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8년 5월 답사자료
0. 일시 : 2018년 5월 19일(토)
0. 답사지 : 불로동 고분군, 신숭겸장군유적지, 파게사, 노태우 전 대통령 생가,
동화사, 대구방짜유기박물관
1. 동구(대구광역시)의 연혁
가.개관
동쪽으로는 경상북도 경산시 와촌면과 하양읍, 서쪽으로는 북구· 경상북도 칠곡군, 남쪽으로는 경산시, 북쪽으로는 경상북도 군위군 부계면, 영천시 신령면과 접하고 있다.
나. 자연환경
개관북동쪽을 둘러싸고 있는 북부 산지는 남동의 초례봉(醮禮峰)에서 시작해, 북서 남동 방향의 능선을 따라 환성산(環城山)을 거쳐 이어진다. 그리고 갓바위와 인봉(印峰)에서 북서로 향하여 주봉인 팔공산(八公山)과 가산바위까지를 연결하는 팔공산지(八公山地), 팔공산지를 둘러싼 도덕산(道德山), 응해산(鷹蟹山), 응봉(鷹峰), 문암산(門巖山), 용암산(龍巖山), 능천산(綾泉山), 무학산(舞鶴山), 태실봉(胎室峰) 등의 환상산맥(環狀山脈)으로 이루어져 있다. 공산지와 환상산맥 경계부에서는 지질의 차이로 인해 사면 경사가 완만하고 해발고도가 낮은 크고 작은 다수의 소 분지들이 형성되어 있다. 이들 분지에는 선상지 및 선상지성 하안단구가 분포하고 있다.
하천은 금호강과 그 지류인 신천, 지묘천, 불로천, 율하천, 숙천, 동화천, 능성천, 용수천, 오목천이 있으며, 이외에 소하천 37개가 있다. 금호강은 동구 남부에 동서로 관류하여 경산시 및 수성구와 경계를 이루며, 신천은 신암동과 신천동을 남북으로 가로질러 중구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용수천과 능성천은 동화천과 합류하여 공산저수지로 유입된다. 동화천은 하류에서 지묘천과 합류하여 남쪽으로 흐르고, 북구 동서변동 지역에 이르러 금호강과 합류한다. 또한 동촌 지역의 불로천과 방촌천, 안심지역의 율하천과 숙천천은 각각 분산된 수계를 이루고, 남류하여 금호강으로 유입된다. 금호강과 그 지류인 소규모 하천이 합류하는 지역에는 습지들이 형성되어 있다. 대표적인 습지로는 안심습지, 율하천과 금호강의 합류지점을 중심으로 발달한 팔현습지 그리고 동화천 습지가 있다. 그 외에 공산지, 단산지, 가동지, 중동지, 신덕지, 노하지, 분암못 등의 저수지들이 팔공산지 남쪽 사면과 금호강 사이에 집중 분포하고 있다. 대구는 북동부와 남부가 높은 산들에 의해 가려져있고, 서부만이 상대적으로 개방되어 있는 지형적인 특성으로 겨울에는 춥고 여름은 무더운 내륙분지의 기후적 특성을 나타내고 있다.
다. 역사
괴전동 무문토기 산포지에는 무문토기편, 석기 등이 산재하고 있다. 이곳에서 발견된 유물들은 대개 청동기시대에서 초기 철기시대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동내동 유적에는 청동기시대의 주거지와 고인돌, 삼국시대의 분묘군이 위치하고 있다. 그 외 초기 철기시대의 유적지로는 신천동 유적지가 있다. 원삼국시대의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봉무토성(鳳舞土城)을 들 수 있다. 봉무토성은 군사적 목적이 아닌, 이 일대를 배경으로 거주하던 대규모 세력집단의 도피용 산성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를 통해 동구 지역에는 적어도 청동기시대부터 사람들이 거주하였으며, 원삼국시대에는 이미 토성을 쌓을 정도의 강력한 정치집단이 형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이 지역은 신라시대 대구현(大丘縣)에 속하지 않고 경산군(慶山郡)에 소속되어 있었다. 삼국시대에 동구를 제외한 대구광역시의 다른 구·군은 수창군(壽昌郡)의 영현었던 대구현, 팔리현(八里縣), 하빈현(河濱縣) 그리고 화원현(花園縣) 등에 속하였다. 따라서 이 지역은 현재 대구광역시의 다른 지역과는 다른 정치세력에 포함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후삼국 혼란기 이 지역은 후백제와 고려의 각축장으로 신라에 대한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는 요충지로 인식되었으며, 역사상 유명한 동수대전의 격전지가 되기도 하였다. 동수대전은 고려의 왕건과 후백제의 견훤이 현재의 팔공산 자락 지묘동에서 벌인 전투이다. 견훤의 공격으로 신라는 위기를 맞이하여 고려에 원병을 요청하였고, 이에 왕건이 군사를 이끌고 견훤의 군대를 정벌하기 위해 경주로 향하던 중 현재의 은해사 입구에서 처음으로 격돌하였다. 여기에서 패한 고려군은 후퇴하여 다시 현재의 지묘동 일대에서 전투를 벌이게 되는데, 견훤의 후백제가 대승을 거두게 된다. 고려는 신숭겸, 김락 등의 장군을 잃게 되었고, 왕건은 겨우 살아남아 도주하게 되었다. 현재에도 동구에는 이 전투와 왕건에 관련된 설화·지명 등이 많이 남아 있다.
고려시대에는 거란의 침입을 막기 위해 판각한 초조대장경을 팔공산에 위치하고 있는 부인사에 보관하였다. 이 초조대장경은 고려 성종과 현종 때, 세 차례에 걸쳐 거란군이 침입해 오자, 이를 불교의 신앙으로 물리치고 국운의 장구함을 염원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해인사의 팔만대장경보다 200년이나 앞선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경판은 몽고 침입 때 모두 불타 버렸다. 그리고 이곳 부인사는 고려시대 무신 집권에 항거하여 봉기한 승려들의 본거지이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1419년(세종 1) 대구현(大丘縣)이 대구군(大丘郡)으로 승격하여, 동구 지역 일부가 대구군에 속하게 되었다. 그리고 1466년(세조12) 다시 대구가 군에서 도호부로 승격함에 따라, 동구 지역은 대구도호부(大丘都護府) 관할의 해안현(解顔縣)과 수성현(壽城縣) 일부에 속하게 되었다. 동구 지역은 1895년 지방제도 개편으로 8도(道) 체제가 폐지되고, 전국에 23개의 부가 설치됨에 따라 대구부에 속하였다가, 다음 해인 1896년 전국이 다시 13개 도로 편성됨에 따라 경상북도 관할이 되었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 3월 새로운 부제 실시로, 대구부의 영역이 대구면으로 제한되었고, 이에 따라 대구면을 제외한 27개 면은 달성군(達城郡)에 속하게 되었다. 1938년 10월 대구부의 행정구역 확장에 따라 동구 지역은 중동, 신천동 등의 14개 동을 관할하는 대구부 수성면이 되었고, 이러한 대구부의 영역 확대와 인구 증가에 따라 효율적인 행정업무 수행을 위해 1938년 11월 2일 수성면을 관할하는 동부출장소가 개설되었다. 광복 후, 1949년 지방자치법 실시로 대구부가 대구시로 승격되어 대구시 동부출장소가 설치되었다.
