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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소리
-일본 교토 가모가와(鴨川) 강변의 환청-
늦봄에 인천문인협회에서 3박4일 일정으로 일본 오사카와 교토지역 문학기행을 기획하여, 마침 여름이 오기 전에 여행이나 한번 가서 기분전환을 꾀하려던 마음을 해갈시켰다. 여행 전날 트렁크의 먼지를 닦아내고 있을 때, 티브이 뉴스에서는 여의도 국회 소식이 들려왔다. 목하 새로이 당선된 여당과 야당의 국회의원들이 낮 뜨겁게 벌이는 격한 정쟁이 보도되고 있었다. 여행의 설렘에 앞서 한심한 당쟁의 소용돌이에 눈살을 찌푸렸다. 왜 우리는 이렇게 협량(狹量)한 정치를 되풀이 하는가.
문득 뛰어난 무사들이 진검 대결을 앞두고 잘라 보냈다는 일지매(一枝梅)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결투 전, 도전장에 덧붙여 잘라 보낸 매화가지의 단면을 보고 서로 상대방의 솜씨와 수준을 가늠했다는 것이다. 일종의 무사의 예(禮)와 도(道)로서 상대방에 대한 자신의 소개와 존중의 표현이다. 우리나라의 정치상황도 이런 신사적인 멋과 풍류가 그리워지는 요즘이다.
그래서였을까. 교토지역 여행 중 가모가와 강변을 관광버스로 지나며 히데요시가 놓았다는 ‘산조대교(3條大橋)’를 본 순간, 갑자기 칼로 자른 일지매의 단면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왜 매화가지를 자른 칼질이 생각났을까. 그것은 바로 이 산조대교의 난간 장식 동판에 남아있는 막부(幕府) 말기 풍운의 시대에 낭인 무사들이 남긴 칼자국 때문이다. 출발 전날 인터넷으로 검색해본 교토 풍물사진 중에 이 칼자국이 남은 동판 사진을 본 기억과 일지매의 이야기가 불현 듯 오버랩된 것이다. 어허라! 귓 속으로 아련히 파고드는 ‘칼의 소리’.
가모가와 강은 강이라기 보다는 우리나라의 지방하천 정도의 규모로 보인다. 도시샤(同志社) 대학 구내에 있는 윤동주, 정지용 시인의 시비 참배를 위해 가는 길 옆에 길게 펼쳐진 가모가와 강을 찬찬히 살펴보며, 내 고향 충청도 공주의 금강과 그 강으로 흘러드는 고향 마을 하천의 옛 풍경이 겹쳐져 보였다. 그립고 정겨우며 아득한 유년시절의 그 ‘돌아오지 않는 강’의 모습들이 눈앞에 펼쳐있다. 한국과 일본의 풍광이 무에 다른가? 인위적인 구조물들 말고는 똑같은 광경이다. 어린 시절, 고향 마을 앞 하천 뚝방에서 뽕나무로 다듬은 나무칼을 들고 아이들과 칼싸움하던 추억이 은은하게 떠오른다.
관광가이드의 차내 역사해설을 들으며, 한국과 일본의 통렬한 비극의 역사에 다시금 가슴이 먹먹해진다. 일방적으로 침탈 당했던 우리 조상들의 한 맺힌 절규들이 회오리쳐온다. 한 시대를 이끌었던 인물과 위정자들, 혁명가와 이념가들에 의해 휘둘러지고, 자행되었던 역사의 희비극들이 한낮의 호접몽처럼 노곤한 눈두덩에서 명멸했다. 친일은 무엇이고 반일은 무엇인가. 한국의 정치상황은 그 도그마(dogma)에 아직도 침윤(浸潤)되어 있다. 버스 안에서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경치를 단편적으로만 볼 수 밖에 없는 처지라서 산조대교의 사무라이 낭인 칼자국은 보지 못했다. 대신 얼핏 눈에 들어오는 것은 이곳의 유명한 노천주점 ‘노료유카’였다.
