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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엽 시인의 돈암동 집
맹문재
1. 1959∼1961, 돈암동 생활 신동엽 시인은 1959년 봄 돈암동에 셋방을 얻어 살림을 차리면서 서울 생활을 시작했다. 주소는 서울시 성북구 보문로 168번지. 성북구청 근처 돈암동 개울가에 있는 집으로 가족과 함께 처음으로 정착한 곳이다. 신동엽 시인은 인병선 여사와 1956년 10월 결혼했는데 직장이 없는데다가 건강마저 좋지 않아 생활이 어려웠다. 인병선 여사는 어려운 가정 살림을 헤쳐나가려고 결혼한 다음해부터 부여터미널 맞은편(현재 백마약국 자리)에 ‘이화양장점’을 운영했다. 결혼한 다음해 맏딸 정섭(貞燮)을 얻었고, 1957년 가을부터 충남 보령군에 있는 주산농업고등학교의 교사로 근무하게 되어 세 식구는 보령으로 이사를 했다. 그런데 안정된 생활을 이루는가 싶었던 신동엽 시인은 각혈을 시작했다. 그리하여 전염성이 있는 폐결핵이라고 여기고 인병선 여사와 딸을 서울 돈암동 친정집으로 올려 보냈다. 신동엽 시인의 장남인 좌섭(申佐燮)에 따르면 그 각혈의 원인은 폐결핵이 아니라 폐디스토마일 가능성이 높다. 신동엽 시인은 1951년 국민방위군 대구 수용소에서 빠져나와 귀향할 때 굶주림에 지쳐 민물 가재를 잡아먹은 일이 있었는데, 그것으로 보아 폐디스토마에 걸렸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뜻밖의 상황에 좌초된 신동엽 시인은 부여로 돌아와 시를 쓰기 시작했다. 가족과 떨어진 채 아픈 몸을 치료하면서 시를 쓴 그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1959년 1월 28일까지 인병선 여사와 주고받은 편지들을 보면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그지없이 애절하다. 인병선 여사에게 보낸 1958년 3월 15일 및 4월 9일의 편지를 보면 주산농업고등학교에는 휴직제가 없어진 신공무원법에 따라 사직서를 제출했는데, 새로 부임한 교감 선생님의 배려로 휴직 처리가 된 상태였다. 신동엽 시인은 1959 년 (30 세 ) 1 월 석림 (石林 )이란 필명으로 『조선일보 』 신춘문예에 시작품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 」가 입선한 것이 계기가 되어 서울에 올라왔다. 시인으로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건강도 어느 정도 회복되었기에 상경한 것이다. 그리하여 ‘동원네’라고 불리는 집에서 셋방살이를 했는데, 손님이 오면 인병선 여사는 작은 아이(좌섭)를 업고 큰 아이(정섭)의 손을 잡고 집밖으로 나가 땅바닥에 강아지를 그리며 놀아주었을 정도로 좁은 집이었다. 그렇지만 그곳은 장남 좌섭을 얻었을 정도로 가정생활의 근거지였고 창작의 산실이었다. 신동엽 시인은 상경한 이듬해에 월간 <교육평론사>에 취직했고, 4·19혁명을 맞아 자신의 작품 「아사녀」가 수록된 『학생혁명시집』을 출간했을 정도로 혁명의 흐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61년에는 명성여자고등학교 야간부에 국어교사로 채용되었고, 1962에는 작은아들 우섭(佑燮)도 얻었다. 또한 시론(「시인정신」,『자유문학』) 및 평론(「60년대의 시단 분포도」,『조선일보』)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의 영역도 넓혀나갔다. 2. 1962∼1969, 동선동 생활 신동엽 시인은 1962년 장모의 도움을 받아 성북구 동선동 5가 45번지로 집을 장만해 이사했다. 