이번 산행부터는 수원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출발한다고 한다. 산행 당일(2011년 5월 14일, 토) 06 : 30분까지 수원 시외버스 터미널로 나오라고 한다. 출발 시간도 비교적 여유가 있다.
산행 전날 밤 1박 2일간 산행 용품을 챙기다보니 짐의 부피와 무게가 장난이 아니다. 갈아 입어야할 옷 두 벌은 기본이고 점심 도시락에 간식을 비롯하여 자질구레한 물품을 챙기다보니 배낭 여유가 없다. 더하여 날씨가 점점 더워지는 시기라 물도 평소보다 배로 준비를 해야 하는데 배낭의 무게도 만만치 않을 것 같다. 이틀간 배낭 무게를 고스란히 감수하며 산행할 일을 생각하니 은근히 걱정이 된다.
(2) 수원 시외버스터미널
5월 14일(산행 당일) 04 : 30분 기상, 배낭을 다시 한 번 점검하고 05 : 20분 평소보다 이른 아침 식사를 하며 터미널 갈 걱정을 하니 집사람이 수고를 해 주겠다고 한다. 다행이다.
05 : 50분경, 집에서 출발하여 06 : 15분 경, 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다소 이른 시간이었던지 함께 산행할 대원들이 보이지 않는다. 06 : 20분, 안교장 도착하고 5분 후 윤사장, 그 뒤를 이어 대장이 도착을 했다. 버스 출발 5분여를 앞두고 장부장도 도착을 했다.
박기양교장과 박상호사장은 사모님과 함께 2일차 와룡산 산행에 참여하기 위해 밤늦게 운행하는 버스를 타고 진주로 내려온다고 한다.
(3) 산행의 출발지 『솔티고개』
06 : 40분, 버스 출발. 경부, 대전통영고속도로로 주행하여 10 : 30분경, 진주 시외버스 터미널 도착, 택시로 오늘 산행의 출발지인 『솔티고개』로 이동을 했다.
10 : 35분, 삼성약국 옆에 있는 「연평마을」표지석을 세워 놓은 『솔티고개=솔티=松峙』에 도착을 했다. 이 고개(솔티고개)는 진주시 내동면과 사천시 곤양면을 잇는 2번 국도가 지나는 고개로 부락을 넘어가는 고개에 솔이 울창하다고 하여 『솔치』라 부른다고 한다.
[참고자료 1] 진주시 내동면(奈洞面)
① 내 동 면 : 경상남도 진주시 남부에 위치한 면(面).
② 명칭유래 : 조선 후기의 축곡리와 내동리에 해당하는 지역인데, 내동리에서 그 지명이 유래되었다.
③ 형 성 : 조선 전기까지는 진주목(晋州牧) 남면(南面) 축곡리(杻谷里), 말동리(末洞里), 내평리(內坪里)라 하였다. 임진왜란 후에는, 말동리와 내평리를 축곡리에 합하였다가 1832년(순조 32)에 축곡리와 내동리라 하였다. 1864년(고종 1) 이후에는 유곡면과 내동면이라고 하였다. 1914년 3월 1일, 진주군 섭천면(涉川面), 내동면, 유곡면(杻谷面)과 곤양군(昆陽郡) 곤명면(昆明面) 조평동(助坪洞), 가리면(加利面) 가화동(加花洞) 등을 통폐합하여 내동면이라 하여 천전리(川前里), 주약리(株藥里), 독산리(篤山里), 신율리(新栗里), 삼계리(三溪里), 내평리(內坪里), 유수리(柳樹里)의 7개리로 개편하였다.1918년 5월에 천전리를 진주면으로, 1938년 7월에는 주약리를 진주읍으로 이속하고 평거면(平居面) 귀곡리(貴谷里)를 편입하였다가 1973년 7월에 귀곡리를 다시 진주시에 이속하였다. 1983년 2월에 사천군 곤양면 가화리 일부를 유수리에 편입하여 5개 법정리를 소관하고 있으며, 1995년 1월 1일자로 법률 제4774호에 의거한 행정구역 개편(도농 통합)에 따라 진주시와 진양군이 통합되면서 진주시 내동면로 개칭되었다.
④ 자연환경 : 내동면의 북쪽으로 남강(南江)과 진양호(晋陽湖)에 면해 있으며, 서쪽으로는 가화천(加花川)이 남쪽으로 흐른다. 내동면의 중앙부에 실봉산(185m)이 있고, 이를 중심으로 구릉지를 이루고 있다.
⑤ 위치와 교통 : 진주시의 남쪽에 위치하여 동쪽으로 정촌면(井村面)과 가호동, 북쪽으로 남강(南江)이 흐르고, 남쪽으로 사천시 축동면(杻洞面), 서쪽으로 가화천을 경계로 대평면(大坪面), 사천시 곤명면(昆明面)에 접한다.내동면의 서쪽으로 중부고속도로(대전-진주구간)가 지나며, 2번 국도이 동서방향으로 관통하고 철도교통으로 경전선이 동서방향으로 지나면서 내동역과 유수역이 지역 내 있다.
⑥ 현 황 : 진주시 남쪽에 위치하며 진양호, 남강, 가화천이 인근 지역과 경계를 이룬다. 2004년 12월 31일 기준으로 면적은 32.08㎢이며, 총 753세대에 1,885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내동면 삼계리에 남강댐 수력발전소가 위치하고 있으며, 남강댐 방수로인 가화천이 삼계리와 유수리를 관통하여 사천만으로 이어지며, 5개의 법정리와 13개 행정리, 24개 반으로 구성되어 있다. 자연마을은 독산, 산강, 대동, 율곡, 산기, 삼계, 양옥, 유동, 정동, 상촌 등이 있으며 주요 지명으로 참난정, 시루봉, 한병산, 가호 등이 있다.주요 기관으로는 내동면사무소와 갈전보건지소, 우체국, 농협 등이 있고, 교육기관으로 내동초등학교가 있으며, 한국수자원공사 남강댐관리단이 입지하고 있다.내동면의 문화재로는 천연기념물 제390호인 진주 유수리의 백악기 화석산지(晋州柳樹里의 白堊紀化石産地)가 있다.
<출처> 내동자율방범대
[2] 옥녀봉(玉女峰)
연평마을(=蓮香洞) 표지석 앞에 배낭을 내리고 산행 준비와 기념 촬영을 한 후 표지석 우측 포장 도로진입을 했다.
10 : 46분, 「고월 마을회관」 앞을 지나 약 4분여를 도로 따라 진행
10 : 50분, 「신흥목장」표지석을 세워 놓은 곳에 도착, 좌측으로 여러 개의 정맥표지기가 나무 가지에 매달려 있어 좌측 목장 길로 진입하여 약 50여m를 진행하니 「옥녀봉」 2km라 표시된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옥녀봉 오르는 길로 진입을 하려고 하는데 대장이 곧바로 따라와 큰길로 진행해야 된다고 한다.