1957년 12월 12일 동촌출장소가 설치되었고, 1963년 1월 1일 법률 제1174호 구제 실시에 따라 동부출장소와 동촌출장소가 통합, 동구로 승격되어 1월 16일 동구 동촌 출장소가 설치되었다. 1975년 10월 1일 구간 경계 조정이 실시되어 북구 대현동 일부가 편입되었고, 신암동 3·6동 일부가 북구에 편입되었다. 또한 신암5동이 3동으로, 검사1동이 도동에 통합되었으며, 검사2동이 검사동으로 개칭되었다. 1976년 8월 1일 동구 동촌 출장소가 시 직할출장소로 승격되었고, 1979년 5월 1일 효목동이 효목1동과 2동으로 분동 되었다. 1980년 4월 1일 동구가 동구와 수성구로 분구 되었다. 이로 인해 동촌출장소는 폐지되었고, 구청 소재지가 신천동으로 이전되었다. 1981년 7월 1일 대구시가 대구직할시로 승격됨과 동시에 경상북도 경산군 안심읍 전역과 달성군 공산면
전역을 편입하게 되었고, 안심읍 전역에 안심출장소가, 공산면 전역에 공산출장소가 설치되었다. 1982년 9월 1일 안심출장소와 공산출장소 관할구역에 안심1·2·3동, 공산 1동 등 4개 행정동이 설치되었다. 1983년 3월 15일 공산출장소가 폐지되었고, 관할구역에 안심4동과 공산2동의 2개 행정동이 설치되었다. 1985년 12월 1일에는 불로동과 봉무동이 불로봉무동, 둔산동과 부동이 둔산부동으로 통합되었다. 1986년 12월 22일 구청 소재지가 신천동에서 신암동으로 이전되었다. 1987년 1월 1일 관할구역 변경이 이루어져, 신암4동 일부가 북구 대현동으로, 공산2동 관할의 연경동이 북구 연경동으로, 수성구 가천동 일부가 율하동으로 편입되었다. 1988년 5월 1일 동구가 자치구로 승격되었다. 1990년 6월 1일 행정동 관할구역 변경으로, 신암4동이 신암4동과 5동으로 분동 되었고, 1992년 10월 14일 공산동의 미대, 내동이 공산1동으로 변경되었다. 1995년 1월 1일 동구는 대구직할시가 광역시로 승격됨에 따라, 대구광역시 동구로 명칭이 변경되었고, 1998년 9월 1일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26개동이 20개 동으로 통합되었다. 1998년 9월 21일 안심출장소가 폐지되었고, 1999년 9월 1일 동 기능전환 실시 및 주민자치센터 설치·운영이 이루어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라. 유물과 유적
문화재로는 보물, 사적, 천연기념물, 중요민속자료 등 많은 국가지정문화재와 시지정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2009년 현재, 국가지정문화재 13개, 시지정문화재 32개, 문화재자료 24개(지정문화재 20개, 등록문화재 4개) 등으로 대구광역시 전체 문화재(193개)의 35.7%를 보유하고 있다. 이외에도 다수의 비지정문화재가 분포하고 있다. 국가지정문화재인 보물로는 도학동 팔공산 동화사의 동화사입구 마애불좌상(桐華寺入口磨崖佛坐像, 보물 제243호), 동화사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桐華寺毘盧庵石造毘盧舍那佛坐像, 보물 제244호),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桐華寺毘盧庵三層石塔, 보물 제247호), 동화사 금당암 삼층석탑(桐華寺金堂庵三層石塔, 보물 제248호), 동화사 당간지주(桐華寺幢竿支柱, 보물 제254호), 달성도학동석조부도(達城道鶴洞石造浮屠, 보물 제601호)가 있으며, 도학동 북지장사에는 북지장사 대웅전(北地藏寺大雄殿, 보물 제805호), 중대동 파계사에는 대구파계사 목관음보살좌상부복장유물(大邱把溪寺木觀音菩薩坐像附腹藏遺物, 보물 제992호), 파계사 영산회상도(把溪寺靈山會上圖, 보물 제1214호), 영조대왕 도포(英祖大王道袍, 중요민속자료 제220호)가 있다.
시지정유형문화재로는 도학동 팔공산 동화사의 동화사 대웅전(桐華寺大雄殿, 유형문화재 제10호), 동화사 극락전(桐華寺極樂殿, 유형문화재 제11호), 동화사 부도군(桐華寺浮屠群, 유형문화재 제12호), 동화사 염불암마애여래좌상 및 보살좌상(桐華寺念佛庵磨崖如來坐像 및 菩薩坐像, 유형문화재 제14호), 동화사 염불암 청석탑(桐華寺念佛庵 靑石塔, 유형문화재 제19호), 동화사아미타후불탱(桐華寺阿彌陀後佛幀, 유형문화재 제52호) 동화사 보조국사진영(桐華寺普照國師眞影, 유형문화재 제53호)이 있으며, 북지장사에는 북지장사 삼층석탑(北地藏寺三層石塔, 유형문화재 제6호), 북지장사 석조지장보살좌상(北地藏寺石造地藏菩薩坐像, 유형문화재 제15호)이 있다. 그리고 신무동 부인사에는 부인사 석등(夫人寺石燈, 유형문화재 제16호), 부인사 서탑(夫人寺 西塔, 유형문화재 제17호), 부인사 부도(夫人寺浮屠, 유형문화재 제28호)가 있으며, 중대동 파계사에는 파계사 원통전(把溪寺圓通殿, 유형문화재 제7호)이 있다. 한편 용수동 팔공산 정상에는 팔공산 마애약사여래좌상(八公山磨崖藥師如來坐像, 유형문화재 제3호), 신무동 마애불좌상(新武洞磨崖佛坐像, 유형문화재 제18호), 팔공산 동봉 석조약사여래입상(八公山東峰石造藥師如來立像, 유형문화재 제20호), 신무동 삼성암지마애약사여래입상(新武洞三省庵址磨崖藥師如來立像, 유형문화재 제21호)이 입지하고 있다. 이외에도 송정동 석불입상(松亭洞石佛立像, 유형문화재 제22호), 봉무동 봉무정(鳳舞亭, 유형문화재 제8호), 미대동 성재서당(盛才書堂, 유형문화재 제9호), 옻골 경주최씨 백불암파 종가 소장 전적(옻골慶州崔氏百弗庵派宗家所藏典籍, 유형문화재 제51호) 등이 있다.