식구가 늘었고 창작 생활에 집중할 공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의 나」(『신사조』), 「이곳은」(『현대문학』), 「별밭에」(『성원』), 「너는 모르리라」(『경향신문』) 등의 시작품을 발표했다. 1963년 3월에는 그동안 발표한 작품 10편과 새로운 작품 8편을 수록한 첫 시집 『아사녀』(문학사)를 출간했다. 이듬해 3월에는 건국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했고(1학기만 다님), 7월에는 부여와 목포를 거쳐 제주도 여행도 했다. 1965년에는 한일협정 비준 반대 문인 서명 운동에 동참했고, 1966년에는 시극 「그 입술에 파인 그늘」을 최일수 연출로 국립극장에서 상연했다. 1967년 신동엽 시인은 가장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1월에는 앤솔로지 『52인 시집』(신구문화사)에 시 「껍데기는 가라」「아니오」 등 7편을 실었고, 6월부터 8월까지는 『중앙일보』의 시 월평을 맡아 집필했다. 또한 12월에는 펜클럽 작가기금을 받아 장편서사시 「금강」을 『한국현대신작전집』 제5권(을유문화사)에 발표했다. 「금강」은 서화, 후화를 포함해서 총 30장 4,673행으로 구성된 대작으로 한국 시문학사에서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1894년에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을 토대로 3·1운동, 4·19혁명으로 맥을 잇고 있는 민중의 역사를 노래한 대서사시이다. 신동엽 시인은 동양라디오 방송의 <내 마음 끝까지>라는 프로그램도 맡아 대본을 썼다. 1968년 5월 신동엽 시인은 오페레타 「석가탑」(백병동 작곡)을 드라마센터에서 상연했다. 6월 16일 김수영 시인이 타계하자 조사 「지맥 속의 분수」(『한국일보』 6월 20일)를 발표했고, 시작품 「보리밭」「여름 이야기」 등 5편을 『창작과비평』에 발표했다. 그렇지만 1969년 3월 간암 진단을 받고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했다. 차도가 없어 4월 7일 동선동 자택에서 타계했다. 4월 9일 경기도 파주군 금촌읍 월롱산 기슭에 안장되었다. 신동엽 시인의 묘소는 1993년 11월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 백제왕릉 앞산으로 이장되었다. 3. 서울의 자본주의 인식 신동엽 시인은 돈암동 집에서 생을 마칠 때까지 서울을 주시했다. 식구들의 삶을 책임진 가장으로서, 사회적인 존재로서, 그리고 시인으로서 서울의 상황을 담아낸 것이다. 그와 같은 모습은 다음의 작품에서 볼 수 있다. 초가을, 머리에 손가락 빗질하며 남산에 올랐다 팔각정에서 장안을 굽어보다가 갑자기 보리씨가 뿌리고 싶어졌다. 저 고층 건물들을 갈아엎고 그 광활한 땅에 보리를 심으면 그 이랑이랑마다 얼마나 싱싱한 곡식들이 사시사철 물결칠 것이랴 서울 사람들은 벼락이 무서워 피뢰탑을 높이 올리고 산다. 내일이라도 한강 다리만 끊어 놓으면 열흘도 못 가 굶어죽을 특별시민들은 과연 맹목기능자이어선가 도열병약(稻熱病藥) 광고며, 비료 광고를 신문에 내놓고 점잖다. 그날이 오기까지는 끝이 없을 것이다. 숭례문 대신에 김포의 공항 화창한 반도의 가을 하늘 월남으로 떠나는 북소리 아랫도리서 목구멍까지 열어놓고 섬나라에 굽실거리는 은행 소리 조국아 그것은 우리가 아니었다. 우리는 여기 천연히 밭갈고 있지 아니한가. 서울아, 너는 조국이 아니었다. 