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로 성공하고 싶어 술, 담배도 멀리 했지만 매니저 해약 갈등으로 4달간 활동을 못하는 시련을 겪기도 했다. 65년 가을, 유명 TV쇼인 '자니 카슨 쇼'와 NBC TV '투나잇 쇼'에 8회나 출연하며 제법 유명세를 탔다. 66년 1월, 서울로부터 어머니의 위독함을 알리는 전화 한 통이 왔다. 3년만에 고국 땅을 밟았다. 이때부터 패티김은 국제적인 가수로 대접을 받기시작했다. TV 쇼에서는 특집 쇼를 마련해 주었다. 이 무렵, 자신과 똑같이 어머니의 병 문안 때문에 일본에서 귀국한 길옥균과 재회를 했다.
11월 첫 딸 정아를 얻었다. 12월 남산 드라마센터에서 열린 길옥윤의 첫 리사이틀에서 '사랑하는 마리아'를 처음으로 불렀다. 이 노래는 일본에서도 대히트를 기록했다. 이때 패티김의 일본 대중 잡지 '주간대중'에 게재된 살색 수영복 누드 사진 사건으로 곤혹을 겪었다.
'잉꼬부부'로 불렸던 이들의 갈등이 시작된 것은 이 무렵부터. 마침내 길옥윤의 3차례의 사업 실패로 71년 9월 하와이에서 결별의 길을 걷게 됐다. 이후 패티김은 '이민설'에 이어 '유태계 사업가 W씨가 새 애인', '주한고위 미군 장성 모씨와 동거 중' 등 온갖 스캔들의 초점이 되었다.
72년 5월 길옥윤은 새 노래 '이별', '서울의 모정', '사랑의 기도'를 들고 돌아왔다. 장충동 스튜디오에서 녹음해 빅 히트가 터졌지만 73년 9월 두 사람은 이혼을 발표해 놀라움을 안겨 주었다. '이별'은 신상옥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기 했다. 이혼 후 모든 출연 스케줄을 취소하며 2개월 간 두문불출했다. 하지만 74년 새해가 되면서도 '패티김은 이태리인과 결혼하고 이민을 간다. 이혼은 그 남자 때문이다'는 스캔들은 계속 터져 나왔다. 그 와중에도 앙드레김과 패션쇼를 펼치고 이형표 감독의 '속 이별'영화에 딸과 함께 출연하며 활동을 이어갔다.
74년 6월 패티김은 4회 동경국제가요제에 길옥윤과 함께 '사랑은 영원히'로 출전해 14개국 450곡 중에서 3위에 입상했다. 야심 찬 포부를 가졌던 그녀는 3위 입상이란 초라한 성적에 충격을 받고 일본 활동을 취소하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76년 3월엔 오랫동안 열애설이 돌았던 이태리계 미국인 아바라도 게디니와 뉴욕에서 재혼을 했다.
캐나다 토론토에서 리사이틀을 개최하며 건재함을 과시했다. 80년 3월, 강남구 서초동에 이태리 식당 '마마미아'를 오픈하며 사업가로 거듭났다. 가수 활동은 대형 디너쇼에만 치중, 지나친 거물 가수 행세로 눈총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83년에는 25주년 기념 신보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으로 팬들의 변치 않는 사랑을 확인했다.
또한 가수 생활 30년과 서울올림픽 1주년 기념공연으로 대중가수로는 처음으로 세종문화회관무대에 올랐다. 93년에는 예술의 전당 야외무대에서 노래인생 35년을 결산했고 94년에는 '서울의 찬가'로 '자랑스러운 서울시민 600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95년에는 영원한 콤비 길옥윤의 영결식에참가해 '서울의 찬가'를 떨리는 음성으로 불러 참석자들의 눈시울을 적셨다.
이 노래는 결국 95년 10월 26일 서울 세종로공원에 노래비로 탄생되었다. 또한 고 길옥윤씨가 암투병중에 만든 곡 '인형의 눈물' 등을 모아 유작앨범을 발표하기도 했다. 96년 패티김은 대한민국 연예예술 대상 수상자로 선정되어 화관문화훈장을 받았다. 한국 여성단체연합후원회장을 역임하기도 한 그녀는 왕성한 사회 활동과 더불어 여전히 전국 투어에 나서며 가요계의 여성 거목으로 우뚝 서 있다.