사천군 곤명면 땅에 덕천강을 끼고 우뚝 솟은 벼랑산이 있으니, 이름하여 「옥녀봉(玉女峯)」이라 일컫고 그 앞 벌판을「완사(浣紗)」라 일컫는 내력은 다음과 같다. 이 봉우리에 옥녀라는 낭자가 살고 있었다. 용모가 뛰어날 뿐 아니라 행실도 단정한데다 베를 짜는데도 능통했다. 그녀는 옥녀봉에서 건너편 한복산이란 봉우리에 실을 날아 그 실로 베를 곱게 짜서 덕천강 맑은 물에 깨끗이 씻어 완사 넓은 들에서 말려 인근 시장에 내다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였다. 이런 사실이 널리 퍼져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덕천강 상류에 사는 민도령이 우연히 이곳을 지나다가 옥녀의 아름다운 자태에 마음이 쏠려, 평생을 두고 사랑할 것을 맹세하면서 청혼을 하였다. 옥녀도 재기가 넘치고 씩씩한 민도령이 싫지는 않았으므로 결혼 수락 조건 하나를 내세웠다. 청운의 꿈인 과거에 합격한 연후에 청혼을 받아들인다는 것이었다. 민도령은 쾌히 승낙 하고 꼭 합격할 것을 굳게 맹세하였다. 도령은 밤낮으로 글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고 열심히 하여 마침내 과거 길에 오르게 되었다. 옥녀도 민도령의 재기와 약속을 굳게 믿었기에 좋은 소식 있기만을 기다리며 기쁜 마음으로 도령에게 줄 옷감을 짜고 있었다. 이 무렵 고을 사또 행차가 옥녀봉을 지나게 되었다. 실은 옥녀의 미모가 빼어나다는 소문을 듣고 그녀를 탐내어 일부러 행차한 길이었다. 그런데 옥녀가 이미 혼처를 정하고 낭군의 옷감을 짜고 있다는 말에 크게 노하여 행차를 더럽혔다는 명분으로 환도를 뽑아 베의 날줄을 모두 잘라 못쓰게 만들어 버렸다.
옥녀는 이 어처구니없는 일이 분하고 억울하기도 하려니와 장차 낭군을 볼 면목이 없었기에 사또를 호되게 나무란 뒤 덕천강에 몸을 날렸다. 사또는 예상치 못했던 사태에 경악하여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피를 토하고 죽었다.
한편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기쁜 소식을 옥녀에게 알리려고 단숨에 달려온 민도령은 이런 처참한 사태를 목격하고 일생을 해로하자고 맹세하던 옥녀가 없음에 세상 살 뜻을 잃고 옥녀를 부르며 강물에 빠져 죽었다. 이 일이 있은 후부터 이 벼랑밑을 지나는 혼인행차는 어김없이 화를 당하였으므로 신행길은 멀리 우회하여서 다녔다고 한다. 주민들은 옥녀의 넋이 어린 이 봉우리를 옥녀봉(玉女峰)이라 이름하고 앞 벌판을 옥녀가 비단을 씻고 널었다하여 씻을 완(浣), 비단 사(紗)자로 하여 완사(浣紗)라 부르고 있다. 상봉에는 옹달샘이 있는데 옥녀가 식수와 베 짜는 용수로 썼다 한다. 옥녀봉 밑은 실을 날던 곳이라 하여 아무리 강바람이 거세어도 이곳만은 바람기 없이 잔잔함으로 주민들은 옥녀의 혼이 지금도 서려 있다고 여긴다. 또한 한복산에는 실을 날던 돌기둥과 베틀자리가 있는데 그 자리에 구멍이 지금도 완연하게 있다. 베를 짜서 한복을 마련한다는 뜻에서 한복산이고, 산허리의 열두 골은 열두 폭 치마를 상징한 것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리고 덕천강의 옛날 교통수단인 완사, 금성의 나룻배는 천년이 넘도록 옥녀봉 밑 나루터에서 강폭을 오고가고 함이 베를 짜는 북이 오고가는 것이라고들 한다.<출처 : 곤명면지>
곤명면지에는 「옥녀봉」아래 절벽 절경을 다음과 같이 소개를 하고 있다.
「절벽(絶壁)의 사이사이에 끼어 있는 괴목(怪木)들은 계절(季節) 따라 경관(景觀)이 아름다워 그 수려(秀麗)한 절경(絶景)은 옛부터 길손이 발을 멈추고 시정(詩情)에 잠겼던 곳이다.봄에는 바위 이끼 사이에 오색(五色) 꽃들이 만발(滿發)하여 봉접(蜂蝶)과 더불어 화류(花柳)의 춘정(春情)을 돋우게 하고 여름에는 벼랑 사이의 녹림(綠林)이 별(別)다르게 조화된 경치를 던저 줄 뿐 아니라 진양호수(晋陽湖水)의 맑고 푸른 물에 석양(夕陽)이 투영(投影) 될 때는 스스로 찬바람이 신비성(神秘性)을 안겨 주어 납량(納凉)의 적지(適地)가 되어 주며, 가을에는 만산(滿山)의 붉은 단풍잎이 호수(湖水)위를 휘날리어 어느 명승지(名勝地)도 따를 수 없는 극치(極致)이다. 겨울에는 직각(直角)의 암벽(岩壁) 틈에 자리 잡은 나무 가지에 보 얀 눈이 송이송이 쌓인 설경(雪景)이 바위와 조화(調和)를 이루어 흡사(恰似) 물형(物形)을 나타낸 듯 기묘(奇妙)하고 장관(壯觀)함이 경탄(驚嘆) 할만하다.」
진주지방에는 옥녀의 전설과 對比되는 노래로「진주난봉가」가 있어 그 가사를 소개해 본다.
울도 담도 없는 집에 시집 삼 년을 살고 나니
시어머님 하시는 말씀 아가 아가 며늘 아가
진주낭군을 볼라거든 진주남강에 빨래를 가게
진주남강에 빨래를 가니 물도나 좋고 돌도나 좋으니
이리야 철석 저리야 철석 어절철석 씻고나 나니
하날 겉은 가을 쓰고 구름 같은 말을 타고 못 본 체로 지내가네.
껌둥빨래 껌께나 씻고 흰 빨래는 희게나 씨여
집에라고 돌아오니 시어머니 하시는 말씀
아가 아가 메느리 아가 진주낭군을 볼라그덩
건너 방에 건너나 가서 사랑문을 열고나 바라
건너 방에 건너나 가서 사랑문을 열고나 보니
오색가지 안주를 놓고 기생첩을 옆에나 끼고 희희낙락하는구나.
건너 방에 건너나 와서 석 자 시 치 멩주 수건 목을 매여서내 죽었네.
진주 낭군 버선발로 뛰어나와,
첩으야 정은 삼 년이고 본 처야 정은 백년이라
아이고 답답 웬일이고
「옥녀봉」은 정맥 길에서 약간 벗어나 있고 정맥 산행 일정이 빠듯해 신흥목장 입구인 큰 길로 되돌아 나와 2차선 포장길 따라 내려갔다.
