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보는 기준이란 구약때부터 한가지로 확정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언약입니다. 언약안에 담긴 의입니다. 그런데 그 언약안에 담긴 의는 언제나 흠없는 제물의 희생으로 나타납니다. 그것은 이지상에서 사람들이 지어내는 어떤 의도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이 세상의 죄를 계속 파고 들어서 근원까지 파 헤쳐서 처리하겠다는 의도로써 이 지상에 언약에 의를 담아서 내려보낸 겁니다.
사람들은 이점에 대해서 오해합니다. 하나님께서 뭘 내려주니까 그것을 잘 이용해서 구원받으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줄 아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인간들의 오해가 집결하고, 그 집결된 자리에서 언약안에 담긴 의가 희생당하는 모습으로 드러나고, 그 희생을 기준으로 세상은 심판의 대상이 됨을 구약성경이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이것이 최종적으로 성사된 자리가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보는 기준이란 예수님의 죽음 하나뿐이라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아버지고, 이 세상이 아들이라면 항상 말을 건네오시는 것이 이것뿐입니다. “네가 내 아들의 십자가 죽음을 어찌 보느냐?”
요한삼서 1장 2절의 말씀으로 바꾸어서 말해보면 이렇게 됩니다.
거기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사랑하는 화평교회야! 네 영혼 잘되게 하는 내 아들의 십자가피만으로 너는 오늘도 횡재한 인생이야! 맞지? 오늘도 그렇게 믿느냐?” 주님께서 이렇게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데 아들의 희생외에는 아예 다른데 관심이 없는 것이 동일하고 변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본문에서 이런 식의 대답을 듣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 내 영혼을 위해서 주님이 몸도 주셨는데, 그보다 작은 것은 못주겠는지요? 제 앞에 닥친 범사가 다 저의 강건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믿습니다.” 사고방식이 맨 이런 믿음으로 충만해 있으니, 오늘 우리 앞에 예수님이 나타나신다 해도 또 다시 십자가에 못박을 판국입니다.
사람들이 복음을 들으면서도 맨 자기 인생 구멍 뚫린것, 메울생각만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힘좀 쓰는 분이니까 힘꽤나 쓰는 분 믿어주고, 그 힘을 좀 끌어다 쓰자는 식입니다. 교회와서 자꾸만 보기를 원하는 것이란, 내 인생의 구멍난 부분, 그래서 행복이 술술 빠져나가는 허술한 인생을 꿰매어줄 메시아 보기를 원하고, 내가 원하는 행복 보기를 원하는 겁니다.
내가 원하는 것 주면 그때 하나님께 영광돌리겠다는 겁니다. 내 몸이란 이런 항의시위가 매일 벌어지는 농성장이 됩니다. 내 인생을 개선시켜 주지 않으면 십자가고 뭐고 때려치우겠다는 시위가 벌어지는 겁니다. 구원받은 성도라도 이런 시위를 매일 매일 부추기는 마귀를 당해낼 재간이 없습니다.
“야! 너 혼자 예수 믿어? 꼬라지 하고는.”
오늘 사도바울이 증거한 믿음, 그리고 그리스도안에 있는 교회가 듣고 신나했던 믿음이란 바로 이런 믿음입니다. 사도바울이 전한 믿음앞에 이런 수식어가 붙어 있는데 그것을 놓치기 쉽습니다. “전에 핍박하고 잔해하던 그 믿음”입니다. 그 믿음을 전한다는 소리 듣고 하나님께 영광 돌렸답니다.
또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22절에 “나를 얼굴로 알지 못하고”
복음을 증거하는 사도바울의 몸에는 자기가 증거하는 복음이 자기몸의 현실이 되어서 아예 생생한 낙인처럼 찍혀 나옵니다. 그래서 사도는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한겁니다. 따라서 반드시 두가지 점을 내보이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십자가의 심판성, 저주성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 저주를 넉넉하게 이기는 십자가의 용서입니다. 그런데 그 용서와 사랑이 외부에서 볼때는 절대로 노출되지 않으려는 것처럼 꽁꽁 숨겨져서 감추인 것처럼 되어 있는 겁니다.
저주스런 십자가안에 보석같이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이 감추어져 있는것처럼, 사도의 몸을 휘감고 평생을 따라 붙을 그 저주스런 낙인(하나님의 교회를 잔해하고 핍박한 사람)이 찍힌 몸 속에 보석같이 숨겨져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사도가 복음 전한다는 소리를 듣고, 감추어진 보물을 찾아내듯이 그걸 알아보고 좋아했다는 겁니다. 한마디로 사도속에 살아계신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들여다 보았다는 말입니다. 사도바울이 복음전하는 것을 보면서, “야! 복음은 진짜 대단해. 대단해. 정말 끝내줘. 역시 구원은 십자가공로로만 되는거야”라는 점을 또다시 확인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복음의 능력이란 반드시 어떤 식으로 우리에게 덮쳐오는가를 보여주는 겁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자기부인입니다. 인간의 행함으로는 절대로 되어질수 없는 일임을 확인하는 식으로 주어지는 겁니다. 그렇게 복음이 주어지기 때문에 교회는 십자가에서 흘린 피외에 다른 것 보기를 원치 않게 됩니다.
그때에는 하나님의 눈을 가지고 서로를 대하게 되는 겁니다. 겉으로 보면 다 문둥이에 중풍병에 별별 더러운 몸땡이인데, 서로 서로 그 속에 담긴 진주를 보고, 다이아몬드를 보는 것같이 즐거워하고 신나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겁니다. 그게 그리스도안에 있는 교회입니다.
로마서를 강의한 책인데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이근호 저)라는 책에 보면 이런 재미있는 예화가 나옵니다. “언니가 동생을 그네 태웁니다. 동생은 무섭다고 죽겠다고 하면서 내려달라고 하는데 마구 밀면서 재미있지? 재미있지? 그런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다루실 때, 그 복음의 능력으로만 구원되었음을 더욱 더 깊이 알기를 원하고, 그 복음의 능력을 맘껏 자랑하는 쪽으로 인도하심을 알아야 합니다. 그 방법은 하나 뿐입니다. 우리의 잘남을 한없이 죽여서 내 힘으로 된 구원이 아님을 알게 하는 겁니다. 죄인인줄 알아야 합니다. 아직 멀었습니다. 더 많이 더 깊게 알아야 합니다. 이미 범사에 철철 넘치는 사랑을 받고 있음을 어줍잖은 자신의 손바닥 만한 믿음으로 가리우지 마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