오백년 전부터도, 떼내버리고 싶었던 맹장 그러나 나는 서울을 사랑한다 지금쯤 어디에선가, 고향을 잃은 누군가의 누나가, 19세기적인 사랑을 생각하면서 그 포도송이 같은 눈동자로, 고무신 공장에 다니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관수동 뒷거리 휴지 줍는 똘마니들의 부은 눈길이 빛나오면, 서울을 사랑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그날이 오기까지는. ― 「서울」 전문 위의 작품의 화자는 “초가을, 머리에 손가락 빗질하며/남산에 올”라 “팔각정에서 장안을 굽어보다가/갑자기 보리씨가 뿌리고 싶어”지는 충동을 느낀다. “저 고층 건물들을 갈아엎고 그 광활한 땅에/보리를 심으면 그 이랑이랑마다 얼마나 싱싱한/곡식들이 사시사철 물결칠 것이랴”라고 생각한 것이다. 작품의 화자는 보리를 심지 않는 “서울 사람들은/벼락이 무서워/피뢰탑을 높이 올리고” 살 정도로 두려움이 많고, “내일이라도 한강 다리만 끊어 놓으면/열흘도 못 가 굶어죽을” 수밖에 없으면서도 “도열병약(稻熱病藥) 광고며, 비료 광고를/신문에 내놓고 점잖”게 살아가는 모습을 호의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그리하여 “특별시민들”은 “과연 맹목기능자”인가 하고 묻는다. 도시적인 삶의 방식과 가치에 함몰되어 자연의 생명력을 망각한 서울 사람들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화자는 이와 같은 상황이 “끝이 없을 것이”라고 예상한다. 다시 말해 “숭례문 대신에 김포의 공항/화창한 반도의 가을 하늘”이며 “월남으로 떠나는 북소리”며 “아랫도리서 목구멍까지 열어놓고/섬나라에 굽실거리는 은행 소리” 등이 지속되리라고 보는 것이다. 그리하여 화자는 “우리는 여기 천연히 밭 갈고 있지 아니한가”라고 물으며 “조국아 그것은 우리가 아니었다”고 말한다. “오백년 전부터도,/떼내버리고 싶었던 맹장”이었을 뿐 “서울아, 너는 조국이 아니었다”고 단언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화자는 서울을 비난하는 것으로 마무리 짓지 않고 “나는 서울을 사랑한다”고 바꾸어 말한다. “지금쯤 어디에선가, 고향을 잃은/누군가의 누나가, 19세기적인 사랑을 생각하면서/그 포도송이 같은 눈동자로, 고무신 공장에/다니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관수동 뒷거리/휴지 줍는 똘만이들의 부은 눈길이/빛나오면, 서울을 사랑하고 싶어진다”고 희망한다. 화자는 노동자나 하층민이 서울을 이끄는 주체라고 인식하고 그들이 지배하는 시대가 오면 서울을 사랑하겠다고 약속하는 것이다. 화자는 “그러나, 그날이 오기까지는” 서울을 사랑할 수 없다고 또다시 단언한다. 서울을 단순히 하나의 도시가 아니라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장소로 보는 것이다. 다시 말해 대지를 파괴하고 세운 고층 건물들이 즐비한 도시이기에 자연으로부터 소외된 곳이기도 하면서 “섬나라에 굽실거리는 은행 소리”로 넘치는 대한민국의 심장부라고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이다. 화자는 서울의 상황이 오백 년 전 중국의 지배를 받던 때와 똑같은 처지라고 여긴다. 그리하여 제국주의의 지배를 받는 서울을 “떼내버리고 싶”은 “맹장”이라고 아파한다. 서울을 단순히 농촌과 대비되는 도시가 아니라 거대한 제국 자본주의 체제에 종속된 식민지로 인식하는 것이다. 결국 화자는 서울을 통해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을 인식하고 그 극복을 모색하는 것이다. 이슬비 오는 날, 종로5가 서시오판 옆에서 낯선 소년이 나를 붙들고 동대문을 물었다. 밤 열한 시 반, 통금에 쫓기는 군상 속에서 죄 없이 크고 맑기만 한 그 소년의 눈동자와 내 도시락 보자기가 비에 젖고 있었다. 국민학교를 갓 나왔을까. 새로 사 신은 운동환 벗어 품고 그 소년의 등허리선 먼 길 떠나온 고구마가 흙 묻은 얼굴들을 맞부비며 저희끼리 비에 젖고 있었다. 