(주간한국)
패티김. 그녀에게선 도회적 감성과 추억이 묻어난다. 안개에 젖은 가로등 불빛 사이, 재즈클럽에서 흘러나오는 색소폰 선율, 우아한 드레스를 입고 노래하는 글래머러스한 여가수, 파워풀하면서도 섹시한 보이스 컬러…. 여가수 패티김(66·본명 김혜자)은 보편적인 한국적 감성으로부터 떨어져서 저만치 홀로 피어 있다. 한때 그녀의 이미지는 외국에서 수입한 ‘이국적 감성’이었지만 이제는 자신만의 색깔을 지키면서 차곡차곡 쌓아온 ‘특별한 감성’으로 우리 곁에 있다. 올해로 무대에 선 지 47년째. 이미자와 쌍벽을 이루는 현역 최고령 가수인 그녀가 2006년 5월11일과 12일 서울 세종문화화회관 무대에 선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갖는 사랑과 감사를 주제로 한 콘서트다.
콘서트 준비에 바쁜 그녀를 지난주 말 서울 여의도에서 만났다. 브라운 톤의 의상에 맞춰 쓴 밤색 중절모가 썩 잘 어울리는 패티김은 초로의 나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여전히 활기가 넘쳤다. 그래서인지 그녀를 만나는 사람들은 누구나 건강과 날씬한 몸매를 유지하는 비결부터 묻는다.
노래인생 47년 현역 최고령 가수
“제가 날마다 운동을 한다는 건 이제 새삼스러운 얘기가 아니죠. 하루에 약 5㎞쯤 걷고, 수영을 2,000m쯤 해요. 수영장에 들어가면 물이 아까워서 못 나와요. 요즘엔 요가도 정기적으로 합니다. 가수에게 폐활량처럼 중요한 게 없거든요. 골프 같은 운동은 준비가 필요하고 상대가 있어야 하지만 걷기나 수영 같은 운동은 저 혼자서 아무 때나 할 수 있어서 좋아요.”
대략 따져보니 하루 평균 4시간은 운동으로 보내는 셈이다. 30대 후반부터 시작한 운동을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30여년간 해오고 있다. 지난해 초 맏딸 정아가 아들 킴(Kim)을 낳아 할머니가 됐다는 그녀는 소감이 어떠냐고 묻자 어린아이처럼 흥분한다.
“워싱턴 병원에서 손주를 받아 안는데 하염없이 눈물이 났어요. 가슴이 뭉클하면서 떨리기도 하고…. 어른들이 손자 보는 느낌은 자식 낳은 느낌하고는 또 다르다던 말을 이해할 수 있겠더라고요.”
패티김의 가족은 한자리에 모이기 쉽지 않은 ‘유비쿼터스 시대’ 가족이다. 건축설계사인 남편 아바라도 게디니씨는 플로리다 마이애미에서 부동산개발업을 하고 있다. 유엔의 HCR(전쟁난민구호기구)에서 일하는 큰딸 정아씨는 현재 태국 방콕에서 근무 중이다. 한때 어머니의 대를 이어 가수로 데뷔한 둘째딸 카밀라는 다시 뉴욕으로 돌아가 뮤지컬을 공부하고 있다.
30년동안 하루4시간씩 운동
“남편과 떨어져 지내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아요. 견우와 직녀처럼 만날 때마다 신선한 느낌이죠. 벌써 결혼한 지 30년이 넘었네요. 사실 남편이 아니었다면 제가 이렇게 무대에 설 수 없었을 거예요. 결혼할 때 남편이 말했죠. 난 패티김이라는 가수의 노래를 사랑한다고. 내가 귀가했을 때 부엌살림하고 청소하는 아내를 보고 싶지 않다고 했죠. 그런 이해와 헌신이 있었기에 오늘날 제가 있는 거겠죠.”
그녀는 티없이 자라준 두 딸에게도 고맙다고 했다. 큰딸이 어렸을 때는 너무나 많은 국내외 공연스케줄 때문에 엄마 노릇을 못 했다. 오죽하면 할머니가 엄마 사진을 아이 옆에 붙여놓고 지냈을까. 어느 날인가 딸에게 엄마가 어딨냐고 물었더니 사진을 가리키며 엄마라고 말해서 가슴이 미어지기도 했다. 미국과 한국을 오가는 생활 속에서도 두 딸이 중학교 다닐 무렵 한국에 데려와 한국교육을 시키면서 예의범절을 익히게 한 건 지금도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자신보다 더 낮은 곳에 있는 이들을 위해 살려고 노력하는 두 딸을 보면서 그녀도 이젠 뭔가 자신을 있게 해 준 사회를 위해 돌려줄 방법을 찾고 있다고 했다.
