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실한' 크리스챤들이 연애함에 있어 나타나는
몇가지 문제들이 있다.
오늘은 여기에 대해 생각해 보자.
단 이점은 '신실한' 크리스챤에게 해당하는 거지,
전체적으로 일반화 할수는 없다.
1.
첫번째 운명론적 사고이다.
신실한 크리스챤들은 자신에게 딱 맞는 한사람, 혹은 정해진 배필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하나님이 짝지워주신 베필을 위해 기도하고,
관심있는 사람이 생기면 '이사람이 맞습니까 Yes or No?'를 질문한다.
그러다가 혼자서 Yes라는 확신을 얻으면(자의적인 해석에 의존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그것을 기정사실화 하여 상대방에게 접근한다.
소위 '당신에 대해 기도 응답받았다'식의 황당한 접근법이다.
이럴 경우 상대는 부담을 느끼고 자연스럽게 관계가 진행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이는 예정 혹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잘못 이해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미래를 아시지만 그것을 결정해 놓으셨다기 보다는 예지하신다는 것에
가깝다고 본다.
성경을 보면, 역사는 하나님의 뜻, 궁극적인 목표의 성취이지만,
그 과정에서 인간은 분명한 자유 의지를 가지고 행동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놀라운 정도로 존중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럼에도 그분의 궁극적인 뜻은 이루어진다.
그래서 오히려 기독교는 운명론이 아닌,
하나님의 뜻 안에서 자유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꽤 많은 경우
크리스챤들도 하나님이 주시는 자유를 누리기 보다,
기계적인 운명론에 의지하고자 하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이 특별히 응답을 주시거나 배우자를 알려주시는 경우도 많다.
그럼에도 그러한 응답도 인격적 만남과 사랑의 감정이 동반되고 확인되어야 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으나,
하나님이 직접적으로 처리 하시는 부분이 있고, 또 우리가 스스로 해야 할 부분이
있다.
그러나
인격적인 만남에 존재하는 불확실성과 거절감이 두렵기 때문에,
때로 우리는 관계를 필연적인 만남으로 규정하려고 노력한다.
만남의 과정에 있었던 신기한 우연들, 여러 정황들 등등,
긍정적인 정보를 조합하여,
하나님의 뜻일 가능성이 높다고 스스로 판단한다.
그리고 기대가 깨어지면, 하나님께 항의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에 잘못된 방식으로 의존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쉽게 말해 우리가 해야 할 자유와 선택의 문제까지도
일종의 '신탁(oracle)'에 의지해서 그저 따라가가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유아기적 신앙에 머무르는 것일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 딱 정해진 배우자가있다는 접근은 위험한 생각일 수 있다.
물론 하나님이 정해주신 베필은 있다. 그러나 내가 그것을 섣불리 확신하고
단정지을수 없다는 말이다.
그것을 찾아가는 과정 - 인격적인 만남과 서로를 알아감 - 은,
어떤 '응답'을 통해 '점프'해 갈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답을 아시지만, 웬만해서는 말씀하지 않으신다. ^^
그것은 우리가 운명의 순응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우리의 인격을 성숙시켜 나가고,
인간을, 삶을, 그리고 자기 자신을 이해해 나가기 원하시기 때문이리라. . .
2.
비전이나 목표가, 사랑(관계)을 압도하는 경우가 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야 하고,
우리 사람의 모든 영역과 부분이,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배우자 문제에 있어도, 비전의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예를 들어 서로의 비전을 공유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관계라면, 함께 살아가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비전만을 위해 이성관계를 생각하는 것도
참으로 부자연스럽고 비인간적인 일이다.
예를 들어, 신학생들은 자신의 배우자로서 보다는, 이상적인 사모감을 찾는 말이
있다.
신학교에서는 유아교육과를 농담반 진담반으로 '사모학과'라고 부른다는 말이
있는데,
신학생이 교회를 개척하면 사모는 교회 부설 유치원을 운영햐는 경우가 많아서라고
한다.
장로님이나 목사님 딸, 3대이상 신앙을 가진 집 딸 등을 조건으로 생각한다는 말도
들어본것 같다.
물론 다 좋은얘기이다.
그러나 문제는 사람이 아닌 '기능'을 보고 배우자를 찾는것이 아니냐 하는 점이다.
비전이라는 이름으로 사람이 일종의 '상품화' 될수 있다는 말이다.
연애와 결혼은 인간과 인간이 사랑하는 일이다.
어떤 목표만을 위해 두사람이 함께 하는 건 꼭 결혼하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일이다.
때로는 앞에서 말한 '두려움'이 이러한 현상의 원인이기 되기도 한다.
자기 자신에 대해 자신이 없을 경우, 무언가 거창한 비전을 이야기 하면서,
관계를 규정하려 하는 경우가 있다.
이성적인 매력에 끌리는 것을, 비전을 위해서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반대로 매력이나 사랑의 감정이 없는데 비전을 위해서 관계를 선택하기도 한다.
위험한 일이다.
이성 문제를 영적 권위로 해결하려는 일도 있다고 한다.
영적 권위자가 당사자들의 동의 없이 결혼 상대자를 정해주거나,
심지어 리더가 멤버에게 자신이 상대에게 맞는 배우자라고 강요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참으로 황당한 일이다.
기독교는 인간성을 초월하는 것이지,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간성을 무시하게되면, 참 우습고도 슬픈 일들이 벌어진다.
3.
크리스챤 중에 특히 신실한 사람중에
지성과 인격에서 오히려 매력이 떨어지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이런 농담을 한다.
권사님들이나 집사님들이 신앙 좋다고 하면서 소개시켜 주시면,
절대로 만나지 말라는. ^^
자매들이 주로 많이 하는 얘기는
크리스챤 형제들 중에 자신감과 카리스마가 있는 사람이 적다는 것이다.
실제로 크리스챤들은 겸손과 회개를 미덕으로 삼고 있는데,
이런 점이 약간 왜곡되어, 자신감 없음과 유약함으로 나타지 않는가 생각해 본다.
반대로 신앙좋고 열심이 있는데
자기 고집으로 똘똘 뭉친, 상대에 대한 배려가 부재한,
'불도저형'의 형제들도 있다.
각 집단마다 이상적으로 제사한는 인간형의 척도가 있는데,
교회에서는 그것이 교회활동에 대한 헌신과 열심이고,
여기에서 인정을 받으면 다른데서는 면죄부를 받는 것이다.
그래서 일은 열심히 하는데, 인격적 성숙은 전혀 안되고
자아가 전혀 깨어지지 않는데도, 인정은 받고,
다른 사람들 무지하게 상처주면서 공동체의 중심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형제들이
있는 것이다.
이런 형제와 교제하고 결혼하는 자매는 참 불행하다 하겠다.
형제들도 신실한 크리스챤 자매에게서 별 매력을 못느낀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다 그렇지는 않지만, '신실한 크리스챤 자매'의 이미지를 생각해 보면,
대략 다음과 같은 것이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