충청북도 보은 속리산, 아니면 전라남도 해남땅 어촌 말씨였을까. 나는 가로수 하나를 걷다 되돌아섰다. 그러나 노동자의 홍수 속에 묻혀 그 소년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 눈녹이 바람이 부는 질척질척한 겨울날, 종묘 담을 끼고 돌다가 나는 보았어. 그의 누나였을까. 부은 한쪽 눈의 창녀가 양지쪽 기대 앉아 속내의 바람으로, 때 묻은 긴 편지 읽고 있었지. 그리고 언젠가 보았어. 세종로 고층건물 공사장, 자갈지게 등짐하던 노동자 하나이 허리를 다쳐 쓰러져 있었지. 그 소년의 아버지였을까. 반도의 하늘 높이서 태양이 쏟아지고, 싸늘한 땀방울 뿜어낸 이마엔 세 줄기 강물. 대륙의 섬나라의 그리고 또 오늘 저 새로운 은행국(銀行國)의 물결이 뒹굴고 있었다. 남은 것은 없었다. 나날이 허물어져가는 그나마 토방 한 칸. 봄이면 쑥, 여름이면 나무뿌리, 가을이면 타작마당을 휩쓰는 빈 바람. 변한 것은 없었다. 이조 오백 년은 끝나지 않았다. 옛날 같으면 북간도라도 갔지. 기껏해야 버스길 삼백 리 서울로 왔지 고층건물 침대 속 누워 비료 광고만 뿌리는 그머리 마을, 또 무슨 넉살 꾸미기 위해 짓는지도 모를 빌딩 공사장, 도시락 차고 왔지. 이슬비 오는 날, 낯선 소년이 나를 붙들고 동대문을 물었다. 그 소년의 죄 없이 크고 맑기만 한 눈동자엔 밤이 내리고 노동으로 지친 나의 가슴에선 도시락 보자기가 비에 젖고 있었다. ―「종로5가」 전문 위의 작품의 화자는 “이슬비 오는 날,/종로5가 서시오판 옆에서/낯선 소년이” 자신을 “붙들고 동대문”이 어디냐고 묻는 모습을 소개하고 있다. “밤 열한 시 반,/통금에 쫓기는 군상 속에서 죄 없이/크고 맑기만 한 그 소년의 눈동자와/내 도시락 보자기가 비에 젖고 있”는 상황이다. 화자는 그 “소년”을 좀 더 주목해서 바라보면서 “국민학교를 갓 나왔을까./새로 사 신은 운동환 벗어 품고/그 소년의 등허리선 먼 길 떠나온 고구마가/흙 묻은 얼굴들을 맞부비며 저희끼리 비에 젖고 있”는 모습도 발견한다. 그렇지만 화자는 그 소년을 외면하고 지나쳤다. 그런데 걸어가는 동안 “충청북도 보은 속리산, 아니면/전라남도 해남땅 어촌 말씨였을까”라는 궁금증이 든 것은 물론 미안함이 솟아올라 “가로수 하나를 걷다 되돌아”선다. 그렇지만 어느새 “노동자의 홍수 속에 묻혀 그 소년은 보이지 않”는다. 화자는 그 순간 “소년”을 둘러싼 가족들을 생각한다. “눈녹이 바람이 부는 질척질척한 겨울날,/종묘 담을 끼고 돌다가” 발견한 “부은 한쪽 눈의 창녀가 양지쪽 기대 앉아/속내의 바람으로, 때 묻은 긴 편지 읽고 있”는 모습에서 “그의 누나”를 떠올린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세종로 고층건물 공사장,/자갈지게 등짐하던 노동자 하나이/허리를 다쳐 쓰러져 있”는 것을 본 모습에서 “그 소년의 아버지”도 떠올린다. 아울러 화자는 그 “소년”을 둘러싸고 있는 서울의 상황도 생각한다. “반도의 하늘 높이서 태양이 쏟아지고,/싸늘한 땀방울 뿜어낸 이마엔 세 줄기 강물”이, 다시 말해서 “대륙의 섬나라의/그리고 또 오늘 저 새로운 은행국(銀行國)의/물결이 뒹굴고 있”는 상황을 떠올리는 것이다. 그 “소년” 같은 노동자나 사회적 약자는 제국주의 자본체제의 물결이 워낙 세기 때문에 발버둥쳐도 헤어날 수 없음을 안쓰러워하는 것이다. 실제로 근대 국가의 노동자 계급에 속하는 이전 시대의 노비나 남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짓는 소작농들에게는 가을 추수가 끝나도 “남은 것은 없었다”. “나날이 허물어져가는 그나마 토방 한 칸./봄이면 쑥, 여름이면 나무뿌리, 가을이면 타작마당을 휩쓰는 빈 바람” 뿐이었다. 그러므로 화자가 서울의 거리에서 만난 그 “소년”을 둘러싼 노동자 계급의 상황에 대해 “변한 것은 없었다./이조 오백 년은 끝나지 않았다”라고 진단한 것은 일리가 있다. 