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더라? 죽은 아내를 하데스에게서 되찾아오다가 못 참고 채 지옥에서 나
오기 전에 돌아본 그 신화 속 사람의 기분이 이럴 것 같다고 절절히 느낀다
. 느끼다 못해 가슴이 아파 죽을 것 같다.
"예진이 없어?"
"없어."
맨날 왔다갔다하면서 친해진 제느의 옆 짝궁 소연이는 처음에는 올 때마다
눈꼴시리고 배알이 뒤틀린 표정을 짓더니 이제는 신경 쓰기도 지쳤는지 돌
아보지도 않고 무덤덤하다.
그나저나 얘는 도대체 학교에서도 안 만나려고 올 때마다 어디로 사라지니
정말 사람 가지고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오늘도 왔네? 너 지겹지도 않냐?"
"너 같음 지겹겠냐?"
"와, 이건 정말 독하네. 너희 같은 극성 커플도 없을 거다. 어떻게 알았는
지 수업 끝나자 마자 예진이 나가버리던데?"
이런. 진짜 얼굴 한번만 봤으면 소원이 없겠는데 말야. 최소한 그 정도는
해줄 수 없는 거 아냐? 아아. 야속해. 정말 야속해!!
"야야, 그러지 말고 선생님한테 사귀는 거 안 들키는 노하우 좀 가르쳐줘.
나 저번에 정학 맞을 뻔했단 말야."
"그런게 어디있냐?"
제느는 예쁜데다 공부도 잘해서 혹시나 반에서 미움 받지나 않고 누구한테
괴롭힘…당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대충 민심을 잘 장악한 듯 싶다. 처음에
는 올 때마다 다들 벼르는 것처럼 날이 서더만 이제는 다들 한탄하는 분위
기다. 여자가 아깝다고 하는 한탄 일까나?
옆구리를 콕콕 찌르며 귀찮게 하는 이연수 이 녀석은 7반에 누구랑 사귀고
있는데 어떻게 했는지 몰라도 학교에서 대놓고 손잡고 다녀서 선생님들한테
문제아로 찍혔다.
우리는 그래도 아무도 없는 으슥한 곳이나 안보는 곳에서 손잡고 껴안거나
했지 대놓고 손잡고 교내를 휘젓지는 않았다. 뭐 처음에 복도에서 키스하는
그런 만행은 좀 했지만.
"아, 진짜. 얘는 왜 이렇게 피하는 거야. 나보고 싶지도 않나?"
"그런가 보지. 혹시 너 차인거 아냐?"
"아냐!"
제느가 눈이 멀 것 같이 아름답기는 해도 도도한 타입은 아니라 사실 학교
내에서 노리는 놈들이 상당히 많다. 이 놈의 세상은 외모지상주의에 빠져서
외모가 전부가 아니라는데도 외모가 엄청난 경쟁력이 된다. 그 예로 눈에
들려는 녀석들이 얼마나 많은지 제느의 책상 서랍만 봐도 당장 알 수 있다.
오늘은 편지가 6장에, 웬 상자도 하나 있네?
"아직도 이런 거 보내는 놈들이 있네."
하기사 나야말로 옛날에 사랑하던 사람이라는 이유로 완전히 거저 먹었으니
할말은 없지만 마음을 얻으려는 이 노력만큼은 정말 가상하다. 이중에는
제느가 오고 나서부터 꾸준히 계속 뭔가 선물이라던지 공세를 계속 하는 녀
석도 있다. 제느가 답장을 해줬는지는 모르겠지만 메아리 없는 외침에 이렇
게 열심인걸 가지고 공부했으면 서울대도 문제없겠다.
"나도 좀 이렇게 인기 좋아봤으면 좋겠다."
"그럼 걔는 차게?"
"…야, 근데 넌 어떻게 전학 온 애를 오자마자 꼬신거냐? 그리고 인터넷에
보니까 예진이 아무래도 외국 사람 같던데 어디서 만났어?"
"뭐 그렇게 궁금한게 많냐? 그냥 만났어."
"그냥 만나서 여친을 탤런트 급으로 얻은 거냐? 하아. 그런게 가능하리라
생각해? 고3의 찌든 얼굴에 반할 여자가 얼마나 되겠냐? 아니지, 그래서 지
금…"
"말 돌리지 마 임마."
아, 너무 답답하다.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네. 그냥 평범한 여자애랑 사귀
는 거면 어떻게 찾아내서 말이라도 걸텐데 이 여신님은 도무지 레이더망에
걸리지 않는다. 물어보면 하나 같이 나갔다고 그러고. 설마하니 학교에는
환영만 보내놓고 있는 거 아냐?
"아 진짜. 얘는 나 보고 싶지도 않나?"
"오? 너 혹시 차인거냐? 내가 알아봤어 임마. 그런 예쁜 여자애들은…."
"시꺼. 저리가. 벌써 시간 다 됐네. 에잉."