[3] 『愛鄕』 표지석
10 : 52, 「애향(愛鄕)」」 표지석을 세워 놓은 삼거리에 도착했다. 碑文에
1997년 남강땜 보강공사로 六百여년 동안 祖上代代로 살아 유서 깊은 故鄕이 水沒되 故鄕이 湖水 속에 잠겨 있다는 것을 想起하고자 비를 세운다는 사연이 적혀 있다.
[참고자료 2] 「愛鄕」碑의 全文
「연꽃의 傳說을 간직한 蓮花峰과 우뚝솟은 玉女峰과 國師峰이 병풍처럼 둘러져 南쪽으론 德川江이 굽이쳐 흐르는 蓮坪마을은 옛 이름 助坪과 蓮香이 통합된 마을로 蓮香의 蓮자와 助坪의 坪자를 따서 蓮坪이라 命名되었다.
마을 앞으로 肥沃한 전답이 늘어선 살기 좋은 本鄕이었다. 六百여년전 羅州丁氏 仁東張氏, 鑛山宋氏, 金海金氏 順으로 마을을 형성하여 살아오던 중 豊川盧氏, 驪陽陳氏, 昌原黃氏등 여러 姓氏들이 함께하여 어언 五百여년을 相互扶助와 親睦으로 한울타리로 어울려 오늘에 이르렀으나 1967년 남강땜의 建設로 인하여 本鄕이 진양호에 水沒되고 富村으로 선망의 대상이 되었던 200여호의 900여 주민이 집과 田畓을 진양호에 잠재우고 離鄕의 아픔을 겪었으며 그 후 1997년 남강땜 보강공사로 마을 전체가 水沒되고 10여호만 이웃마을로 移住하였으니 六百여년 동안 祖上代代로 살아 유서 깊은 故鄕이 저 아래로 굽이쳐 넘실거리는 湖水 속에 잠겨 있다는 것을 想起코져 그 痕迹을 남기기 위하여 이 돌에 故鄕 잃은 쓰라린 事緣을 새긴다.
1997년 1월 일」
[4] 태봉산(胎峰山)
10 : 55분, 「愛鄕」표지석을 뒤로하고 다고 가파른 봉에 올라 묘지군(가족묘)을 지나 또 밤나무 밭을 통과하여 완만한 능선을 따라 진행.
11 : 23분경, 성터 흔적이 있는 『태봉산』에 올랐다. 정상에는 삼각점(진주 813번)과「태봉산(190.2m) / (낙남정맥) / 고산마루(다올)」이라 쓴 코팅지와 노랗고 파란 정맥 표지기가 여러 개 나무 가지에 매달려 있다.
『태봉산(胎峰山, 190.2m)』은 경남 사천시 곤명면 은사마을 태봉산 정상 부근에 세종대왕과 단종의 태를 안치했던 태실지가 있어 이 산을『태봉산(胎峰山)』부른다고 한다.
태실지(胎室址)는 조선시대 조정에서 태실도감까지 설치한 뒤 전국에 지관을 내려 보내 선정한 길지에 어태를 묻고 인근에 분묘를 조성하지 못하도록 금혈(禁穴)을 바위에 새겨 둔다. 경남도는 세종과 단종 태실지를 지난 1972년 지정기념물 제 30호와 제31호로 각각 지정했다고 한다.
[참고자료 3] 泗川 世宗大王 胎室址
왕실에서는 태를 왕자와 공주의 신체와 같이 여겼다. 사천시에 있는 ‘세종대왕 단종대왕 태실 수개(修改) 의궤’와 남아있는 석물 등의 자료에 따르면, 태실은 8각의 대석 위에 중동석과 상개연엽석을 놓은 뒤 주변에 전석을 깔고 돌난간을 돌린 형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1730년에 제작된‘세종대왕 단종대왕 태실 수개(修改) 의궤’는 현존하는 유일한 왕의 태실 보수 기록으로 알려져 있고, 문화재나 보물 등의 지정 가치가 높다. 세종대왕 태실지(世宗大王 胎室址)가 사천시 곤명면 은사리 산 27번지에 있다. 1975년 2월12일 경상남도기념물 제30호로 지정돼 사천시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세종이 탄생한 지 22년이 되던 해인 1418년(세종 즉위) 조성되었다.
태실은 태를 묻은 곳이다. 예부터 우리 민족은 태를 몸의 일부라고 여겼고, 그래서 태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풍습이 있었다. 특히 왕실에서는 태를 왕자와 공주의 신체와 같이 여겼고, 태실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왕의 태실은 그 왕의 즉위년에 주로 만들어졌는데, 왕의 재위 기간 나라를 잘 다스리느냐 혹은 잘못 다스리느냐를 이 태실에서 시작한다는 의미를 두었다. 그래서 태실지는 길지(吉地)를 찾았고, 태실도감을 만들 정도였다. 당연히 풍수지리학으로 태실지는 명당인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태실을 중시하는 풍습은 삼국시대부터 시작되었다.최초의 태실 기록은 신라시대 김유신의 태실로 알려져 있으며, 충북 진천에 있다. 사천시 곤명면에 있는 세종대왕 태실지는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당시 왜적들에 의하여 도굴, 파괴된 것을 1601년에 중수하였다. 그리고 1733년(영조 9) 태실비가 세워졌다. 태실비의 규모는 높이 180㎝, 너비 33㎝, 두께 27㎝이다.
태실은 일제 강점기인 1929년 경기도 양주군으로 이전하였고 태실지에는 민가의 사설묘가 들어섰다. 현재는 당시의 조형유물인 태실비와 태항아리를 안장하는 중동석(中童石), 상개연엽석(上蓋蓮葉石),돌난간, 지대석, 주춧돌, 팔각대 등의 석물을 산자락에 한데 모아 두고 있다.
사천시에 있는 ‘세종대왕 단종대왕 태실 수개(修改) 의궤’와 남아있는 석물 등의 자료에 따르면, 태실은 8각의 대석 위에 중동석과 상개연엽석을 놓은 뒤 주변에 전석을 깔고 돌난간을 돌린 형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1730년에 제작된‘세종대왕 단종대왕 태실 수개(修改) 의궤’는 현존하는 유일한 왕의 태실 보수 기록으로 알려져 있고, 문화재나 보물 등의 지정 가치가 높다.
세종과 단종의 태실 보수는 경상도 관찰사 박문수의 장계로 시작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이 두 태실에 표석을 세우기 위해 돌을 진주(대곡)에서 사천(곤명)으로 옮기는데 1170명이 동원되어 닷새 동안 일을 했다고 한다. 돌을 옮기면서 농작물에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는 기록도 있다.
사천시에서는 산자락에 대충 모아둔 세종대왕 태실 유적들을 원래 태실지로 옮겨 복원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하지만 세종태실지가 개인 소유로 성역화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세종태실지에는 4기의 민묘가 있다. “옛날 왕의 태실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세종대왕의 ‘자주정신’과 ‘과학정신’이 오늘날 청소년들에게 반드시 심어줄 정신임을 상기해 볼때, 세종대왕 태실은 그냥 태실로서의 의미보다 ‘세종정신’의 교육 도장으로서 가치가 있다고 하겠다.