화자는 “옛날 같으면 북간도라도 갔지./기껏해야 버스길 삼백 리 서울로 왔”는가라고 다소 극단적인 감정까지 내놓는다. 그만큼 “고층건물 침대 속 누워 비료 광고만 뿌리는 그머리 마을,/또 무슨 넉살 꾸미기 위해 짓는지도 모를 빌딩 공사장”에 “도시락 차고” 일하는 노동자들을 안타깝게 여기는 것이다. 그리하여 화자는 “이슬비 오는 날,/낯선 소년이 나를 붙들고 동대문을 물었다./그 소년의 죄 없이 크고 맑기만 한 눈동자엔 밤이 내리고/노동으로 지친 나의 가슴에선 도시락 보자기가/비에 젖고 있었”던 상황을 다시 떠올린다. “소년”과 함께하려고, 그와 연대해서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을 극복하려고 하는 것이다. 4. 사랑과 혁명을 위한 시 시와 사랑과 혁명을 꿈꾼 신동엽 시인에게 서울은 다소 낯선 장소였다. 부여의 고향 사람들에게는 공동체 의식을 볼 수 있었는데 비해 서울 사람들에게는 이기적인 경쟁에 빠져 행복한 모습을 볼 수 없었다. 그리하여 신동엽 시인은 조용하면서도 부단하게 사랑과 혁명을 이루고자 시를 써나갔다. 큰소리로 떠든다고, 바삐 서둔다고 꿈을 이룬다고 보지 않았다. 신동엽 시인이 서울의 거리에서 들리는 자동차 소리, 호각 소리, 클랙슨 소리, 사람들의 외치는 소리, 깨어지는 소리 등을 멀리하고 자신을 지킨 것이 그 모습이다. 일요일이면 북한산이나 관악산에 오른 것도 그러하다. 등산하는 사람치고 눈동자가 맑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믿음을 가질 정도였다. 또한 신동엽 시인은 전경인(全耕人)의 시인 정신을 가지고 암흑과 절망을 외치는 현대인들을 구원하려고 했다. 시란 인간 인식의 전부이고 세계 인식의 통일적 표현이며 생명의 조직이라고 보고, 광범위한 정신의 집단과 호혜적 통로를 가지려고 한 것이다. 장편 서사시 「금강」을 창작한 것은 이와 같은 의도를 실현한 것으로 보인다. 「60년대의 시단 분포도―신저항시 운동의 가능성을 전망하며」란 평론을 공들여 쓴 것도 마찬가지이다. 정치를 정치 전문 기능자에게, 종교를 종교 전문 목사에게, 사상을 직업 교수에게 위임한 채 단어 상자나 쏟아놓고 원고지 앞에 앉아 안이한 서정으로 노닥거리는 시인들에게 각성을 요구했다. 민중 속에서 흙탕물을 마시고 민중의 정열과 지성을 조직하고 조국 심성의 본질적 전열(前列)에 발언할 것도 제시한 것이다. 또 다른 평론에서 수운 최제우가 삼천리 강토를 10여 년 동안 걸으면서 노예의 조국을 본 것을 소개한 것도, 진정한 시인이라면 미국의 식민지 지배를 받고 있는 조국의 현실을 피맺힌 언어로 노래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도 같은 의도로 볼 수 있다. 신동엽 시인은 김수영 시인이 타계하자 조사 「지맥 속의 분수」를 발표했는데, 김수영 시인이 순수한 것, 민족적인 것, 인간적인 것을 노래함으로써 어두운 시대의 위대한 증인이었다고 평가하면서 그의 죽음은 민족의 손실이라고 아쉬워했다. 그러면서도 위대한 민족 시인의 영광이 무덤 위에서 빛날 것이라고 기대했다. 뿐만 아니라 평론 「선우휘 씨의 홍두께」를 통해 좌우익이라는 색깔로 이 세계를 분리하는 세력에 맞서 시인은 영원한 자유주의자이고 부정주의자라며 김수영 시인의 참여시 정신을 계승했다. 신동엽 시인이 희망했던 참여시 정신은 1970년대에 들어 민중시로 확대되었다. 근로기준법 준수와 유신헌법 폐기를 외치는 민중시의 목소리들이 시대를 울린 것이다. 맹문재 시론 및 평론집으로 『한국 민중시 문학사』『패스카드 시대의 휴머니즘 시』『지식인 시의 대상애』『현대시의 성숙과 지향』『시학의 변주』『만인보의 시학』『여성시의 대문자』『여성성의 시론』 『시와 정치』 등이 있다. 현재 안양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