그 다음 국어 시간 끝나고 쉬는 시간에 왠지 나만 너무 조급하고 끌려다니
는 게 아닌가 싶어 그냥 자리에 엎드려 있었더니 정대가 와서 노트페이지
한중간에 잘라 온 신문기사를 보여줬다.
"누가 찍은 거야?"
반대쪽 아파트 베란다나 옥상에서 몰래 찍은 듯한 사진인데 너무 잘 알아서
잊어먹을 수가 없는 긴 머리의 여자랑 어떤 남자가 베란다에 나와서 이야
기 하는 듯한 장면이었다. 이거, 설마 주위에 잠복하고 있었던 거야? 저 시
간대라면 아이를 찾고 다시 돌아와 이틀 정도 제느가 집에 있을 때였는데?
"아무래도 물 건너온 파파라치겠지. 이거 영국쪽 가쉽지다."
"파파라치? 그 유명한 사람들 사진 찍어 파는 사람들?"
"그래. 꽤나 유명인었던 것 같은데. 조사해보니 한 2년 전에 사라졌었다고
나오더라고."
우와. 이러면 더 문제가 심각해지는데. 제느랑 내가 같이 있는 사진을 보니
답이 안 나온다. 나 이렇게 계속 살아야 하는 거야?
"하아…."
그건 그렇다 치고 박정대 이 녀석이 의외로 굉장히 협조적이다. 어디서 듣
도 보도 못한 외국 걸 가져오질 않나 신문에 나오지도 않은 걸 막 알아오기
도 하고 말야. 혹시 그동안 악연을 다 정리하면 제느 같은 여자애 하나 소
개시켜 줄 것 같아서 흑심 품고 작업하는거 아냐?
"공부나 해야지."
"요즘 들어 공부 열심히 한다는 거 아냐?"
"몰라."
"내가 너와의 악연으로 3년 동안 같은 반에 있게 됐지만 지난 2년간 태도와
지금은 전혀 달라. 뭐랄까, 철이 든 것 같군. 여자친구 생겨서 철이 든 거
냐?"
"철이 들어? Fe에 중독 됐다는 말은 아닌 것 같고, 내가?"
썰렁개그에는 안 웃네. 이 녀석.
문득 반지를 만져보았다. 처음에 한번 끼고서 딱 한번 빼본 적 밖에 없는
이 화려한 반지는 제느와 나 사이에 이어진 언약이다.
사실 책임감 때문에 어깨가 무거워진건 사실이다. 처음에야 그저 좋아서 턱
이 빠지려고 했지만 그 짧은 몇 개월 동안의 기간에 상상할 수도 없는 생명
의 위협도 받고 힘들게 여행도 하다보니 점점 정신이 돌아와 이제는 현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하기사 그런 경험을 하고 누구라도 안 변할 수는 없지. 제느가 해꼬지 당했
을 때는 지금 생각해도 뒷골이 땡긴다.
"고등학생이면 인생의 푸르름도 논하고 반항도 해봐야지, 벌써 철분이 넘치
면 어떻하나? 인생 다 살았나?"
"니가 우리 엄마냐? 수시 붙은 놈은 집에 가 발 닦고 잠이나 자! 배은망덕
한 자식."
수시로 염장질 벅벅 긁은 것도 모자라 이제는 불붙은 집 앞에서 선풍기 돌
려대는 군 이 자식. 시어머니도 아니고 한순간 좋게 생각했던게 후회 스럽
다. 역시 질긴 악연이구만.
"아 재미없어. 수능 때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거야?"
"재미있는 학교는 소설 속 밖에 없다. 현실 회피하지마."
진짜 재미없게 말한다. 그러니까 니가 3년 내내 박장대소지. 아니 뭐 여신
이 찾아오는 그야말로 판타지스런 일도 일어났는데 미소녀가 가득하고 매일
소동이 일어나는 재미있는 학교가 하나쯤 없을까.
아니, 정말로 서울 한복판에 나타났던 정체불명의 헬기처럼 미스릴 이라던
지 포춘텔러 같은 단체가 진짜로 있는 거 아냐? 은근히 무섭네 그거.
하지만 확실한건 여기는 전쟁터라는 것이다. 수능을 앞둔 고3 교실이 다 그
렇듯 과목 진도는 다 나가고 수능 문제풀이라던지 모의고사라던지 그런 것
들을 죽어라 풀며 밤을 지새고 있는 이곳은 뺄래야 뺄 수도 없는 전쟁터다.
수능과 대학에 목메는 고등학교에서는 빛의 신도 얄짤 없이 야자를 하리니
!
보통 세렌네 집에는 주말에나 갔지만 학교가 파하고 심난하기 그지없거나
하늘의 달을 보면서 기분이 울적할 때는 무조건 제느에게로 갔다. 가봤자
뭐 보고 오는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안정이 된달까? 그래서 오늘도 마음이
동해 세렌네 집으로 갔다.