<출처> 사천신문(2003년 06월 26일)
http://www.4000news.com/gisa/view.html?hosu=489ho&number=9
[5] 디비리산과 바락지산
태봉산 정상을 뒤로하고 무너진 성터를 내려서서 완만한 길로 진행.
11 : 30분, 『디비리산(115m) / 舒來野 愛(서래야 애)』이라 쓴 코팅지를 나무 가지에 매달아 놓은 峰에 올랐다. 쉼 없이 진행.
11 : 40분, 시멘트포장길을 만나 우측으로 내려가니 좌측으로 단선 철로가 있고 2번 국도가 눈에 들어온다. 2번 국도 굴다리 통과, 「박가네 가든」표지판이 있는 곳에서 우측으로 진행. 2번 국도 절개지를 따라 올랐다.
11 : 55분, 『바락지산(128m) / 舒來野 愛)』에 도착했다. 선두로 가던 대원들이 쉼을 취하고 있다. 얼른 배낭을 내리고 시원한 얼음물로 목을 축인 후 짧은 휴식을 가졌다.
[4] 낙남정맥의 맥을 끊어 놓은 가화강
12 : 14분, 휴식도 잠시, 다시 출발 농장을 지나 시멘트 포장길로 들어섰다. 길 아래로 가화강과 鐵橋가 눈에 들어온다. 가다 멈춰 가화강 철교를 배경으로 사진촬영을 하며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 내려갔다.
12 : 20분, 가화강 표지판(국가하천 / 가화강 / 국토해양부장관)과 유동마을 버스승차장이 있는 유수교 앞에 도착했다.
「가화강(加花江)」은 낙동강 권역의 낙동강 남해권 수계에 속하며, 유로연장(流路延長)이 12.52㎞, 하천연장이 10.38㎞, 유역면적이 29.08㎢이다.
진주시 내동면(奈洞面) 유수교 아래, 남강댐에 의해 생긴 진양호(晉陽湖)의 수문(水門)에서 흐르기 시작하여 사천시 곤양면(昆陽面) 가화리를 거쳐 사천시 축동면 구호리와 곤양면 중항리의 경계지점까지 흘러간다.
원래 남강댐을 설계할 때는 물이 가화천으로 흐르지 않고 유수교에서 진양호 쪽으로 흐르게 되어 있었지만, 나중에 유수교에서 남쪽으로 10m 떨어진 낙남정맥의 암벽을 잘라내어 진양호의 수문을 열면 인위적으로 물이 남쪽으로 흐르게 바꾸었다.
진양호는 경상남도 유일의 인공호수로서 물이 맑고 자연경관이 훌륭하여 관광명소가 되었다.
가화천을 따라 공룡화석이 발견되고 있는데, 진주시 내동면 유수리(柳樹里) 가화천 하상에는 약 1억 년 전 중생대 백악기 古 環境과 恐龍化石産地 26만 8575㎡ 규모가 천연기념물 제390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고, 최근에는 사천시 곤양면 가화리에서부터 검정리에 이르는 가화천 하상에서도 공룡의 발자국 화석이 발견되었다.
<출처> 한배산악회 산악대장 제공자료
이 땅의 모든 산줄기는 백두산으로 통한다. 백두대간은 백두산에서 비롯하여 지리산에 이르러 남도의 평야지대로 흐르는 정맥으로 바다로 흘러든다. 백두산이 심장이라면 백두대간의 대동맥이고 이를지나 우리가 살고 있는 와룡산에 이르러 모세혈관이다. 이처럼 민족의 정기는 산을 타고 우리의 핏속에 면면히 흐른다. 이것은 1대간1정간 13정맥을 이루는 우리 산줄기의 기본으로 보는 조선후기 실학자 신경준의 산경표(山經表)개념이다.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은 한국 고지리서 산경표의 기본개념으로, 산 없이 시작되는 강이 없고 강을 품지 않는 산이 없으니 산은 스스로 물을 나누는 고개가 되고 물은 산을 건너지 않는다. 그러므로 산과 강은 하나이고 이는 유기체적 자연의 선순환 구조이다. 고산자 김정호는 1866년에 이르러 이 산경표를 대동여지도의 근본을 삼았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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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을 출발해 낙동강 하구 「신어산」에 이르는 약 246.4km의 산줄기인 낙남정맥의 맥을 끊어 놓은 것이 『가화강』이다. 낙남정맥은 지리산계인 함양, 산청을 이어달려 하동을 지나 사천 고성을 휘어감아 마산 창원 그 끝 김해에 이르는 백두대간의 맥이다. 그 맥이 잘리고 산자분수령의 원칙이 깨어지고 강이 거슬러 산을 넘어간 인위적 변화를 야기했다. 인공으로 내와 천을 바꾸어 만든 강이 바로 『가화강』이다.
<출처> 강은 산을 넘지 못한다 했거늘(2008년 12월 01일(월) 뉴스사천 기사)
http://www.news4000.com/news/articleView.html?idxno=662
[참고자료 4] 가화리(加花里)
사천시 곤양면 가화리는 면 소재지와 가장 멀리 떨어져 있으며 진양호 사천만 방수로가 있다. 동쪽은 축동면과 북쪽은 진주시와 서쪽은 흥사리와 남쪽은 검정리와 경계를 하고 있으며, 본래 곤양군 가리면의 지역으로 가불개, 가화 또는 가호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가불개ㆍ밀기미ㆍ산음ㆍ목섬ㆍ탑골가화마을 회관 등 5개 자연마을과 진주군 수곡면의 수거동 일부를 병합하여 가화리라 해서 사천군 곤양면에 편입되었다가 1983. 2. 15 다시 가화리 일부는 진양군 나동면에 편입되고 남은 마을은 가화리 탑동마을이다.
마을 전체로 현재 남강 방수로가 된 곳은 농경지였으나 모두 방수로에 편입되어 옛 농토는 간 곳 없고 돌바닥만 남아있으며, 경지면적이 줄어 도로 위쪽의 경작지에 생계를 유지하고 산지 개발로 밤ㆍ감 등과 축산으로 생활하고 있다.
회관이 있는 골은 탑골이라 하여 몇 년 전 까지만 해도 논 가운데 탑이 있었고, 부근에는 절이나 암자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 오며 유물들이 나왔다고 한다. 서쪽으로 천길 먼당으로 불리는 높은 산이 있고, 아래쪽으로 탑골재가 있어 흥사ㆍ제방 등 동부지역의 주민들이 사천과 진주를 나들이 할 적에는 이 재를 넘나들어 큰 통행로가 되었으나 이제는 폐도가 되었다. 마을로 통하는 길을 검정에서 2차도로가 포장되어 있다.
취락형태는 검정에서 고개를 넘으면 머엉개이고, 가장 북단이 게자골로 여기서 남쪽으로 한 모퉁이 돌아가면 산음 다음이 목섬이고, 목섬에서 서편으로 한등성이 넘으면 탑골이다.