시지정무형문화재로는 신암3동 가곡(歌曲, 시무형문화재 제5호), 신암3동 살풀이(시무형문화재 제9호), 평광동 공산농요(公山農謠, 시무형문화재 제7호), 봉무동 소목장(小木匠, 무형문화재 제10호) 등이 전승되고 있다. 그리고 문화재자료에는 중대동 파계사의 파계사 설선당(把溪寺設禪堂, 문화재자료 제7호), 파계사 산령각(把溪寺山靈閣, 문화재자료 제8호), 파계사 적묵당(把溪寺寂默堂, 문화재자료 제9호), 파계사 진동루(把溪寺 鎭洞樓, 문화재자료 제10호), 파계사 기영각(把溪寺祈永閣, 문화재자료 제11호)이 있으며, 도학동 동화사 수마제전(桐華寺須摩提殿, 문화재자료 제16호), 신무동 부인사 일명암지석등(夫人寺逸名庵址石燈, 문화재자료 제22호), 도학동 사명당 대장진영(泗溟堂大將眞影, 문화재자료 제26호), 도학동 부도암부도(浮屠庵浮屠, 문화재자료 제34호), 도학동 동화사 대웅전 삼장탱(桐華寺大雄殿三藏幀, 문화재자료 제37호), 동화사 부도암신중탱(桐華寺浮屠庵神衆幀, 문화재자료 제38호), 동화사 죽암당 대선사선찰진영(桐華寺竹庵堂大禪師善刹眞影, 문화재자료 제39호) 등이 있다. 이와 함께 용수동의 수릉향탄금계표석(綏陵香炭禁界標石, 문화재자료 제21호), 수능봉산계표석(綏陵封山界標石, 문화재자료 제33호), 봉무동 독암서당(獨岩書堂, 문화재자료 제12호), 평광동 첨백당(瞻栢堂, 문화재자료 제13호), 도동 문창공영당(文昌公影堂, 문화재자료 제20호), 도동 문창공영정(文昌公影幀, 문화재자료 제25호), 평광동 효자강순항정려각(孝子姜順恒旌閭閣, 문화재자료 제35호), 둔산동 최흥원정려각(崔興遠旌閭閣, 문화재자료 제40호), 둔산동 수구당(數咎堂,
문화재자료 제41호) 등 다양한 문화재자료가 있다. 그밖에 비지정문화재로는 도학동 동화사 영산전, 동화사 비로암 대적광전, 동화사 염불암 극락전, 동화사 영산전 삼층석탑, 동화사 대웅전 동쪽 삼층석탑, 중대동 파계사 배석, 파계사 석조부도, 파계사 석등, 신무동 부인사 배석, 부인사 탑재 및 부도재, 부인사 당간지주, 용수동 마애불두상, 팔공산 정상부 팔공산 제천단 등의 불적건조물 13점과 각산동 마을뒷산 각산동 사지, 그리고 도학동 동화사, 중대동 파계사, 도학동 북지장사, 도동 관음사, 능성동 관암사, 신무동 부인사 등 전통사찰 6곳, 신무동 부인사지 등을 들 수 있다.
사적으로는 불로동의 대구불로동 고분군(大邱不老洞古墳群, 사적 제262호)이 있고, 내곡동의 내곡 모감주나무군락(기념물 제8호), 봉무동 고분군(鳳舞洞古墳群, 기념물 제15호), 봉무동 봉무토성(鳳舞土城, 기념물 제4호), 도동 용암산성(龍岩山城, 기념물 제5호), 괴전동 무문토기 산포지, 팔공산 용수동 와요지 등의 유적지가 있으며, 둔산동 경주최씨 종가 및 보본당 사당(屯山洞 慶州崔氏宗家및報本堂祠堂, 민속자료 제1호)과 용수동 당산(龍水洞堂山, 민속자료 제4호) 등의 민속자료도 있다. 한편 도동에 위치한 측백수림(側栢樹林)은 1962년 12월 3일 천연기념물 제1호로 지정되어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다.
마. 교육
조선시대 교육기관인 서원은 1692년(숙종 18) 건립된 백원서원과 1701년 건립된 백안동 청백서원, 1777년(정조 원년) 건립된 지묘동 평천서원, 그리고 1784년 건립된 불로동 유효서원 등이 있다. 서당으로는 미대동 성재서당(盛才書堂, 유형문화재 제9호)이 1626년에 설립되었다. 이곳은 조선 인조 때 선비 채명보(蔡明輔)가 정자를 짓고 만년에 학문을 강론하던 곳으로, 그 뒤 후손들이 선생의 덕행을 널리 기리고자 새로 짓고 ‘성재서당’이라 이름을 고쳤다. 봉무동 독암서당(獨岩書堂, 문화재자료 제12호)은 이 지역에 사는 경주 최씨 문중에서 세운 서당으로 1865년(고종 2)에 세워졌다. 서당 이름을 ‘독암’이라 한 것은 서당 서쪽에 고려 태조 왕건이 공산싸움에서 견훤에게 패하고, 혼자 피신해 앉아 있었다는 독좌암이 있어, 따온 것이라 한다. 그리고 평광동 첨백당(瞻栢堂, 문화재자료 제13호)은 우효중의 효행과 우명식의 충성심을 기리고, 광리에 거주하는 단양 우씨들의 교육을 위해 세운 건물이다. 첨백당이라는 이름은 우명식의 묘소가 있는 ‘백밭골을 우러러보는 집’이라는 뜻에서 붙인 이름으로, 1896(고종 33) 건립되었고, 1924년 중수하였다. 근대 교육시설인 동내동 동호서당(東湖書堂)은 황경림(黃慶霖)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 동호사(東湖祠)로 불렀으나, 건립 이후 후학들을 강학하기 위해 서당으로 중수하였다. 『동호서당중수기(東湖書堂重修記)』에 의하면 최동집, 손처눌 등도 이곳에서 수학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바. 민속
동구 신암3동 살풀이춤은 오랜 역사를 지닌 남도무속무용 계열의 춤으로 대구광역시 무형문화재 제9호로 지정되어 현재까지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용수동 당산(龍水洞堂山, 민속자료 제4호)은 그 유래와 특별한 전설은 없으나, 구전에 의하면 이 마을을 개척한 배씨와 구씨가 마을 입구에 나무를 심고 돌을 쌓아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용수동의 당나무와 당은 마을 개척 시기와 비슷한 300여 년에 가까운 역사를 가진다. 제사는 마을의 무사평안과 동민들 가가호호의 풍요와 무병장수를 기원하기 위해서 1명의 제관을 선출하여 음력 정월 보름날 새벽에 지내며, 당굿은 1970년대 새마을운동이 시작되면서부터 없어지게 되었다. 현재 당나무와 돌로 조산(造山)한 당(堂)만 남아있다.
사. 설화·민요
팔공산은 신라시대에는 부악(父岳), 중악(中岳), 또는 공산(公山)이라 불렸으며, 고려시대에는 ‘공산’으로 불리다가, 조선시대에 들어 지금의 팔공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팔공산의 ‘공산’은 우리말로 곰뫼 즉 웅산(熊山)이란
뜻이다. 고대에 곰은 신, 신성의 뜻을 가졌는데, 곰나루(熊津)가 공주가 되듯, ‘곰’이 ‘공’으로 표기되었다. 공산이 팔공산이라 불리게 된 것에 대해서는, 통일신라 말기 벌어진 왕건과 견훤의 공산전투에서 왕건을 대신해 신숭겸을 비롯한 여덟 장수가 순절한 것에서 유래되었다는 설, 여덟 고을에 걸친 산이라고 해서 유래되었다는 설, 신라 헌덕왕 때 심지대사가 진표율사로부터 받은 8간자를 동화사에 봉안했다고 해서 유래되었다는 설, 원효대사의 100명 제자 가운데서 여덟 분이 득도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 등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또한 사대주의 모화(慕華) 사상가들이 중국의 지명에서 따온 것이라는 설도 있다.