달도 휘엉청 뜬 밤 10시쯤에 남의 집에 들이닥치는 것은 실례지만 다들 안
자도 쌩쌩한 신들이니 그리 눈치는 안 받았다. 오히려 카렌이는 좋아라 하
며 나를 게임으로 끌어들이려고 해 조심해야했다. 사실 화려하고 눈이 뛰어
나올만한 사양인 PC 4대쯤에 온갖 콘솔게임기를 들여놓고 타이틀만 수백 개
씩 벽에다 장식해놓고 있는 방을 누가 안 부러워하겠냐!
물론 이렇게 염장 질러도 자매들이 다 같은건 아니라서 아렌이나 레시아는
거실에 누워 드라마 보면서 자지러지기에 바빴다.
"오늘은 무슨 일이에요?"
"아, 안녕? 제느 있어?"
"이모야 학교 갔다오면 방에 틀어박혀서 나오지도 않아요."
"그래?"
오늘도 못 보는거 당첨이네.
문을 열어준 카렌이를 따라 거실로 들어가니 집안 분위기가 평소와 많이 달
랐다. 평소 이 집 밤 분위기는 게임에 중독된 카렌이 때문에 밤을 지새거나
뭔가 이상한 마법쇼를 하는 자매들 때문에 요란했는데 거실에 커피향이 솔
솔 감돌고 조용하기 그지없었다. 아무래도 카엘이 단속했나보다.
"안녕하세요."
"어서와요."
"어?"
무례란걸 알지만 세렌의 인사에도 답하지 못했다.
생전 처음 보는, 그렇다고 보통사람도 아닌 이가 세렌과 마주 앉아서 날 바
라보고 있었다. 분명히 사람의 모습이지만 사람은 아니고…뭐라 알 수가 없
네?
그리고 그 앞에는 커피잔 두개가 놓여있는데 향이 굉장히 강한 것 같다.
"내 세계에 이런 신이 있을 줄이야."
놀라워하는 그 목소리는 톤이 가늘지만 거만한 인상을 주진 않았다. 하지만
외모가 너무 깬다.
짙은 초콜릿 빛 피부에, 어깨 위로 부드럽게 웨이브져 흘러내리는 아이보리
색 머리카락, 그리고 황금색 눈동자. 겉에 입은 것은 아무런 장식도 없는
하얀 코드인데 그 밑으로 드러난 어깨는 굉장히 다부지고 떡 벌어져 모습을
더 크게 보이게 했다.
"어, 저기?"
"초면이죠? 인사해요. 지구의 신이랍니다."
"내 세계에서는 모든 신비를 금지했거늘 이런 일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
네. 나는 지구의 신입니다. 반갑군요."
"아, 아 예. 저는 고등학교 3학년, 아니 그냥 빛의 신이라고…해요."
세렌과 그가 한바탕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 자기 소개 좀 잘못했다고 이렇
게 웃을 필요는 없잖아? 처음 만나서 좀 낯선 것뿐인데.
그런데 정말 지구의 신, 그런게 있단 말야? 생각지도 못했지만 이거 좀 충
격이다. 물론 전에도 유령이나 귀신은 있을거다라고 믿었고 제느를 만나면
서 그 믿음은 확실해졌지만 앞에 있는 사람은 내가 태어나고 자라온 세계의
신인 것이다. 제느나 세렌이야 그렇다치고 유령을 믿어도 한번도 본 적이
없고 TV에서 나오는 성령이라던지 미스테리를 다룬 다큐에서도 보면 결론은
그냥 착시나 속임수 그런걸로 밝혀졌는데 지구의 신이 정말 있다면 여기저
기 신화에서 말하는 하나님이란게 저 사람 맞을지도 모르잖아?
"믿지도 않을테지만, 행여나 어디가서 말하면 안돼요."
"저, 정말이에요?"
"정말이에요."
세렌이 하는 말이라면 맞겠지. 그렇담 진화론이나 종교 같은건 다 새빨간
거짓말이거나, 아니면 신의 존재는 전세계적으로 파묻힌 알려져선 안 되는
기밀 같은 거라던지? 그것도 아니면 죄다 사기놀음이었다는 이야기다. 아니
면 제느의 그것처럼 심심풀이로 만들었다거나.
이거 세상에 알려지면 전 세계적으로 종교전쟁이나 안 날런지 몰라. 무신론
자들이나 성직자들은 단체로 물먹게 생겼네.
"인간들이 무얼 믿든 상관없습니다. 단지 종만 보존해 나가며 발전하기만
하면 되지요. 하지만 모든 신비를 내가 금지한 이상 직접적인 발언은 삼가
해 주시기 바랍니다. 흔히들 바티칸이라고 부르는 곳이나 그외 비슷한 급들
에서는 내 존재를 알고 있으니까요."
"아, 예. 아, 그러니까 제느 보러 왔어요."
아니 뭐 당장 앞에 대놓고 보여주면서 제느가 여신이라고 해도 안 믿을 텐
데. 이것저것 안 보여줬으면 나도 안 믿었겠지. 하여튼 제느만 한번 어떻게
보고 가야지. 되게 얼떨떨하고 어색하다.
"안녕하세요 이모부."
"어? 아, 안녕?"