[5] 유동(柳洞) 마을(柳樹里)
12 : 23분, 유수교는 정맥길 중 유일하게 능선이 아닌 다리를 건너는 길이라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유수교 난간에 기대 멋지게 포즈를 잡고 기념 촬영을 한 후 다리를 건너「내동 / 축동, 사천」방향 표지판과「유동마을」표지석이 세워져 있는 삼거리에 도착했다.
「柳洞마을」은 진주시 내동면 유수리(柳樹里)에 있는 자연마을로 버드나무가 많아 「유동(柳洞)」부른다고 한다.
[참고자료 5] 유수리(柳樹里)
유수리 경상남도 진주시 내동면의 법정리 유동의 ‘유(柳)’자와 수거촌의 ‘수(樹)’자를 따서 유수리(柳樹里)라 하였다. 한자 표기가 ‘柳樹里’ 와 ‘柳水里’로 혼용되고 있으나, 문헌 조사에 따르면 유수리(柳樹里)가 맞는 표현이다.
조선시대에는 진주군 축곡면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진주군 축곡면 유동(杻谷面 柳洞)·수거촌(樹巨村)과 곤양군 가리면 가화동(加利面 加花洞) 일부를 합쳐 유수리(柳樹里)라 하고, 내동면(奈洞面)에 편입하였다. 1983년에는 사천군 곤양면 가화리(昆陽面 加花里) 일부가 유수리에 편입되었다.
남강 연안 지역으로 남강의 지류인 유수천이 흐른다. 대부분의 지역이 낮고 평탄한 구릉성 산지로 이루어져 있다. 정동소류지 등의 못이 분포해 있다. 남쪽으로 사천군 축동면에 접해 있다.
자연마을로는 버디골, 새미땀, 쑥골, 웃다리, 유동 등이 있다. 새송이버섯과 느타리버섯을 특산품으로 재배하고 있다. 진주보건소 정동보건진료소가 자리 잡고 있으며, 문화재로 도통사(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63호)와 1997년에 발견되어 천연기념물 제390호로 지정된 유수리 백악기고환경 공룡화석지(柳樹里 白堊記古環境 恐龍化石地)가 있다.
http://cafe362.daum.net/_c21_/filefilter_viewer_hdn
[참고자료 6] 유수리 백악기고환경과 공룡화석지
‣ 주 소 : 진주시내동면 유수리 457번지외 가화천 일원
‣ 전화번호 : 055) 745-0473
‣ 지정번호 : 천연기념물 제390호
‣ 지정일자 : 1997년 12월 30일
‣ 규모 : 82,24평
약 1억년 전 중생대 백악기 고환경 지질로서 공룡이 서식하였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곳이다. 2개의 공룡 화석층이 발견되어 국내 최초로 용각류의 지골, 발가락뼈, 새끼 공룡의 좌골 화석과 종류 미상의 두개골 화석 2점, 장골편 등 147점의 고화석편이 발굴되었다. 공룡 화석층의 특성, 공룡의 서식 및 화석화 환경과 그 과정을 상세히 나타내고 있어 국내 고환경 지질사의 귀중한 자료로 학술적 가치가 높다. 제1 공룡화석층은 두께 약 40-50㎝ 정도의 이질사암에서 사질이암으로 점이되는 퇴적층으로 조사지역 하상의 퇴적층 중 최하부의 층준에 해당한다. 암색은 대체로 붉은색을 띠며 석회질 단괴의 함유에 의하여 부분적으로 녹회색의 얼룩 구조가 발달되어 있다. 층의 하부에는 역을 함유하는 조립 내지 중립질 사암이 놓여 있으며 이 층과의 경계는 점이적이다. 또한 이 사암층은 조사지역에 노출되어 있는 퇴적층 중 최하부층이다. 그의 상부에는 두께 170㎝ 정도의 석영질 괴상의 중립 내지 조립 사암층(옅은 회색)이 뚜렷한 경계를 이루며 덮여 있다. 제2 공룡화석층은 제1 화석층보다 약 8m 상부의 지층에서 산출되는데 제1 공룡화석산지에서 150m 북동쪽 지점에 분포한다. 이 지층의 두께는 약 120㎝ 정도이며 하부는 이질암이, 상부는 이질암과 석회질 단괴를 함유하는 역질 및 세립사암층이 렌즈상 내지 설상으로 협재한다. 하부의 이질암 중에서 공룡 화석편들이 집중적으로 산출되며 제1 화석층 보다 세립질임에도 불구하고 장경 수㎝에서 10㎝ 이상의 단괴내에 공룡골 화석편이 산출됨은 특이할 만하다.
[5] 남강댐 홍수 에보 경보 시설
「유동마을」표지석이 있는 삼거리에서 우측 시멘트 길을 따라 진행, 약 3분 후 운동장 통과하여 시멘트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다소 가파른 오르막을 오르면서 숲으로 지행하기를 3, 4분 묘지와 대나무 숲을 지나
12 : 40분경, 「남강댐홍수예보경보시설」이 있는 곳에 도착을 했다. 작은 슬라브집 위에 철탑을 세우고 철탑에 여러 개의 스피커(싸이렌)와 안테나를 설치해 놓았으며 외부인 출입을 막기 위해 집 둘레로 철망을 쳐 놓았는데 이곳을 지나간 정맥꾼들의 표지기가 수없이 달려 있다. 출입문에 「이 시설물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재해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홍수예경보 시설입니다. 홍수에경보의 원활한 수행을 위해 이 시설물을 무단으로 조작하거나 손상시키는 일이 없도록 협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한국수자원공사 」라고 쓴 ‘알림’판을 붙여 놓았다.
[6] 非山非野 山行도 어렵다.
「홍수예보경보시설」을 뒤로하고 잠시 오르면 두릅 군락지가 나오는데 묘목을 심어 관리를 하는 것 같고 남부지역이라 잎이 활짝 피었다. 아깝다는 생각을 하며 쉬엄쉬엄 진행하다보니 밤나무 단지가 나온다.
13 : 00시경 밤나무 단지를 지나 봉(171m)에 오르니 먼저 도착한 대장과 장부장, 점심식사 자리를 마련해 놓고 있다. 약 30여 분간 점심식사를 겸한 넉넉한 휴식을 가졌다.
오늘 산행은 다른 때에 비해 非山非野 지대를 산행하는데도 불구하고 배낭의 무게가 천근만근의 무게로 어깨를 짓누르고 걸음도 잘 떨어지지 않는다.
솔티재를 출발하여 이곳까지 오는데 190. 2m 태봉산을 제외하면 100m 고도를 기점으로 50m 안팎에서 오르내리고 계리재까지도 높은 산이 없어 산행에 전혀 부담이 되지 않는 룰랄라 길이지만 몸이 생각을 들어주지 않는다. 아마도 지난주 산행(5/8, 한북정맥, 5/10, 괴산 두릅산행 등)의 피로가 풀어지지 않았기 때문인 모양이다.
