흡연과 폭력이 일상화된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체벌보다 존중과 사랑이라고 말하기는 쉬울 것이다. 그러나 존중과 사랑의 실천은 내 자녀에게도 쉽지 않은 법이다. 비평준화 지역의 신생 학교, 매일 아침 교문에서 아이들의 이름을 불러주며 인사를 나누고 흡연한 아이들과 운동장을 돌고 지리산을 등반한다. 치킨 집에서 아르바이트하는 아이의 배달을 도와주고 시급을 올려달라 부탁하는 이범희교장, 흥덕고 전교생과 학부모들이 한목소리로 재임을 요청한 아름다운 탄원의 주인공이다.
한 아이의 손도 놓지 않겠다
행정실을 거치거나 교무실 옆에 배치된 교장실이 아니다. 2층 교실 옆, 게다가 투명 유리창으로 언제든 교장 선생님의 업무를 볼 수 있는 '오픈 하우스' 다. 그런데 창문 밖에 알록달록 붙은 메모지의 정체는 뭘까.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는 이범희 교장 쌤' '절대 지각 안 할게요. 잠에 굴복하지 않아요.' '매일 아침 정문에 계셔서 감사해요.'
아이들은 저마다 다짐과 반성과 감사의 러브 레터를 교장실 창에 붙인다. 연예인 부럽지 않은 인기다. 셔츠와 카디건, 청바지에 운동화를 신은 격의 없는 옷차림 때문일까. 아빠처럼 다정하고 따뜻한 미소 때문일까. 흥덕고 이범희(53) 교장에게서 엄숙하고 관료적인 교장의 이미지는 찾을 수 없었다.
2010년 혁신 학교로 출발한 흥덕고는 비평준화 지역이라 첫 입학생들의 내신 성적은 120점대(200점 만점), 복도에는 담배 연기가 자욱한 '노는 학교' 였지만, 3년 만에 '흥덕 특목고' 라는 소문이 날 정도가 됐다. 지금은 중학교 내신 성적이 190점대인 성적 우수 학생들까지 지원 입학하고 있다. 가히 '흥덕고의 기적' 이라 할 만하다. 하지만 이범희 교장은 대학 진학률로 학교를 평가하는 것 자체를 경계했다. "대학 진학률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학생 개개인이 학교생활을 통해 어떻게 성장했는지가 중요하다" 고 강조한다.
흥덕고와 인연은 어떻게 이어졌나요?
용인의 한 고교에서 평교사로 지내다 교장 공모제를 통해 흥덕고 교장으로 부임했습니다. 그동안 꿈꿔온 공교육의 변화를 시도하려는 열망으로 가득 차 있었지요. 마침 김상곤 교육감의 혁신 교육이 학생을 중심에 놓고 잘 가르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미래형 패러다임으로 큰 전환을 시도하던 터라 평소 뜻이 맞는 교사들을 초빙해 함께 노력했습니다. 4년 임기를 만족스럽게 마쳤는데, 뜻밖에 학생들과 학부모님들이 연임을 요청하는 바람에 다시 교장 공모를 통해 흥덕고를 이끌게 되었네요.
흥덕고 입학식은 장미 한 송이로 출발한다는 전설(?)이 있더군요.
비평준화 지역 차별이 당연시돼온 환경에서 마음에 응어리가 있는 아이들이라 돌봄과 치유의 과정이 필요하다 생각했습니다. 학생 한 사람 한 사람의 목에 명함을 걸어주고,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장미꽃 한 송이씩 선물하는 것으로 입학식을 치렀어요. 너희는 모두 이 장미꽃처럼 아름다운 존재다. 너희 가운데 한 아이의 손도 놓지 않고 끝까지 가겠다" 고 약속했지요. 가시가 있는 걸 불안해하지 않고 가시 속에 있는 예쁜 꽃을 발견하겠다는 다짐이었는데, 첫 졸업식 때는 아이들이 가시가 없는 종이 장미꽃을 만들어 선생님들에게 돌려주었습니다. "우리가 입학할 때는 가시가 잔뜩 달린 존재였는데 선생님들의 사랑이 그 가시를 없애주었다" 고 할 때 정말 뭉클했습니다.