도학동의 동화사 염불암 극락전 뒤쪽에 있는 바위 좌우 양면에는 여래상과 보살상이 나란히 새겨져 있는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옛날 이 바위에서 염불 소리가 들려 암자를 짓게 되었는데, 늘 암자 옆에 있는 바위에 불상을 새기고 염원하는 불심 깊은 스님이 있었다. 어느 날 암자 부근에 안개가 끼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지만, 스님은 끼니도 잊은 채 불경을 계속 읽었다.
칠일 째 되던 날, 아침에 안개가 서서히 걷히면서 주위의 모습이 드러났을 때, 스님이 그렇게도 원했던 불상이 바위 양쪽에 새겨져 있었는데, 그것은 문수보살과 아미타여래였다. 그런데 문수보살의 오른쪽 팔꿈치 바로 옆에는 10㎝ 정도 되는 구멍이 하나 있어서 매일 한 사람이 먹을 정도의 쌀이 나왔다. 하지만 욕심 많은 스님이 더 많은 쌀을 얻기 위해 막대기로 구멍을 쑤셨고, 그 이후로 다시는 쌀이 나오지 않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중대동에 있는 파계사(把溪寺)는 조선 영조(英祖)의 출생과 관계되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숙종(肅宗)이 어느 날 숭례문 근처에서 용이 하늘로 올라가는 꿈을 꾸고는 기이하게 여겨 용과 관계되는 ‘용피(龍披)’라는 이름을 가진 파계사의 스님을 찾아 왕자 탄생을 위한 백일기도를 부탁했다. 그 후 숙종은 숙빈최씨에게서 아들을 얻었는데, 이 왕자가 훗날 영조였다. 숙종은 크게 기뻐하면서 그 공을 칭찬하고, 용피 스님에게 ‘현응조사(玄應祖師)’라는 법명을 내려주었다. 그리고 파계사 주변 40리 이내의 조세(租稅)를 받아쓰라고 하였으나, 현응은 이를 거절하고 대신 숙종 조상의 어패(御牌)를 파계사에 모시게 해 달라고 청하였다. 이는 어패를 파계사에 모심으로써 당시 양반들의 행패를 막아보기 위함이었다. 숙종은 파계사에 어패를 모시도록 하고, 절 입구에 하마비(下馬碑)를 세우도록 하였다. 파계사 기영각(祈永閣)에는 현재 성종·숙종·덕종(성종의 생부)·영조의 어패가 모셔져 있고, 입구에는 하마비가 그대로 남아있다. 또한 지금도 영조가 11세 때 써 보냈다는 ‘자응전(慈應殿)’이라는 글씨가 성전암 마루 위에 걸려 있다. 그리고 1979년 파계사 원통전 관음보살상 개금 공사
때에는 파계사가 차지하는 위상을 엿볼 수 있는 영조의 도포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도동에 있는 용암산성 주변에서는 삼국시대 토기 조각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이 성은 삼국시대에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임진왜란 때 의병들이 이 성에 주둔하면서, 왜병들과 격전을 치렀는데, 그때 판 샘을 옥천(玉泉)이라고 부른다. 이는 항상 옥같이 맑고 차가운 물이 솟아난다는 의미이다.
팔공산 문턱의 도학1동에는 학부라는 작은 마을이 있다. 옛날 이 마을 위쪽 산에는 성질이 난폭한 큰 호랑이 한 마리가 있어,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곤 했다. 호랑이가 매일 밤마다 횡포를 부렸기 때문에, 결국 마을 주민들은 아래쪽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마을 위쪽 산의 장성사라는 작은 절 아래쪽의 큰 바위를 범바우(호랑이 바위)라고 부르게 되었고, 지금도 그 바위 아래쪽으로는 예전의 집터가 발견되고 있다.
동구 방촌시장 맞은편 둔산동에는 경주최씨 성을 가진 20여 가구가 모여 사는 옻골이라는 마을이 있다. 마을 남쪽을 제외한 동·서·북쪽의 모든 산에 옻나무가 많아 옻골이라는 이름이 붙어지게 되었다. 이곳에 옻나무가 많은 이유에 대해서는 옛날, 마을을 지나가던 어느 노인이 마을 가운데 있던 정자에 금호강 물이 보이면 지기(地氣)가 기괴해져 마을이 망할 것이라고 하였고, 이에 마을 사람들이 동네 주변에 옻나무를 심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지묘동의 신숭겸 장군 유적지 일대는 과거 오동나무숲으로 덮여 있었고, 공산전투의 최대 격전지였다. 이곳 주변에는 왕건과 관련된 지명이나 전설이 많이 전해지고 있다. 공산전투에서 왕건의 군사들이 크게 패했다는 파군(破軍)재, 공산전투에서 패배한 왕건이 지묘동 뒷산에 피신하여 잠시 휴식을 취해 ‘왕건을 살렸다’는 뜻으로 이름 붙여진 왕산(王山), 왕건이 도주하다 이 지역에 이르렀는데, 어른들은 피난 가고, 어린아이들만이 남아 있었다는 불로동(不老洞), 겨우 위험을 피해 이곳에 도착한 왕건이 한숨을 돌리고 찌푸린 얼굴을 활짝 폈다는 해안(解顔), 반야에 달이 중천에 떠서 왕건의 탈출로를 비췄다는 반야월(半夜月), 이 지역에 도달하여 비로소 왕건이 안심했다는 안심(安心), 왕건이 병사들에게 ‘경계를 게을리하지 말고 태만함이 없도록 하라’고 했다는 무태(無怠) 등이 왕건과 관련된 지명이다.
자료출처 : [Daum백과] 동구(대구광역시)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 불로동 고분군
위치: 대구 동구 불로동 335외 148필지
문화재청: [대구 불로동 고분군] 사적 제262호(1978.06.23 지정)
삼국시대 고분군, 불로동 고분공원
금호강이 흘러가는 동구 불로동 일대 야산에 200여기의 고분군이 있다. 불로동은 왕건이 동수전투(일명 : 공산전투)에서 패하여 도주하다 이 지역에 이르자 어른들은 피난가고 어린아이들만이 남아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이 고분들은 삼국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며 사적 제262호로 지정되었다. 이미 일제 강점기 때 이 고분들을 조사한 적이 있는데 당시에는 경북 달성군 해안면에 속하여 해안면 고분군이라 불렀다. 이곳 불로동 고분들은 삼국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옛날 이 지역을 다스렸던 토착지배세력의 집단묘지로 추정된다. 불로동 고분군의 유물, 불로동 고분군은 불로동과 입석동의 구릉에 분포하고 있었는데, 1938년 11월 입석동 쪽 고분 2기를 조사하여 해안면 고분으로 불려졌다. 그 뒤 1963년 12월과 이듬해 1월 두 차례에 걸쳐 경북대학교 박물관에서 불로동 고분 2기를 조사한 뒤 입석동 고분을 포함하여 대구 불로동 고분군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봉토의 지름은 1∼28m 내외이고 높이는 4∼7m 정도이다. 전체적으로 불로동 고분군은 위치가 구릉이라는 점과 봉토 내부가 돌무지 무덤과 비슷하게 할석으로 축조된 점, 그리고 돌방이 지나치게 세장(細長)한 점 등이 구암동과 내당동 고분군과 유사하여, 같은 계열임을 짐작케 한다. 전체 고분군의 축조시기는 대략 5∼6세기에 걸치는 것으로 추정된다.