[7] 유수재(=비리재)
13 : 30분,「솔티 6.93 / 와룡산 9.4」지점 이정표를 세워 놓은 곳에 도착
13 : 45분, 2차선 포장도로인 『유수재』에 내려섰다. 『유수재』진주시 내동면 유수리와 사천시 축동면 탑리를 연결하는 1049번 지방 도로로 낙남정간 주능선을 가로지르고 있으며 고개 마루에는 진주시(내동면)와 사천시(축동면)의 경계표지판을 세워 놓았다. 지도에는 이 고개를 『비리재=비루골고개』라 표기가 되어 있다.
[8] 다루 향토집
유수재를 횡단하여 묘지(13 : 52분)가 있는 능선을 따라 진행, 묘지가 있는 능선봉(128m)을 지나 컨테이너가 있는 농장을 지나 도로를 따라 잠시 오르니 「다루 황토집 / 찜질방 ☎ 756-1715)」간판과 이정표(낙남정맥 / 와룡산7.52km / 솔티고개8.82km)를 세워 놓은 곳에 도착(14 : 12분 경)을 했다. 날짜로 보면 늦은 봄인데 찌는 날씨가 초여름을 방불케 한다. 그리고 준비해 온 물 2통도 거의 바닥이 나 물도 보충하고 아이스크림이라도 입에 물어볼까 하여 「다루 향토집」에 들렸다. 원형으로 만들고 붉은 벽과 지붕을 황토로 처리해 운치를 살렸고 일자 형태의 살림집도 황토로 지었다. 그리고 돌과 여러 그루의 분재도 전시를 해 놓았는데 값이 꽤 나갈 것 같다.
아이스크림은 없고 식혜만 있다기에 식혜를 주문하고 빈병을 꺼내 물도 보충을 했다. 오픈을 한지가 얼마 되지 않았는지 주인장과 아주머니가 매우 친절하다. 가을에 오면 감(甘)도 따고 맛볼 수 있다며 꼭 한번 들리라고 권한다.
[9] 실봉산(=시루봉)
휴식을 취하며 식혜로 갈증을 풀고 「다루 향토집」을 출발한 것이 14 : 22분경. 포장길을 따라 진행 「상탑 햇살농원」,「낙남정맥 / 와룡산6.79km / 솔티고개9.55km」라 표시된 이정표를 지나 을 지나 고개 마루 절개지에서 도로를 버리고 숲으로 진입(15 : 00분)을 했다.
15 : 10분 경 임도를 지나 삼거리에 도착했다. 임도에는 「2000 임도시설 / 내동 독산지구 / 1.16km / 시행천 : 진주시 / 시공자 : 진주시산림조합」표지석과 낙동정맥 표시 이정표(←내동, ↑낙남정맥 실봉산0.6km, ↓낙남정맥, →심대마을)가 세워져 있다.
독산리(篤山里=독산, 지소)는 진주(진양)군 내동면의 지역으로서 지소 또는 독산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永康洞(山康 북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 첫 입주지로 부자들이 많았다고 함)을 병합하여 篤山里라 하였다.
이정표를 세워 놓은 송립숲으로 진입, 15 : 10분경, 표지판과 삼각점 그리고 묘지가 있는 『실봉산(해발 185.0m) 』정상에 도착했다. 선두로 온 대장과 장부장, 후미 팀을 기다리며 휴식을 취하고 있다.
『실봉산(=시루봉, 185.0m)』은 진주시 정촌면 대축리와 내동면 독산리, 신율리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산의 형국이 식정 위에 떡시루를 얹은 것과 같이 우뚝 솟아 있다 하여 「실봉산」 또는 「시루봉」이라 부른다고 한다.
출발할 때부터 몸 컨디션이 좋지 못했는데 2, 3시간 산행을 했는데도 어깨와 다리 근육이 풀어지지가 않는다. 오늘 산행의 종착지인 『계리재』까지는 앞으로 5시간은 족히 걸린다고 한다. 아무래도 지금의 몸 상태로 보아 완주는 무리다 싶어 대장에게 중간 탈출로를 물으니 진주분기점, 3번 국도가 지나는 「화원마을」에서 탈출하면 된다고 한다. 안교장도 중도 탈출을 하겠단다.
[10] 해돋이 쉼터
15 : 25분경 『실봉산』을 뒤로하고 두릅농장을 지나 이정표, 저수탱크, 운동 시설과 정자가 있는「해돋이 쉼터」에 도착(15 : 49분경)했다. 오늘 산행 중 가장 조망이 좋은 곳이다. 산불감시초소에는 이곳을 지나간 마루금 산꾼들이 달아 놓은 표지기가 쉼터에 온 것을 환영이라도 하는 듯 바람에 나부끼고 있다. 중간 탈출을 결정한 터라 바삐 갈 이유가 없어 눈이 시리도록 조망을 즐기고 자갈길 임도를 따라 진행을 했다.
15 : 55분, 이정표(←산강마을, ↑낙남정맥 화원마을, ↓낙남정맥 실봉산, →함촌마을) 사거리 도착, 선두 팀과 합류하여 임도를 따라 계속 진행, 사거리에서 약 2, 300m를 임도를 따라 내려가다 숲 속으로 진입을 했는데 앞서가던 대장이 마루금을 벗어난 것 같다며 잠시 대기를 하고 있으란다. 5분여를 기다렸는데도 연락이 없어 다시 사거리 이정표를 세워 둔 곳으로 이동하여 대장의 연락을 기다렸다. 드디어 대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마루금을 찾은 모양이다.
이정표 사거리에서 「해돋이 쉼터」 방향으로 약 170여 m 후진하여 임도 안부에 도착했다. 임도 안부 우측으로 샛길이 나 있는데 마루금 표시기가 있었지만 나무 잎에 가려 확인을 하지 못하고 그냥 지나쳤던 것이다.
[11] 대축리와 화동마을
16 : 13분경, 임도를 벗어나 숲 길 내림 길로 진행.
16 : 20분경, 밀양박씨 묘, 20여 분 후 진양강씨 묘를 지나
16 : 50분경, 화원마을 직전 묘지가 있는 곳에 도착하니 선두 팀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중간 탈출 지점으로 버스를 타고 삼천포로 이동하여 숙소와 식사 장소를 마련해 둘 것을 부탁하고 곧 바로 출발을 한다.
17 : 10분경, 진주시 정촌면 「대축리」마을로 내려섰다. 「대축리(大杻里)」는 본래 진주(진양)군 내동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한골, 깊은 한골, 함촌, 향교를 병합하여 대축리라 해서 정촌면에 편입이 되었다.
[참고자료 7-1] 정촌면(井村面)
정촌면의 지형을 보면 새가 남쪽으로 날아가는 형태 같기도 하고, 곰이 서쪽을 향해 편안하게 누워있는 것 같기도 하다. 위치를 보면 북쪽이 가호동과 인접하고 동북쪽은 문산읍, 서북쪽은 내동면, 남쪽은 사천시 사천읍과 경계를 하고 있다.