강변식당 ‘노료유카’(納凉床)는 교토의 여름 명물이다. 다리를 높이 받쳐 강 쪽으로 돌출시킨 옥외 마루(유카) 위에서 강변 풍경을 즐기며 식사할 수 있도록 한 식당이다. 가족과 연인들이 노료유카를 향해 강변을 걸어가는 야경은 교토를 상징하는 수많은 표현물에 단골로 등장한다. 보통 5월에서 10월 말까지 문을 여는데 2023년 현재 87곳의 가게가 영업 중이라고 한다. 강가에 걸상이나 탁자를 놓고 음식과 술을 파는 노천주점 가와도코(川床)의 일종인 노료유카는 17세기부터 형성됐다고 하는데, 홍수와 태평양전쟁 등으로 한때 철폐됐다가 1950년대부터 영업이 재개됐다고 한다.
[‘서울&’ 인터넷 기사 인용]
이곳에서 숙박한다면 일행 중 취향이 비슷한 몇분과 노료유카에서 사케라도 들며, 여독을 풀었으면 하는 생각이 치밀었지만 일정상 고베로 향해야 했다. 도시샤 대학 구내에서 정지용과 윤동주 시인의 시비 앞에서 묵례했다. 도중에 길게 펼쳐져 있는 가모가와 강줄기의 천변에서 두 사람은 얼마나 많은 향수어린 노래와 눈물을 흘렸었을까. 애닮은 마음이 뭉게구름처럼 솟아올랐다. ‘鴨川 十里ㅅ벌에 해는 저물어…… 저물어……’ 정지용 시인의 아득한 목소리가 가물가물 들려오는 착각에 젖어들었다.
대학 구내에서 화장실을 찾다가 1층 강당에서 수업중인 학생들을 보았다. 넓직한 강의실에서 교수로부터 질문과 강론을 청강하는 정숙한 분위기가 면학의 전당임을 확인케 했다. 복도에서 마주친 학생들의 순수하고 맑은 눈동자와 성실한 모습들도 인상적이었다. 지난 봉건시대와 근대사에서 이들의 이 성실함과 군주를 향한 일치된 의식들이 국가적으로 뭉쳐져서 군국주의로 피어났을까. 이들의 조상들이 한반도를 짓이긴 임진왜란과 일제식민지시대를 우리는 인두로 지진 화열(火裂)의 고통으로 잊지 못한다.
가모가와 강변을 지나 도시샤대학을 탐방하고 나오면서, 그간 어렴풋이 작은 이명(耳鳴)처럼 왱왱대던 예리하면서도 진득한 ‘칼의 소리’가 점차 또렷한 환청처럼 들려오는 듯했다. 일본은 칼의 나라다. 사무라이 계급이 정권을 수립하고, 그 무사도 정신으로 수양(修養) 된 의식으로 나라를 평정하고 이웃 나라들을 고통으로 몰아넣은 과거를 지닌 칼을 숭배하는 나라라 할 수 있다. 어쩌면 칼의 나라에서 칼의 소리를 듣는다는 것이 이상할 리 없다. 하지만 뇌리에 안개가 스며들 듯 아슴푸레하게 번져오는 칼의 소리에 신경은 예민해졌다.
필자는 검도(劍道)에 대한 관심자로서 검도의 기예와 칼에 대한 흥미를 가지고 있다. 검도라하면 일본을 떠올리기 십상이다. 우리나라도 조선의 검술이 전승되고 있으나, 일반적으로 실용화 되어 있는 검을 닦는 무도로서 일본의 검도 보급은 세계적이다. 앞서 기술한 일지매에 대한 언급이나 산조대교 철주에 찍힌 낭인의 칼자국에 대한 관심도 이와 연관이 있는 것이다. 차츰 나이를 먹음에 따라 기예보다는 검도의 오의(奧義)에 관심추가 기울어 가고 있다. 첨언하자면, 필자는 검도의 고단자가 아니고, 그저 관심있는 관찰자일 뿐이며 기초적인 기예로 심신수련에 만족하는 수준이다.