누구더라? 얘가 페이 아들일텐데. 거실 저쪽 방에서 나와 인사를 하곤 뛰어
가는 것이 영락없이 그 또래 남자애 모습이지만 나이는 벌써 50살은 먹었던
가? 그랬다. 그래도 참 신기한게 이 집안에 두 엄마랑 그 사이에서 난 아이
들이 알력이나 미움이 하나도 없다. 세렌과 페이는 사이도 좋아 보이는데
카엘이 참 능력이 좋단 말야. 만약 내가 이랬다면 제느는 나를 반 죽여놨을
거다. 카엘 겉보기에는 그렇게 가냘픈 미소년처럼 보여도 벗겨보면 근육덩
어리라던가 그런거 아닐까? 제느만 해도 보채는 거에 뼈가 녹아날 지경인데
여신 두명을 어떻게 감당해?
"자기야. 자기야. 제느야. 나 왔어. 응?"
오늘도 여전히 제느는 한 마디 대답도 안해준다. 지난 주에 이야기하고 진
짜 좋았는데 얘는 정말 내가 보고 싶기는 한 걸까? 하기사 겨우 한달 못 만
났다고 이런 생각이나 들고 나도 참 바보 멍청이다. 이래가지고 사랑한다고
하는 거야?
어쨌든 안보면 죽고 못살 것처럼 굴던 사람이 한달 동안 아예 말도 안 나누
고 있으니 정말 혀를 내두를 정도로 철저하다. 애가 둘로 나뉜걸 합친다고
한달 정도 떨어져 있자는건 이해하겠는데 이렇게 철저히 할 필요가 있을까?
나도 걔 아빠인데 말야.
"제느야. 혼자 자려면 심심하지 않아?"
근데 벌써 나 아빠란 말이 술술 나오네. 좋은건 좋은건데 이건 아니다란 느
낌도 든다. 사실 이 나이에 아빠가 되려면 어디가서 사고쳐야 가능한건데
말야.
"으아 죽겠네."
지구의 신이라. 하기사 무조건 없다고 하기도 이젠 그렇지만 정말 꿈에도
몰랐다. 다른 세계나 차원엔 멀쩡히 있는 마법 같은게 전연 없는게 이런 이
유였냐? 저번엔 갔다온 세계에서는 유령들도 떼로 몰려다니더만 이러면 바
티칸이라던지 중동의 종교분쟁 같은건 한낱 인간들의 드잡이질이 되어버리
잖아?
"에휴."
"오늘도 소득이 없나보죠?"
"예. 근데 안에서 뭘 하는지 알고 있어요?"
다시 거실로 나와서 세렌에게 물으니 고개를 저으며 빙그레 웃는다. 역시
모르는구나. 이대로 일요일까지 기다려야 하는구나. 짧다면 짧은데 너무나
긴 기간이다. 오늘이 화요일이니까 5일 곱하기 24시간 해서 120시간이나 기
다려야하는 거야!!!
"헤유."
여기서 이야기라도 나누는지 지구의 신이라는 분은 아직 안 가고 있었는데
학교에서 배운 인류는 아프리카의 한 여성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가설을 증
명해주는 듯한 모습이다. 그렇지만 얼굴은 완연한 여성의 모습인데 목소리
는 남자 같고 코드 아래 가려진 몸은 나보다도 더 크니 이거 어떻게 설명해
야할까? 아니 그보다 지구의 신이 인간의 모습이라니 역시 인간은 지구상에
서 특별한 존재인건가? 다른 세계에 가면 언어로 이야기하는 엘프라던가 다
른 종족이 많이 보이던데.
"이거 맛있군요. 좀 얻어갈 수 있을까요?"
"네. 얼마든지요."
커피라…. 의외로 취향도 평범하네. 아니 그것도 무려 지구의 신이 외계인
취향이라던지 돌을 씹어먹길 즐긴다던지 그러면 그것도 또 문제일것 같네.
"그럼 말씀드린건 지켜주실 수 있으시지요?"
"물론이에요."
둘은 내가 오기 전에 뭔가 약속이라도 한듯 말을 주고받았다. 잠깐, 새삼
생각해보면 이건 러시아와 미국 대통령과의 회담보다 더 엄청난 자리 아냐?
둘이서 주고 받은 말이 세계를 어찌하겠다는 거념 이거 완전히 역사의 현
장에 앉아있는 셈이네.
무려 지구의 신은 평범하게 인사를 하고 평범하게 현관에서 신발을 찾아 신
더니 문을 열고 나갔다. 신이라면 어디서 휙 사라진다거나 눈을 감았다 뜨
니 없어졌더라 하는 짓도 해야 하는 거 아냐? 이 사람들 왜 이렇게 평범해.
그런데 이러면 달의 여신도 있는 거 아냐?
"세렌. 저기 물어볼게 있는데요."
"예?"
"달의 여신도…혹시나 있어요?"