자료출처: [Daum백과] 대구 불로동 고분군 – 대한민국 구석구석
3. 신숭겸 장군 유적지
신숭겸 본관은 평산(平山). 초명은 신능산(申能山). 평산(平山) 신씨(申氏)의 시조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전라도 곡성현(谷城縣) 출신으로 태조(太祖)가 평산에서 사성(賜姓)하였다고 하고, 『고려사』열전(列傳)에는 광해주(光海州: 지금의 강원도 춘천) 사람이라 하였다. 그런데 『신증동국여지승람』 춘천도호부(春川都護府) 인물조(人物條)에 그의 이름이 실려 있으며, 또한 그의 묘가 춘천에 있는 것 등으로 보아, 본래 곡성 출신으로 뒤에 춘천에 옮겨와서 살게 된 것으로 보인다.
몸집이 장대하고 무용(武勇)이 뛰어나 궁예(弓裔) 말년에 홍유(洪儒)· 배현경(裵玄慶)· 복지겸(卜智謙)과 함께 혁명을 일으켜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王建)을 추대해 개국일등공신(開國一等功臣)에 봉해졌다.
태조 즉위 후 7, 8년 동안 소강상태였던 후백제와의 긴장관계는 견훤(甄萱)이 신라를 공격함으로써 악화되었다. 927년 견훤이 고울부(高鬱府: 지금의 경상북도 영천)를 습격하고, 신라를 공격해 경애왕(景哀王)을 죽이고 갖은 만행과 약탈을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태조는 크게 분개해 사신을 신라에 보내어 조제(弔祭)하는 동시에 친히 정기(精騎) 5천을 거느리고 대구의 공산(公山) 동수(桐藪)에서 견훤을 맞아 싸우게 되었다. 그러나 후백제군에게 포위되어 태조가 위급하게 되었을 때, 대장(大將)이 되어 원보(元甫) 김락(金樂)과 더불어 힘써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간신히 위기를 벗어난 태조는 신숭겸의 죽음을 매우 슬퍼해 시호를 장절(壯節)이라 하였다. 또한 아우 신능길(申能吉)과 아들 신보(申甫)를 모두 원윤(元尹)으로 삼고, 지묘사(智妙寺)를 창건해 그들의 복을 빌게 하였다. 994년(성종 13) 4월에 태사(太師)로 추증되어 태사 개국장절공(太師開國壯節公)으로 태묘(太廟)의 태조 사당에 배향(配享)되었다. 신숭겸의 행적을 기록한 『평산신씨장절공유사(平山申氏壯節公遺事』에는 1120년 예종이 신숭겸과 김락을 추도하며 지었다는 「도이장가(悼二將歌)」라는 향가가 전한다.
자료출처 : [Daum백과] 신숭겸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4. 노태우 대통령 생가
대구광역시 동구 신용동에 자리한 노태우 전 대통령 생가는 부지 466㎡,건물면적 66.45㎡의 1층짜리 목조건물 3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당시 경북 달성군 공산면 신용리(지금은 대구광역시 동구 신용동)라 불리던 이 마을에서 1932년 아버지 노병수와 어머니 김태향의 사이에 맏이로 태어났다.
1945년 공산국민학교를 마치고 대구공립공업학교(현재의 대구공업고등학교)에 진학할 때까지 이 집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생가 뒤편으로 조부와 증조부 선령이 자리해 있다.
5. 파계사(把溪寺)
대구광역시 동구 파계로 741 (중대동)
가. 영조의 출생 설화가 전해지는 사찰
파계사 804년(애장왕 5) 심지(心地)가 창건하고, 1605년(선조 38) 계관(戒寬)이 중창하였으며, 1695년(숙종 21) 현응(玄應)이 삼창하였다. 이 절에는 영조(英祖)의 출생과 관계되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숙종의 부탁을 받은 현응은 농산(聾山)과 함께 백일기도를 하였고, 기도가 끝나는 날 농산이 숙빈(淑嬪) 최씨에게 현몽하였으며, 이렇게 태어난 아들이 후일의 영조였다는 것이다. 숙종은 이에 대한 보답으로 파계사 주변 40리 이내의 조세(租稅)를 받아 쓰라고 하였으나 현응은 이를 거절하고 선대의 위패를 모시기를 청하였다. 이는 지방 유림(儒林)의 행패를 막으려는 것이었다. 1979년 관음보살상을 개금할 때 불상에서 나온 영조의 어의(御衣)는 이 설화의 신빙성을 더해 주는 것이었다. 이곳은 동화사와 더불어 대구 지방의 유명한 풍치지구이며, 조계종 제9교구의 본산인 동화사의 말사로서 불상, 석등, 석불, 영조대왕의 어의가 보관되어 있다. 영산회상도는 구도나 형식에서 특색을 갖추고 있고 필법과 채색 또한 품격을 지닌 뛰어난 작품으로 18세기초를 대표하는 불화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나. 파계사의 주요문화재
현존 당우로 2층누각인 진동루(鎭洞樓), 법당인 원통전(圓通殿), 적묵당(寂默堂) 등이 있고, 부속암자로 현니암(玄尼庵)·성전암(聖殿庵) ·금당암(金堂庵) 등이 있는데, 성전암은 경북 3대 도량 중의 하나이다. 문화재로 보물 제1214호 파계사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가 있다.
원통전(지방문화재 제7호), 원통전목조관음보살좌상(보물 제992호) 영산회상도(후불탱화 보물 제1214호)
민속문화재(시지정) : 설선당, 산령각, 적묵당, 진동루, 기영각
[산령각]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8호(1984.07.25 지정) 산신각이라고 하기도 한다. 산신각은 산신을 봉안한 건물로 우리나라 사찰 특유의 전각 가운데 하나로 우리나라 불교의 토착화 과정을 짐작게 하는 좋은 증거가 된다. 산신은 원래 불교와 관계가 없는 토착신이나 불교의 재래신앙에 대한 수용력에 의하여 사찰내에 봉안되게 되었다. 산신신앙은 우리나라 특유의 산악숭배신앙과 관련이 깊지만 조선시대 이후 차츰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 신앙은 불교 본연의 것이 아니라 하여 전(殿)이라 하지 않고 반드시 각(閣)이라는 명칭을 붙이고 있다.
