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 아이들을 가슴에 품은 ‘대모(大母)’월드비전 긴급구호팀장 한비야
“세계 구석구석 사랑해야 할 사람이 너무도 많아요”
남녀간의 사랑만이 애틋하고 소중한 건 아니라는 걸 몸소 실천해 보이는 열혈 여성 한비야. 월드비전의 긴급구호팀장으로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이들을 위해 전 세계를 누비는 그녀는 개인의 삶에서는 북한산과 마주하는 작은 공간에서 싱글로 당당히 살아가고 있다. 한비야의 열정과 사랑, 사고가 고스란히 녹아 있는 그녀만의 공간에서 함께 한 반나절.
40대 중반을 훌쩍 넘긴 나이에, 개인의 사랑에 만족하지 않고 더 큰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고 있는 여자 한비야(47). 여행가로 '바람의 딸'이란 애칭과 6권의 책을 낸 베스트셀러 작가란 말 대신 그녀가 가장 욕심내는 것은 월드비전 긴급구호팀장이라는 자리다. 33세가 되면 과감히 모든 것을 버리고 여행을 떠나겠다던 계획을 실천에 옮긴 그녀가 여행을 통해 본 것은 아름다운 풍경이 아닌 굶주리고 아파하는 기아들이었던 것.
사람, 길, 산에게서 배우는 것들
그녀의 집으로 가는 길은 언제나 유쾌하다. 북한산이 훤히 내다보이는 널찍한 거실에서 마시는 차 한 잔의 여유도 그렇지만, 산을 바라보며 느끼는 마음의 동요는 방문하는 이로 하여금 다시 찾고 싶은 기대를 갖도록 한다. 아울러 산을 좋아하고, 산을 닮아가는 한비야의 건강한 사고까지 전이되는 것 같아 즐겁다. 문을 열자 가슴이 확 트인다. 취재진을 반기는 한비야의 낭랑한 목소리와 그녀의 뒤로 펼쳐진 북한산의 전경이 반가울 따름이다. 거실과 침실, 손님방, 사고뭉치방('사고가 뭉쳐 있는 방'이란 의미로 그녀는 서재를 이렇게 불렀다) 등 집안 어느 곳에서든 북한산이 내다보인다는 사실이 '바람의 딸' 한비야를 이곳에 정착하게 만들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산을 탔고, 지금도 산을 애인 삼아 살고 있다는 그녀. '산다람쥐'란 별명은 그냥 붙은 게 아니었다.
“땀 흘리며 신나게 땅을 밟고 나면 내 육체가 아직은 건강하다는 느낌이 들어요. 그 순간 난 가장 큰 희열을 느끼고, 그래서 틈만 나면 등산을 하는 거죠.”
월드비전 업무의 특성상 그녀에게 '주말'이란 개념으로 시간이 주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틈틈이 여유시간이 생기면 산에 오르거나 설록차를 마시며 책을 읽는다. 아무리 더운 여름이라도 꼭 뜨거운 차를 마신다며 그녀는 향긋한 차 한 잔을 준비해주었다. 차를 마시는 일련의 행동, 그 자체가 한비야에겐 휴식이라고.
“뜨거운 차는 한 번에 마실 수가 없으니까 천천히 마시게 되잖아요. 그렇게 천천히 마시다보면 심장박동이 완화되면서 잠시 여유를 가질 수 있을뿐더러 머릿속도 깔끔하게 정리되는 느낌이죠.”