"아아. 보통 이런 행성의 창조신들은 그 별 그 자체예요. 표면에 생명이 없
는 행성의 경우 끝까지 의식체로서 모이지 않는 것이 허다하지만 이 별처럼
생명이 있는 별의 경우 생명진화에 따라 의식이 모여 발현되죠. 보통은 그
곳에서 가장 진보된 생명을 본떠요. 이곳에서는 문명을 세운 인류처럼 진보
된 생명이 있기 때문에 그 모습을 하고 있죠. 사실 생명체의 모습은 아주
다양해서 인간의 생각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개념이나 원론적인 생명체도
있으니 그 만큼 많다고 보면 될 거예요."
"그럼 달에는 생명이 없으니까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세상은 DNA로만 유전되는 게 아니랍니다. 일단 달에는 생명체가 없지만 어
떤 생명체가 생겨날지는 시간이 결정할 일이죠. 그 외에는 신이라고 하면
일단 여러 곳에 생명을 퍼트리고 신위를 얻은 종족 정도나 신비가 허락된
곳에서 생겨난 정신적인 집합체 정도로 보면 될거에요."
그럼 저번 세계에 있던 신들도 그런것인가 보구나. 그것 참 미스테리네. 지
구 같은 행성이라고 해봐야 돌이나 가스가 중력 때문에 그냥 크게 뭉친 것
밖에 안 되는데 그걸 가지고 신이라니 좀 개념 밖이다. 이러니 내노라 하는
천재들도 겸손해지지. 것 참 오묘하네.
지구의 신이란 분도 가고 제느도 못 봤으니 이만 폐 끼치고 가야겠다. 사실
좀 늦게 가면 엄마가 고3이 뭐하고 싸돌아 다니냐며 당장 난리를 치니 여
기 오기에도 빠듯하다. 뭐 학교 끝나면 바로 태워서 학원으로 직행하는 애
들보다야 낫다고 생각 할 수 있지만 그래도 분 단위로 귀가시간을 체크하는
엄마는 역시 좀 그렇지 않나?
"그럼 이만 가볼게요."
"역시 학생은 바쁘네요. 준건 잊지 말고 봐요."
"예."
달이 휘엉청 밝았다. 세렌과 인사를 하고 나오는데 그 달을 보니 새삼 울컥
하고 뭔가 올라온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뭐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집에
가서 펑펑 운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그저 공부나 죽어라 해서 무념무상
, 잊는게 최고인 것 같다.
"여유를 좀 가져요. 어디 가는 것도 아니잖아요. 나도 세렌이 막내 낳았을
때 무려 두 달 동안 접근 금지였는데 애들 별로 한달 두달씩 겪다보니 이젠
아무렇지도 않아요. 원래 애들 낳으면 다들 그래요."
"그럼 저도 접근 금지인 거예요?"
"네."
"그렇네요. 그렇긴 한데 마음은 안 그렇네요."
접근 금지라. 저번에도 들었지만 그쪽 문화나 뭐가 틀린 건가? 그렇게 해야
한다는 법이라도 있나? 여신이라서 다른 점도 있지만 이럴 때는 참 힘들다
. 어떻게 그렇게 냉정하고 매정한 건지 모르겠다. 배웅 나온 카엘은 아무렇
지도 않은 표정이었지만 난 그러지 못하겠다. 자기는 몰라도 난 이제 사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옆에 두고 계속 보면서도 또 보고 싶은걸 벌써 한
달 가까이 참았다. 정말 얼굴 한번 보여주면 어디가 덧나는지, 진짜 서럽다
.
"하아. 그럼 갈게요."
카엘의 배웅을 받으며 어둑어둑한 골목길로 나섰다. 이제 한달 앞으로 다가
온 수능과 아직도 뭔가 더 찾아 기약 없이 헤매야 하는 사랑, 둘 다 이 가
로등 없이 어두운 골목길처럼 암담하기만 한 것 같다. 얼굴 몇 번 못 봤다
고 이렇게 뭐 하기가 귀찮아 지냐. 이러니 연애질을 하면 성적이 떨어진다
고 못하게 하는 건가?
"그나저나 이름을 도대체 뭘로 해야 하나."
제느가 그것도 여태 생각 안 했냐며 핀잔 줄 텐데. 그래도 아무리 생각해봐
도 맘에 드는 이름이 안 나온다. 어떻게 몇주를 생각해 봐도 맘에 드는 이
름이 하나 없을까? 이게 다 창의성과 다양성을 말살해서 하나로 회반죽해
똑같이 붕어빵 찍어내는 대한민국 교육의 문제다. 그런 교육의 밑에서 잔뜩
세뇌를 당했으니 예쁜 여자애 이름 따위 생각이나 날까! 확 이 나라를 엎
어버려서 수능의 이름 앞에 허덕이는 고 3들을 해방시킬 수는 없는 걸까?
"세피? 너무 이상한데. 음?"
갑자기 등골을 자극하는 이 한기. 누가 뒤에서 빤히 바라보고 있는걸 느꼈
을 때 그런 감각이랑 비슷했다. 누구야? 불량배라도 따라오나? 발소리도 없
는데? 그냥 공부에 지쳐 헛것이 느껴졌나.