검도의 역사를 나름대로 논하자면, 현재는 일본이 종주국인양 인식되는 경향이 있지만 원류를 거슬러 올라가면 고대에 우리 한반도에서 일본열도로 전파한 것이 정설로 여겨진다. 일본의 ‘사무라이’라는 어원도 백제의 무사들인 ‘싸울아비’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오늘날 일본의 검도가 체계화되어 세계화 된 것은 도꾸가와(德川) 시대에 죽도와 호구를 사용하여 대중화에 성공한 것이 큰 계기가 되었다.
도시샤 대학 강당의 청년들의 맑고 순수한 눈망울과 오버랩되는… 어찌보면 이율배반적인 장면이 떠올랐다. 그것은 불과 일주일 전, 여행 출발 전에 읽은 김훈의 ‘칼의 노래’ 소설 속에 묘사된 잔혹한 전장의 서사 속에서 일구어지는 인간적 핏빛 서정이다. 고독한 장수 이순신의 독백이 절창을 이루는 걸작이다. 이 소설을 거론할 때마다 애독자들이 인용하는 명문 중의 한 대목을 소개한다.
안위는 노획품을 싣고 왔다. 군량 10섬, 건어물 20짝, 고구마 10가마, 소금 3되, 칼 10자루, 조총 7자루, 화약 100근, 그리고 피복과 신발 들이었다. 먹다 남은 차와 찻잔도 있었다. 나는 안위의 배로 올라가 노획품을 점검했다. 종사관 김수철이 목록을 작성했다. 나는 안위에게 물었다.
- 척후선에 웬 식량이 이리 많은가?
- 장기 척후입니다. 열흘 동안 고흥, 보성 쪽 연안을 샅샅이 뒤지고 있습니다.
적의 주력이 다시 서진(西進)을 예비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다만 고흥, 보성 연안의 내 군세를 탐지하고 있는 것인지 판단할 수 없었다. 고흥, 보성 쪽에는 적에게 보여줄 아무런 군세도 없었다. 나는 늘 그쪽이 추웠고 시렸으며 적에게 감지될 내 빈곤이 두려웠다. 조총은 도원수부로 보냈고 화약은 수영 창고로 옮겼고 식량은 안위에게 돌려주었다.
- 칼을 보여라.
안위가 노획한 적의 칼을 뽑았다. 안위는 칼을 나에게 넘겼다.
- 죽은 척후장의 칼입니다.
쇠가 살아 있었다. 칼자루에 감은 삼끈이 닳아서 반들거렸다. 살아서 칼을 잡던 자의 손아귀가 뚜렷한 굴곡으로 패어져 있었다. 수없이 베고 찌른, 피에 젖은 칼이었다. 나는 그 칼자루를 내 손으로 잡았다. 죽은 자의 손아귀가 내 손아귀에 느껴졌다. 죽은 자와 악수하는 느낌이었다.
[중 략]
칼날의 아래쪽에 글자가 몇 자 새겨져 있었다. 죽은 척후장의 검명(劍銘)인 모양이었다. 나는 칼을 눈앞으로 바싹 당겨 글자를 들여다보았다.
말은 비에 젖고
청춘은 피에 젖는다.
나는 안위에게 죽은 적의 검명을 보여주었다. 안위가 말했다.
- 글귀가 심히 가엾어서 요사스럽습니다.
- 죽은 척후장은 몇 살이라 하더냐?
- 스물여섯이라 하더이다.
- 내력을 물었느냐?
- 소상히 모르오나, 세습 무사의 자식이라 하더이다.
- 저 글귀가 가여우냐?
- 적이지만 준수했습니다. 내 부하였더라면 싶었습니다.
- 글이 칼을 닮았으니 필시 사나운 놈이었을 게다.
안위가 빼앗은 적의 칼은 열 자루였다. 나는 또 다른 칼을 빼보았다. 오래 쓴 칼이었다. 피고랑에 녹이 슬어 있었다. 그 칼에도 검명이 새겨져 있었다. 나는 그 녹슨 글자들을 꼼꼼히 들여다보았다.
청춘의 날들은 흩어져가고,
널린 백골 위에 사쿠라 꽃잎 날리네.
- 이 칼을 쓰던 자를 죽였느냐?