조선조 전기인 1402년 이래 진주목 남면의 정촌·지공·가차례리였고, 1864년에는 진주목의 정촌면·지공면·가차례면이 되었다.
1895년 진주목이 진주군이 되고 1906년 진주군 속면의 개편때 정촌면(鼎村面)·지공면(枝貢面)·가차례면(加次禮面)을 정촌(井村)이라는 어구를 쓰게 되었는데 정촌면의 전신인 鼎村面의 鼎자에서 目을 지우고 井村面이라고 하고 원 鼎村面은 鼎洞으로 개칭하였다 한다.
1973년 7월 1일 행정구역개편으로 10개리중 가좌리와 호탄리는 진주시로 이속되고 옥산리와 동물리는 문산읍에 이속되어 현재 화개리 · 관봉리 · 소곡리 · 예상리 · 예하리 · 대축리로서 6개 법정리와 19개 행정리로 되어 있다. 1995년 1월 1일 진주시와 진양군이 통합하여 진주시 정촌면으로 개칭되었다.
<출처> 진주시청 정촌면 내고장 유래
http://www.jinju.go.kr/county/jeongchon_01.htm?&sk_id=jeongchon
[참고자료 7-2] 진주시 정촌면 대축리
○ 대방(大芳)
유래는 골짜기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다. 옛날에는 축동면 중사동으로 되어 있었으나 일제때 대축리 대방으로 변경되었다. 오룡골은 옛날에 용이 5마리가 있었다 하여 지은 이름이다.
○ 함촌(咸村)
전설에 의하면 함안고을 원이 살았다 하여 함안촌이라 하였는데 확실한 유래는 알 수 없으나 진양지에 의하면 옛 지명에 함안촌이 있었다. 약400여년 전 의령군 가례면 부근에서 밀양박씨가 피난을 와 정착하면서 신안주씨와 의형제를 맺고 살았는데 그 후손들과 서씨, 황씨 등이 살고 있다.
○ 향교
생긴마을 혹은 향기마을이라 불렀다. 옛날 향교가 있었다는 증거로는 박씨 묘소의 비문에 향교안산에 위치한다고 새겨져 있고 임진왜란 당시 소실되었다고 전해오고 있으며 30여년 전 집을 건축하기 위해 터를 고르다가 향로항아리, 기와, 도자기 등이 발견되었고 70년대 말 새마을 사업때에도 도자기가 발견되었다 한다. 옛 향교터에는 일제말기까지 서당이 있었고 이 고장 청년들이 음력보름(8. 15)밤에 자발적으로 모여 민속씨름대회도 치렀으나 지금은 밭으로 개간되었다.
○ 심대(深大)
유래는 옛날 심판사 세력하에 있다가 서울로 떠난후 구암 이정선생의 입산을 계기로하여 포구정이라 칭하였다 한다. 구암선생의 묘소는 대축리 한골이라 하였는데 왜정말기에 심대라 개칭하였다. 마을에 있는 실봉산은 전설에 의하면 천지가 개벽할 때 산봉우리가 떡시루 정도 남고 물에 잠겼다하여 실이바위, 집화바위, 할머니바위, 미륵바위 등의 이름이 전한다.
<출처> <출처> 진주시청 정촌면 내고장 유래
http://www.jinju.go.kr/county/jeongchon_07.htm
17 : 35분, 「대축리」마을을 빠져나와 잠시 진행하니「화원경로복지관」이 나온다. 중간 탈출을 할 수 있는「화원마을」에 도착을 했다.「화원경로복지관」에 들려 마을 분에게 삼천포 가는 버스 정류소 안내를 받고 포장도로를 따라 진행, 삼거리에 도착했다. 삼거리에는 「실봉산·무선산 등산 안내도(낙동정맥 정촌면 구간)」와 실봉산 가는 방향 화살표가 있고 그 옆으로「화원 / 삼게탕 / 754-6583」간판이 세워져 있다.
17 : 45분, 마을분이 일러준 대로 삼거리에서 좌측 고속도로 굴다리(공사중)를 빠져나와 3번국도로 올라서「화동마을」버스정류소로 이동을 했다.
「진주시 정촌면 화개리(花開里)=꽃골=화동」는 본래 진주(진양)군 지공면의 지역으로서 꽃이 많이 피므로 「꽃 골」또눈 「화동(花洞)」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죽봉동과 내동면의 율동 일부와 가차레면의 하동 일부를 병합하여 「화개리」라 해서 정촌면에 편입을 시켰다.
<출처> 한국지명총람 9(경남편 Ⅱ) p535
[참고자료 8] 진주시 정촌면 화개리
○ 화동(花洞)
화봉산은 지리산의 주령으로 정촌면의 주된 산이다. 예로부터 "당개" 라 불렀다고 하는 이 산은 자생하고 있는 진달래, 연지, 들란초, 복숭아꽃, 살구꽃, 백일홍 등 이 만발하였던 곳이라 하여 마을이름을 "꽃골"이라 부르게 되었고 화동은 이에 연유하여 부르는 말이다.
○ 화원(花院)
1996. 4. 1 화동마을에서 분리된 마을이며 1980년도와 1992년도에 취락구조로 형성된 마을이다.
○ 매동(梅洞)
자연마을로 매동(불매골)과 내동(안골)이 있다. 서재골은 마을오른쪽에 옛날 공부를 하던 서당이 있었다 하여 일컫는 말이다. 일제강점때에는 마을옆에 정촌초등학교가 있었는데 18회 졸업생을 배출하고 개양으로 이전하였는 바 지금 정촌초등학교의 전신이다. 지금도 마을사람들이 예의바르고 향학열이 높아 칭찬을 받고 있는 것도 일찍이 서당이나 학교가 있어 문명을 빨리 받은 까닭이다. 불매골은 마을 앞산아래 불매터에 옹기굴이 있어 불매터 앞들이라는데서 유래했고 안골은 위치 상 안쪽에 있다는 뜻이다.
○ 이동(梨洞)
북쪽 물부려재 중봉의 돌배골에 지금까지 배나무가 있어 배골이라 하였다. 행정상 마을 명칭은 이(梨)자를 따서 이동이라 부른다.
○ 모심(慕心)
원래 진양강씨 집성촌을 이룬 곳이다. 웃어른을 섬기는 것을 제일로 여겨 심성을 좋게 기른다는 목적에서 사모할모(慕), 마음심(心)자를 따서 모심이라 하였다.
○ 죽봉(竹鳳)
시초에는 죽방(竹坊)이라고 불렀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대밭에 봉이 왔다 하여 마을이름을 죽봉이라 하였다한다. 진삼선 철도가 마을 중심을 통과하고 북쪽에 죽봉터널이 있으며 아래쪽에는 죽봉저수지가 있다. 마을 앞에 있는 느티나무는 500년 전에 심은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 시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출처> <출처> 진주시청 정촌면 내고장 유래
http://www.jinju.go.kr/county/jeongchon_07.htm
[12] 중간 탈출의 아쉬움
17 : 50분, 버스에 승차하여 「삼천포」로 이동하는 것으로 오늘 산행을 마무리 했다. 선두 팀과 끝까지 산행을 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2011. 6. 1
※ 화동마을 이 후는 [참고자료]만 올립니다.