일반고와 다른 혁신학교로서 흥덕고의 학교 문화는 어떻습니까?
혁신이란 자꾸 뭔가 새로 '발명'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원형을 되찾고 '발견' 하는 것이라 믿습니다. 흥덕고에는 강제적 야간 자율 학습과 보충수업, 체벌과 두발·복장 제한, 교문 지도가 없습니다. 없어도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그 '원형'을 회복하기 위해 학교 행사 결정권을 학생 자치에 맡기고, 학생 생활 규정은 학생 학부모 교사 등 학교 구성원들의 토론을 통해 결정하죠. 수업은 학생들이 네 명씩 모둠을 이뤄 협력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1학급 2담임제를 운영해 학생들이 더 많은 보 살핌을 받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교장 선생님 별명을 '교문 앞 스토커' 라고 하던데요.
하하, 맞습니다. 교문에서 아이들을 맞으며 이름을 자주 불러주죠. 처음엔 수업을 하면서 이름을 익혔어요. 요즘엔 페이스북을 통해 아이들이 누구랑 사귀고 깨졌는지, 부모와 상태가 어떤지, 고민이 무엇인지 알게 되는데 교문에서 한 마디 던지면 아이들 이 깜짝 놀라요. 교장 선생님이 나의 모든 걸 알고있다며, 스토커 같다면서 그런 별명이 붙었어요. 고민도 공유하고 해결책도 나누면서 아이들과 한층 가까워졌죠. '자세히 봐야 예쁘다. 오래 봐야 사랑스럽다' 는 말을 실감합니다.
흥덕고의 교장실 한편에는 학생들이 교장선생님에게 보낸 편지와 쪽지가 가득하다. 학생들의 애정이 가득 담긴 편지는 이 교장을 설명하기에 충분하다.
체벌은 산책과 등산 그리고 눈맞춤
어디선가 소녀시대의 '미스터 미스터' 가 들린다. 어깨를 들썩이며 몰려 나오는 아이들을 보니 수업 종소리인가 보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인기 가요를 스스로 선택해 수업 종으로 쓴다니 신선하다. 흥덕고에는 교훈도, 교가도 없다. 창의적이지 않고 계몽의 내용을 담은 틀에 박힌 교훈과 교가는 별 의미가 없다는 이범희 교장의 생각 때문이다. 대신 아이들에게 교가를 공모해 수업 종이나 예비 교가로 쓰기도 한다. 또 '어떤 경우에도 체벌은 금지한다' 는 것이 기본 방침이다. 이 교장은 체벌을 폭력이자 '인간과 인간 사이에 차마 있어서는 안 되는 일' 이라고 규정한다. 이 교장 스스로 교사 생활 20년 동안 매를 들어본 일이 없다. 화가 치밀 때도 있지만, 매를 든다고 근본적으로 해결되는 문제는 아무것도 없다는 믿음 때문이다. 흥덕고는 체벌 대신 교사와 학생이 한 시간 동안 함께 산책하는 안을 마련했다.
학교 안에서 흡연했을 경우, 학교 공동체 질서를 해치는 행동을 했을 경우 담임선생님과 손잡고 아침 산책을 하거나 배드민턴을 쳐야 한다. 아주 로맨틱한 벌이다. 그러나 그 산책으로 아이들은 달라지고 성장한다. 이범희 교장은 "교사나 학생의 관계에서 신뢰 회복이 가장 중요한데, 함께 걸으며 대화를 나누며 서로 돈독해지고 소통 창구를 마련하는 뜻에서 시작했다" 고 설명했다.
흡연하는 학생을 적발하면 교사가 함께 운동장을 뛴다고 하던데요.
