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꾼 한도숙, 섶길을 가다 1
평택이 깨지나 아산이 무너지나
길을 떠난다. 싫건 좋건 떠나야 한다. 그것은 선택이 아니라 삶이 짊어진 짐이다. 아이가 자라 두발로 일어서면서 시작되는 길 걷기는 고스란히 삶이 된다. 마당을 걸어 나오면 길로 연결된다. 조금씩 멀리 걸어 보며 나와 주변을 지역을 돌아보며 관계를 만들어 나간다. 그것이 곧 삶이고 인생이다. 고대 벽화에도 두발을 당당히 내 뻗어 걸어가는 인간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는 인간이라는 자부심으로 그린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내가 걸었던 첫길의 기억은 백양나무가 하늘높이 솟은 신작로였다. 어딘지 기억나진 않지만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먼지 나는 신작로를 걸었다. 그렇게 걸었던 길을 학교를 들어가고선 일요일 빼고 매일 걸었다. 중학교 들어가서는 시오리 길을 걸어 학교에 다녔다. 그렇게 길을 걸으며 ‘애송이’를 벗어나 내 뼈는 합쳐지고 영글어 갔다. 천천히 느리게, 참으로 긴 시간으로 생각된다.

망건다리앞에 있는 엉터리 해장국집술꾼들은 물론 길손들도 속풀고 갈 수있는 마춤한 음식점이다.
망건다리도 그렇게 기억되는 다리다. 왕복 두 차선으로 좁은 도로는 미루나무를 양쪽으로 부여잡고 남으로 흘러가다 안성천에서 망건다리를 만들어 강을 건넜다. 망건다리는 성환의 청맹이들과 평택의 유천리들을 연결하며 지금도 승용차나 농기계들이 다니는 다리다. 그 아래로 전에 세웠던 다리발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일제가 세웠던 다리로 보인다. 오래된 기억으로는 그 다릿발위로 검게 타르를 뒤집어쓴 통나무로 된 교각의 잔해가 있었다.

옛망건다리 다리발로 추정되는 구조물
망건다리도 그렇고 청맹이들이라는 이름이 암시하듯 이곳은 청일전쟁의 격전지였다. 그보다는 먼저 조일전쟁시기 소사평 전투가 있었다. 小砂坪혹은 素沙坪전투는 1597년 직산현 북방 소사평에서 왜장 구로다와 명나라 섭지충이 6회전 전투로 명나라가 승리했다고 기록 하고 있다. 소사평 전투는 평양성, 행주대첩과 함께 육전삼대첩으로 기록된 규모가 큰 전투라 한다. 다만 명나라군대에 의해 치러진 전투란 것이 다른 두 곳의 전투와 다른 점이다. 300년 가까운 시차를 두고 두 나라는 다시 이곳에서 전쟁을 치렀다. 300년쯤 전에는 명나라가 이기고 그 후에는 일본이 이겼다. 이 전쟁으로 청나라는 급격히 쇠락하고 말았다. 그래서 청맹(靑亡)이 뜰이란 이름이 생겨났단다. 망건다리는 청군이 진을 치고 망루를 세웠다고 해서 망건(望見)이 라는 지명이 생겼을 것이고 이후 이지점에 다리가 놓이면서 망건다리란 이름이 붙었을 것으로 보인다.

소사평을 적시는 안성천과 철교
그러고 보니 80년대까지만 해도 평택이나 성환지역 사람들이 즐겨쓰던 말이 “평택이 깨지나 아산이 무너지나”란 말이었다. 그 말은 ‘길고 잛은 것은 대봐야 안다’는 속담과 비슷한 의미로 쓰였다. 그러나 그 말의 출처는 청일전쟁에서 기원했다. 아산을 통해 성환벌에 주둔한 청나라군대를 아산으로, 서울에서 내려와 소사벌에 진을 친 일군을 평택으로 상징하고 두 나라의 전쟁이 우리민중과는 아무 상관없는 전쟁이라는 좀 자조석인 속담이 됐다는 것이다. 즉 일본이 이기나 청나라가 이기나 우리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국제정세는 그리 간단하진 않았다.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갑오농민군들은 공주 우금치를 넘어 평택과 안성을 거쳐 서울로 진격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청이 개입하고 일이개입하면서 운명은 결정 났다. 농민군은 이 다리, 아니 안성천을 건너지 못했다. 죽산에서 기다리던 농민군들은 이후 작살이 났다고 한다.

와룡리 언덕에서 바라본 평택시내
어찌보면 이 전쟁으로 조선의 운명이 결정 나고 조선민중의 운명이 결정 난 것으로 볼 수 있지만, 당시 민중들은 두 나라와의 전쟁이기에 우리는 두고 볼 뿐이라는 생각을 한 것 같다. 그렇지만 청나라군대의 주둔과 전쟁을 도와야 했던 민중들의 고통은 극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오죽 하면 일본군대의 근대식군사행동에 찬사를 보내는 이들도 있었을까. 어쨌든 청나라 군대는 성환전투에서 청망이 되도록 패전하고 말았다. 청맹이들에는 어린나이로 전장에 끌려와 낮선땅에서 일본군대의 기관총에 피를 흘리며 죽어간 청나라군의 원혼이 서려 있을지 모를 일이다. 강물은 무심히 그날과 같이 흐르고 있다. 금빛 머리를 팔랑이는 억새꽃에 부는 바람도 무심하기는 마찬가지다.
벌써 백년이 훨씬 넘는 시간이 흘렀다. 철길이 놓이고 다리가 놓이고, 홍수피해를 막기위해 직강으로 바뀐, 더 이상 바닷물이 올라오지 않는 안성천이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