"뭐지?"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이번에는 어디선가 폭발음 같은 소리가 들려온 것 같
았다. 묵직하니 낮게 우르르 울리는 소리는 꼭 어디서 폭탄을 터트려 건물
이라도 무너지는 소리 같은데 우리나라 수도에 폭탄 테러 같은 게 일어날리
가 없잖아? 이거 제느 얼굴도 못 봐서 스트레스 자꾸 받다보니 이제 환청까
지 들리는 건가?
"으음…."
또 들렸다. 팍 터지는 듯한 물소리가 같이 들리는 걸 보니 한강 쪽인 것 같
았다. 주의를 집중하니 어디서 들려오는지 감이 잡히고 안 들리던 쇳소리가
들렸는데 영락없이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다.
"이거 누구야. 간 큰 사람들 같으니라고."
대한민국 법치국가 맞나? 아니면 아무런 힘도 없는 건가? 시 한복판에서 무
기를 가지고 뭔가 뻥뻥 터트리며 드잡이질을 하는데 사이렌 소리 같은 건
하나도 안 들리고 조용하다.
이거, 끼어드는 게 좋을까 그냥 집에 가 자는 게 좋을까?
일단 하늘로 뛰어 한강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어딘가 아파트 옥상으로 올라
오니 상황이 명확해졌다. 몇 번째인지 모를 한강다리 바로 옆 수면에서 불
꽃이 번쩍거리며 터지며 수면이 출렁거리고 흐릿한 두 사람의 인영이 격돌
하고 있었다. 세상에 토요일 저녁에 뭐 하는 거야? 저러다 다리라도 자르면
어쩌려고.
그런데 생각해보니까 저게 정상이 아닌거잖아? 지구의 신이 친히 모든 신비
를 금지했다던데 어째서 버젓이 한강 다리 아래에서 저런 쑈를 하고 있고
이 세계와 연결된 카페가 있는 것이며 발키리가 살고있는지 다시 가서 물어
보고 싶다. 설마 대부분의 사람은 모르니까 문제없다고 발뺌하면 외적갈등
을 빚어줘야지.
"음."
그나저나 어떻게 할까? 더 늦으면 엄마한테 혼나는 데다 사실 아무것도 모
르는 생판 남이 싸우는데 끼어 들어 참견하는 것도 그렇잖아.
그래도…조금만 구경하다 갈까? 안 들키기만 하면 될거 무슨 상관이야. 뭐
한 10분 정도라면 변명도 할 수 있을 테니까 안 들키게 적당히 보기만 해야
지.
한강 둔치로 내려가 다리 밑의 어둠 속에 적당히 숨었다. 사람은 꼭 호기심
때문에 위험을 자초한다니까.
추워지는 10월 중순이라 한강변엔 사람도 없었다. 그게 이 장소를 택한 이
유인 것 같다. 어쨌건 한강 위에서 싸우는 두 사람은 물을 밟으며 공수를
주고받는데 그 기세가 흉험하기 그지없어서 빗나간 칼을 따라 수면이 터지
고 물보라가 연신 튀었다. 저거 보니 아리나가 생각난다. 아리나도 진짜 저
게 사람이 맞나 싶었는데.
"경찰은 뭐 하는 거야?"
싸우는 두 사람은 펄럭거리는 옷차림을 봐서는 남자와 여자인 것 같다. 남
자 쪽은 하얀 코트에 하얀 옷, 하얀 머리카락, 손에 든 하얀 검까지 온통
하얀색으로 치장하고 뻗어나가는 기운까지 하얀색이고 여자 쪽은 온통 붉은
색 인데 대비가 너무나 선명했다.
짜아아악!
붉은 코트를 입고 새빨갛게 빛나는 문양을 등에 업은 여자가 손에 든 커다
란 칼을 휘두를 때마다 강물이 갈라지며 이어진 다리 밑 교각에서 불꽃이
튀며 돌 조각이 튀어나온다. 저거 시 재산에 대고 저렇게 칼질해도 되는 거
야? 자기들이 책임질 것도 아니잖아? 다리 무너져서 사람 죽으면 어떻게 할
건데?
몇 번의 공방전 끝에 쇠가 이겨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검끼리 대고 두 사람
이 맞붙었다. 만화처럼 주위에 바람이 불고 번개가 치는 그런 것도 없었지
만 흉험한 기세는 점점 커져만 갔다. 여기서 사생결단을 내겠다고 외치는
것 같았다.
"하압!"
그러나 하얀 코트의 남자가 기세에서 조금 밀리며 균형을 잃다가 한순간 기
합을 넣으며 밀어내고 여자를 향해 칼을 떨치자 격렬한 바람이 일어나며 여
자가 뒤로 날아갔다. 검붉은 것이 허공으로 길게 뿌려진다. 잠시 뒤에 묵직
한 폭음이 귓가를 울렸다.