하하, 지금은 바뀌었어요. 한때 흡연 적발이 많아져서 선생님이 하루에도 몇 시간씩 운동장만 뛰어야 하는 거예요. 도무지 할 수가 없어서 백두대간 종주로 바꿨어요. 우리 학교는 '도전 과제' 라는 게 있거든요. 책 100권 읽기, 소논문 쓰기 등을 학생들이 완수하면 인증패를 줘요. 백두대간 9구간을 3년간 뛰는 것도 도전 과제인데, 그걸 함께하는 거죠.
수업 방식은 어떻게 다른지 궁금합니다.
'성적 맞춤형' 대신 '적성 맞춤형' 교과 교실제 수업을 합니다. 성적에 따라 강제로 반을 나누는 게 아니고, 상담을 거쳐 아이들이 스스로 선택해요. 기본반에 들어가면 1학기와 여름방학에 중학교 과정을, 2학기와 겨울방학에 고등학교 1학년 과정을 배워요. 방학도 없이 두 배로 열심히 공부해야 해요. 자발적으로 원하고 성실히 하겠다고 약속해야 하죠. 봉사 활동·인문학 토론 수업을 통해 공부의 필요성을 스스로 깨닫는 학생들이 늘어났어요.
김상곤 교육감의 혁신 정책으로 경기도에 긍정적 변화를 일으켰는데, 경기도지사 출마 결정으로 불안감이나 아쉬움은 없는지요.
5년 동안 변화의 주춧돌 역할에 큰 의미를 둡니다. 무엇보다 교육계의 관행을 바꾸는 단초를 제공했고, 학교 변화를 위한 정책적 입안과 함께 시너지 효과가 있었다고 봅니다. 시대 변화에 따른 혁신 학교의 시도는 당연한 결과입니다. 정치 이데올로기에 매몰돼 진보와 보수로 이분화되는 것은 무의미한 일입니다. 더 큰 틀에서 교육정책이 뒷받침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가시가 있는 걸 불안해하지 않고 가시 속에 있는 예쁜 꽃을 발견하겠다는 다짐이었는데, 첫 졸업식 때는 아이들이 가시가 없는 종이 장미꽃을 만들어 선생님들에게 돌려주었습니다. 정말 뭉클했죠.
교사는 어떤 존재인가
교육 관료 틈에서 학생 인권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교사야말로 우리 교육의 '희망'이다. 이 교장은 학생들에게 낙인찍는 교사가 될 수 없다며, 교육 당국의 학교 폭력 학교생활기록부 기록 지침을 거부했다가 감사와 징계를 받기도 했다. 학생과 학부모의 지지에 이어 교사와 학생이 서로 믿고 의지하는 관계가 회복된 것이다.
흡연이나 폭력의 벌칙은 교사들과 함께하는 무박2일 지리산 산행이다. 교사와 학생이 서로 손을 잡고 당겨주며 힘겹게 오른 천왕봉의 선물은 쏟아질 듯한 밤하늘의 별빛만은 아닐 터다.
교사로서 철학과 소신이 남다른데 어떤 영향이 있었습니까.
부모님이 모두 초등 교사 출신입니다. 어릴 때부터 아이들과 함께하는 부모님을 보고 자라서 저도 꿈을 키웠지요. 아내도 현직 교사고, 대학에 다니는 두 자녀도 특수교육학과 아동학을 전공하고 있어요. 아빠 같은 교사가 되고 싶다는 아이들의 말에 힘을 얻기도 하지만, 용돈 타내려는 발언일 수도 있어요. 하하.
큰아이가 선천성 심장병을 앓아 아이들에 대한 애틋함이 더 컸다는 이 교장은 자신에게 교육받는 아이들의 존재를 인식할 때마다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곤 한다. 교사는 '아이들과 삶을 나누고성장하는 존재' 라고 믿는 이 교장의 명함 뒷면에는 '이 세상의 모든 아이들이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적혀 있다
미즈내일