'사고뭉치방'을 가득 메운 일용할 양식
거실에 앉아 도란도란 담소를 나누고 있자니 거실 벽에 훈장처럼 걸린 '발' 사진이 눈에 들어온다. 저렇게 작은 발로 세계 곳곳을 돌아다녔다고 생각하니 신기할 따름이다. 두 발로 열심히 뛰면서, 스케줄 달력이 꽉꽉 들어찰 정도로 바쁘게 생활하는 그녀에게 '시간이 없어서'란 말은 핑계다. 바쁜 시간을 쪼개서 책을 읽거나 사람들을 챙기고, 자신을 돌보는 모습을 '열심히 산다'는 말로만 표현하기엔 부족했다.아무리 바빠도 책 읽는 일만큼은 게을리 하지 않는다는 그녀. 거실은 시작에 불과했다. '사고뭉치방'에 들어서자 그녀의 일용할 양식들이 넘쳐났다. 냉장고는 비었을지언정 마음은 살찌우고 싶어하는 그녀다. 요즘엔 그동안 미뤄둔 책들을 작정하고 읽고 있다며 '뜻으로 본 한국역사', '살아있는 한국사 교과서 1·2', '조선 사람들, 혜원의 그림 밖으로 걸어나오다', '조선의 뒷골목 풍경', '김용택의 한시 산책 2' 등을 보여줬다. 적지 않게 높은 한비야의 음성에 더욱 힘이 들어가는 순간은 바로 '구호활동'과 '책'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할 때다. 신이 나서 책 소개를 마친 그녀와 함께 주방으로 나왔다. '사고뭉치방'에 비해 왠지 휑한 느낌이다. 아니나 다를까 집안에선 음식을 만든 기억이 없단다.
“여행 다닐 땐 요리를 많이 했던 것 같은데 요즘은 전혀 안 해요. 외국에선 그 친구들에게 한국 음식을 맛보게 해주려고 자주 만들었지만, 이젠 집에 있을 시간도 없는데 뭘. 아마 6층에 언니가 살지 않았다면 사는 게 더 힘들었겠죠(웃음).”
그동안 출간된 한비야의 도서를 탐독한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결코 요리를 못하는 건 아니다. 단지 같은 아파트의 아래층에 든든한 지원군인 언니가 살다보니 그녀의 집에서 주방은 가장 사랑 받지 못하는 장소가 된 것이다.
외로움은 인간이 가지는 가장 기본적인 감정
자신이 원하는 대로 생활할 수 있다는 것이 싱글의 가장 큰 매력이며, 같은 이유로 지금 삶에 만족한다는 그녀. 누군가와 함께라면 그 사람의 취향이나 의사를 고려해야 하는데, 그런 수고가 없어서 편하단다. 그녀는 여행 방식 또한 이와 동일하다. 여행은 기본적으로 혼자 떠나는 것이며, 만약 시간과 마음 맞는 이가 있다면 동행하면 된다는 게 그녀의 생각이다. 누군가와 일정을 맞추다보면 여행 자체가 틀어지기 쉽다는 것이다. 한참 맞장구를 치며 수다를 계속하다가, 그녀의 외로움에 대한 얘기를 어렵사리 꺼냈다. 마흔을 훌쩍 넘긴 나이에 혼자라는 사실 자체에서 이미 외로움이 묻어나니까. 하지만 그녀의 대답은 의외로 밝고 명쾌했다.
“외로움이란 인간이 가지는 가장 기본적인 감정 중 하나죠. 그런 자연스러운 감정 때문에 힘들어할 필요는 없잖아요. 그냥 당연하게 받아들이려고 해요. 여름은 본질적으로 더운 것이고 왜 더운지를 궁금해할 필요가 없듯이, 사람은 본질적으로 외로운 것이고 그 본질에 대해 괴로워할 이유가 없는 거죠. 다만 여름에 더위를 극복하기 위해 옷을 얇게 입는 것처럼 자신에게 맞는 극복법을 가질 필요는 있어요. 나? 난 초연해지는 마음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신앙인들은 믿음이 있어서 그런지 외로움을 덜 타는 것 같아요.”
분명 그녀는 독신주의자가 아니다. 20대엔 하고자 하는 공부가 너무 많아서 결혼 이야기를 꺼낼 틈조차 없었고, 30대엔 거의 국내에 없었으니 닦달할 사람이 없었단다. 40대엔 굳이 얘기를 꺼내서 뭐하겠냐며 웃는 그녀.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이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살아가는 데 큰 힘이 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결혼만큼은 하고 싶단다. 단지 자신이 건강한 신체를 가지고 있는 동안은 구호활동을 계속할 계획이라, 현재로서는 국내에 가정을 꾸린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뿐이라고.