- 배를 나포할 때 스무 명을 사살했습니다. 그때 죽은 자들 중의 하나였을 것입니다. 모두 다 젊은 녀 석이었습니다.
- 이 또한 모진 놈이었을 게다.
적의 칼을 한 자루씩 들여다보면서, 나는 하루종일 배를 저어온 안위를 데리고 그런 하나마나한 잡소리를 하고 있었다. 말은 비에 젖고, 청춘은 피에 젖는구나…….
청춘의 날들은 흩어져가고, 널린 백골 위에 사쿠라 꽃잎 날리네……. 젊은 것들의 글이었다.
바다에서 내가 죽인 무수한 적들의 백골이 내 마음에 떠올랐다. 내 칼에 새겨 넣은 물들일 염(染)자도 내 마음에 떠올랐다. 내 젊은 적들은 찌르고 베는 시심(詩心)의 문장가들이었다. 내 젊은 적들의 문장은 칼을 닮아 있었다. 이러한 적들 수만 명이 경상 해안에 집결해 있었다. 널린 백골 위에 사쿠라 꽃잎 날리네……. 내가 죽인 백골 위에 사쿠라 꽃잎 날려도 나는 이 바다 위에 남아 있어야 했다.
그날 저녁에 술을 먹여 안위를 재웠다.
[김훈 소설 ‘칼의 노래’(‘사쿠라 꽃잎’ 내용 중) 일부 인용]
‘칼의 노래’는 1인칭 소설로 임진왜란의 명장 이순신 장군의 진중일기 형식을 띄고 있다. 이 소설은 김훈 작가의 위상을 새삼 증명한 근래 보기드문 역작이다. 필자 또한 일천한 문인으로서 김훈 작가의 필력에 경의를 표한다. 전장에서 피아를 막론하고 꽃다운 나이에 스러져 간 양국의 병사들에게 묵묵히 명복을 빈다. 당시 최전선의 양국 병사들은 선조의 교지(敎旨)나, 히데요시의 하명(下命)을 온전히 인식하고 전투에 임했을 리가 없었을 것이다. 가모가와 강변의 무성한 수풀과 강물은 역사의 질곡을 아는지 모르는지 속절없이 푸르고 유유히 흐른다. 수세기 전 임진년 조선 남해 바다에서 히데요시의 야망에 의해 벚꽃처럼 산화해버린 왜병들의 주검도, 그 왜병에게 도륙되고 능욕되었던 우리 병사와 백성들의 피맺힌 한도 가모가와 강변의 억새풀처럼 슬퍼보였다.
필자가 왜 교토의 가모가와 강변에서 스잔한 칼의 소리를 들었는지 상세히 설명할 수는 없다. 다만 끈처럼 이어진 일련의 예리한 검날 같은 상징들이 심중을 지배하고 있었음이다. 출국 전 국내 보혁 세력간의 정쟁에 환멸을 느끼며 떠올린 일지매, 그 잘려진 매화가지의 매끈한 단면에서 들려오던 칼의 소리. 가모가와 천변의 산조대교 동판에 패인 격동의 개화시기, 사무라이들의 다리 위 결투 칼자국을 보며 그 검흔의 단면에서 느꼈던… 시대의 울음 칼의 소리. 그리고 도시샤 대학의 젊은 학생들을 보며 그 눈망울에 투영된(필자의 주관적 시선)… 수세기 전 임진왜란에 출병한 왜병(倭兵)들의 상황이 김훈의 ‘칼의 노래’로 짙은 소회를 자아내게 했음이다.
결국 이번 여행은 문학적 상상력을 충전하여 새삼스럽게 건필을 외치려던 다짐이, 도둑처럼 찾아온 칼의 예리한 소리에 침잠되어 버렸다. 한가지 상징에 의하여 여행일정 내내 의식을 잠식당했던 적은 기억이 없었다. 이것은 새로운 발상의 전환을 촉구하는 의식의 명령이리라. 이제 그간 쌓아온 저장공간을 말끔히 비우고, 덕지덕지 붙은 심신의 때들을 가차없이 베어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칼의 소리가 먹구름 걷히며 먼동이 트는 새벽하늘 너머로 명멸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