[설선당]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7호(1984.07.25 지정) 설선당은 강당으로 사용하던 건물로, 원통전을 중심으로 적묵당과 마주하고 있다. 1623년(인조 1)
계관법사에 의해 창건되어 두차례(1646, 1725)에 걸쳐 중건하였고 1762년 지붕을 다시 잇는 공사를 시행한 후 1976년에는 대대적인 보수공사가 있었다. 이 건물은 대중식당과 강습소로 사용되고 있으며, 구조양식과 가구 수법 등이 간결하면서도 견실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기영각]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1호(1984.07.25 지정) 기영각은 영조대왕을 위해 기도한다는 뜻으로 이름한 전각이다. 1696년(숙종 35) 현응조사가 성전암(성전암)과 더불어 건립하였다고 전해지며 1974년과 1983년의 두 번에 걸친 보수공사가 있었다. 건물은 화강석 바른층쌓기 기단위에 건립된 정면 3칸. 후면 2칸 규모의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구조양식은 덤벙초석 위에 원주를 세우고 주상에 주두와 함께 앙서와 수서를 장식한 외일출목 주심포계양식을 보이고 있으며 주두와 장식이 번잡하게 발달한 조선후기 공포양식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하겠다. 상부가구는 5량가이나 우물천장으로 가리어져 있다.
[적묵당]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9호(1984.07.25 지정) '적묵당(寂默堂)'이란 눈을 감고 조용히 명상을 한다는 불교용어인 적묵(寂默)에서 따온 것으로 설선당과 마주보고 있는 'ㄱ'자형의 건물로 소박한 조선후기 건축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진동루]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0호(1984.07.25 지정) 파계사 원통전 앞에 있는 누각으로 1715년(숙종 41)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진다. 이곳은 원래 물의 줄기가 아홉갈래고 흩어져 있다하여 물길을 다시 모은다는 의미로 파계사라 이름하였다 하며, 진동루는 파계라는 이름만으로는 이 곳의 기를 제압할 수 없어 기를 진압한다는 의미로 이름하였다 한다.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의 2층으로 가공하지 않은 방형의 주춧돌 위에 둥근 기둥을 세우고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아래층 어칸을 통로로 하고 측간의 뒷부분을 창고로 사용하고 있으며, 2층에는 통간 우물마루를 했다. 건물의 규모에 비해 부재가 다소 약한 감이 있다. 천장은 연등천장이며, 문은 모두 미닫이 유리문을 달아 어색한 면이 있으나 익공 등에서 볼 때 조선시대 중·후기 양식에 어울리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원통전]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7호(1984.07.25 지정) 원통전은 일반적으로 관음전(觀音殿)이라고 하며, 관세음보살(觀世音普薩)을 주불로 봉안하는 불전을 말한다. 파계사는 중심전각인 원통전을 중심으로 좌우에 설선당, 적묵당 그리고 앞에는 진동루 등이 위치하여 전체적으로 口자형을 이루고 있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1605년(선조 38) 계관법사가 중건하고, 1695년(숙종 21)에 현응조사때 삼창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건축양식은 정면 3칸·측면 3칸의 맞배지붕으로 가구식 기단 위에 자연석 주춧돌을 놓은 후 둥근기둥을 올리고 있다. 법당 내부의 불단은 은해사(銀海寺) 백흥암(百興庵)의 수미단(須彌壇)과 같은 형태로 정교하게 무늬를 새겨넣어 관음보살상을 모시고 있다. 불단의 상부에는 보개(寶盖)를 설치하고 있다. 원통전 앞에는 좌우 양쪽에 당간지주와 석등이 배치되어 있다. 수미단(須彌壇)은 사찰의 법당 등에 설치하는
수미산(須彌山) 형상의 단. 수미산은 불교의 우주관에서 나온 상상의 산으로 세계의 중심에 있다고 한다.
[대구파계사건칠관음보살좌상및복장유물] 보물 제992호(1989.04.10 지정) 파계사의 주전인 원통전의 주존불이다. 고려후기 불상양식으로 삼중의 높은 보관과 통견의를 걸치고 있으며 온몸에 장엄하고 복잡한 영락을 표현, 전체적으로 둔중한 느낌을 가지고있다. 이 불상이 차지하는 큰 의의는 1979년 개금불사 때 복장(腹裝)되어 있던 영조대왕의 어의(御依)와 어의를 복장하게 된 경위와 불상의 건립 년대를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인 발원문을 발견하여 불상이 조성된 것이 최소 1448년 이전이라는 것과 불상 조각의 변천과 유사 불상의 편년을 가늠할 수 있게 된 점이라 할 수 있다.
[파계사 석조부도] 파계사 입구 오른쪽에 석축을 쌓아 조성(2기)되어 있다. 좌측부도는 절충장군 가선대부 보광당 전명대사지탑(1651년 효종2)으로 사각의 대석위에 6각의 석조를 놓고 2중으로 조각된 앙련좌 위에 부도가 설치되어
있다. 우측부도는 회진당원의 대사지탑(1648년(인조26)으로 6각의 대석위에 연화문을 조각, 그 위에 일석으로 된 앙련과 부련이 있고 그 위에 부도를 설치하였다.
[팔공산파계사사적비] 파계사 사적비명이라 하여 파계사의 사적을 기록하고 있다. 신라 애장왕(800-808)때 심지왕사가 창건했으나 임진왜란으로 회진된 것을 1605년(선조 38년) 계관법사가 원통전을 시작으로 설선당 등을 중건하였다고 한다. 또한 파계사 삼병조사(三甁組師)인 현응대사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1693년(숙종 19년) 10월 5일 밤에 숙종의 꿈속에 현응이 나타났다고 한다. 이에 왕이 현응대사에게 왕자 낳기를 부탁하는데 수락산(水絡山) 성전에서 100일 기도 끝에 이듬해 원자가 탄생하니 이가 후일의 영조이다. 숙종은 이에 대한 보답으로 파계사를 영조의 생전·사후의 복을 기원하는 축원당(祝願堂)으로 삼았다. 또한, 절 입구에 「대소인개하마비(大小人皆下馬碑)」를 세워 왕실 원당에 감히 말을 타고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양반과 관료들로부터의 착취와 사역도 면하게 해주었다.
자료출처 : [Daum백과] 파계사 – 대한민국 구석구석
6. 동화사(桐華寺)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의 본사이다. 통일신라시대의 절로 금산사 , 법주사 와 함께 법상종 3대 사찰의 하나이다. 고려 문종 때에는 이 절에서 원천 법천사의 지선국사가 배출되었고 그 문하에서 속리산 승통 석규를 비롯하여 1,000여 명의 승려들이 나왔다. 임진왜란으로 동화사 전체가 불타버린 후 여러 차례의 중창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으며 경내에는 조선 영조 때 중건된 대웅전과 극락전을 비롯하여 20여 채의 건물이 남아 있다. 이밖에도 보물로 지정된 당간지주(보물 제254호)·금당암3층석탑(보물 제248호)·비로암3층석탑(보물 제247호)·비로암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제244호)·동화사입구마애불좌상(보물 제243호)·석조부도군 등이 있다.