어떻게 이렇게 싸워대는데 다리 위는 전혀 아무런 이상이 없는 걸까? 누구
라도 차 세우고 밑에 내려다 봐야 정상 아니야? 혹시나 내가 헛것을 보고
있는 거 아닐까? 기가 허해서 귀신이 보일만한 일을 한 적이 없는데.
물에 떨어진 여자는 정말로 죽었는지 어디서 나타날 기미가 안 보인다. 그
를 패퇴시킨 남자는 물 위에 그대로 서서 차분히 아래를 내려다보며 한쪽이
잘린 코트 자락을 만지작거리다가 한참 후에야 경계를 풀고 칼을 허리춤에
집어넣었다.
이거 다 끝난 분위기인데 너무 늦게 왔나봐. 그나저나 안 들켰으면 슬슬 가
봐야겠다. 괜한 호기심에 더 이상 말려 들었다간 제느가 나중에 뭐라 구박
할지 모른다.
"나와라!"
순간 나한테 한 말인가 하고 가슴이 뜨끔했지만 다시 보니 그건 아닌 것 같
고 남자는 여자가 정말로 죽거나 행동불능이 되었는지 못 믿는 눈치 같다.
여전히 강물만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아 다행이다. 간 떨어지는 줄 알았네.
"나오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
어매, 무슨 목소리가 저래 살벌해. 하기사 철천지원수니까 그렇게 죽기 살
기로 싸웠겠지. 일단은 빨리 집에 가자. 무슨 사단을 내려구.
슬쩍 뒤를 돌아보니 아무 기미가 없는 것에 심히 불쾌감을 느낀 듯한 남자
가 다시 칼을 빼들고 기운을 돌리기 시작했다. 남자의 머리나 옷처럼 하얀
검신에서 스멀스멀 아지랑이 같은 것이 피어오르더니 금새 하얀 불꽃이 붙
어 오르며 달아오르기 시작한다.
뭔가 이상한 힘이나 마법적인 불꽃이 아니라 순수하게 온도가 높아서 생기
는 불꽃 색이었다. 그러다 보니 늘어트린 칼끝에 가까운 수면에서 물이 부
글부글 끓으며 연기가 피어올랐다. 엄마, 저거 뭐야?
"나와라!"
외침과 함께 눈앞으로 화끈한 열기가 훅 밀려왔다. 바로 코앞까지 들이대진
하얗게 불타는 불꽃이 똑똑히 보였다. 그러니까, 이게 지금 들킨 거지?
"어…저기요."
갑자기 사람 면상에 칼을 들이대다니, 너무 놀라서 가슴이 콩닥콩닥 거린다
. 이거 뭐 진부한 스토리처럼 나뭇가지 밟아서 소리 낸 것도 아니고 조용히
퇴장하는 와중에 이게 무슨 일이야. 그 싸우고 있는 와중에도 알아보고 있
었던건가?
무섭게 타오르는 불길에 얼굴이 그슬릴까봐 슬쩍 뒤로 물러났는데 오히려
칼날이 턱 밑에 닿았다. 사람 몸에 그런 위험한 걸 함부로 들이대나!
"정체가 뭐냐. 카르테의 노예냐."
"저기 그게, 악!"
눈앞에 드리워진 칼날이 사라지는 것을 느낀 순간 목덜미에 싸늘한 날이 닿
으며 온몸에 소름이 쭉 돋았다. 이 사람 다짜고짜 사람을 죽이려고 하고 있
어!
스슥 하고 머리를 비워낼 듯한 썰렁한 소리와 함께 목덜미를 날카로운 예기
가 훑었다. 옛날 같았으면 바로 뎅겅 목이 날아가야 하겠지만 칼날이 지나
간 후 목을 만져봐도 멀쩡했다.
사람의 목을 아무렇게나 날리는 저 남자도 얼굴에 잠시 표정이 떠오르더니
이번엔 검을 가슴으로 찔러왔다.
"이봐요! 지금이 예의 없으면 골통 깨지는 원시시대도 아니고! 으악! 뭐 하
는 겁니까!"
등골이 서늘해지는 급소로 파고 들어와 찔러대고 베어대는 칼날을 이리저리
맞아가며 몸으로 막다가 제느가 호신용이라며 준 창을 꺼내서 막자 잠시
공격이 중단되고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이렇게 사람을 다짜고짜 죽이려 들
다니, 악의 세력인가?
"누구냐. 우리가 싸우는 걸 어떻게 알았나?"
"몰라! 다짜고짜 사람 죽이는 놈한테 알려줄 거 없어! 사람이 좋게 말로 하
자는데 이렇게 나오면 나도 어쩔 수 없지! 가뜩이나 독수공방하느라 외로움
이 뼈에 사무쳤거늘 내 교복 값은 어떻게 할거냐! 후줄근해도 내년 2월까지
는 입어야 한단 말이야!"
"윽? 크윽!"
힘을 주어 맞닿은 칼날을 밀어내고 창을 휘둘렀지만 역시나 간단히 피해내
더니 허공에서 발을 디딘 그의 칼끝이 미간을 향해 날아왔다. 화난 제느의
눈에서 나오는 예기 같은 날카로운 느낌이 눈알을 간지르는 것 같았다.
