霜餘水反壑 (상여수반학)/양사언의 시
霜餘水反壑 (상여수반학) 서리 녹아 내린 물 계곡으로 흘러가고
風落木歸山 (풍락목귀산) 바람에 진 나무잎도 산으로 돌아가네
苒苒歲華晩 (염염세화만) 어느덧 세월흘러 한 해가 저물어 가니
昆蟲皆閉關 (곤충개폐관) 벌레도 모두 다 숨어 움추리네
飄飄靜上人
표표히 떠나가는 靜이란 이름의 스님은
橫吹紫鸞笙
붉은 난새(하늘의 天子새)타고 피리소리 바람에 부쳐 보낸다.
披雲呼我道
그는 구름을 헤치고나와 내 불러 말하기를
自是安期生
나 자신은 옛날 신선이라고 일러지던 安期生이라네.
-蓬萊翁書(봉래옹 씀)-
양사언(楊士彦)의 ‘날 비(飛)’자 유래
양사언은 명종 19년(1564) 48세 때, 고성군(高城郡) 구선봉(九仙峯) 아래
감호(鑑湖)가에 비래정(飛來亭)을 짓고는 시 한편을 남겼다.
비래정(飛來亭)
海入壺中地 바다는 신선계로 들어가고
樓居水上天 누대는 물 위 하늘에 떠있네
靑浮雙玉筍 푸르게 떠 있는 것은 쌍옥순이고
紅折萬金蓮 붉게 꺾인 것은 만금의 연꽃이네
煉汞龍吟鼎 수은을 달이니 용은 솥에서 울고
餐霞骨已仙 안개를 먹으니 뼈는 이미 신선이네
居招黃鶴酒 그대는 황학을 불러 술을 마시게
吳與白鷗眠 나는 백구와 더불어 잠을 잘 테니
이 정자는 양사언(楊士彦)이 은거(隱居)하려고 지은 정자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는 유배에서 풀려나오는 도중에 병사를 하고 말았다.
감호(鑑湖)는 현제 비무장지대 안에 있다.
고선전망대에서 보면 햇빛에 반짝반짝 하는 호수가 가물가물 보이는데,
바로 그 호수가 감호다.
양사언은 이 ‘날 비(飛)’자에 큰 애착을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지봉유설》에 보면, ‘양사언이 일찍이 양양 별장에 있을 때
‘날 비(飛)’자 한 자를 써서 그 자제에게 부탁하기를
“나의 정력이 모두 이 글에 있으니 아껴 간직하라” 하였다.
시를 지어 이르기를,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건마는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라는 시를 지었다고 한다.
양사언이 1564년에 쓴 ‘날 비(飛)’자는 현재 양사언의 종손인
양재웅(楊載雄) 씨가 소장하고 있다.
《택당집(澤堂集)》은 이 식(李植:1584~1647)의 시문집으로
1677년의 원집이 있고, 1747년의 중간본이 있다.
제6권 <비자입해가(飛字入海歌)>를 보면,
푸른 고래수염을 붉은 붓대에 묶어 놓고
맑은 날 성홍(星泓)에다 은하수를 쏟아 부어
비래정(飛來亭)에 써놓은 비(飛)자 절로 날아가 버렸나니
적선(謫仙)께서 능운필(凌雲筆)을 휘둘러 남긴 글씨였네
신선의 수레타고 바다 동쪽 향하실 때
소군(蕭君)이 텅 빈 소재(蕭齋) 다시 돌보려 했겠는가
진관(眞官)을 명을 받들고서 풍백(風伯)을 불러 들였거늘
눈동자 점찍어서 용공(龍公)을 깨울 게 있었겠나
세상의 많은 물건 중에 오직 이것을 취하다니
방외인(方外人)의 기이한 자취 정녕 짝이 없어라
달팽이 기어 다닌 좀먹은 책이나 뒤적이며
나는 백발로 언제까지 천록(天祿)의 청려(靑藜)에 속으려나.
양사언이 일찍이 경포 호숫가에 비래정을 세우고는 큰 글씨로
‘비(飛)’자를 벽에 붙였다. 그런데 양공이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나던 날에
바람과 우레가 치면서 정자의 벽에 붙어 있던 ‘비’자의 글씨를 휘감아
바다 속으로 집어넣었다는 기이한 전설이 세상 사람들 사이에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지금 양공의 적자(嫡子) 양이일(楊理一)이 이를 소재로 해서
제공(諸公)에게 시를 청하기에, 나도 부득이 여기에 응하게 되었다.’ 라고 하였다.
註)
* 성홍(星泓): 벼루의 별칭.
* 소군(蕭君): 양사언이 죽고 나서 주인도 없는 비래정에 자신이 쓴 글자만
허전하게 남겨두려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이다.
양나라(梁)의 명핑 소문운(蕭文雲)에게 양무제(梁武帝)가 소자(蕭字)를 쓰게
하였다.
뒤에 이 약(李約)이 매입하여 정자를 세우고는 이름을 소재(蕭齋)라고 하였
다.
* 천록(天祿)의 청려(靑藜): 선조수정실록을 편찬하느라 정신이 없는 본인을
지칭한 것임.
<명가필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