[참고자료 9] 모산재
진주시 정촌면 화개리를 잇는 도로로
[참고자료 10] 와룡산(93.8m)
[참고자료 11] 竹鳳재,
진주시 정촌면 화개리에 있는 고개로 죽본동 동쪽에서 관봉리로 가는 고개다. 시초에는 죽방(竹坊)이라고 불렀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대밭에 봉이 왔다 하여 마을이름을 죽봉이라 하였다한다. 진삼선 철도가 마을 중심을 통과하고 북쪽에 죽봉터널이 있으며 아래쪽에는 죽봉저수지가 있다. 마을 앞에 있는 느티나무는 500년 전에 심은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 시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 대나무열매(전설)산이 봉황새처럼 생겼거나 봉황새가 산다고 생각하여 봉산(鳳山)이라고 불리는 산이 있었는데, 전설에 따르면 봉황새는 오동나무에 깃들고, 성질이 고결하여 굶주려도 좁쌀은 먹지 않고 대나무 열매(竹實)를 먹고 산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산에는 오동나무를 심고 강가에는 대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진양지』의 관기총설(官基總說)에 비봉산을 봉황새로 설정하고 비봉산 둘레에 대롱사(大籠寺), 중롱사, 소롱사를 창건하여 새가 날아가지 못하도록 봉황새를 보호하는 형국을 취하였다고 전한다.
관아 건물 또한 진주의 진산인 비봉 아래에 있는 금롱(金籠)의 형국에 위치하도록 하였다. 게다가 객사의 누각을 봉명루(鳳鳴樓)라 하였고, 비봉산 아래에 죽동(竹洞), 죽전(竹田)마을이 있어 봉황새가 먹는 대나무 열매를 공급토록 한다는 생각을 하기도 하였다.
작평(鵲坪)이라는 들판 이름도 봉황새가 까치를 보면 날지 않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고, 진주성의 앞산을 망진산(網鎭山)이라고 한 것은 봉황새가 그물을 보면 날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진주 지역 사람들은 봉황새가 사는 곳에는 인재가 나고 후손이 번영한다는 믿음으로 대나무를 심고 가꾸었다. 그 결과 남강변을 따라 많은 대나무가 자라게 되었고, 그것이 조선시대에는 진주 지역의 장관(壯觀)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한때는 실제로 대나무 열매가 유용한 양식으로 쓰인 적도 있었다.
1894년에 일어난 동학혁명으로 지리산 자락에 위치한 마을들이 곤욕을 치를 때 보리농사마저 흉년이 들어서 마을에서는 밥 짓는 연기를 볼 수가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견디다 못해 산에 가서 칡뿌리를 캐거나 송기(松肌: 쌀가루와 함께 섞어서 떡이나 죽을 만들어 먹기도 한다는 소나무의 속껍질)를 벗겨 먹는 등 풀뿌리와 나무껍질로 연명하였다.
사람들이 이처럼 고통을 당하는데, 뜻밖에도 7월과 8월에 산죽(山竹) 수만 대가 돋아나는 이변이 일어났다. 죽실(竹實)은 보리쌀 비슷하게 생겼으나 보리쌀보다는 약간 작고, 밥을 지을 수도 있으며 가루로 빻으면 수제비도 끓일 수 있었다. 죽이나 술 등의 대용식으로 가능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비상식량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출처>
http://cjk1438.or.kr/webmiso/bbs/board.php?bo_table=fboard&wr_id=10661
[참고자료 12] 고미동고개
정촌면과 문산읍 경계인 2차선 포장도로
○ 관봉리(官鳳里) : 본래 진주(진양군) 지공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 구역 페합에 따라 봉전동, 상동 일부와 사천군 북면의 관율동 일부를 병합하여 관율과 봉전의 이름을 따서 관봉리라 하여 정촌면에 편입 함
<출처> 한국지명 총람(경남편 Ⅱ) p 533
○ 고미(古美) : 옛 이름은 산꼬리가 아홉등으로 이루어져 구미골(九美谷)이라 부르다가 정자나무가 여러나무 있어서 길손들의 휴식처로 더없는 곳이기에 계미골이라고 고쳐서 부르다가 그 뒤 아름다운 골이라 하여 고미(古美)라고 부르고 있다.
○ 봉동(鳳洞) : 앞산이 봉(鳳)새를 닮았다하여 새밭골이란 안동네와, 앞산너머 봉새가 지나왔다 하여 묵은 새밭골이 있다. 새밭골에는 봉새를 닮은 암 수의 형상석이 있고 숫봉새는 암봉새를 따라가는 형상을 하고 있었는데, 경운기 길이 뚫린 후에 숫봉새와 암봉새의 머리가 없어져 버렸다.
○ 봉전(鳳田)
무선산 북쪽 기슭에 자리 잡은 이 마을은 뒷산은 학이 밭에 내려앉는 형태이기 때문에 봉전이라 부른다. 우백호 등은 학등이고 좌청룡은 무선산이다. 우백호 등밑에 용청사(龍淸寺)가 있었으나 지금은 석탑만 남아있고 없어졌다. 좌청룡인 무선산 중턱은 진(陳)터라고 전해왔는데, 지금은 성터만 남아 있다. 무선산 밑 중턱에 용바위가 있는데 용이 등천했다고 하는 굴이 있다.
[참고자료 12] 계리재
풍수지리설에 의하여 전해진 말에 의하면 닭(鷄)과 삵쾡이(狸)가 이쪽 저쪽에 있다고 해서 『계리재』라 하였다는 설과 저 아래 관봉초등학교가 있는 고미동을 계미골이나 계미동으로 부르는데 이 지역의 산세가 고양이처럼 되어 있어서 게리재라고도 부른다고 한다.
○ 진주시 문산읍 두산리
1914년, 진주군 정촌면 동물곡동(井村面冬勿谷洞), 처음동(處音洞), 이곡면 어수동(耳谷面魚數洞), 송곡면 정자동(松谷面亭子洞) 각 일부로서 동물리(冬勿里)라 하고 정촌면(井村面)에 속했다가 1973년 7월 1일 대통령령 제6542호(1973. 3. 12공포)에 의하여 문산면으로 편입되었다.
○ 동물(冬勿) : 이 지방의 방언으로「두메실」이라 부른다. 두메실이란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고 불리워진 이름인데 1910년 토지세부측량시 동물이라고 불려졌다고 한다.
○ 계리재 : 옛날부터 풍수설에 의하여 전해진 말에 의하면 닭(鷄)과 삵쾡이(狸)가 이쪽 저쪽에 있다고 해서 계리재라 하였다.
○ 계리재 : 게리재 부락 옆산이 닭실이고 북산이 씩(너구리)실이므로 이 부락 지형에 따라 게리재, 제리재 또는 소음동이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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