땅!
날아오는 칼끝에 창을 마주쳐 힘껏 휘두르자 그의 팔이 그대로 휙 꺾이며
자세가 흐트러졌다. 그렇지만 그 얼굴은 전혀 당황함이 없이 매끄럽게 허공
에서 자세를 고쳐 땅에 발을 디딘다. 보통 이럴 때는 내 검을 막아내다니!
하면서 식겁해야 하는 거 아냐?
"에잇!"
길이만 내 키의 두 배는 되는 창을 휘두르는데 그 안에서 정말 잘 피해댔다
. 아무리 내가 쥐뿔도 모르고 창을 들었다지만 예의상 한번은 맞아줘야 되
는 게 아닐지 고민하게 만들 정도로 움직임이 현란했다.
"좀 맞으세요!"
"잡념이 많군."
창을 크게 휘두른 허점을 파고든 칼날이 하얗게 불타며 허리를 베었지만 약
간 따뜻한 느낌만 나곤 멀쩡하다. 그래서인지 제느랑 싸울 때는 그야말로
순식간에 제압 당했는데 칼로 찔러도 들어가질 않으니 생각을 바꾼건지 피
하기만 하고 적극적으로 공격해 오지도 않았다. 이거 더 늦으면 엄마한테
혼날 텐데 빨리 한방 먹이고 도망쳐야 되는 거 아냐?
"끝이다."
"으앗!"
손에서 순식간에 창이 달아나 한강 물 속에 퐁당 빠졌다. 아니 분명히 그냥
손목 좀 꺾는 것 같았는데 어떻게 내 손에서 창이 날아가는 거야?
내 목젖에 신중히 겨눈 칼끝에서부터 하얗게 다시 불꽃이 붙기 시작하더니
곧 활활 타오른다. 칼이 안 통해서 그런가 아예 칼끝으로 찌르고 있는데 따
갑기 그지없다. 이거 너무하잖아. 난 그냥 훔쳐봤을 뿐인데.
"음?!"
그때 느닷없이 펑하며 한강에서 물보라가 치솟아 올랐다. 그리고 그 사이로
뭔가 빨간 것이 튀어나와 쐐액 하고 날았다.
"어, 어?"
으적, 하고 뼈가 갈리는 소리가 나더니 가슴 한 중간에서 비죽 튀어나온 붉
은색 검신을 타고 검붉은 피가 흘러 하얀 옷을 빨갛게 물들여나가기 시작했
다. 으, 아, 우. 그러니까…."
"살아있었나. 분명히 목을 베었거늘."
가슴을 꿰뚫린 그의 표정이 약간 일그러진다. 마치 모기에라도 물렸다는 듯
귀찮은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의 등 뒤에 선 붉은 눈이 요사하게 빛나는
여자가 아무 말 없이 칼을 비틀자 피가 팍 튀며 스슥하고 고기 잘리는 끔찍
한 소리가 들렸다.
"이걸로 1대1인가."
"으악!"
여자가 입을 열어 낮게 중얼거리자마자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비틀어진 칼
날이 남자의 몸을 가슴에서 목덜미까지 베어버렸다.
"크학!"
찢어지려는 몸을 다른 손으로 감싸안은 남자가 피를 뿌리며 뛰어오르더니
마치 중력을 무시한 것처럼 날아 철교 위에 올라섰다. 물리법칙을 무시하는
움직임이다. 그러니 여자는 흥미를 반쯤 잃은 표정을 짓고 칼을 집어넣더
니 강변 아래로 내려가 물 저쪽으로 걸어가다 이내 사라져버렸다.
"어?"
다시 철교 위를 보니 그런 끔찍한 상처를 입고도 멀쩡한지 남자도 이미 사
라지고 없었다.
어안이 벙벙해서 현실 같지 않았지만 몸에 튄 피가 끈적끈적하니 생생하다.
그리고 일어나니 다리가 후들거렸다. 후아, 자꾸 제느 얼굴만 생각나네.
그런데 생각해보니 아직 생명석도 아주 작은 조각 밖에 없는데 얘 몸이 괜
찮을지 모르겠네. 겉만 멀쩡해 보인다고 속병 들지 않았다고 할 수 없는 거
잖아. 생각해보니 참 무섭다. 길가다 갑자기 쓰러지면 어떻게 해.
"아놔."
그나저나 내 교복. 완전 천 조각이 돼버렸는데 누구한테 하소연해야 되는
거야? 이 꼴로 집에 가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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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흥. 오랜만입니다. ^________^
월간 연재는 저도 싫어요 ㅠ.ㅠ
처음과 달리 많이 안써집니다. 희유.
카페에 글이 많이 올라오면 많이 써질 듯 한데에.................
첫댓글 =-= 드디어 연제다~~~~~~~~~ㅡㅡ 5연참정도는 해주셔야 됩니다!!
오오오..
마트 알바하시느라 힘드셔서 막 보채지도 못하겠네요ㅎㅎ 힘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