신라와 고려시대를 통해 대가람이었으며 금산사, 법주사와 함께 법상종 3대 사찰의 하나이다. 〈동화사사적기〉에 따르면 493년(신라 소지왕 15)에 극달화상이 창건하여 유가사(瑜伽寺)라 부르다가, 832년(흥덕왕 7)에 심지왕사가 중창했는데 사찰 주변에 오동나무꽃이 상서롭게 피어 있어 동화사라 고쳐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삼국유사〉 권4 심지계조조(心地繼祖條)에는 신라 헌덕왕의 아들이었던 심지가 갖은 고행 끝에 속리산의 영심대사(永深大師)가 진표율사로부터 받은 불골간자(佛骨簡子)를 전수받아 팔공산으로 돌아온 후 불골간자를 모실 절터를 찾기 위하여 간자를 던져 떨어진 곳에다 절을 짓고 동화사라 했다는 기록이 있어 심지를 그 개조로 보기도 한다.
고려 문종 때에는 이 절에서 원천 법천사의 지선국사(智先國師)가 배출되었고 그 문하에서 속리산 승통석규(釋窺)와 금산사 주지 혜덕왕사 소현(韶顯)을 비롯하여 1,000여 명의 승려들이 나왔다. 임진왜란으로 동화사 전체가 불타버렸으며, 1608년(광해군 1) 절을 중건할 때 화주(化主) 학인(學仁)이 미륵전을 재건했고, 1725년(영조 1)에 다시 중창했다.
그 후에도 여러 차례의 중창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으며 경내에는 조선 영조 때 중건된 대웅전과 극락전을 비롯하여 20여 채의 건물이 남아 있다. 이밖에도 보물로 지정된 당간지주(보물 제254호)·금당암3층석탑(보물 제248호)·비로암3층석탑(보물 제247호)·비로암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제244호)·동화사입구마애불좌상(보물 제243호)·석조부도군 등이 있다.
가. 동화사비로암석조비로자나불좌상
보물 제244호. 전체높이 293cm. 상높이 129cm. 이 불상은 비로암 법당 앞에 있는 3층석탑의 1층 탑신석에서 출토된 사리호의 명문에 의해서 863년에 석탑과 함께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통일신라 불상조각 양식의 흐름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편년자료가 되는 작품이다.
광배와 대좌를 모두 갖춘 완전한 석불상으로 현재 얼굴을 비롯하여 불신과 광배, 대좌의 윗부분에 호분을 두텁게 바르고 그 위에 다시 채색을 가하여 원래의 모습을 많이 잃어버렸다.
나발의 머리 위에 얹은 육계는 나지막하여 뚜렷하지 않으며 머리의 중앙과 정상부분에는 각각 계주가 있는데 후대에 만들어 넣은 것이다. 비교적 둥글고 통통한 얼굴에는 양끝으로 약간 치켜 올라간 눈매와 낮고 넓적한 코, 작은 입 등이 단정하게 표현되어 있다. 좁아진 어깨와 두 다리의 폭은 상 전체를 위축된 자세로 보이게 하며 평행으로 연속되어 내려오면서 표현된 형식적인 옷주름 등은 9세기경에 유행한 불좌상 형식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특징들이다.
광배는 전신을 감싸고 있으며 2줄의 선으로 구분된 두광과 신광에는 연화무늬·보상무늬·당초무늬가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고 또 경계선을 따라 8구의 화불이 배열되어 있다. 그 바깥쪽으로는 불꽃무늬를 새기고 가장 윗부분에는 삼존불 형태의 화불을 안치했다. 대좌는 8각형의 연화대좌로 상대와 하대에는 연화무늬가 장식되어 있고 중대에는 복잡한 구름무늬 사이로 사자를 1마리씩 배치하여 전체적으로 화려하고 장식적인 것이 특징이다.
나. 동화사입구마애불좌상
보물 제243호. 높이 106cm. 얼굴은 약간 살이 찐 편으로 풍만하며 각이 진 넓은 어깨에는 통견의 법의를 걸쳤고 옷주름은 좁은 간격으로 복잡하게 늘어져 있다. 특히 가슴 위로 보이는 대각선의 내의와 띠매듭 등은 통일신라 말기
불상의 전형적인 법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두 손은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으며 앉아 있는 자세는 완전한 결가부좌의 모습이 아니라 오른쪽 다리를 대좌위에 비스듬히 내려놓은 특이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광배는 2줄의 선으로 두광과 신광을 표현했으며 그 가장자리에는 불꽃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대좌는 앙련과 복련이 서로 맞붙어 있으며 이 연화대좌 밑으로는 구름무늬가 생동감있게 표현되어 있어 마치 불상이 천상의 정토세계에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이 마애불상은 전반적으로 얕은 저부조로 표현되어 부드럽고 섬세한 조각기법을 보여주고 있으나 얼굴의 굳어진 표정이나 비교적 경직된 어깨선, 장식적인 광배와 대좌의 표현 등은 통일신라 말기 불상에 나타나는 양식적 경향으로 대체로 9세기 후반에서 10세기초의 작품으로 볼 수 있다.
다 동화사금당암삼층석탑
보물 제248호. 높이 동탑 562cm, 서탑 524cm. 동탑의 기단은 대부분 근래에 보수되어 약간 변형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즉 하층기단의 중석에 새긴 우주와 탱주는 대나무 모양으로 조각했으며 갑석 윗면에는 정(井)자형의 굄이 있고 네 귀퉁이에 작은 구멍이 뚫려 있다. 상층기단의 중석에는 각 면에 우주와 탱주를 2개씩 새겼다. 탑신부의 옥개와 옥신은 각기 다른 돌로 구성되었으며 각 층의 옥신에는 우주만 장식했고, 옥개에는 위아래로 2단의 굄과 4단의 받침을 두었다. 상륜부는 비교적 보존상태가 좋은 편이며 현재 노반·복발·앙련·보륜·보주 등이 남아 있다. 서탑도 역시 2층 기단으로 지대석 위에 있는 중석은 4매의 돌로 이루어져 있고 각 면에는 1개의 탱주와 우주를 조각했다. 상륜부에는 노반과 찰주만 남아 있다. 동탑과는 세부형식에서 다소 차이점을 보이고 있으나 대체로 양식적 특징은 같이 하고 있다. 1957년 서탑을 해체했을 때 안에서 99개의 소탑(小塔)과 사리장치가 발견되었다. 이 두 탑은 배치에서 통일신라시대 쌍탑의 일반적인 형식과는 차이를 보이며 결구방식이나 크기, 세부처리 등에서 9세기경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라. 동화사비로암삼층석탑
보물 제247호. 높이 371cm. 1층 옥신에서 나온 납석제 사리호의 표면에
"敏哀大王追崇福業造石塔記…… 時咸通四年 歲在癸未無射之 月十日記" 등의 명문이 있어 863년(경문왕 3)에 신라 민애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건립된 석탑임을 알 수 있다. 2층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이 올려진 일반적인 석탑형식을 보여준다. 하층기단은 4매의 돌로 구성되었고 각 면에는 탱주와 우주를 표현했는데 특히 갑석 위에 굄을 만들고, 아래는 잘록하게 안으로 파여져 있어 마치 다른 돌을 끼운 듯한 형태는 신라 말기에 나타나는 석탑양식이다. 상층기단도 마찬가지로 4매의 돌에 탱주와 우주가 각각 도드라지게 새겨져 있다. 탑신부의 옥개와 옥신은 다른 돌로 만들었으며 옥신에는 우주만 간략하게 표현했고 옥개석 받침은 4단으로 되어 있다. 상륜부에는 노반·복발·보주만 남아 있다.