그녀의 이력을 보면 유난히 최초의 기록이 많다. 한국 가수 최초로 뉴욕 카네기홀에서 공연하고, 대중가수로는 처음으로 세종문화회관 공연을 했던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그녀는 여고를 졸업하고 18살 때 미8군 무대에 데뷔한 최연소 여가수였다. 또 패티 페이지처럼 노래를 잘하라고 지은 영어식 예명도 최초다. 또 해방 이후 최초로 일본에 공식초청받은 가수였고, 60년대에 이미 미국에 건너가 뮤지컬 주연배우로 출연하기도 했다. 또 국제결혼을 한 최초의 여가수이기도 하다. 그 이면엔 타고난 가창력뿐 아니라 그녀의 집념도 한몫했다.
“가요계에서는 제가 까탈스럽기로 유명해요. 사실 제 원칙에 어긋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는 스타일이거든요. 그 때문에 가끔 오해도 받곤 하죠. 그러나 연예계에서 줏대없이 끌려다니면 아무것도 안 돼요. 자기 스스로 이미지를 지켜가야죠.”
그녀는 요즘 섹스어필을 상품으로 내세우는 후배 가수들이 못마땅하다. 한때 탁월한 자질을 가진 몇몇 후배 여가수에게 애정을 쏟기도 했다. 그러나 상업적 마케팅에 휘둘리면서 기량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걸 보면서 무척 안타까웠다고 했다.
살면서 후회할 일이 없었냐고 물었을 때 그녀의 눈동자에서 지난 세월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게 보였다. 후회도 있었고 실수도 있었지만 이만하면 잘 살아왔다고 생각한다고 말하는 그녀에게서 당당함이 느껴졌다. 작고한 그녀의 첫 남편이자 음악적 파트너인 길옥윤 선생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린 부부로서 성공은 못 했지만 작곡가와 가수로서는 최고였다고 생각합니다. 길선생님의 음악에 대한 열정은 정말 대단했어요. 병석에 계신 박춘석 선생과 길옥윤 선생이 없었다면 제 음악도 없었겠죠. 요즘엔 랩이나 힙합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의 노래가 유행하지만 당시 스탠다드팝을 도입해서 길선생처럼 멋지게 재해석하신 분은 없었거든요. 저는 운좋게 그런 분을 만난 거구요.”
몇년 반짝에 끝내는 직업 아닌데
20대의 열정으로 노래하던 패티김은 30대와 40대를 거쳐 이제 60대의 원숙한 가수가 됐다. 그녀 스스로도 가수로서 가장 최고조에 이르렀다고 애기한다. 젊었을때 파워풀한 가창력으로 내지르는 노래를 했다면 요즘은 안으로 곰삭아서 깊은 맛이 우러나오는 노래를 부른다고 했다.
“갓 대학에 입학해서 제 팬이 됐던 청춘남녀들이 이제 백발이 성성해진 지금에도 제 공연을 보러 옵니다. 그분들은 자식과 며느리까지 이끌고 와서 제 팬을 만들어줘요. 최근 몇 년 동안 객석에 젊은층들이 많아졌어요. 너무 감사할 따름이죠. 후배들에게 가수는 몇 년 반짝하고 끝내는 직업이 아니라고 얘기해주고 싶어요.”
1959년 겨울 오산 미 공군기지 클럽에서 파워풀한 음색으로 ‘You don’t know me’를 부르던 당돌한 여가수 패티김은 지금 없다. 그 대신 더욱 원숙해지고 깊이있는 목소리로 ‘사월이 가면’이나 ‘빛과 그림자’ ‘이별’ 등을 열창하는 여가수 패티김이 우리 앞에 있다.
이제 그녀는 곧 노래인생 50주년을 눈앞에 두고 있다. 아직도 여전히 TV에 출연해서 노래를 부르고 정기적으로 콘서트를 갖는 현역가수로서 50주년을 맞는다는 건 예삿일이 아니다. 줄기차게 반세기를 노래하는 가수와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것 또한 우리에게도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첫댓글 내가 알기로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한국을 넘어 세계를 상대로 노래를 한 가수가 패티김 일꺼여......무대메너도 뛰어나고...
그래 자네가좋아한 패티김일세...매혹적인언니제!!따라부르기엔 넘 힘든 노래들이라서 늘 머물다 지나쳐버리게 되더군^^
그려~나도 참 좋아하는디 넘 따라가기엔 용량이 부족혀서!!!
한국의 가요를 세계에알리는 자존심강하고 개성이뚜렷한 한국을 대표하는 대형 가수라고 감히 표현하고싶네...
패티김 가창력이 무척 좋은 가수라 듣는감상으로 만족하리 한국을 대표하는 가수임에는 틀림없어 보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