55세엔 동반자와 함께 산에 오르고 싶은 소망
그녀의 유일한 식구 '차돌이'를 소개한다. 그녀는 강아지를 너무 좋아하지만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일정치 않아 키울 수가 없다며, 조그만 강아지 인형을 내밀었다. 마치 살아 있는 강아지를 다루듯 “우리 차돌이, 우리 차돌이”를 연발하는 한비야. 작은 인형에게도 애정을 듬뿍 퍼주는 그녀로서는 넘치는 사랑을 필요한 이들에게 나눠주는 것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같은 나라, 같은 집에 살고 있진 않지만 이미 3명의 딸도 가졌다. (만난 순서대로)큰딸 니보세제네브(9)는 에티오피아에 있고, 둘째 카툰아도리(10)는 방글라데시, 셋째 에크흐진(3)은 몽골에 산다. 그녀가 결연을 맺고 돌봐주고 있는 아이들인 것.
“내가 해외출장을 자주 다니다보니 운 좋게 아이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난 아시아의 여자아이들에게도 교육의 기회를 주고 싶어요. 큰딸 제네브는 아직 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있죠. 300명 이상의 아이들이 모여야 학교가 만들어지는데, 그만한 형편이 되는 아이들이 거의 없어요. 둘째는 아동 노예였어. 집이 너무 가난해서 부모가 $50을 사채로 빌렸는데, 아이의 노동으로 이자를 대신하고 있는 거죠. 우리가 가진 6만원이 그들에겐 갚을 수 없을 만큼 큰 액수의 돈이라고 생각해봐. 막내딸은 구루병이었는데, 다행히 나와 결연을 맺어서 고칠 수가 있게 됐어요.”
마치 친자식처럼 손가락까지 헤아려가며 아이들의 소개를 마친 그녀. 굶주리고 고통받는 아이들을 돌보는 그녀에게 '친자식에 대한 애착'을 묻는 건 무의미한 일이다. 한비야만의 공간에서, 그녀의 이야기를 적당히 담았다고 생각할 때 즈음, 언젠가 그녀가 '남녀간의 사랑은 교통사고'라고 말했던 게 생각나 물었다.
“그동안 교통사고는 없었나요?”
“응. 아직은 없었어요. 하지만 막연하게 이런 생각은 해요. 33세가 되면 내 두발로 세계를 밟아보리라 마음먹고 실천했듯이, 55세가 되면 모든 걸 접고 등산만 하고 싶거든요. 그때쯤 내 옆에 누군가 함께라면 바라보는 세상이 더 아름다워 보이지 않을까?(웃음)”
한비야의 생활에서 빠질 수 없는 보물 4가지
1. 피로를 씻어주는 반신욕 그녀는 집에 돌아오면 반신욕을 즐긴다. 한국 돈으로 1,000원 정도 하는 요르단 소금을 주로 이용하는데, 일반 소금을 이용해도 무관하다.
욕조에 물을 받고 보통 세탁세제 계량컵 4~5개 정도 분량을 넣어 반신욕하면 피곤이 싹 가신다고.
2. 마음을 살찌우는 책 검소하기로 소문난 한비야가 유일하게 욕심내는 것이 책. 한 달에 적어도 15권 이상은 구입해야 만족한단다.
한비야 추천 도서_ 마지막 팬클럽(한겨레출판사),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오래된 미래), 허삼관 매혈기(푸른숲), 성에(푸른숲), 지리산 반달곰 이야기
3. 삶의 지표가 되어주는 성경책 가톨릭 신자인 그녀는 잠자리에 들기 전 꼭 기도를 드린다. 신앙생활도 게을리 하지 않는 그녀의 또 다른 보물은 바로 성경책.
4. 스스로를 반성하게 하는 일기장 기도 외에 하루 일과를 마무리하면서 빼놓지 않는 것이 일기를 쓰는 일이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일기를 쓴다는 그녀.
글 윤민영 기자 사진 조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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