마. 동화사비로암석탑내발견사리함금동선각사방불
각 면 크기 세로 14.5cm, 가로 15.3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4개의 금동판에는 천개 밑에 좌상의 본존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협시보살상이 서 있는 삼존형식의 불상이 각각 선각으로 표현되어 있다. 본존불은 각각 지권인, 항마촉지인, 합장인, 그리고 약항아리를 들고 있는 손 모양을 취하고 있는데 이러한 형식의 사방불은 아직까지 발견된 예가 없어 각 상의 도상적 명칭을 정확히 밝히기가 어렵다. 그러나 북방에 위치한 지권인의 상은 비로자나불을 나타내며 이 경우에는 일반적인 도상과는 달리 보관을 쓴 여래형으로 표현되었다. 약함을 든 상은 약사여래로 생각되나 금동판의 연결구조로는 남방보생여래로 볼 수 있고, 촉지인은 동방의 아촉여래, 합장인은 서방의 아미타여래로 각각 추정된다. 얼굴은 생동감이 사라져서 무표정한 모습이며 탄력감이 줄어든 몸체 위로는 U자형의 옷주름이 내려오면서 양 다리를 덮고 있다. 본존을 향하여 몸을 약간씩 틀고 있는 두 보살상도 거의 본존불과 동일한 양식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이 사리기의 선각사방불상은 함께 발견된 납석제 사리호의 명문에 따라 863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당시 신라 사방불상 표현의 한 예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사. 동화사수마제전금동불좌상
이 불상은 1702년에 건립된 수마제전에 안치되어 있으나 원래 있었던 장소는 알 수 없으며 현재 광배부분이 없어진 상태이다. 머리를 앞으로 약간 숙이고 있는 자세로 허리가 유달리 길게 표현되었고 상체에 비하여 무릎의 높이가 낮은 편이어서 전반적으로 불안정한 신체비례를 보여준다. 나발로 표현된 머리의 중앙에는 계주가 장식되었으며, 턱이 겹친 비만한 얼굴에는 오똑한 코와 꼭 다문 작은 입 등이 표현되어 있다. 좁은 어깨와 밋밋한 가슴에 걸쳐진 통견의 법의는 규칙적인 단을 이루면서 무릎 밑에까지 내려와 양 다리 사이로 부채꼴의
옷주름을 형성하고 있다. 또한 왼쪽 어깨에서 1번 접혀 내려온 옷자락이 그대로 가슴의 옷깃 속으로 들어간 착의법이나 가슴 위로 보이는 내의와 띠매듭의 표현 등은 통일신라시대에 유행한 불좌상의 형식을 이어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두 손은 각각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는 아미타불의 중품하생인을 취하고 있다. 이 불상은 비만해진 얼굴모습이나 신체비례가 제대로 맞지 않는 점, 규칙적인 띠 모양으로 처리된 옷주름 등으로 보아 대체로 조선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자료출처 : [Daum백과] 동화사 – 다음백과
7. 대구방짜유기박물관
대구광역시 동구 도장길 29 (도학동)
가. 우리나라의 문화의 힘을 알려주는 대구 방짜유기박물관
2007년 5월 25일 개관한 방짜유기박물관은 전국 최초로 방짜유기를 테마로 한 전문박물관으로 대구광역시가 점차 사라져 가는 전통문화유산인 방짜유기와 제작기술을 전승.보존하고 지역문화 발전을 도모하고자 건립하였다. 1983년 정부에 의해 국가무형문화재 제 77호로 지정된 유기장 이봉주 선생이 평생 수집 제작한 방짜유기 275종, 1,480점을 무상기증 받아 소장하고 있다.
대지면적 17,880㎡(5,409평)에 건축연면적 3,758㎡(1,137평)로 지하 1층, 지상 2층의 규모로, 3개의 전시실(755평)과 자료 검색실, 문화사랑방, 영상교육실, 야외공연장 및 기획전시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상설전시장인 유기문화실에서는 우리의 역사와 함께 그 맥을 이어온 유기의 역사와 종류 등 유기에 대한 각종 정보를 접할 수 있으며, 기증실에서는 국가무형문화재 이봉주 선생의 유기명품이 전시되어 있다. 재현실에서는 유기를 제작했던 공방과 거래했던 놋점을 1:1 인물모형과 자동감지장치가 부착된 작동모형으로 재현해 놓았다. 방짜유기는 세계적으로 기술 보존국이 회귀하며, 방짜유기박물관은 역사문화에
대한 국민들의 이해를 높이고 청소년들에게는 훌륭한 교육의 장으로 활용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나. 방짜유기(방자유기)란?
유기의 종류중 가장 질이 좋은 유기로, 구리와 주석을 78:22로 합금하여 거푸집에 부은 다음, 불에 달구어 가며 두드려서 만든 그릇. 유기의 종류는 제작기법에 따라 방자(方字)와 주물(鑄物), 반방자(半方字) 등이 있다. 가장 질이 좋은 유기로 알려진 방짜유기는 먼저 구리와 주석을 78:22로 합금하여 도가니에 녹인 엿물로 바둑알과 같은 둥근 놋쇠덩어리를 만든다. <BR>이 덩어리를 바둑 또는 바데기라고 부르는데 이것을 여러 명이 서로 도우면서 불에 달구고 망치로 쳐서 그릇의 형태를 만든다. 주물 유기와는 달리 정확히 합금된 놋쇠를
불에 달구어 메질(망치질)을 되풀이 해서 얇게 늘여가며 형태를 잡아가는 기법이다. 이런 기법으로 만들어진 방짜 유기는 휘거나 잘 깨지지 않으며 비교적 변색되지 않을 뿐 아니라 쓸수록 윤기가 나는 장점이 있다. 또한 방짜는 독성이 없으므로 식기류를 만들 뿐만 아니라 징·꽹과리 같은 타악기도 만든다. 특히 악기는 방짜기술만의 장점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으로 손꼽힌다.
자료출처 : [Daum백과] 대구 방짜유기박물관 – 대한민국 구석구석
|
첫댓글 유익한 답사가 될 것입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답사자료 올려주신 국장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감사드리구요! 덕분에 많은 공부가 될듯합니다.
고맙습니다 국장님!~^^
파계사와 동화사에 산제되어 있는 유물과 유적을 하나하나 확인할 수 있는 기회라 기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